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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한국어
(*.78.119.85) 조회 수 6038 댓글 4

학교와 학벌이 인간의 인생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다 읽게된 글입니다.
대한민국은  고등학교시절 점수로 학력과 학벌이 결정되어  한 인간의 인생의 대부분을 평가하게되죠.

좋은점수를 받은 사람은 지성인과 성공한자로 불리어 용서와 축복을 받고  좋은점수를 받지못한자는
패배자가 되어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비난을 받잖아요.

물론 그 이후의 인생은 본인의 몫이라고 해도,  10대의 청소년들을 현 입시제도에 어느정도 적응했느냐에
따라 일률적으로 판단하는것은 옳은것인가요.
  
아직 많은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수있는 청소년들에게  단한번의 실패로인해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끊이지 않는 자기비난의 굴레속에서 자신감을 상실케해  인생의 다양함을 보지못하게 하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요.

학창시절에 시험점수는 좋지않더라도  마음씨곱고 생각이 많았던 친구가 그리워지고,
우리동네  과일집 아줌마의 인자함과 끝도없는 성실함과 노력에  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글을
올려요~

그러고보니 기타음악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수있지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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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오래전부터 저는 학생들의 학교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교사들과 학생들의 잘못된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획일적인 정부독점의 교육제도가 학생들을 좀 더 창의적이고 주입식이 아닌 열린교육을 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교사들은 원래부터 주입식교육을 시키는 기계가 아닙니다. 그들도 학생들이 좀 더 자유롭고 창조적인 지적활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면 오히려 수업을 한다고 하면서 학생들을 억누르는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과정을 정부가 정해놓고 대학입시 형태역시 정부의 교육과정을 따라야만 되도록 만들어 놓고, 학생들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간혹 부적격교사와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교사를 만나도 항의하거나 거부할 수조차 없게 되어 있는 제도하에서는 현재와 같은 악몽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도 믿습니다.

많은 학부모들은 학교에 자녀를 보내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것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홈스쿨링을 하는 학생의 인성이나 지적수준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보다 많이 더 우수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프러시아에서 시작한 현대 의무교육은 중앙집권화한 학교가 길러내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고분고분한 노동자, 정부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기업이 요구하는대로 일하는 사무원,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  국가의 발전도가 낮고 정치, 경제, 문화의 수준이 열악한 사회에서는 이러한 교육이 효과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교육은 더 이상의 성장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자,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을 말살하는 교육제도입니다.

저는 개토의 바보만들기라는 책을 읽고 나서 제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정부독점의 배급제도식 교육의 문제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고, 사상적으로 엄청난 동지를 얻었다는 기쁜 마음이 들었었습니다. 다만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1994년도에 한국에서 초판이 발해되었었는데 그때에는 이러한 책의 존재를 제가 몰랐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10년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대한민국의 발전은 개토가 지적한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개토의 생각은 너무나 진보적이어서 정말 그럴까? 라고 의심하는 분들도 많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어도 좋습니다.

그의 사상은 수십년간의 교사생활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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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온 길



저는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먼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여러분과 같은 사람 중의 하나로 인식해 주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이야기꾼이 또 하나 나왔나보다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가끔 텔레비전에서 뉴스 해설을 보다가 엉뚱한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대체 당신은 누구요? 당신이 내게 그런 사실들을 가르쳐 주는 까닭이 뭐요?' 제가 이야기할 사상이 어떤 배경에서 잉태되었는지 얼마간이라도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그런 까닭입니다.

저는 지난 26년 동안 뉴욕 시에서 교사 노릇을 해 온 사람입니다. 그 중에는 맨해튼 북서부에서 영재 아이들을 가르친 기간도 있습니다. 제가 가르친 학교들은 오페라가 열리는 곳인 링컨센터와 방위계약을 따내는 곳인 컬럼비아대학사이 구역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은 흑인과 히스패닉 빈민가에서 썩어들어 가는 산업도시의 험한 소용돌이 속에서 인생을 키워가는 아이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26년 동안 여섯 학교에서 근무해 보았는데,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큰 고딕 건물인 세인트 존 대성당 그늘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유명한 자연사 박물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몇 해 전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던 여자가 강간당하고 처참하게 얻어맞은 일로 언론이 떠들썩했던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우리 학교에서 세 블록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강간범 아홉 명 중 일곱이 우리 학군에서 학교를 다닌 녀석들이었죠.

그러나 사물에 대한 저의 관점이 빛어진 장소는 뉴욕 시에서 한참 떨어진 곳입니다. 펜실베니아 주의 모농가헬라, 피츠버그에서 동남쪽으로 40마일 거리에 있는 곳입니다. 그 시절 모농가헬라는 철강공장과 탄광이 있고 짙푸른 강물을 기선의 물레방아 모양 바퀴가 휘젓고 다니던 고장이었죠. 근면한 노동과 가정생활이 존중받고, 또 계층간 격차가 두드러지지 않은 곳이었죠. 정도 차이는 있어도 다들 가난했으니까요. 그래도 자기가 가난하다고 확실히 생각한 사람은 아주 적었던 것 같습니다.

