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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한국어
(*.255.173.87) 조회 수 10923 댓글 19
기타제작에 관한한 스페인의 전통적인 명가인 Ramirez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호세 라미레즈가에 관한 고찰을 하려면 스페인 기타제작사를 둘러보아야 되고
그러려면 역사라기보다는 세계적인 시대의 변천상을 이해하는 길이 첩경입니다.



1) 기타와 세계의 변천사 :

□ 무적함대의 패퇴 (1588년) :
신대륙발견 이래 스페인은 중남미와 동남아에 걸친 광대한 식민지를 소유하게 된다.
식민지로부터 들여오는 금은보화 덕분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오늘의 소말리아처럼 신사의 나라인 영국 해적들의 출몰이 극심한데다, 영국정부는
이를 방조하는 입장에 있었다.

수차의 경고에도 해적의 소탕은커녕 날로 번성하자, 마침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맹군이 영국을 정복하고자 출병하기에 이른다.
무적함대라 일컫는 127척의 함대가 출범하였으나 해전에서 기습을 당해 패퇴한다.

결과 해상권을 영국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델란드가 장악하게 되고 스페인의
쇠퇴기가 시작된다.


□ 산업혁명 (18세기 중반 이후) :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기술상의 혁신은 이후 2세기에 걸쳐 유럽을 위시한 전 세계로
확산되어 산업화시대로 돌입한다.
그동안 식민지에서의 수탈로 번영을 누리던 스페인은 산업혁명에의 관심을 게을리
한 탓에 근대공업의 발전이 늦어지고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한다.


□ 아르헨티나의 독립 (1810) :
아르헨티나의 독립선언에 이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 마드리드의 국민반란 (1808∼1814) :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군이 퇴각하자, 이베리아반도의 지배에 저항하여
반도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 Francisco Gonzalez(1818 〜1880) :
1845〜1880까지 그라나다의 같은 공방거리에서 토레스보다 7년이나 먼저 기타를
제작하였고, 호세 라미레즈 1세가 그에게 사사하였다.


◈ Antonio De Torres(1817〜1892) :
생업이 목수였던 토레스는 1852년부터 기타를 제작하였으나,
1869년경에 중단하고 도자기 가게를 운영함.
제작중단 직전에 Julian Arcas의 소개로 Tarrega가 방문하여 기타를 구입하다.
1875년부터 다시 기타제작을 시작함.


◈ Benito Ferrer(1845∼1925) : 세고비아의 첫 악기를 제작함.
스승인 Jose Ortega와 함께 왕실의 지원으로 그라나다에 기타제작학교를 창설했다.


◈ Jose Ramirez 1세(1858∼1923) :
Francisco Gonzalez로부터 기타제작을 배운 유일한 제자로 알려짐.
왕실의 지원으로 마드리드에 기타제작학교를 창설하였다.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스페인 제1의 마에스트로가 되고 사업적으로도 번창한다.

그는 기타제작의 Maestro로서 명성을 날리며 라미레즈왕국의 초석을 굳건히 한다

◈ Manuel Ramirez(1864∼1920) :
호세 라미레즈1세의 6살 아래 동생으로 라미레즈의 기타학교에서 기타제작을 배움.
1891년경에 빠리로 진출코자 하여 라미레즈1세가 이주비 조로 큰돈을 지원해 준다.

그러나 프랑스의 내란으로 포기하고 마드리드에서 독립하자, 형제간의 관계가
소원해진다.
제1차세계대전 말기에 전유럽을 휩쓴 독감으로 인해 후사도 없이 사망한다.


◈ Santos Hernandez(1874∼1943) :
Manuel Ramirez공방에서 가장 우수한 작업반장으로 세고비아가 연주한 악기를
만들었다.
마뉴엘 사후 3년간 마뉴엘 부인공방에서 제작을 계속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하다.

같은 시기에 많은 기타제작가들도 스페인어권의 중남미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 스페인 전쟁(1898) :
쿠바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스페인이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한다.
쿠바에 이미 많은 투자를 한 미국이 방관하지 않자, 미국∙스페인간의 전쟁 시작됨.

