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24 13:31
아빠에게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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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까지 교회에서 성극에 쓰일 배경을 그렸다. 작년엔 동화적 느낌이 물씬나는 마굿간 성벽길 같은 것이라서 오히려 마음대로 슥슥 그렸는데, 이번 배경은 집안 거실, 길거리였다. 이런 사실적인 그림들이 그림공부를 하지 않은 내겐 역시나 더 힘들었다.
게다가 지금도 정말 작고 귀여운 교회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다소 커져서 무대를 중앙으로 옮긴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란 걸 생각하니 이번에는 배경도 와이드 화면으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지 3장을 연이어 붙이니 진짜로 제대로 시네마스코프!!
사실 너무 지치고 피곤하고 마음도 힘든 요즘이었기에, 뭘해도 어깨에 힘이 실리지 않는 나날들이라서 그랬는지 붓끝에 기운이 작년만 못했다. 그래도 몇시간 작업 끝에 다 된 그림을 보니까 기분이 좋았다. 특히나 그나마 여러가지로 신경썼던 집안 풍경에 비해 너무 썰렁하던 거리가 아주 재미있는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는거다. 왜 그런지는 우리 교회 사람들만 보면 안다^-^;;
흰 종이 위에서 무릎을 꿇은 이상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다보면 단 십분이 못되어 허리를 일으키거나 무릎이 아파 자세를 바꾸게 된다. 완성된 그림을 붙이러 강단으로 갔다가 아버지의 방석을 보았다.
무릎부분이 움푹 파인 아버지의 낡은 방석.
그 앞에는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써낸 기도 제목들이 있다. 아버지는 군에 간 누군가의 아들을 위해, 입시를 앞둔 또 어떤 딸을 위해, 병환을 앓고 있는 어떤 이의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을 위해 새벽마다 이 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최근 나는 근 한달 간을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아버지와의 사소한 의견차에서 그만 내 불같은 성격이 나온 것이다. 아주 어릴 때,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볼기짝이라도 때려주어 나를 혼내던 아버지는 그저 입을 꾹 다무는 걸로 당신의 의견을 표시하셨고, 그 때 이후 계속 이 모양이다.
아버지, 나의 아빠. 왜 그렇게 남주기를 그리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대던 나도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뭔가 갖고 가서 줄게 없나 두리번거리게 되고, 아버지의 그 꼬장꼬장한 취향과 이상한 자기만의 원칙들이 세상살기를 불편하게 만든다면서 불만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내 취향이며 내 원칙들도 그리 만만치는 않은 것 같다.
아버지, 여기저기에 참 재주가 많은 사람이어서 사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지금 내가 그린 것보다 백배는 더 멋진 배경을 늘 직접 그리곤 했다. 나처럼 이렇게 종이 몇장에 덜렁덜렁 그려 붙이는 게 아니라 베니어판을 뒤에 대고, 문은 문대로 파서 열리게 만들고, 그런 무대세트를 전부 다 혼자서 하루 이틀만에 뚝딱 만들어내곤 했다. 아버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원래부터 갖고 있다가 나에게 준 사람,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무서우리만치 입맛까지도 똑같이 내가 닮아가고 있는 그 사람.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항상 이렇게 기도를 하며, 우리 딸 셋에 대한 기도를 끊이지 않았을 사람.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지내온 이 한 달 동안에도 아버지는 나를 위해 기도했겠지. 그 한달동안 나는 뭘했는지,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고, 내가 이렇게 힘든데 왜 아버지는 날 알아주지 않냐고 불만이나 갖고 있었던 건 아닌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르르한 기운이 올라와 잠시동안 배경을 붙든 팔을 치켜올린 그대로 난 움직일 수 없었다. 급기야는 얼어붙은 아버지와 나와의 다리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면서 어머니에게도 투덜댔던, 아버지가 좋아하는 통닭을 사들고 들어온 날도 있었지만 또 그걸 갖고 가서 같이 드시자고 이야기하는게 쑥쓰럽고 또 자존심 상해서 동생에게 미루어버렸던, 그걸 뻔히 알것이 뻔한 아버지가 그걸 그대로 물리자 분통을 터뜨렸던, 그런 내 모습들이 떠올랐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 이 날의 주인공은 연인들도 산타클로스도 서울시청 앞의 불밝은 트리도 아니고, 우리에게 사랑을 알려주시려 오신 예수님. 이런 날 내가 아버지랑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아주 그만 벌이라도 받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어쩌면 배경을 그럴싸하게 그려붙이거나 여러가지 소품을 만들어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면서 난 가장 중요한 걸 잊고 맘 한켠에 치워두고 있었나, 아버지, 아니, 아빠. 죄송해요.
아빠. 그 날 그렇게 말한건 다 진심이 아니었어요. 제가 얼마나 아빠를 좋아하는지 아빠는 모르실거예요. 아빠가 저를 지금껏 사랑해준 것만 못하겠지만 그래도 좋아한다구요!! 아빠, 우리 다시 둘도 없이 친한 아빠랑 딸로 돌아가요. 다시는 아빠 맘 아프게 하지 않을게요. 아빠 사랑해요,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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