독립성, 강인성, 자율성을 명예의 근거로 삼고 선조와 지방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더라도 아이들이 자라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일에 간섭하려 들었습니다. '바깥세상'의 막연한 일들은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바깥 세상이라는 것도 고작 피츠버그가 그 경계였죠. 피츠버그, 어두운 색조의 그 놀라운 강철의 도시, 일 년에 한두 번은 구경하러 가 볼 만한도시였지요. 제가 기억하는 한 아무도 모농가헬라라는 좁은 곳에 갇혀 있다는 구속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가 보지 못함으로써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마을의 인쇄업자였고 한때는 마을신문 '데일리 리퍼블리컨'의 발행인이기도 했습니다. 마을이 민주당의 아성이었으므로 신문 이름 때문에 눈총을 받기도 했답니다. 할아버지에게서, 그리고 그분의 독일식 독립적 태도에서 저는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오늘날처럼 노인들이 양로원에 수용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히는 시절에 자라났더라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가르침이었습니다.

맨해튼에서 산다는 것이 제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에서 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35년이나 살아오고도 제 마음과 습관은 아직도 모농가헬라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맨해튼의 사회와 가치가 제 자신의 것과 몹시 다르다는 사실이 저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준 덕분에 저는 교사이면서 동시에 인류학자의 자격도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 26년간 저는 교실을 인간의 가능성이 어떠한 범위에 걸쳐 있는지, 그 희망과 두려움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탐구하는 실험실로 써 왔으며, 인간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도록 해 주는 것은 어떠한 것이며 묶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그곳에서 연구해 왔습니다.

그 기간을 통해 저는 천재성이라는 것이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의 성질로서, 우리들 대부분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제게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점이었습니다. 저는 두 곳의 일류 대학에서 받은 훈련을 통해 지능과 재능은 종 모양 곡선에 따라 경제적으로 분포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이 수학적인, 과학적인 사실들에 의해 인간의 운명은 칼빈파의 주장못지 않게 엄격히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배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통찰력, 지혜, 정의감, 너그러움, 용기, 창의성 같은 인간의 훌륭함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전혀 엉뚱한 아이들에게서 수시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혼란을 느꼈습니다. 그런 특징들을 더 자주 보여 주었다면 가르치기도 수월했겠지만 그럴 만큼은 아니었죠. 그러나 제 마음에 의혹을 불러일으킬 정도로는 자주 보여 주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일 자체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 말입니다. 제가 월급 타 먹으며 한다는 짓이 학생들의 능력을 늘려 주는 것이 아니라 줄여 주는 것은 아닌가? 처음에는 황당무계한 의문 같았지만 저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종소리, 교실에 가두기, 맹목적인 줄 세우기, 동년배 모아놓기, 혼자 있지 못하게 하기, 끊임없는 감시 같은 학교제도의 모든 일반적인 요소들이 마치 누군가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꾸며낸 것 같다는 것을. 학생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도록, 중독상태나 종속적인태도에 빠지도록 말입니다.

   저는마이들에게조금씩조금씩게릴라학습법을알려주기시작했습니다. 인간이 늘 스스로를 가르치는데 써온 원료들을 힘닿는대로 많은 아이들에게 찾아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만의 영역, 선택의 기회, 감시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제 한정된 능력과 밑천이 베풀어 줄 수 있는 최대한 다양한 인간관계와 상황의 경험, 간단히 말해서 저는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의 교사가되고 자기교육의 주교재가 될 기회를 가지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려고 한 것입니다.

   제가 추구하기 시작한 이념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교육이란 그림보다는 조각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림이란 표면에 물감을 덧붙임으로써 형상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임에 반해 조각이란 재질의 일부를 떼어냄으로써 재질안에 내재하던 형상이 풀려 나오는 것이지요. 이게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아이들의 조그만 머리통에 제가 가진 전문지식을 채워 넣어주는 전문가의 입장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대신 아이들의 내재적 재능의 구현을 가로막는 요인들을 제거해 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교실 안에서 불쌍한 학생들에게 지혜를 베풀어주는 것이 제 일이라는 생각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않게 되었지요. 그 쓸데없는 수작을 아직까지도 계속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제도교육의 성격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죠. 그러나 기회 있을 때마다 저는 교습의 전통을 벗어나 자신의 가치를 향한 길을 스스로 찾도록 아이들을 풀어 주려고 합니다.