마닐라만에서 스페인이 대패하자, 쿠바를 독립시키고, 푸에르토리코, 괌과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하게 된다.
이에 스페인의 국력은 급속도로 쇄잔하게 되었다.


□ 제1차세계대전 (1905∼1919) :
독일의 선전포고에 따라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4년만에 항복한다.


□ 세계경제공황 (1922∼1933) :
1922년 미국의 경제공황은 급기야 유럽까지 파급되어 세계경제공황 사태를 맞는다.


□ 스페인 내란 (1931∼1939) :
부르봉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내전이 시작되어, 1939년에 프랑코 장군이 정권을 장악,
종결될 때까지, 8년간의 내전으로 인해 국력을 소진하여 경제는 파탄 위기에 몰린다.


□ 제2차세계대전 (1939∼1945) :
독일, 이태리 및 일본이 주축국이 되어 전 세계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다.

독일과 이태리의 군수지원으로 스페인 정권을 장악한 프랑코총통의 독재정권은
명목상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독일과 이태리를 지원하므로서 전후에
UN가입이 거부되어 국제적으로 고립된다.

독일 스프루스재도 금수조치 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유보상태에
있었다.

미∙쏘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과의 관계가 깊어지자, 1953년에 스페인에 미군의
주둔기지가 설치됨.
이에 따라 1955년에 유엔에 가입되면서부터 우방 국가와 교류가 시작된다.

1960년대부터 스페인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기타제작계에도
중흥기가 찾아 온다.



※ 아래에 계속됩니다.
            
Comment '19'
  • 도치 2011.08.23 18:40 (*.109.171.234)
    최동수님 코너 하나 만들어 주세요.ㅎㅎ 정리 하기 편하게요.ㅎㅎ
  • 2011.08.23 19:30 (*.184.77.171)
    몰랐던 역사공부가 요약으로 그냥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질문이 있는데요..
    193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독일,스페인기타의 스프루스 전판은
    무조건 독일 스프루스로 만들어 졌다고 봐도 되는지요?
    1930년대 이전의 스페인,독일기타들의 스프루스 전판은
    거의 무조건 german spruse 라고 표기하는 외국의 사이트가 많아서요..
    그런데 제가 실제 본 40년대 이전의 스페인기타중에는 무르고 결이 아주 넓은
    아주 저질 스프루스(스프루스가 아닐수도?)같은 전판을 사용한 기타도
    여럿 보았거던요. 제가 아는 독일 스프루스는 얇아도 단단하고
    결이 중앙으로 갈수록 촘촘했습니다.
  • 최동수 2011.08.23 20:27 (*.255.173.87)
    도치님도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훈님,
    지면관계로 요약하는까닭에 뭐든지 분명히 설명드리지 못해 죄송할뿐입니다
    그저 수박 겉핥기라도 최소한의 갈증이 가시기만 바라지요.

    스프루스의 명칭에 관해서는 앞서 [8-전면재의 혼동]에서 대충 요약했는데,
    먼저 그걸 참조하시면 반쯤은 답변이 되겠는데요.

    저도 기타 재료전문가나 재료상이 아니어서 문헌에서 줏어 읽은 정도입니다.


    토레스도 스페인 내에서 자생하는 무슨 Pine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고 엄상옥님께서 남대문 중수시에 나온 소나무를 사용했지요.
    저는 일제 장농에서 스기 같은 나무를 뜯어내어 기타를 만든 적이 있고...


    다만 독일이 오래 전부터 현악기재료의 집산지였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오래 전에는 지금처럼 통제하지 않았다고 미루어 볼 수도 있겠죠.

    참고로,
    유럽 전역의 산지에서 자라는 나무의 80%이상이 스프루스 랍니다.
    우리나라의 참나무나 아카시아 만큼이나 많다는거죠.


    시대상이란 잠까사이에 바뀌기 때문에...

    1940년대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세계인구가 24억이라고 배웠는데
    지금 얼마나 늘어났고, 목재 소비량은 얼마나 증가되었는지 생각해 보시죠.


