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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2009.03.14 06:55

지고이네르바이젠

(*.161.67.9) 조회 수 11364 댓글 23



바이얼린에는 김지연.

정경화나   장영주에 비해 어떤가요?


http://www.youtube.com/watch?v=POYRzVKDfO0&feature=related
* 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5-27 11:11)
Comment '23'
  • THE CYNICS 2009.03.14 15:03 (*.106.193.147)
    현 세대에게 이 음악은 어떻게 받아 들여질까?
    음악 청취에 다양한 호불호는 당연한 것이고
    이 음악을 듣고 애절함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과잉된 애절함에 민망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 문제다.
    필자는 후자에 속한다. 다음의 얘기 또한 사견일 뿐이다.

    과잉된 애절함이 마지막으로 풍미하던 시대는 80년대다.
    이러한 과잉 애절함은 아마도 시대를 반영한 결과일게다. 이러한 결과로 80년대에는 무수한 신파성 슬픔들이 양산되었다. 대중매체가 가장 그랬을 것이다.
    애절함의 극치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아니겠는가. 온갖 창작 매체들은 이러한 죽음을 슬픔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적극 애용했다.

    80년대의 강렬한 아이콘하면, 바로 '까치'로 대변되던 암울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작가 이현세는 그의 작품에서 까치를 몇번이나 죽였더라? 링에서 맞아 죽고, 총 맞아 죽고, 여하튼 숱하게 죽었다. 숭고하게.
    '공포의 외인구단'을 기억하시는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전승을 달리던 외인구단, 안타를 못쳐서 미쳐가는(?) 마동탁을 차마 보기 힘들었던 옛 애인 '엄지'는 '까치'에게 일부러 져 줄 것을 부탁한다. '난 니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던' 까치는 약속대로 마동탁의 아웃성 공을 일부러 꽉 쥔 채 역전을 허용하게끔 한다. 그 결과 연승의 꿈은 날라가고 각각의 연봉 10억도 날라간다. 그 뿐이랴. 까치는 시각장애인이 되고 패배의 충격으로 감독은 심장마비사 하고 만다.......참으로 숭고한 죽음이다.

    황당하기로는 고 박봉성의 '신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기업가이자 마라토너이며 체급의 제한을 두지 않는 영원불멸의 복서인 '강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품안에서 직접적 사인이 모호한 채로 그냥 죽는다. 가수 박정수의 '그대 품안에서 잠들었으면'이라는 노래가 떠올려지는 순간이다. 미국의 헤비급 복서들의 핵주먹에도 견디던 신의 아들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싱겁지 않은가.

    이현세 원작인 영화 '죽음의 링'을 보자. 맷집 하나로 버텨온 까치는 결국 가랑비에 옷 젖듯이 누적된 충격으로 결국 링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들것에 실려가고...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략 5분간을 까치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 오열한다. 아,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이 아니던가? 엄지(전세영 분)의 오열을 5분이나 지켜보는 관객의 심정은 찢어질 듯이 마음이 아플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소재로 한 1970년도의 영화 ;러브스토리'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는가?
    제니의 죽음을 뒤로하고 병원을 빠져나오는 올리버는 텅빈 운동장에 걸터 앉는다. 카메라는 이런 올리버의 뒷모습을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그리고 프란시스 레이의 아름다운 그 음악.

    어떤 에세이에서 본 글인데, 슬픔에 빠진 최상의 모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조각가는 손을 머리로 감싼 채 얼굴을 아래로 파묻어서 슬픔이 표상된 얼굴이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반실신 상태에 이른 얼굴......물론 슬프다.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많은 이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나 가상일뿐인 작품의 세계에서는? 물론 개인의 사적인 슬픔은 존중되어야 하나, 초당 몇명 꼴로 굶어 죽거나 전쟁에 희생이 되는 현실 세계, 또는 사회적 부조리에 의한 비극을 반영한 작품이라면 넘치는 눈물이 있는 그대로 받아지겠지만 연애사 같은 사적인 슬픔의 과도한 표현은 유감스럽게도 과잉된 눈물의 밀도가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무언가 조절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술이자 핵심이다.

    음악은 어떨까? 아시다시피 음악은 모든 예술계에서 현실에의 표상성이 제일 떨어지는 분야다. 제아무리 '해바라기'라는 꽃을 음악으로 묘사해봤자 고흐의 그림같은 명확한 표상성은 보장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이미지적 유사성만 얼추 상상력을 동원하여 뒷받침해 줄 뿐.

    주성치의 '쿵푸허슬'이라는 영화를 보자. 주성치라는 이름에서 보다시피 이 영화는 황당무계함을 전면에 내세운 코믹 쿵푸물이다. 이 영화에서 바로 이 음악, '지고이네르바이젠'이 쓰였다. 어울리는가? 물론 후반부의 경쾌한 부분과는 잘 들어 맞기는 한다.
    상황은 비극(?)이지만 극 자체를 희극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나 시트콤등의 장면에 이 음악은 정말 널리, 두루 쓰였다. 예를들어, 여자한테 바람맞고 비를 쫄딱 맞고 서 있는 주인공이 무심한 하늘을 바라보며 "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이 음악의 전반부가 애용된다. 분명 이 음악의 전반부는 비극적 요소로 가득차 있는데 오히려 비극인 체하는 희극적 장면에서 애용되는게다. 이 묘한 조합은 대체? 그러면서도 그러한 장면에서 일체의 거부감도 느끼지 못하는 건 어째서?
    다음과 같은 요소 때문일게다.

    1. 상투성
    2. 과잉 비극성

    누군가 여자에게 바람 맞았다. 술먹으며 눈물 콸콸 쏟으며 심지어는 자해까지 한다. 슬픈가?
    내게 이 음악은 딱 이 정도 수준이다.
    롹웰의 '나이프'라는 음악을 보자. 슬픈 곡이라 당연히 마이너 계열의 코드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냥 3화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7도 음을 추가하여 m7계열의 코드를 이용한다.
    3화음만으로 충분히 슬픔이 전달되는데 왜 단7도 음을 추가하는 걸까?
    아마도'슬픔의 농도를 희석'시키는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려운 얘기 아니다. '라도미'화음에 '솔'을 추가해보라. 슬픔의 농도가 제법 낮아짐을 느낄게다.
    (오해하지는 마시라. 무조건 마이너의 3화음은 쓰면 안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절제의 효과를 가져다 주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 것일 뿐. 마이너의 3화음이 빈번하게 쓰이는 바흐의 샤콘느는 절대 상투적이지 않다. 왜 그럴까? 그건 12개의 음을 넘나드는 음 조합의 절묘함 있다.)
    적어도 이 시대는, 이 시대는 그런 거다. 과잉된 슬픔에, 적나라한 슬픔에 반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절제된 것에 미적인 근거를 찾는.