제 생각과 같은 교육의 명제가 확산될 경우 위험을 느끼게 되는 것이 국가 독점 교육제도의 사회학적 특성입니다. 확산만 되지 않는다면 간간이 저와 같은 발견을 하는 교사는 기껏해야 지휘 체계에 대한 사소한 교란 정도일 뿐입니다. (그 지휘 체계는 산발적인 교란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나아가 교란 요소를 종화시키거나 박멸하는 자동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산될 경우, 제도교육의 성립 근거가 되는 핵심 가설들이 이단적인 사고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글읽기를 배우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라거나 아이들은 근본적으로 공부하기를 싫어한다는 따위의 수많은 거짓된 가설들. 지금 학교에서 배출해 내고 있는 제품들과 다른 규격의 제품들을 만들어 내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진정 우리 경제체제의 안정성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비판적 사고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지금 우리 학생들이 받아들이고 공헌하도록 교육받고 있는 경제체제는 한 세대도 못 가서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 교육방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큰 신뢰가 필요합니다. 잘하고 못하는 데 따라 조건부로 주어지는 신뢰가 아니라 자연적이고 총체적인 신뢰여야 합니다. 사람은 제멋대로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스스로 바로잡을 기회를 가져야만 자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암기하거나 모방만 한다면 그 능력은 흥내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제 방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또한 여러 가지 인습적인 관념들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부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바람직한 인생을 이루는 데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 하는 관념들 말입니다.                  

  아이들과 교육 사이를 갈라놓는 장애물들과 여러 해 동안 씨름해 오면서 저는 국가 독점 교육제도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교육제도는 그 핵심적 신화들이 까발려지고 버려지면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여러 해 동안 저는 제가 교사로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온 모든 일이, 그리고 제가 실제로 해 온 일의 대부분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르쳐 온 것은 이 교육제도를 지탱하는 신화들, 계급제도에 근거한 경제체제를 떠받드는 신화들을 뒷받침해 주는 보이지 않는 교과서였던 것입니다.

   교사로서의 제 경험으로부터 무슨 쓸모 있는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해 드릴지 궁리하던 제게 떠오른 생각은 제가 하는 일 가운데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말씀드리기보다 무엇이 그른 일인지를 말씀드리는 편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일 중에서 옳은 것, 그것은 이해하기가 아주 쉬운 것들입니다.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아이들에게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고 존중해 주는 것. 반면 제가 하는 일 중에서 그른 것은 기괴하고 복잡하고 공포스러운 것들입니다. 먼저 그것이 어떤 것들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

제가 개토입니다. 26년전, 제가 교사 노릇을 직업으로 골라잡았던 것은 그보다 썩 좋은 다른 일거리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자격증은 영어와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은 전혀 그게 아닙니다. 저는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선생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잘한다고 상도 타고 그러는 겁니다.
가르친다는 일, 이것은 장소에 따라 다른 내용을 가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할렘에서 헐리우드까지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으로 가르치는 일곱 가지 교과 내용이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로 이루어지는 전국적인 교과목을 위해 여러분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돈을 내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은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내용이 뭔지 좀 아시는 게 좋겠죠. 물론 여러분이 이 내용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지는 여러분 마음대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비꼬는 뜻에서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믿어 주십시오. 이 내용들이 바로 제가 가르치는 것이며, 거기에 대한 보수를 여러분이 제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여러분 마음입니다.


1. 혼란

예전에 인디애너주 듀보이스에서 케이시라는 여자분이 이런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큰 생각이란 어떤 것들일까요? 글쎄 제 생각으로는 아이들이 가장필요로 하는 큰 생각은 자기들이 배우는 것이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 같습니다. 그 모두에 어떤 체계성이 있으며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해하는 일, 체계성을 잡는 일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케이시는 윌 잘못 알았어요. 제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바로 혼란이거든요. 제가 가르치는 모든 것은 제멋대로예요. 만사의 연관성을 파괴하도록 저는 가르칩니다. 관계의 단절, 그것이 제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들은 너무 많아요. 행성의 궤도, 상수법칙, 노예제도, 형용사, 건축제도법, 무용, 체육, 합창, 회의방법, 소방훈련, .. 학교 밖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연령별 격리... 이들중 어느 것들이 상호연관성을 가진 것이란 말씀입니까?

아무리 좋은 학교라도 교과내용과 그 시행방법을 세밀히 검토해 보면 체계성에 결함이 있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연의 질서와 순리를 깨뜨리는 강압이 교육이라는 이름아래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뒤집어 씌워지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분노를 어린이들이 꼭 집어서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학교라는 곳은 졸업생들이 어떤 참된 열정을 가지고 사회에 나서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경제학, 사회학, 자연과학 등에서 나온 뜻도 모를 전문용어가 뒤범벅인 채 들어있는 공구상자를 들고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해서든 깊은 배움이 없이 교육의 질이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의 직업에 연관성을 거의 느끼지 않는 너무나 많은 어른들이 사실은 자격도 없는 전문성을 내세우면서 아이들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단절된 사실의 파편들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그리고 교육이란 원재료를 가공하여 의미를 뽑아내는 일련의 공정입니다. 사실과 이론들을 누비이불처럼 뒤 얽어놓는 학교제도의 관행과 집착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오랜 노력의 역사를 감춰 놓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학교에서는 그리 두드러져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자'는 것과 '저것을 하자'는 것 사이의 소박하고 단순한 관계 속에 무슨 의미인가가 있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학교생활의 경험들이 그런대로 뭔가 체계적인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아직 그 연극과 꾸밈 뒤에 얼마나 빈약한 내용이 가려져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할 단계에 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순리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어린아이가 걷기나 말하기를 배우는 과정, 해뜨기에서 해지기까지 빛의 변화, 농부나 대장장이나 제화공이 대를 물려온 일하는 방법, 추수감사절 잔치의 준비,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하나하나의 행위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비춰 보여줍니다. 학교의 원리는 이렇지 못합니다. 한 교실 안에서도 그렇지 못하고 하루의 일과표 속에서도 그렇지 못합니다.