    1930년대 이전에 기타를 만들면 얼마나 만들었겠어요?
    지금은 OEM까지 합해서 중국제 기타류의 제작댓수만해도 300만대라더군요.


    그런데, 줄 바꿔쓰기 또 깜빡하셨네요.
    읽기 힘들다는데도 애먹이시네, 하하
  • 송선비 2011.08.23 20:57 (*.207.218.209)
    기타 제작의 역사를 한눈에 요약하셨네요~
    모르고 지나쳤던 서양의 역사요약까지~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
  • 2011.08.23 21:12 (*.184.77.171)
    최선생님..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다음엔 꼭...줄 띄어쓰기 하겠습니다. ^^
  • 최동수 2011.08.23 21:22 (*.255.173.87)
    반갑습니다, 송선비님.
    흥미있으시면 카피해두세요.


  • ..... 2011.08.23 22:12 (*.203.122.238)
    최동수님 이 참에 우리나라 기타계에 대한 현실과 앞으로 나아갈 길과 같은 점들을 토론해 보면 어떨까요?
    부쉐의 이야기나 라미네즈의 이야기가 유익하고 즐겁기는 합니다만, 기타제작의 세계가 꼭 재미만 존재하지는 않으니까요... 저도 명기제작가들의 이야기들을 참 좋아합니다만, 그러나 막상 우리네 기타제작계의 현실을 들어다 보면, 제작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지고 맙니다. 악기연구는 커녕 하루종일 사포질에 우레탄 입히려 밥벌이 하며 살아가는 우리 기타제작계의 현실을 한 번 꼭 집어 주셨으면 합니다.
  • 최동수 2011.08.23 23:29 (*.255.173.87)
    .....님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우리네 기타제작계의 현실 뿐이겠습니까?

    기타가 발전해온 과정자체도 아직은 충분한 공부가 덜된 상황으로 보이는 까닭에,
    앞으로의 바람직한 토론을 위해서도, 먼저 알것은 알아두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평생 아마추어로서 기타제작에 취미를 갖고 지내다보니,
    여기저기서 줏어들은 풍월이나마, 애호가님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러고 있는겁니다.

    애호가님들이 바쁘신 중에 시간이라도 아끼시라고...

    저는 이미 지는 해가 되어서, 남은 중요한 과제는 젊은 세대에 맡겨야 될듯합니다.
  • 최동수 2011.08.24 00:07 (*.255.173.87)
    ※ 전술한 내용의 계속입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기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라미레즈 악기에 대해서는 극찬에서부터 혹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도 사실입니다.
    돈 벌려고 Estudio를 많이 만든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얘기가 잠시 빗나가지만,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기타의 연간 출하량이 4만대쯤 된다고 제작업계에서 들었습니다.
    - 300호급 이상의 클래식기타는 연간 400대로 어림 잡고,
    - 중저가의 클래식기타는 각종 기타의 연간 출하량의 1/20이라고 가정할 경우,
    중저가의 클래식기타가 2천대가량 되겠는데, 이는 300호급 이상의 1/5이 되는군요.

    이건 정확성도 없고 통계자료조차 없는 얘기이지만,
    저가의 기타가 고가의 기타보다는 훨씬 많이 소요된다는 짐작은 가능하겠습니다.
    개인 생각이지만, 어느 나라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 전에 스페인제 유명악기로 연주하는 세계적인 연주가의 명단을 훑어보았더니,
    스페인의 연주가가 그리 많지 않은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명기급 악기는 일반적으로 연주가들이 소장하는데 외국인들이 대분이었습니다.

    --------------------------------------------------------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2) Tablao Guitar 시대(19세기 후반부터) :

    식민지의 상실, 전쟁, 내란 등의 역경 속에서 장기간 동안 쇠락에 쇠락을 거듭한
    스페인의 시대상이야말로 나락의 암흑기였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변천사와 대조해보면 위에 열거된 기타제작가들은 거의 스페인의 암흑기에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중산층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그 시대에는 빈부의 차이가 컸다.