    (이런 얘기하면 간혹, "나는 이 음악이 엄청 좋은데 왜 악평을 하느냐?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수준이 낮아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인가?"라고 반응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필자가 "송혜교는 별로 안예쁘다"라고 말 할 때에도 같은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 콩쥐 2009.03.15 09:28 (*.161.67.9)
    아...이렇게도 생각할수있군요.......좋은글 감사합니다.


    애절함......^^*
  • 금모래 2009.03.15 11:04 (*.186.226.251)
    어머니 기일이라 산소에 갔다오는 날
    피곤해서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시디가 돌다가 이 음악이 나오는 부분에서 잠이 깼나봐요.

    참고로 제 운전용 시디에는 잠 깨려고 별별 장르의 노래를 다 넣어놓았답니다.
    곡들이 변화무쌍해야 졸리지 않거든요.
    심지어는 요들송 따라하는 것까지 있답니다.
    운전 중 잠 깨는 방법 중 제일 좋은 방법은 큰 소리로 고함을 치거나
    핏대가 서도록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저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단점은 동승자가 옆에 있을 때는 쓸 수 없다는 점이죠.

    이게 한계가 올 때는 창문 열고 찬 바람 쐬기와 뺨 때리기, 고함지르기를 병행해야 합니다.
    그러고도 안 되면 차를 세우고 자야죠. 안 그러면 하늘에서 조상님 만납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꽃상여를 타고 가고 싶다는 말씀을 은근슬쩍 하셨는데
    그리 안 될 줄 아셨는지 온 산이 단풍으로 꽃상여마냥 울긋불긋 수를 놓을 때
    저 세상으로 가셨죠.

    날씨가 흐리고 살짝 비가 왔어요.
    거슴츠레 눈을 뜨니 창가 벽에 붉은 담쟁이 넝쿨이 비에 젖어 바람에 흔들리는데
    이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인생무상. 저절로 눈물이 핑 돌데요.

    이 노래는 너무 슬픕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 기운을 차릴 수 없는 거 같아요.
    후반부에, 2악장인가요?
    그래도 그게 뭔가 경쾌하게 휘저으며 정신을 차리게 해서 다행이지
    안 그러면 심장이 얼어붙고 온 몸의 맥이 빠져 숨을 쉴 수가 없는 거 같아요.
    참으로 대단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연은 셋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분위기가 있어요.

  • THE CYNICS 2009.03.15 14:09 (*.106.213.219)
    하하.....제가 너무 악평을 했나요?
    물론 개인적 견해 차이고요.
    저는 인생무상의 정서는 주로 정적인 것에서 많이 느끼는 편이지요.
    다음과 같은 시에서.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꽃상여와 단풍 얘기는 아름답네요.
    일본판 고려장 얘기라 관련은 없지만 후까사와 시찌로의 '나라야마부시코' 라는 소설의 마지막 눈내리는 장면이 생각 나기도 하고요.

    <닷뻬이는 "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지긋이 보았다. 눈은 금방 굵어지며 함박눈으로 퍼붓고 있었다.
    노상 오린(주인공의 어머니)이 '내가 산으로 갈 때에는 필경 눈이 올 것이다'라고 힘 주어 말한 그대로가 된 것이다.....>

    어쨌든 제게 지고이네르바이젠은
    70년대의 '엄마 잃은 하늘 아래'류의 한국영화의 배경음악 분위기와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매너리즘의 코드화랄까. 무겁고 음침하며 이발소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어디까지나 개인 소견일 뿐이니 콩쥐님께서는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하하......




  • 금모래 2009.03.15 15:29 (*.186.226.251)
    ^^
    "70년대의 '엄마 잃은 하늘 아래'류의 한국영화의 배경음악 분위기와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매너리즘의 코드화랄까. 무겁고 음침하며 이발소의 그림을 연상시킨다"는

    곡의 변화와 회돌이 그 안에 담고 있는 빛과 어둠, 인생의 우여곡절과 인간으로서 어쩌지 못하는 숙명, 절망,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막지한 악평으로 THE CYNICS 님의 음악적 수준의 깊이를 의심케 하는 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음^^

    특히 이 곡을 그저 눈물이나 짜게 하는 삼류 통속 영화나 남의 그림을 베끼는 수준인 이발소 그림에 비유한다는 것은 그 독특한 기교와 곡의 변화와 독창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 곡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며 망발(?)이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음....

    너무 셌나? 나도 이 곡의 화음적 패턴에 대해서는 음악적으로 잘 모르는데.....
  • 금모래 2009.03.15 15:32 (*.186.226.251)
    ^^
    "70년대의 '엄마 잃은 하늘 아래'류의 한국영화의 배경음악 분위기와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매너리즘의 코드화랄까. 무겁고 음침하며 이발소의 그림을 연상시킨다"는

    곡의 변화와 회돌이 그 안에 담고 있는 빛과 어둠, 인생의 우여곡절과 인간으로서 어쩌지 못하는 숙명, 절망,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막지한 악평으로 THE CYNICS 님의 음악적 수준의 깊이를 의심케 하는 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음^^

    특히 이 곡을 그저 눈물이나 짜게 하는 삼류 통속 영화나 남의 그림을 베끼는 수준인 이발소 그림에 비유한다는 것은 그 독특한 기교와 곡의 변화와 독창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 곡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음....

    너무 셌나? 나도 이 곡의 화음적 패턴에 대해서는 음악적으로 잘 모르는데.....
  • THE CYNICS 2009.03.15 20:01 (*.106.198.89)
    하하하.....그래서 제가 제 의견은 가볍게 무시하셔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제가 느끼는 건 '통속성'일 뿐이니 어쩔 수 없지요. 음악적 소양의 깊이가 어쨌거나.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은,
    음악에는 타 예술 분야에 비해 분명히 표상성이 떨어지며,
    고로 '빛과 어둠', '인생의 우여곡절', '숙명' 등을 지고이네르바이젠이 표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청자의 주관적 메타포에 불과하다는 것.
    저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에 동감합니다.