학교의 원리는 미치광이 원리입니다. 어느 한 부분도 확고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세밀히 살펴보면 허점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학교나 교사의 독단을 비판할 수 있는 수단을 감히 가르치려는 교사는 거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교과목들을 배웁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카톨릭 신자들이 교리문답을 배우듯, 성공회 신자들이 39조항을 외우듯, 그렇게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만사, 만물 사이의 관련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칩니다. 체계화의 정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세계를 파편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텔레비전프로그램 편성에 가까운 일이지, 질서를 심고 키우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이란 것이 이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맞벌이 때문이기도 하고, 이사를 너무 자·주 하거나 직장을 너무 자주 바꾸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나친 야심 때문이기도 하고, 뭔가가 사람들을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든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저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르치는 첫 번째 내용입니다.
  

   2.교실에 갇혀 있기

두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이 교실에 구속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있을 곳은 교실 안이니 그곳에서 나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사실을 결정하는 것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학생들에게는 번호가 매겨져 있어서 교실을 벗어나더라도 제자리에 쉽게 되돌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번호 붙이는 여러 가지 방법이 너무 엄청나게 발달해서 이제는 그 숫자들의 중압으로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 사업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아이들에게 번호 붙이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고도 유익한 사업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부모들이 항의 한 번 안 하고 용납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것도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은 번호가 붙어 있는 어린이들이 함께 갇혀 있는 상태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좋아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별 말썽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죠. 제가 제 할 일을 잘하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다른 곳에 설 수 있다는 상상도 하지 않게 됩니다. 더 우월한 반을 선망하고 두려워하도록, 더 열등한 반을 경멸하도록 제가 가르치기 때문이지요. 이 능률적인 제도가 잘 돌아가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서로를 견제해가며 행진의 보조를 잘 맞추게 됩니다. 학교처럼 짜고 벌이는 경쟁판에서 정말로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각자 자기 위치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는 거지요.

학생들의 99퍼센트를 그들이 속한 교실에 묶어 두는 것이 교실 체제의 전반적인 구도이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시험 성적을 향상시키도록 공공연히 격려하기도 합니다. 잘하기만 하면 더 우월한 교실에 올라갈 수도 있다는 미끼를 던져가면서. 언젠가는 고용주들이 시험 성적과 등급을 근거로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따금씩 악몽처럼 저를 덮칩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고용주들이 현명하게도 그런 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학교교육과 진실이 란 근본적으로 양립 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갈파한 사실입니다. 번호 매긴 교실의 가르침이란 모든 학생이 피라밋 속의 돌덩이처럼 정해진 자기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숫자의 마술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길 말고는 아무도 자기 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3.무관심

  세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무관심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어떤 것에도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싶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방법은 아주 교묘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 강의에 완전히 몰두하도록 요구하는 겁니다. 자리에 똑바로 앉아서 온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게 하고 제 눈에 들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시키는 겁니다. 학생들이 그렇게 움직여 줄 때는 마음이 흐뭇하죠. 누구라도 신명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강의를 아주 잘 할 때, 저는 바로 이런 효과가 일어나도록 몹시 공들여 강의 계획을 짭니다. 그러나 종이 땡 울리기만 하면 지금까지 하던 일이 무엇이든 즉각 손을 떼도록 요구합니다. 다음 시간의 할 일로 서둘러 넘어가기 위해서죠. 아이들은 전등불을 켰다 껐다 하듯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제가 가르치는 교실에서든, 제가 아는 어느 교실에서든 어떤 중요한 일도 제대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교과진도표 위에서 말고는 완전한 경험이라는 것을 가지지 못합니다.