    노동자나 농민들은 부지런한데 반하여, 도시의 중산층들은 게을렀다.
    도시인들은 지주, 귀족과 군벌 등 지배계층이 누렸던 지난날의 습관을 이어 받는다.
    점심과 시아스타(낮잠)로 3∼4시간씩 시간을 허비하고는, 한밤중까지 극장, 식당과
    카페에서 지내는 등, 업무에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낙천적이고 다혈질인데다 낭만적 기질이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사회적 풍조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은 노래와 기타를 즐겼다는 것도 역사에도 나와 있다.


    스페인의 제작가들은 고가와 저가의 기타를 만들었는데, 대중들이 선호하는 악기는
    저가형이 더 많았다.

    전술한바와 같이 몇백년에 걸친 외우내환을 겪어오다보니 서민들은 좋은 기타를
    갖고 싶어도 살만한 돈이 없었다.
    하물며 플라멩코로 생계를 유지하는 집시악사들의 형편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기타가 바로 “Tablao"이다.

    Tablao는 살롱 같은 작은 스테이지에서 연주하기 알맞은 가볍고 작은 악기이다.
    토레스의 영향으로 전면판은 점차로 커젔으나, 측판이 상대적으로 얇아서 안고
    연주하기에 편리하다.
    당연히 플라멩코 기타도 이 범주에 속하며 값싼 재료를 사용한다는게 특징이다.


    ※ 아래에 계속됩니다


  • 망고레 2011.08.24 06:45 (*.46.165.4)
    최동수님 글 항상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지(외국인이 바라본 동양인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름만 들어서는 이 사람이 기타제작자 인지 기타리스트 인지 헷갈리네요...ㅎㅎㅎ

    한국편도 만들어 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
  • 최동수 2011.08.24 09:53 (*.255.173.87)
    망고레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기타리스트와 제작가를 구분하도록 유의 하겠습니다.
  • 최동수 2011.08.25 15:34 (*.255.173.87)
    ※ 기타의 명가 라미레즈의 계속입니다.

    앞서 깜빡한게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 기타의 수요를 비교하여 보았지요.
    중저가 클래식기타의 수요는 고가의 클래식기타의 5배는 될듯하다고 얘기 있는데...
    일렉기타는 없던 시절이므로, 이즈음의 아쿠스틱기타와 플라멩코기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봄직 합니다.

    아쿠스틱기타의 수요를 연간 출하량의 절반정도로 본다면 중저가기타의 총수요는
    고가의 클래식기타보다 몇십배는 되리라는 계산이 나오는군요.
    지나는 길에 막연히 헤아려본 것이므로 특별한 의미는 없고, 참작만 하시기를...

    -----------------------------------------------------------

    ※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3) 호세 라미레즈 1세(1858∼1923) :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Jose Ramirez 1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Francisco Gonzalez
    공방에서 제작을 배운다.
    그 시절에는 어릴 때부터 공방에서 잔일을 도우며 기타제작을 배우는게 관행이었다.
    곤잘레스도 명장으로 그의 악기는 지금도 Paris Conservatory에 소장되어 있다.


    1882년경에 라미레즈1세도 마드리드에 공방을 차렸고, 1890년에는 제자를 양성하는
    작업실도 병설하였다.
    제자는 그의 동생인 Manuel Ramirez, 그의 장남 라미레즈2세, Francisco Simplicio,
    Enrique Garefa 와 Julian Gomez Ramirez인데 그는 훗날 프랑스 빠리로 이주한다.

    마뉴엘 라미레즈와 라미레즈 2세가 작업반장이 될 무렵에 Antonio Viudes와 Rafael
    Casana가 합류한다.

    얼마 후 Alfonso Benito와 Antonio Gomez도 제작을 배우러 들어왔다.



    1987년 라미레즈1세는 지역전시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데 이어 다른 전시회에서도
    여러번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은 넓은 나라인데다 지방색이 짙고 악기의 성향도 다른 까닭에 악기전시회도
    마드리드나 세비야에서 따로 개최하는게 관례였다.