    <정말로 표현 불가능한 것이 있다. 이것은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것이 신비이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윤리학, 미학, 종교, 삶의 의미......등이 있다. 이 모든 분야에정말로 진리가 있지만 이런 진리의 어느 하나도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여져야 한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말로 할 수 없는 바를 말로 할 수밖에 없는 음악 예술 분야에 대해 어느 신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바이얼리니스트 '힐러리 한'은 매우 '단단한'연주를 들려주고 있으며 그의 곡 해석은 '세련됨'과 '유려함'을 지니고 있다.....>

    연주가 '단단하다'는 것, 그리고 '세련됨'과 '유려함'이 있다는 건 대체 무슨 얘기인지요?
    여러분은 이 기사를 읽고는 힐러리 한의 연주 스타일이 머리 속에 쏙 들어 오나요?
    위의 기사는 단지 "힐러리 한은 연주를 잘한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공허한 내용일 뿐입니다. 단지 구체적 표상성이 떨어지는 모호한 언어로 치장만 했을 뿐.
    당연합니다. '보여져야 할 것'을, 즉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자니 명제적으로 무의미해질 수밖에.
    제겐 '빛과 어둠', ;숙명','인생의 우여곡절'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말로 할 수 없는 음악의 내용을 구태여 말로 표현하자니 그런 메타포가 발생하는 것이지 그 단어들과 지고이네르바이젠이라는 '구체적'인 음악은 그 어떠한 대응관계도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그러한 대응관계가 전혀 없다는 건 아닐겝니다. 음악을 언어로 말하고자 할 때 다음 정도는 능히 '말하여질 수' 있습니다.

    리듬의 변화가 심한 선율 -> 동적인 이미지.
    리듬의 변화가 약소한 선율-> 정적인 이미지.

    화음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언어적 표현이 '일부' 가능할 겁니다.
    디미니쉬드 코드 -> 염세적, 심각함.
    마이너 코드 -> 슬픔, 우울함
    장7화음->포근함, 상쾌함.

    그러나 이 정도로는 음악의 일부만 말하여진 것일 뿐.



  • 콩쥐 2009.03.15 21:38 (*.88.130.164)
    앗. .... 제가 제일 좋아하는 "힐러리 한"이 예로 나오네요...
    그녀가 나오면 무조건 반가워요...
    우아한 그녀...짱


    말로 표현할 수 없는거 .......좋은거죠~.
  • Vorstellun 2009.03.15 22:42 (*.123.125.30)
    "음악은 어떨까? 아시다시피 음악은 모든 예술계에서 현실에의 표상성이 제일 떨어지는 분야다. 제아무리 '해바라기'라는 꽃을 음악으로 묘사해봤자 고흐의 그림같은 명확한 표상성은 보장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이미지적 유사성만 얼추 상상력을 동원하여 뒷받침해 줄 뿐" THE CYNICS님이 말씀하신 이 부분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잘 이해가 가지않네요^^ 제생각에 작가가 표현하고자하는 가시적 이미지야 구체성을 담보로하는 미술분야가 유리한고지를 점하고 있겠지만 작가의 정서를 담아내는데 음악을 따라갈 영역은 없을 것 같습니다. 비장함과 슬픔,고뇌 회한, 죽음, 애상, 환희 등을 소리의 공간 속에서 음악보다 더 잘 표상해낼 수 있는 예술 장르가 있을 런지요. 표상성의 개념을 이미지나 사실 묘사에 둔다면 몰라도... 그건 너무 지나칠정도로 표상의 개념을 협의의 감옥에 가두어버리는게 될테구요^^.잠깐 생각이나서 적어봤습니다^^
  • BACH2138 2009.03.15 23:41 (*.201.41.64)
    연주가 '단단하다'는 것, 그리고 '세련됨'과 '유려함'이란 평가를 보니
    새삼 음악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악음악의 추상성을
    드러내니까요. 먼저 연주가 단단하다는 평가는 힐러리 한 연주의 특징 중
    감성의 진폭이 적다는 뜻으로 새겨집니다. 이는 힐러리 한의 음악 중에 바흐나
    파가니니같은 무반주에 강점을 드러내는 면이기도 하죠. 담담하게 연주하면서
    음악 듣는 청자가 그 부족분을 채우며 공유하는 힐러리 한 무반주의 속성을 잘
    표현하는 말로 생각합니다. 반면 이런 그녀의 특징은 다소 차가운 연주로 보일
    여지를 동시에 동반합니다. 극적인 요소를 동반한 베토벤이나 낭만파 음악은
    밋밋하게 받아들여지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세련됨이나 유려함이란 표현은
    다른 연주자에 적용될 중립적인 관념들이지요. 하지만 이 표현을 나름대로 선해하자면
    최근의 흐름이라 생각되는 과도히 표현적인 프레이징이나 비브라토를 절제하는
    그녀의 스타일을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려함이란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입니다.힐러리 한 바이얼리니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주루룩 흘러
    가게 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부분도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THE CYNICS 2009.03.16 07:13 (*.106.198.89)
    이런, 싸인이 맞지 않아 글의 순서가 또......죄송합니다.
  • THE CYNICS 2009.03.16 07:28 (*.106.198.89)
    Vorstellun님의 글에 대한 답글.

    예술에서 재현의 기능이 가장 탁월한 것은 영화와 연극 분야라고 생각해요. 문학과 미술이 그 다음일게고.....음악은 어쩔 수 없는 한계(그러나 그로 인해 '순수한')로 재현성은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님께서 이미 잘 알고 계신 바이겠지요.
    표상성의 개념에 대해 단순히 이미지나 사실 묘사에 한정하는 것은 협의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 하셨는데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본성에 대한 이론들 중 '재현론'과 '표현론'을 언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님께서 지적하신 바로 그 내용이, 재현론과 표현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실례를 들어가며 언급해 봅니다.