종소리의 진정한 가르침이란 어떤 일도 끝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에든 지나치게 몰입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해 동안 종소리에 길들여지고 나서도 아무것도 중요한 일거리가 없는 그런 세상에 맞춰지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그는 웬만큼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학교의 시간을 지배하는 감춰진 원리가 바로 종소리입니다. 그 원리는 가차 없는 원리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이 원리에 의해 파괴되며 이 원리는 같은 길이의 어떤 시간이든 서로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치 지도의 추상화 원리가 서로 다른 산과 강들을 똑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종소리는 학생들의 모든 노력을 무관심이 지배하도록 감염시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4. 정서적 의존성

  네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정서적 의존성입니다. 동그라미와 곱표, 미소와 찌푸림, 상과 벌, 표창 따위로 저는 아이들에게 각자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목표가 정해진 지휘 체계에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모든 권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고 박탈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는 한 학교 안에는 아무 권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연방법원에서 판시한 바 있는 자유로운 의사표시의 권리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저는 교사로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결정에 간섭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합당한 일에는 허가를 내려주기도 하고 제 통제력을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교정 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이나 십대 학생들에게는 개성을 끊임없이 드러내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 판단은 신속하고 확고하게 내려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개성이란 학급 이론에 저촉되는 요인이며 일체의 분류체계에 암적인 존재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의 개성이 겉으로 나타나는 흔한 예들을 들어 보겠습니다. 수업 중에 볼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어 화장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일, 복도에서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수돗가로 빠져 나가는 일, 저는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줍니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제 눈치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따금은 제 관할을 벗어나는 일로 아이들이 분노하거나 실망하거나 기뻐할 때 아이들의 자유의지가 제 앞에서 마구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교사가 그 권리를 판별해 준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오직 주었다 빼앗았다 할 수 있는 특혜를 빌미로 올바른 처신을 강요할 뿐입니다.

  
5. 지적 의존성

  다섯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지적 의존성입니다. 교사가 어떻게 하라고 시키기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착한 학생들입니다. 자신보다 더 잘 훈련받은 다른 사람이 자기 인생의 의미를 정해주도록 기다리게 하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모든 중요한 선택은 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공부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교사인 저뿐입니다. 아니, 제게 봉급을 주는 사람들이 그 결정을 내려주면 제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거죠.

생물의 진화가 하나의 이론이 아닌 사실이라고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으면 저는 그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가르치라고 제가 지시받은 내용을 거부하는 아이들은 벌을 받습니다. 아이들이 생각할 내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잘하는 학생들과 못하는 학생들을 구분하는 일도 아주 쉽게 됩니다.

잘하는 학생들이란 이렇게 생각하라고 제가 시키는 방향을 별 저항 없이 잘 따르는 학생들입니다. 기분 좋을 정도로 열의를 보여주기까지 하지요. 공부할 가치가 있는 수없이 많은 사물들 가운데 우리가 가진 시간으로 무엇 무엇을 공부할지를 제가 결정해 줍니다. 아니, 얼굴이 감춰진 제 고용주들이 결정해 주죠. 그 사람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제가 뭐하러 왈가왈부하고 나섭니까? 제 직업에는 호기심이란 것이 작용할 여지가 없습니다. 동화만이 중요한 것이죠.

  못하는 학생들이란 물론 여기에 저항하는 학생들이죠. 자기들이 저항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네가 무엇을 언제 공부할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 녀석들을 그대로 놓아두고서야 어떻게 저희가 선생 노릇을 해먹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저항하는 아이들의 의지를 꺾는 데는 효과가 확인된 방법들이 있습니다. 물론 극성스런 부모가 애들 편을 들 경우 일이 훨씬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학교란 곳의 평판이 떨어지고 있는 중에도 그런 일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나 본 중류층 학부모 가운데 자기네 아이들의 학교가 나쁜 학교라고 정말로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26년 동안의 교사 생활을 통 해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부모 자신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면서 일곱 가지 가르침을 잘 받은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할지 전문가들의 지시를 받으려 합니다. 이 가르침이 행해지는 바탕 위에 우리의 경제체제 전체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의존성을 갖도록 훈련받지 않는다면 무슨 꼴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회사업이라는 것은 설 땅을 잃고 근세에 태어날 당시의 역사적 조건 속으로 사라져 버리겠죠. 정신장애자의 공급이 끊겨서 상담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공황에 빠지겠죠. 사람들이 제멋대로 노는 방법을 다시 익힘에 따라 텔레비전을 비롯한 상업 오락과 흥행들은 말라죽어 버리겠죠.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채소를 심고 따고 썰고 요리하는 일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하게 되면 식당과 패스트푸드점을 비롯한 전문 음식사업이 대폭 위축되겠죠. 근대 법학과 의학, 공학의 상당 부분도 사라져버릴 겁니다. 의류산업과 학교산업도 마찬가지고요. 이 모두가 해마다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존성을 가진 사람들 덕분에 존재하고 번창할 수 있는 겁니다.

근본적인 학교제도 개혁을 지지하는 투표를 하시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월급 봉투에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르니까요. 스스로는 뭘 할지 모르기 때문에 남들이 시키는 일 만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생활양식이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6. 조건부 자신감

여섯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조건부의 자신감입니다. 부모들이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들을 사랑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아이들을 한 줄로 정렬시키는 일을 한번 해 보십시오. 자신감에 찬 영혼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동화를 배격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 우리의 세계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경우 버텨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아이들의 자신감이 전문가의 의견에 얽매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평가와 판별을 받습니다.