    라미레즈1세는 1882년경에 공방을 개설하였으므로, 그는 미국 ∙ 스페인간의 전쟁과
    제1차세계전을 겪은 셈이다.
    스페인으로서는 해외의 식민지를 거의 모두 상실한 쇠퇴기의 시작라고 보면 되겠다.


    19세기말에는 지금처럼 클래식기타보다는 플라멩코 기타를 찾는 사람이 더 많았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플라멩코가 더 잘 알려져 있었고, 작은 모임에서 자주 연주되었다.
    그런 장소에서는 작고 가벼운 기타가 적당한 까닭이다.
    한 예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장 토레스가 만든 플라멩코 기타도 작고 가볍다.


    20세기 초부터 플라멩코 기타 Tablao가 음량의 한계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늘어난 청중을 위해 살롱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 플라멩코의 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극장에서의 연주는 더 심각하였으니, 5대의 플라멩코 구룹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는 당시 가장 우수한 제작가인 라미레즈1세로 하여금 큰 몸통의 Tablao의 고안을
    유발하였다.
    전면은 토레스 악기보다 더 넓으면서 측판의 깊이는 얕은 형태였는데, 잠정적으로는
    이런 방식이 해결책이 되기도 하였다.
    덩치 큰 Tablao의 성공으로 라미레즈 1세는 큰돈을 만지게 된다.

    그는 기타제작의 Maestro로 명성을 날리며 라미레스왕국의 초석을 굳건히 한다.

    그러나 동생인 마뉴엘 라미레즈와는 달리, 완고한 라미레즈 1세는 만년까지도 한때
    성공하였던 그의 Tablao를 고집하였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제작가도 많았다.

    타레가(1852∼1909)도 토레스 뿐아니라 라미레즈 1세의 기타를 사용하였으며
    어거스틴 바리오스 망고레도 그의 악기로 연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Tablao를 훨씬 더 많이 제작하였고, 이런 저가품 기타에는 라벨조차
    붙이지 않았다.


    ※ 아래에 계속됩니다

  • 최동수 2011.08.25 19:47 (*.255.173.87)
    ※ 기타의 명가 라미레즈의 계속입니다.


    4) 마뉴엘 라미레즈 (1864∼1916) : (1869∼1920)설은 오류임.

    호세 라미레즈가의 직계는 아니지만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〇 마뉴엘 라미레즈의 일화 :

    토레스의 사후 얼마 안되어서 마뉴엘 라미레즈에게 우연히 토레스 기타의 라벨
    2장이 입수되었다.
    마뉴엘 라미레즈는 최선을 다하여 토레스기타의 짝퉁 2대를 만들었다.
    기타의 안쪽에는 먼저 자신의 라벨을 붙인 다음, 그 위에다 토레스의 라벨을 살짝
    붙여 두었다.

    마뉴엘은 토레스의 악기 2대를 새로 구하였으니 시연해보라고 연주가들을 초대
    하였다.
    2 악기를 연주해본 연주가들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우수한 악기라고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마뉴엘은 나중에 뒷말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 2악기의 성능에 대한 의견을
    자세히 수렴하고 다짐을 받았다.

    마뉴엘이 2 기타의 안쪽에 붙어있던 토레스의 라벨을 뜯어내니, 마뉴엘의 라벨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

    Manuel Ramirez는 Jose Ramirez 1세의 친동생으로 일찌감치 형의 문하에서
    기타제작을 배웠는데, 그중에서 가장 탁월한 재능이 돋보였다고 한다.
    6살 아래였으나 제1차세계대전 중 유럽을 휩쓴 독감으로 52세의 젊은 나이로
    형보다 7년이나 먼저 사망한다.


    마뉴엘은 1891년에 빠리로 진출코자 하여, 형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프랑스의 내란 등으로 인하여 취소하고 같은 마드리드에서 공방을 개설한다.