    '재현 representation'은 말 그대로 현실,사물을 '다시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재현론'은 '모방론' 또는 '표상론'으로 불리우기도 한답니다.
    플라톤은 이 현실 세계를 '이데아'의 모방으로 파악했습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쉽게 얘기해서 사후에나 가볼 수 있는 '천국'이 진짜 세계이고 지구상의 현실세계는 천국의 모사품에 불과하다는 것. 일부 광신도들이 가족 몰래 전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는, 내세를 위해 현실을 방기하는 행태와 유사하다고 하면 다소 과장이 될까요.....어쨌거나, 플라톤에게 현실세계란 이데아의 모사품에 불과한 짝퉁이었을 뿐이었으니, 이 짝퉁을 또다시 베낀(모방한) 미술 같은 예술 작품이 얼마나 하찮았겠습니까. 짝퉁을 베낀 짝짝퉁이랄까. 이런 얘기가 있지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품을 만든 예술가의 이름은?" 이라는 시험문제가 출제 됩니다. 맨 첫째줄에 앉은 아이는 답안지에 '로댕'이라고 씁니다. 바로 그 뒤에 앉은 아이는 앞의 아이의 답안을 커닝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답안지에 '오뎅'이라고 적습니다. 또 그 뒤에 앉은 아이가 '오뎅'이라고 적은 아이의 답안지를 커닝합니다. 그런데 너무 똑 같이 적으면 커닝한게 티날까봐 답안에 변형을 가합니다......'뎀뿌라' 라고.
    그러니까 플라톤에게 있어 '그림'이란 뎀뿌라 같은 존재에 불과한 거죠. 제 아무리 제욱시우스나 솔거가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그러나 중세에 '그림-미술'의 지위는 상승합니다. 성경을 재현하는 역할로 말이죠. 재현의 역할이 강조됨에 따라 당연히 그림은 사진과도 같은 리얼한 현실재현이 요구됩니다. 고로 클레나 미로나 피카소 따위(?)의 그림은 필요 없었겠죠....이후에 19세기 들어 사진의 발달로 리얼한 재현으로서의 그림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표현'이 '재현(모방)'을 압도하게 되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고로, 화가가 세계를 재현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그게 뭔지는 몰라도)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재현론'과 '표현론'의 경계가 모호해 집니다.
    왜냐하면 '재현'이라는 게 반드시 현실세계만을 모사하는 것으로 한정 지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되거든요. "꼭 현실에 있는 사물이나 자연만을 모방해야 '재현'이라 할 수 있나? 그건 너무 '재현'을 한정 지으려는 것 아닌가? 요컨대 창작자의 심경이나 내면을 재현하는 것도 '재현론'의 범주에 포함 시킬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는 님께서 말씀 하신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건 너무 지나칠정도로 표상의 개념을 협의의 감옥에 가두어버리는게 될테구요"
    여기서 '재현'과 '표현'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고로, 단순히 현실의 사물이나 자연만이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비장함과 슬픔,고뇌 회한, 죽음, 애상, 환희 "같은 심리적, 관념적인 대상 또한 재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의로 진행될 겁니다(논의의 편의성을 위해 이러한 '표현적'인 것을 그냥 '재현적'인 것으로 언급하도록 하지요).

    음악에서, '슬픔'이라는 정서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경험하는 것일까요? '슬픔'이라는 정서는 음악이나 미술등에 속해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음악 자체에는 슬픔이라는 정서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음악'이나 '미술'은 살아 숨쉬는 인격체가 아닌, 그저 하나의 일반명사, 또는 관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사'나 '관념' 자체는 슬픔을 인지할 수 없지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니까. 슬픔은 어디까지나 슬픔을 느끼는 주체인 인간에게 속해 있는 정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음악을 듣고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슬픔'에의 정서와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교적 유사한 특질들이 음악 속에서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인용합니다. < >안의 글은 인용문, ( )안의 글은 필자의 잡설입니다.

    <'느림'은 분명 그러한 특질 중의 하나이다. 똑같은 선율이라도 빠르게 연주되면 슬프다고 말해지지 않을 것이다(영화 '러브스토리'에서 올리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애인을 잃고 난 후 텅빈 운동장의 스탠드에 죽은 듯이 앉아 있습니다.....물론 '달려라 하니'처럼 뛰면서 우는 이상한 사람들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급격한 음정 차이들의 결핍도 그 중 하나이다. 소위 음들이 귀에 거슬리기 보다는 속삭이는 듯한 경향을 띈다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의 '오열','통곡'은 이러한 견해와는 거리가 멀 겁니다. 그냥 여기서는 '올리버'의 정적인, 침잠되어 있는 슬픔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음악적 진행방향이 상승적이라기 보다는 하강적이라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이를테면, 바흐의 '마태수난곡'등에서 보여지는 멜로디의 하강-하늘에서 지상으로 하강하는 듯한-이나, 소르의 op.34 l`encouregement(위안)의 세번째 변주의 후반부에서 하강하는 선율의 애절함-줄리안 브림의 비브라토가 곁들어진-처럼).>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닐겁니다. 화음이 전해주는 정서도 언급해야지요. 일반적으로 마이너 계열의 화음이나 디미니쉬 계열(하프 디미니쉬-m7(b5)-포함)의 화음은 슬픔의 정서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그 화음들은 왜 그런가?"라고 물으면 참으로 일이 복잡해집니다. 청취가능한 자연배음의 존재로 이루어진 장3화음에 비해 단화음이나 감화음은 그렇지 못하다,는 답변을 내놓아봤자 이는 다시 "왜 청취가능한 자연배음으로 이루어진 화음은 슬프지 않은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디미니쉬드 코드의 경우는 다소 설명이 쉬울 수도 있습니다. 디미니쉬드 코드란 음정이 모두 단3도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코드이고, 이 단3도 음정은 장3도 음정보다 '비교적' 불협에 가깝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불협'이란, 음들 간 관계가 '협' 일 경우보다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은유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례로 완전 5도(예컨대 '도'와 '솔'의 관계)의 경우, 도와 솔의 동시적 울림은 두개의 음이 아닌 마치 찰떡같이 들러붙은 하나의 소리로 느껴져서 유니즌의 경우처럼 아주 강력하게 들림으로 인해 이들 찰떡궁합성 음의 조합은 말 그대로 '완전'한 음정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음정관계를 '록음악'쪽에서는 '파워코드'라 불리우고 강력한 리프의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반면에 현악4중주 같은 경우엔 이 5도 병진행이 다른 성부를 심하게 죽이느라 대위법에서는 금지하는 사항이고요.
    어쨌든, 장3도의 음정관계는 완전5도에 비하면 '비교적' 불협입니다. 단3도는 더하고요. 음간 관계의 찰떡의 점도가 점점 엷어진다고나 할까. 불협, 그러니까 '비교했을 경우' 찰떡궁합의 정도가 약해지고 불화가 더한 단3도로만 이루어진 디미니쉬드 코드의 경우엔 완전히 콩가루 집안인 셈이지요. 그리고.......콩가루 집안엔 항시 불행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디미니쉬드 코드가 '슬픔'이나 '비극성'을 강하게 표상하는 이유입니다(말러가 생각나지 않나요?).