매달 번듯한 모습으로 모든 학생들의 가정을 찾아가는 통지표는 부모들에게 자기 아이에 대해 얼마만큼 만족을 느끼고 불만을 느껴야 할지 퍼센트단위까지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좋은' 학교 분위기의 생태학적 원리는 상업경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만을 영속화하는 데 있숨니다. 수치로 나타낸 성적표를 작성하는 데 얼마나 적은 시간과 생각이 들어가는지 알면 놀랄 분들도 계시겠지만,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통지표들이 쌓이고 쌓인 무게 아래 아이들은 무성의한 타인들의 판단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나타난 바 있는 모든 주요한 철학 체계의 밑바탕이 되었던 자기 평가라는 개념은 전혀 설 땅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험과 성적, 통지표의 가르침이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이나 부모를 믿기보다는 자격증을 가진 권위자들의 평가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남이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7.숨을 곳이 없다

일곱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숨을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항상 감시되고 있다, 나와 내 동료들이 끊임없이 너회들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도, 자기만의 시간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수업 사이의 휴식은 정확히 3백 초로 제한해서 우발적인 동료애가 생겨날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입니다. 학생들 서로간에 일러바치는 일, 심지어는 자기 부모의 일을 일러바치는 것까지 장려됩니다. 물론 저는 부모들에게도 자기 아이들의 문제점을 보고하도록 권유하죠. 집안에서 서로 고자질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서도 위험한 비밀을 간직할 위험이 별로 없겠죠.

저는 숙제라는 이름으로 학교공부가 집안에까지 연장되도록 시킵니다. 감시 자체는 연장되지 못해도 감시의 효과는 연장되는 셈입니다. 아이들에게 남는 시간이 있으면 자기 부모에게서든, 길거리를 다니면서든, 동네에 사는 현명한 할아버지에게서든, 학교에서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을 배울 위험이 있습니다. '못난 사람이 한가로이 있으면 착하지 못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과 같이 학교제도의 이념에 대한 반역의 마음은 한가한 아이들에게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마귀입니다.

끊임없는 감시 그리고 개인적인 영역의 박탈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으며, 혼자만 있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감시란 유서 깊은 제도로서 영향력 있는 여러 사상가들이 신봉해 온 바입니다. 이것은 『공화국』, 『천로역정』의 「천국편」, 『기독교의 제도들』, 『뉴 아틀란티스』, 『리바이어던』을 비룻한 많은 책에 핵심 처방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이를 갖지 않았던 이 책의 필자들은 모두 같은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사회를 확고한 중앙통제 아래 잡아 놓으려면 아이들을 빈틈없이 감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제복을 입혀 악대 속에 묶어 놓지 않으면 떠돌이 피리쟁이를 따라가 버릴 것입니다.  







제 가장 뛰어난 동료 교사들 중에도, 그리고 제가 만나 본 가장 훌륭한 학부모들 중에도, 교육이 다른 방법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규모 학교에서 국가 독점 의무교육이 거둔 위대한 승리를 보여 줍니다. "읽고 쓸 줄은 아이들이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덧셈 뺄셈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명령에 따를 줄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의 사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창의성과 다양성이 널리 존중되었습니다. 규격화를 벗어난 미국인, 그들은 세계의 기적이었습니다. 이 나라의 국민은 놀라운 자신감과 창의성을 갖고 많은 것을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정부가 우리 생활을 기웃거리며 구석구석을 파악하는 일도 없고 우리에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도록 통제하는 제도나 사회기구도 없는, 이런 나라는 지구 위에 미국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개개인으로도 특별한 존재였고 미국인 전체로서도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남북전쟁 직전 무렵부터 미국 사회는 본질적으로 중앙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국가 독점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느 곳에서도 학교라는 것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교가 있기는 있었죠. 그러나 너무 많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만 있었죠. 학교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읽기, 쓰기, 셈하기 따위를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독립전쟁 당시 동부지역의 노예 아닌 시민들 가운데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토마스 페인의 『커먼 센스』는 인구 3백만의 사회에서 60만 부가 팔렸습니다. 그 인구의 20퍼센트는 노예였고 50퍼센트는 계약제 하인들이었는데요.

그 당시 사람들이 다들 천재였을까요? 아니죠. 배우려는 마음이 식기 전에 가르쳐 주면 됩니다. 1850년대 5학년의 산수나 수사학 교과서를 한 번 훑어 보십시오. 오늘날의 대학 수준이라 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본 기술’의 습득을 주장하는 연막 뒤에 오늘날의 학교는 12년 동안 학생들의 시간을 깔고 앉아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일곱가지 내용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학교는 우리 아이들을 데려다가 지역사회의 생활 속에서 아무런 능동적인 역할도 맡을 수 없게 붙잡아 놓습니다. 사실 아이들의 교육을 자격증 가진 전문가들의 손에만 맡겨 놓는다는 것이 바로 지역사회를 파괴하는 짓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아이들이 완전한 인간성을 가지고 자라나지 못하게 합니다. 사회생활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제대로 맡지 않으면서 건전한 인격체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다음에 학교나 양로원 근처에 가시는 일이 있으면 한 번 둘러보세요. 그 말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학교란 특정한 사회공학 모델을 지탱하는 긴요한 부속품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모델은 사람들로 하여금 통제력의 뾰족한 정점을 떠받드는 피라미드 안에서 여기저기 자리를 지키는 돌멩이 노릇을 하게 합니다. 학교는 이런 피라미드 모양의 사회구조가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책략의 본산입니다.