    타고난 창의력과 추진력의 소유자인 마뉴엘 라미레즈가 독립하자, 그는 새로운
    기준에 의한 디자인으로 플라멩코 기타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그의 이상적인 모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채 플라멩코 기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뉴엘은 클래식 기타의 연구개발에도 정열을 쏟아 붓는다.
    드디어, 마뉴엘은 1893년 국제적 악기품평회인 미국의 시카고 악기전시회에서
    메달을 딴다.

    마뉴엘은 기타의 연구와 제작에만 매달리지 않고 바이올린의 수리와 제작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 그는 마드리드의 Royal Conservatory로부터 현악기 제작가로 인증 받는다.
    - 나아가, Madrid Royal Chapel로부터 스트라디바리 4중주용 현악기 수리의
    책임자로 임명 받기도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Santos Hernadez, Domingo Esteso, Modesto Borreuero 등의
    명장을 배출하였다.
    당시 잘 알려진 연주가 Gimenez Manjon의 의뢰를 받아 만들었던 11현 기타를
    세고비아에게 헌정한 일화는 이미 전술한바 있고, 줄리안 브림도 마뉴엘의 악기로
    연주하였다.

    마뉴엘은 자식이 없으므로 그의 사후에는 실제 제작자의 이니셜을 악기에 명기하는
    조건으로 [VIUDA DE MANUEL RAMIREZ-마뉴엘의 부인]이라는 기타를 제작
    하기도 하였다.


    ※ 아래에 계속됩니다
  • 최동수 2011.08.26 17:09 (*.255.173.87)
    ※ 기타의 명가 라미레즈의 계속입니다.


    5) 호세 라미레즈 2세(1885∼1957) :

    라미레즈 1세는 네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인 라미레즈 2세를 제외한 세 아들은
    다른 직업에 종사하였다.

    라미레즈 2세는 알아주는 기타 연주가 였다
    그는 1904년부터 2년간에 걸처 민속음악단의 일원으로 중남미의 여러 나라를
    순회연주 하던 중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정착한다.
    거기서 낳은 아들이 호세 라미레즈 3세이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기타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가 1919년 세비아에서 개최된 범 라틴국가 박람회에서 최고금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923년 라미레즈 1세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40세에 귀국하여 가업을
    잇게 된다.
    당시 Alfonso Benito와 Antinio Gomez가 작업반장이었고, Jesus Martinez가
    도장을 맡았다.
    Marcelo Barbero는(수습생)로 있었는데, 머지않아 독립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작업반장들을 열거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훗날 유명한 제작가가 되므로 명기급
    소장자들은 참고하시라고...


    라미레즈 2세는 제1차세계대전, 세계경제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골고루 겪었다.
    특히 스페인내란 때 마드리드에서 공방을 운영한 탓으로, 외우 내환으로 인하여
    악기재료와 각종 기자재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기타를 소장한 연주가는 Barrios Mangore, Carlos Montoya, Miguel Llobet,
    등이다


    ○ 헤드의 모양 :
    라미레즈 2세의 기타도 헤드의 모양은 라미레즈 1세의 헤드와 비슷한데, 이는 가업
    전승의 상징이라 봐야겠다.
    라미레즈 1세 기타의 헤드는 프랜시스코 곤잘레스의 헤드와 똑같은바, 이는 스승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헤르만 하우저가의 헤드모양은 1,2세와 3세 모두 토레스의 헤드와 거의 같다.
    이는 하우저 1세가 처음에 토레스를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모델을 고안 하였으므로
    토레스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걸로 유추할 수 있다.



    ※ 아래에 계속됩니다
  • 최동수 2011.08.29 19:53 (*.255.173.87)
    ※ 본문의 계속입니다


    6) 호세 라미레즈 3세(1922∼1995) :

    Jose Ramirez 3세야말로 라미레즈 왕국을 굳건하게 건설한 장본인이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를 따라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18세인 1949년부터 가업인 기타제작에 합류한다.
    아버지는 다른 도제들과 마찬가지로 가차 없이 제작을 배우도록 하였고, 엄격하게
    기준 디자인대로만 제작하도록 감독하였다.


    그는 1957년 라미레즈 2세의 사망 후 가업을 계승하게 된다.