    그러나 위의 얘기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왜 단3도는 장3도에 비해서 불협에 가깝나?"라고요. 이는 음의 파형을 음향학적으로 조사해보면 해결될 일일 겁니다(잘 기억이 나지않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군요). 그리고 "장화음이든 단화음이든 3화음일 경우엔 하나의 장3도 음정과 하나의 단3도 음정을 지니게 되는 것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왜 단3도가 아래로 깔려 있는 단화음이 유독 슬픔을 표상하는가?"라는 질문도 가능할 것이고요.......
    실제로 인도네시아의 어느 부족민은 단화음에서 슬픔의 정서를 읽어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양음악의 화음이 표상하는 강제성에 이미 길들여진 것일까요?
    '가'라는 글자를 보십시오. 정말 우리의 음성에서 발음되는 '가'와 똑같이 닮지 않았나요? "정말 '가'라는 글자는 '가'라는 발음을 닮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글을 모르는 일본인은 '가'라는 글씨가, 발음되는 '가'처럼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 단화음에 대한 우리의 표상도 그러한 편견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잖습니까?

    단3화음이 슬픔을 표상하는 이유는 어쩌면 음계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음계(도레미파솔라시도)의 경우 비교적 불협화 음정인 단2도 관계가 3번째 음(파)4번째 음(파)에 발생하는 것에 비해서, 단음계(라시도레미파솔라)의 경우는 2번째 음(시)과 3번째 음(도)에 발생하는데, 슬픔의 근원(?)인 불협음정-단2도 음정-이 장음계보다 비교적 먼저 발생하여 슬픔을 '서두른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논리의 빈약함을 느낍니다.

    얘기가 장황해졌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먼저 '재현론'과 '표현론'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얘기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음악 자체에는 슬픔이 없다"고 했습니다. '음악'자체는 살아있는 인격체-슬픔을 느낄 수 있는 실체-가 아니므로. 단지 음악에는 슬픔의 주체인 인간의 '슬픔에의 정서'를 유사하게 유발하는 요소-특질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설령 그것들의 원인을 속 시원하게 규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인도네시아의 어느 원주민들은 배제하고서라도).
    고로, 님께서 말씀하신 것-비장함과 고뇌, 회한, 죽음, 애상, 환희등을 음악보다 더 잘 표상할 수 있는 예술장르는 없다는 것-에 대해 공감합니다. 단지 말씀하신 실례들(비장함, 고뇌, 회한, 죽음. 애상. 환희)을 다소 범주화하여 구분할 필요는 있다고 봐요.
    비장함, 고뇌, 회한, 죽음. 애상. 환희.....의 실례들 중, '감성'의 형식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비장함이나 고뇌, 회한 등은 당사자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냄에 비해 '죽음'은 실존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비장함,고뇌,회한,애상'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기류는 바로 '슬픔'이라는 정서입니다. 물론 "죽음도 슬픔의 정서가 흐르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지했다시피 '죽음'이라는 것은 '정서적 성향'이 아니라 '생의 끝'을 의미하는 실존적 성질의 것이므로 범주를 달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환희'는 말할 필요도 없이 기쁨에의 정서고요.

    음악에서 '슬픔'과'기쁨'을 표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슬픔은 위에서 언급한 요소-특질로 얼마든지 표상 가능하고 기쁨은 도약하는 선율선으로, 동적인 리듬의 변화 같은 것으로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얘기가 다릅니다. 죽음에 따른 슬픔이야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지만, 죽음 그 자체를 표상할 수 있나요? '아멜리아의 유서'라는 기타 곡을 들으면 죽음이 떠올려집니까? 그것이 단순한 슬픔이 아닌, 죽음 자체를 묘사한 것이라고 온전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 음악의 제목이 '아멜리아의 실연'이었다면, 과연 우리는 이 음악에서 '죽음' 그 자체를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은 제목이 가져다준 선입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의 제목이 만일 '연인의 죽음'따위였다면 우리는 그 음악에서 죽음을 느낀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요?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지금 님의 의견에 '반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님의 의견을 예로 들어 "빛과 어둠, 숙명,인생의 우여곡절 " 등의 존재론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은 마치 '죽음'처럼, "고뇌,비장함,회한"등이 공통적으로 내포한'슬픔'이라는 정서와는 (음악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범주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음악의 완전한 표상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완전히 따로국밥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단지 그것들은 '분위기적 유사성(mood resemblance)'에 그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듣고 숙명이나 인생...등을 느끼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걸 주장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단지 그러한 표상은 자의적인 메타포(은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었지요.
    (물론 위의 예에서 '빛과 어둠'은 '기쁨과 슬픔-장조와 단조'의 은유로서 '죽음'이나 '생의 우여곡절'이 드러내는 은유성보다는 더 명료합니다. 기호학적으로 애기해서 '동기화'가 높습니다. 즉 표상성이 "숙명, 생의 우여곡절" 보다는 비교적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음악을 듣고 무엇을 표상하는 지는 전적으로 청취자의 권리이고 따라서 청취자의 수만큼 표상성도 다양화될 것입니다......이러한 다양성이 부재하다면, 그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는 논리의 영역에서나 찬성할 일이겠지요. 실제 세상에서 음악을 감상하고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대응하는 언어를 찾을 수 없다하여 그냥 입 닥치고 있는다면 그 얼마나 심심할까요. 아마 이 곳에서 감상의 차이에 따른 의견충돌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잣거리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러한 충돌이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사족.
    사라사테가 이 곡을 작곡했을 때 아마도 깊은 슬픔을 경험했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의 경험이 슬픈 곡을 창조해냐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닐 수도 있을겁니다.
    '부활'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자인 김태원이 그런 얘길 하지 않았나요?
    "내 음악은 슬픕니다. 그러나....내 인생은 슬프지 않습니다."
    김태원은 이 멋진 얘기조차 웃기게 하더군요.