--
  이 나라에 표준 교과과정을 만들어야 할지를 두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토론은 가짜 토론입니다. 제가 방금 얘기한 일곱 가지 교육내용이 벌써 표준 교과과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교과과정은 육체와 도덕과 지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며 그 끔찍한 폐해는 이떤 교과과정을 보충해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학습능력의 저하에 대한 국가적 히스테리 속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제들은 요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학교는 마땅히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썩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착한 이집트인이 되어 피라미드 속에 제 자리를 잡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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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느 것도 필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어느 것도 벗어 던질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떤 방법으로 키워낼지 우리에게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단 하나만의 올바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라미드가 가진 환상의 힘을 우리가 깨뜨릴 수 있을 때 이 사실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일거리, 만족할 만한 주거 환경, 성취를 향한 교육, 충분한 의료 서비스, 깨끗한 환경, 정직하고 믿을 수 있는 정보, 사회적 · 문화적 쇄신, 그리고 정의 그 자체, 이런 것들은 정치경제학자들이 신경 써 주지 않는 문제들입니다. 그들의 야심을 뒷받침하는 것은 생산성과 생활수준의 개념입니다. 그 개념들은 일반적인 인간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서 저는 거기에 잘못이 있다고 믿습니다.
진정 의미를 찾을만한 곳, 가정과 친구 관계, 계절의 변화, 자연, 단순한 예절과 의식, 호기심, 너그러움과 동정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봉사, 존엄한 독립성과 개인의 영역, 이처럼 참된 가정과 참된 친구관계, 참된 지역사회를 세워 주는 돈 안 드는 온갖 요소들에 의미를 두는 그런 철학을 우리가 회복할 수 있다면, 물질적 '풍요'조차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제가 가르치는 것과 같은 내용들을 날이면 날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고도 국가적 위기를 맞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성격은 언론매체에서 선전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나 미래에 대해 관심을·잃고 있습니다. 갖가지 장난감과 폭력 외에는 관심을 갖는 대상이 거의 없습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때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빈부를 막론하고 어떤 일에든 오랫동안 집중할 능력이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감각이 빈약합니다. 결손가정의 어린이처럼 친근한 관계에 편안해하지 못합니다. 실상 그들이 부모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해 온 결과 모두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된 셈입니다. 그들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잔인합니다. 물질주의에 빠져 있고 의존적이며 수동적입니다. 난폭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일 앞에서는 겁쟁이가 되고, 의미 없는 일에 몰두합니다.

어릴 적의 갖가지 버릇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조장되고 확대되어 추악한 모습으로 자라납니다. 학교가 감춰진 교과과정을 가지고 인간성의 바람직한 성장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아이들의 공포심과 이기심, 미숙함을 이용하지 않고는 우리의 학교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저 자신 자격증가진 교사로서 자리를 지킬 수 없을 겁니다.

감히 일반 학교에서 비판적 사고의 도구가 되는 변증법이라든가 발견학습법처럼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이 쓰는 무기를 아이들 손에 쥐어 주었다가는 오래 안가서 풍비박산이 날 겁니다. 세속화한 우리 사회에서 학교는 교회의 자리를 넘겨받았습니다.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그 가르침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학교는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제도화한 학교교육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직시해 보도록 합시다. 일곱 가지 내용의 교과과정, 그 해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지독하게 반교육적인 것입니다. 섣부른 땜질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가 겪는 가장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학교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고할 경우 그 비용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것보다 너무나 적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이해관계가 얽힌 세력들이 놓아둘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취로사업 대상자인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업은 계약중개업과 같은 것입니다. 사업 규모를 줄이거나 제품을 다양화하여 비용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것이 제도화한 학교교육의 철칙 입니다. 통상적인 회계 원칙이나 합리적인 경쟁 원리가 통하지 않는 사업이 이것입니다.