    기타의 성능개발이 이미 완성된 것도 아니고, 오케스트라나 다른 악기 앞에서는
    맥도 못추는 처지에 기타의 형태가 그대로 머무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미레즈 3세는 비록 기타음향에 관한 충분한 자료는 없지만 관련분야에 지식이
    있는 과학자들과 함께 발현음을 증폭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로 한다.

    - 그는 전면판의 대체 재료로 레드시더(Thuja Plicata)를 선정하였다.
    - 여러 가지 바니쉬의 진동전달과 Crystallization을 비교 분석한다.
    - 타현 및 공명통으로서의 측판의 기능과 효율.
    - 맑은 음질의 발현에 적합한 현장과 공명통 크기의 상관관계.
    - 사용할 목재의 건조를 위한 재래식 방법 외에 자외선의 사용 등.


    아직도 갈 길은 멀었지만,
    그는 세고비아가 1937년 이래 독일제 기타만 연주하는데 무척 속상해 하였다.
    세고비아는 그동안 몇 번 악기를 가져갔으나 콘서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드디어 1960년에 세고비아가 그의 악기로 콘서트를 하는 날이 찾아왔다.
    그 때부터 세고비아와 40년에 걸친 오랜 교분이 시작된다.

    세고비아가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라미레즈 기타는 거의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 라미레즈3세의 수상내용 :

    - 1962년 시카고에서 기타협회주최 전시회에서 금메달 수상.
    - 마드리드 상공회의소로부터 동메달(전 기업을 대상으로 하므로 큰 상임).
    - 1968년 로마의 Centro Culturale Chitarra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감.
    - 1972년 마드리드에서 명장에 선정되어 금상 수상.
    - 1983년 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명예 작곡가상 수상
    - 1986년 인간문화재로 지명됨
    - 1987년 마드리드상공회의소로부터 왕조100주년기념 포상.
    - 1987년 빠리의 문화교육성으로부터 금제 소리굽쇠 수상.

    - 무엇보다도 소중한 상은 세고비아가 타계하기 수개월 전에 라미레즈 3세에
    관해서 쓴 짧은 헌정사이다.

    -----------------------------------------------------

    『 A FEW WORD ABOUT JOSE RAMIREZ :

    호세 라미레즈 3세는 훌륭한 기타 제작가일뿐만 아니라 기타의 발전사에
    기여한 지칠 줄 모르는 연구가이다.
    그는 찰현 및 탄현악기의 신비한 진동파와 음질을 연구하였다.
    그는 아주 소수의 현악기제작가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 그 이상의 방대한
    지식을 소유하였다.
    그는 그러한 지식을 끊임없이 실질적인 작업에 적용하므로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라미레즈는 그를 돕는 탁월한 제작기술자들의 협력을 받아 창조적인 솜씨로
    기타제작의 지도와 감독, 개선과 수정 작업을 하므로서 날이 갈수록 성능을
    향상시켜 왔다.

    나는, 지금까지 20대가 넘는 그의 기타로 녹음실 뿐아니라 청중이 3,000명,
    4,000명, 때로는 5,000명도 넘는 콘서트 공연장에서 라미레즈가 흘린 땀의
    열매를, 혼자 맛보았다.

    일례로, 미국 디트로이트 근교의 Ann Arbour 공연장에서는 청중 5,000명이
    넘는데도 마이크를 사용치 않고 연주하였는데, 그 이유는 예술보다 상업적인
    면에 비중을 두는 이즘 젊은이들이 이용하는 확성기를 반기지 않는 까닭이다.

    전 생애를 걸고 목표의 실현을 추구하는 강한 집념으로, 호세 라미레즈 3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색으로 울려퍼지는 기타를 만들어 낸 것이다』

    Andrez Segovia
    Maraquis of Salobrena

    -------------------------------------------------------

    세고비아는 연주 여행에 기타를 한 대만 갖고 다니는데, 너무나 잦은 연주를
    하다보면 악기가 고장이 나는 경우도 꽤 있었다.
    라미레즈는 이에 대비해서 늘 기타를 포장해두었다가 보내주곤 하였다.