    바흐2138S님의 의견에 대한 답글은 다음으로 미룹니다....피곤이 엄습해서.
  • 콩쥐 2009.03.16 08:17 (*.161.67.9)
    안네 소피 무터나 힐러리 한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들어보니 또 다른세계가 있네요.....
    연시 연주자는 자기의 세계를 연주하네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공감대........"역사성."
    the cynics님의 글을 읽으니 이런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나무들은 해마다 알아서 나이테로 표현하고
    원자들도 자신의 주기율을 특정반원으로 표현하나봐요.
    일종의 예술가들이네요, 나무나 원자나.....
    걍 ....우주 자체가 큰 예술작품같아요....
  • 금모래 2009.03.16 09:31 (*.152.69.54)
    ^^THE CYNICS 님, 필력이 대단하십니다.
  • 간디 2009.03.16 09:32 (*.48.5.127)
    THE CYNICS 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사실 저와 같은방향의 생각을 하시는 분을 만나서 반갑기도 하고요..
    그래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음악 연주자들은 무엇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것이 발전적일 수 있을까요?

    이 것 역시 개인적인 취향이나 원하는 목적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THE CYNICS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 최동수 2009.03.16 09:52 (*.77.185.196)
    많은 것을 알게 해주신 위의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지고이네르바이젠은 당연히 바이얼린 연주가 아름답지만,
    저는 로스 인디오스 타바야라스의 기타연주를 더 좋아합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음악은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있는 수단이라고.
    음악은 영성치료도 가능하다는걸 알고계시죠?
    옛날에 기타?연주로 사울왕을 치료한 사람이 바로 다윗왕이죠.

  • 지초이 2009.03.16 10:33 (*.59.144.22)
    THE CYNICS 님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 Kyung Yoo 2009.03.16 11:19 (*.95.209.225)
    음악, 미술, 문학을 떠나서 예술이야 말로 우리 인간들이 먹고 자고 입는것 만이 중요하지 않다는것을
    인간에 가장 높은 지혜와 능력으로 나타내고 입증해 주고 있는것 입니다.
    예술이란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것이고 또 우리생활에 알게 모를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것입니다.

    종교 또한 우리 인간에 본질과 근원에 영원성을 추구 하고자하는 또 인간과 신의관계를 정립해 보려는
    끈임없는 인간들에 진지한 노력에 과정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생각해볼때 다행이라고 느껴지는것은 신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았고 또 불공평함과
    모순으로 침범돤 인간사회에 큰 소망이고 활력소가 되는것입니다.
  • 그래이칙 2009.03.16 11:41 (*.250.112.127)
    김지연님의 연주는 곡의 비애에 잠겨 나오는 연주가 아닌, 곡이 가지는 선율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연주로 들리네요. 그래서인지 비애 비통 그리고 몸부림이 아닌 밝음을 간직한
    지고이네르바이젠을 감상할 수 있네요.

    김지연님은 매우 밝은 성격이 아닌가 싶네요. 이연주는 밝음이 더해진 야샤 하이페츠의 연주랄까
    제게는 그리 들려 참 좋습니다.

    콩쥐님덕분에 감상 잘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콩쥐 2009.03.16 11:50 (*.161.67.9)
    신비로움에 대한 접근 그 말할수없는 아름다움을
    종교지도자들이 인간을 지배하는데 이용만 안한다면 참 좋겟는데,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종교가 정치와 깊이 연관되어 민중을 이용해왔죠...
    당장 우리나라를 보면 제대로 알수있는일이고요....

    정치권력자나 자본가 그리고 부도덕한 종교지도자들이
    신비감에 도취해 찾아간 보통사람들을 종교에서 좀 놔뒀으면.....
    청에떼로 생각하지말고...


    마치 맛있는 샘물가에 온갖 잡상인(권력과 자본가)이 달라들어
    물마시러 온 모든사람에게 돈뺐고, 시간뺏고, 교육하고, 함부로하고.....
  • vorstellun 2009.03.17 15:56 (*.123.125.30)
    저는, 정신이란 결국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적 대상의 정신적 이미지(표상)만을 인식할 뿐 대상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한 인식론으로서의 표상론(representationalism)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진행한 반면, 님께서는 아마도 미학이론중 모방론을 표상론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시면서 이해한 데서 오는 차이인듯합니다. 모방이론(imitation theory)에서나 표현이론(expressive theory)에서처럼 작품의 대상이, 현실계가 되었든 아니면 작가의 감정이나 정서가 되었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결국 인간 정신에 현현하는 표상작용이 매개하기에(이를 통해 플라톤은 이데아의 인식에 다다르지 못하는 인간 지성의 저급함을 지적) 상상력의 틈새에서 진행되는 대상의 표현, 즉 정서(고뇌, 회한, 등)의 묘사, 삶의 사건(죽음, 질병...)등에 대한 표현 모두를 표상 행위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19세기 이후 등장한 표현 이론의 정점에 서있는 콜링우드(Collingwood)의 견해를 따르자면, 인간 삶의 측면들이나 상상력을 토대로 일구어낸 작가의 감정 표현만이 예술의 본령을 이루게됨으로,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음악의 영역이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높은 수위에서 표현능력을 발휘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부분도 개인에 따라 다른 주장을 할수도 있겠지만.
    끝으로, 표상을 단순히 이미지-카피(감각적으로주어진 것)로서가 아니라 감성의 형식적이고 순수한 조건으로서,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보편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칸트는 그의 주저 <판단력 비판>에서 이미-
    예컨대, 아름다움을 예로 들자면, 이에 대한 상호주관적 판단과 그 판단이 동일시하는 순수 쾌락은 작품 안에 재현되어 있는 사물의 인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서안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각현상이 아니라, 표상 능력과 상상사이에서 일어나는 놀이이며, 개념을 통한 직관 능력인 셈입니다.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끼는 것도 이에 대한 보편적 감성능력을 인간이 구유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THE CYNICS 2009.03.18 20:29 (*.252.123.177)
    제가 예전에 잃은 책을 중심으로 말씀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아, 그렇다고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제 얘기는 어느 유명한 학자가 한 얘기이므로 이 얘기가 반드시 옳다,라는 '권위에 의존한'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며, 단지 '이러한 견해도 있다'라는 선에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로 아래의 얘기들은 님의 글에 대한 반론도 아니고 가르치려 들려는(?) 목적도 없으며
    단지 위의 제 글에 대한 정확한 지침을 다른 분들에게 제공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주십시오.^^

    먼저, 주지해야 할 점은, 표상론이니 표현론이니 하는 논의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논의의 목적은 바로 '예술'이라는 것의 속성소를 규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술이라는 것과 기타 다른 분야(예컨대 과학이나 종교같은)와의 차이를 규정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고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곧 '예술이 다른 분야와 구분되는 결정적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며 이러한 물음들은 곧 예술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는 것.
    그러니까, '모방론'은 '예술이란 바로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며,
    '표현론'은 '아니다. 그럼 이명박 사진도 예술이냐? 예술은 그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대충 이 정도 하고 넘어 갑니다.