  공교육에 어떻게든 자유시장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해결의 길을 찾는 가장 그럴싸한 방향입니다. 가족학교들, 소규모 기업학교들, 종교계 학교들, 기술학교들, 농장학교들이 다양하게 병립해서 정부교육과 경쟁하는 자유시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그리고자 하는 학교교육의 자유시장이란, 남북전쟁이전에 이 나라에 있었던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는다고 생각되는 교육의 종류를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독학까지 포함해서요. 벤저민 프랭클린이 독학 때문에 손해 본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

가난한 사람들과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더 나은 교육의 길이 거의 완벽하게 닫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정부독점교육제도의 이 난장판을 뒤엎기 위해 우리가 뭔가 용감하고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일곱 가지 가르침의 재앙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어른이 되고서 반평생을 학교교육에 바쳐온 저는 믿습니다. 대량 교육이라는 그 방법이야말로 대량교육의 진정한 알맹이라고.

좋은 교과과정과 시설, 그리고 좋은 교사진이 여러분자녀들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검토해온 학교교육의 병리 현상은 대부분 학교가 학생들을 가로막고 붙잡아 두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그리고 가족들과 마주치는 가운데 자발성, 인내력, 용기, 자존심, 사랑, 봉사정신 같이 가정생활과 지역사회에서 배워야 할 소중한 가르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30년 전만 해도 아이들은 학교가 파한 뒤에 이런 것들을 배울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텔레비전이 그 시간의 대부분을 먹어치웠고, 맞벌이 가정이나 이혼한 가정의 긴장감이 가정 시간이라는 것을 삭막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자라나기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너무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우리 문화 위에 덮쳐 오고 있는 미래는 우리 모두에게 비물질적인 경험의 지혜를 익히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그 미래는 우리에게 물질의 사용을 극소화하는 자연의 길을 따라 살 것을 생존을 위한 대가로서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학교에서는 그 방향의 공부가 가르쳐질 수가 없습니다. 12년 징역과도 같은 학교제도, 거기서 진정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나쁜 생활태도뿐입니다.

학교선생 노릇 잘했다고 상을 타먹는 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Comment '4'
  • 쑤니 2006.08.24 15:41 (*.111.250.226)
    저도 읽은 책이지만...
    글쎄요... 저도 느낀건 많았지만, 또 동감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이렇게 교육하면 좀 힘들어지지 않을까...ㅋ
  • 회귀순환 2006.08.24 16:38 (*.140.240.151)
    이렇게 교육하는 것... 한반에 학생이 15명 내외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글은 사상과 문화가 다른 외국의 경우이며 우선 시급한 점은 우리나라 만의 고유한 교육사상이 나와

    야 한다는 것이죠.
  • 바닐라 2006.08.24 18:15 (*.78.119.35)
    먹고 마시고 보고 느끼는것중 태반이 외국문화이면서도 이러한 문제앞에서 냉정하게 환경과 문화의 다름을
    이유로 드는것은 무엇인지요.
    아무리 인종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더라도 교육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합니다. 현실을 묵인하고 소수의 엘리트아닌 엘리트를 키워내는것보다 현상황을 타개하고서라도 다수의 청소년의 가능성을열어주는것이 올바른것 아닌가요.
    그리고 현 교육체계가 우리나라에서 자생해오고 그결과 이와같은 폐단을 보여주는것인데 더이상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교육사상이 나와야 한다는것은 어떤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다수의 성공적인 외국 교육체계와는 다른 15명내외에서 학생들의 자율성을 키워줄 대한민국만의 교육방안이
    있다면 어떤것인지 답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쑤니 2006.08.24 22:56 (*.98.141.75)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교육사상이 나올수가 없죠...ㅋ
    모든게 따다가 무작정 적용하기인데...ㅋㅋ
    한반의 인원수가 문제라...
    전 고등학교때 3년내내 22명이라는 아주 환상적인 학급 인원수로 모범적인(?) 교육현장에서 공부했고..
    그 아이들이 지금은 교사로, 심리학자로, 약사로, 통역사로, 회사원으로, 학생으로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결국 중요한건 그 아이들 나름대로의 자질이란 거죠. 결코 교육 시스템도, 교사의 자질도, 그 아이 나름대로의 자질을 훨씬 웃돌수는 없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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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8 가즈히토 야마시타의 속주의 진수를 맛볼수 있는 곡이 없을까요..? 9 김철수당 2006.08.20 5875
7877 기타 레슨합니다^^ 2 조성환 2006.08.20 4389
7876 부탁함미다... 1 임대식 2006.08.20 4473
7875 엄태흥선생님 공방방문 후기. 2 file 콩쥐 2006.08.20 6859
7874 소품사랑님 사랑합니다 늦바람 2006.08.19 4491
7873 10년전에 산 소리샘기타 앨리스 2006.08.19 4432
7872 야코피 3 file 시니리 2006.08.19 4172
7871 기타곡 추천좀여,, (쉽고 동화적인.) 2 이힝 2006.08.19 4272
7870 운영자님이나 기타매니아의 관계자 분들께 여쭙니다. 7 당배 2006.08.18 3928
7869 뭣좀 여쭤볼게요...클래식기타와 일렉기타를 같이 배울 수 있나요...? 7 김철수당 2006.08.18 6258
7868 혹시 이주용님연락처 아시는분 1 이..기타 2006.08.17 4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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