    1.엄밀하게 따지자면, 현실-외부 대상에의 카피에 그치는 것을 '모방론'으로,
    2.단순한 카피가 아닌, 예술작품을 통해 작품의 '내재적 성질'의 것을 드러내는 것을 '표상론'이라고 규정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플라톤이 그림을 우습게 여긴 건 바로 '모방 따위는 해서 뭐하는데? 고작 덴뿌라인 주제에.....'라는 회의의 결과일테고요.

    그러나 제가 본 저서는 '표상론'의 범주 안에 '모방론'을 포함 시킵니다. 인용합니다.
    <표상이란 무엇인가? 표상은 어떤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그 대상을 대치해 보임을 의미한다. 표상 R(representation)은 그것의 대상(Object)의 실재적 존재를 전제하며, 표상된 사실, 혹은 사건은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대상의 대치를 의미한다.>
    이는 모방론에의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다른 견해도 제시합니다.
    <(그러나) 비록 모든 예술 작품의 기능을 표상성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모방이나 모사라는 뜻에서의 표상성일 수 없음은 자명한 것 같다.......표상은 반드시 모방이나 모사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물 현상은 그것이 딴 것과 실재적인 유사성, 즉 복사적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해서 표상적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R이라는 사물 현상이 O라는 사물 현상을 표상하기 위해 그들 간에 복사적 관계가 있을 필요는 없다. 한 사물 현상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표상할 수 있으며 그 방법들 간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표상은 그 대상의 복사(카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 가시적인 약정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표상론을 단순히 모방론의 틀 안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라는 얘기를 한 것이지요. 이를 설득하기 위해 소쉬르의 언어 철학을 예로 듭니다. 바로 (스피노자가 한 말입니다만)'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논점으로 말이죠.

    <'달'이라는 말이 구체적인 실재의 달을 표상한다고 해도 그 낱말과 구체적인 달의 관계는 결코 복사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月이란 상형문자가 원래 복사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다고해도 그 문자가 우리에게 달을 표상하는 것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은 '月'이란 문자와 실제로 존재하는 달의 유사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재와 언어가 따로 논다는 얘기 같습니다. '똥'이라는 낱말은 실제의 똥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제의 '똥'을 표상한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론'은 다음과 같은 반론에 부딪힙니다. "그럼, 대체 과학과 예술의 차이는 뭐냐? E=MC(2)이라는 공식도 예술이냐?"라는. 좀 유식하게 얘기해서 예술을 정의하는 속성소로 '표상에 따른 인식적 역할'로 규정하면 과학이나 일반 언어까지도 예술의 범주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는 것.
    이 지점에서 표상론에 반기를 들기 위해 '표현론'이 제시됩니다. 표현론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저서를 인용합니다.

    '김태희는 여자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합시다. 이 명제는 유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실'을 알려주니까요. 이 문장은 '인식적 의미'를 갖습니다. 김태희가 남자는 아니라는. 고로 고추가 없다는.
    반면에 '김태희는 예쁘다'라는 말에는 인식적 의미가 없습니다. '예쁘다'는 말은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만일, 김태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외국인에게 이 말을 했다고 합시다. 이 외국인은 '예쁘다'는 말을 듣고 김태희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표상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할 겁니다. 이는 위에서 제가 힐러리 한에 대한 연주평에서 '단단하다'느니, '유려하다'라는 따위의 말들에는 의미가 비어 있다,고 말한 것과 일치합니다. 힐러리 한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 수사의 의미는 비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단하다'라는 의미를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견고한 연주'로 받아들일 수도 있거든요. 말한 이의 본래 의도가 이와는 다른 것이라면, 이는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 것입니다. 고로 이런 얘기는 의미가 비어 있는 것이지요. 고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논리철학-논고'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여야 한다'-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고 해요. 신(神)? '신'이라는 낱말이 있다 해도 그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거나, 증명할 수 없잖은가? '미(美)? 김태희가 예쁘고 송혜교가 이쁘고 이효리가 예쁘니까 '미'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것 같지? 그런 거 없거든? 그러니까 얘기 꺼내지 말고 닥치고 있어라, 라는 정도로 받아들였다고.
    (그런 거 있다......성형외과에 가면 의사의 컴퓨터에 '미인의 기준'이 저장되어 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어쩌면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로 명제가 될 수 없는'김태희는 예쁘다'라는 말은 '인식적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예술의 속성소는 인식적 기능에 있다'는 '표상론의 폐기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똥'이라는 글자도 예술이냐?"라는 의미랄까요.

    '김태희는 예쁘다'라는 말은 (저자에 의하면), '인식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단지 '환감(歡感)적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고로 '인식적 기능'이 '표상론'의 영역이라면, '환감적 기능'은 '표현론'에의 영역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표현론은 어떤 객관적 상황이나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어떤 대상에 대한 화자(예술가)의 심리상태를 노출하는 데 있다, 라는 얘기라고. 고로 표상론 따위는 집어 치우라고, '표현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말합니다.

    예술 작품의 속성소로서 '표현'이란 개념에 대해
    위에서 언급하신 콜링우드라는 학자는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해요. 예술과 제작(Craft)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크래프트가 <언제나 이미 결정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활동>임에 반해 예술은 <진술에 비유될 수 있는 '언어적 활동'>이며, 그가 구태여 표상과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표현이라고 한 것은 <그 표현의 대상이 인간 밖의 객관적 대상이나 인간의 사고가 아니라 인간의 감동>이라는 데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러나 저자는 콜링우드의 견해에 대해 '표상'과 '표현'의 개념 차이가 모호하다고 비판합니다.
    <예술표현론이 뜻하는 표현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한 것 같은 환감적인 기능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표상의 형태로 사용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표현론은 표상론과 구분되고 대립되는 이론이 아니라 표상론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하며.....논리실증주의적 의미로서의 표현이란 말이 표상이란 말과 대립되어 예술 작품에 적용될 수 없다.>

    왜 모호하다고 말할까요? 저자는 '김태희는 예쁘다' , 또는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말은 환감적 의미만 지닌다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의견을 반박하여 논증합니다.

    <....'장미꽃은 아름답다'는 문장에 있어서 '아름답다'라는 술어가 '장미꽃은 빨갛다'라는 문장에 있어서 '빨갛다'라는 술어와는 달리 주어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가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나타낼 뿐이라는 이유에서, 그것은 느낌을 표출하는 의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름답다'라는 말 자체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감정의 표출은 아니다. 그 말은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로서, 감탄사, 황홀해서 하는 몸짓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대할 때 독자는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것도 아니며, 화자가 체험한 경험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다. 독자는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문장을 이해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 독자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생각과는 독립해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문장도 넓은 의미에서 표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김태희는 예쁘다'는 것은 단순히 의미가 비어있는 환감적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니라 '예쁘다'는 말 자체가 충분히 인식적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식에 '예쁘다'라는 선험적 감성형식이 존재하거나 말거나 '예쁘다'는 말은 '못생기지 않고 보기에 좋다'라는 인식적 기능을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저자는 표상과 표현의 경계를 허뭅니다.
    좀 어렵네요....말장난 하는 것 같기도.ㅡㅡ;

    제가 위에서 '선험적 감성형식'에 대해 얘기 했는데요.
    사실 전 칸트의 저서는 그 어떤 것도 읽은 바가 없습니다......오래전에 친구가 가지고 있던 '순수이성비판'을 1시간 정도 들여다 본 적은 있는데....그 당시 이런 결심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내 살아생전 칸트의 책은 절대 겉표지조차 들여다보지 않으리.......'
    칸트는 제게 많이 어렵습니다......(그래서 개론서에 의존할 뿐).

    Vor...님께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칸트의 얘기는 보통 '예술 형식론'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언급한 모방론, 표상론, 표현론 과는 좀 다른 애기겠지요. 언급하신 칸트는 인간이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먼저 감성이 인식 대상을 받아들인 다음 오성이 그 대상에 개념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감각 기관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개념 파악이 배재된 단순한 감각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칸트는 미적 대상에서는 오성의 역할이 배제된다고 했답니다. 미 자체는 오성이라는 형식에 내재된 ‘선험적 범주’의 영역 밖에서도 오로지 감각적으로 온전하게 인식될 수 있다고. 이를 ‘개념 없는 판단’이라고 했답니다.

    <인식이 가능한 것, 다시 말해서 지각의 대상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보장되는 것은 그 판단이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편성을 띈 선험적인 범주, 즉 오성의 형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선험적 범주에 의존하는 인식 판단과는 달리 심미 판단은 오로지 감각적인 것에만 의존한다. 그래서 칸트는 심미적 판단을 '개념 없는 판단'이라 한다.....>

    예술론으로서의 형식론은 표상과 표현 모두 거부합니다. 대신 예술 작품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형식’을 예술에의 속성소롤 규정한다고. 저자는 모든 인식의 대상이 선험적 범주에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심미적 태도만 그것을 벗어나 있다고 말한 칸트의 견해를 비판합니다. 선험적 범주야말로 객관성을 보장해 주는 장치일 터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심미적 판단이 객관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 외에 이러 저러한 근거를 중심으로 형식론을 비판합니다. 이로서 예술을 규정짓는 속성소로서의 표상, 표현, 형식론은 모두 기각됩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예술론이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다음은 본문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얘기입니다.

    "정신이란 결국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적 대상의 정신적 이미지(표상)만을 인식할 뿐 대상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오래전에 들은 얘기라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칸트가 '물자체(Ding an sigh)'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의 오성이나 이성은 이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네오를 매트릭스(가상세계)에서 벗어나게 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가상세계를 보여주며 매트릭스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모피어스 : 지금 자네의 모습은 잉여 자기 이미지란 거야.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을 디지털화 한 거지.
    네오 : 진짜가 아닌가요?
    모피어스 : 진짜가 뭔데? 정의를 어떻게 내려? 촉각이나 후각, 미각, 시각을 뜻하는 거라면 '진짜'란 두뇌가 해석하는 전기 신호에 불과해.>

    우리는 눈앞에 있는 '김태희'의 얼굴이 우리의 감각(시각)이 받아들이는 그대로의 모습일 거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파리나 사마귀나 진드기의 눈에는 김태희가 과연 우리가 보는 그 모습 그대로 보일까요? 저는 저 색깔을 빨간색이라고 생각하는데 '상근이(개)'는 회색으로 봅니다. 내가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일 것이라고 (논리적으로)주장할 수 있습니까?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여기에서 물자체의 개념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그러니까 지구에서 10 억 광년 떨어져 있는 우르탕카 별(?)의 외계인에 비친 김태희의 모습은 어쩌면 '킹콩'의 모습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김태희의 '진짜' 모습은 알 수 없습니다. 칸트는 이 '진짜'를 '물자체'라는 말로 정의했고요......덧붙여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이 물자체를 인지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


    사족.
    전 글을 쓸 때, 이 글이 제 생각인지, 아니면 다른데서 보거나 들은 바가 있는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인지를 구분하는 편입니다. 이를테면 '제 생각엔.....' 등으로.
    위의 예술론에 대한 글들은 그저 단순한 소개 글 정도로만 받아 들여 주십시오. 제가 어떠한 '예술론'을 주장하기에는 분에 넘치는 일이므로. 그리고 실제로 위의 저자의 내용은 위에서 제가 소개한 것보다는 훨씬 다채롭습니다.

    그리고 '간디'님께서 제게 질문을 주셨는데요, 오전에 그에 대한 답글을 쓰다가 말았습니다. 역시나 말이 많아져서요. 짬 날 때 제 주관을 피력해 보겠습니다. 물론, 제 얘기가 틀릴 수도 있겠고요......
  • 간디 2009.03.19 03:21 (*.227.149.6)
    아..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보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기대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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