    한번은 미국에서 연주 중에 악기가 고장났는데 보내줄 시간이 모자랐다.
    하는 수없이 가까이 있던 어거스틴 기타줄 회사(듀퐁) 사장부인이 소장하고있던
    라미레즈 2세 악기를 헌정했다고 한다.



    그는 세고비아가 지적한 바와 같이 문제의 여린 음정과 울프노트를 해결하고자
    노력을 경주하였다.

    거트현 시대가 저물며 1940∼1950년대에는 나일론 현이 범용화 되기 시작한다.
    나일론 현의 효능을 극대화하여 오늘날과 같이 힘차고 아름다운 소리를 발현할 수
    있도록 이에 적합하게 악기를 성능을 개선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1950년대에 들어서서 그는 연구실에서 실험한 결과 얇은 측판으로는 발현효과가
    미진함을 발견하였다
    먼저 측판의 변형을 방지하므로서 내부응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안쪽에 라이닝을
    한 이중측판을 고안하였다.

    몸통내 공기의 진동을 더욱 활력있게 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664mm로 늘리는게
    최선임을 깨달았다.
    이는 3프렛에서 1.5mm정도 프렛간격이 커지는 만큼 운지의 어려움은 있겠으나
    득보다는 실이 더 크다는 판단이 섰다.

    라미레즈의 영향으로 60∼70년대에는 전세계에 현장 664mm 악기가 유행하게된다.
    심지어 일반현장인 650mm의 기타는 잘 안팔릴 정도 였다.

    네크도 습기에 의한 변형을 방지하기 위해 안쪽에 흑단 심을 심었다.
    네크의 두께와 폭은 누가 뭐래도 세고비아의 힘 있고 큰 손을 기준으로 삼았다.

    전통적으로 악기에 입히던 쉘락이 습기로 인한 변형에 취약함을 고려하면, 오히려
    두터운 락커가 전면판의 횡적진동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락커 마감을 개발한다.

    [De Camara Model]의 경우, 측판의 중간을 따라서 얇은 날개를 부착하므로서
    울프 노트를 방지하도록 개발된 것이다.



    ※ 아래에 계속됩니다
  • 최동수 2011.08.31 09:26 (*.255.173.43)
    ※ 본문의 계속입니다


    7) 기타의 다량생산 시대 :

    전에 라미레즈 1세와 2세도 물론 저가형의 기타를 만들었지만 규모는 달랐다.
    당시의 저가형은 출고할 때 라벨조차 붙이지 않았다.

    실제로 세계적인 명기를 내놓은 사람도, 다량 생산방식으로 중고가의 표준악기
    제작을 시작하고 관리한 사람도 다름 아닌 라미레즈3세로 봐야 된다.


    라미레즈의 부친인 라미레즈2세 시대에는 전쟁과 내란으로 인하여 악기 재료를
    구하기 힘들 뿐아니라, 악기를 찾는 사람도 적어서 작업반장이 2명밖에 없었다.

    1954년 기타의 제작보다 관리에 능력이 있어 가업을 헌신적으로 돕던 3살 아래
    동생이 의료사고로 타계한다.
    라미레드2세도 1957년 타계할 때까지 거의 3년간을 중환으로 누워있었다.

    1940년 공방에 합류한 이래 정신없이 제작과 나름대로의 개발에 몰두하다보니
    17년이나 지나 뒤늦게 장인(Maestro)의 칭호를 획득하게 된다.


    제2차세계대전 종료 후 기타용 재료의 수급이 원활해지기 시작한다.
    패전국이었던 독일, 이태리와 일본도 어느새 전후재건을 이루고 세계의 산업경제가
    급속도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라미레즈 3세의 술회에 의하면,

    스페인의 많은 사람들이 서민들의 형편에 맞는 저가 내지 중고가의 라미레즈
    악기를 갖기를 원하는 시대가 왔다.
    백화점에는 독일제나 일제 등의 수입기타가 진열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라미레즈도 상공부로부터 종용을 받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라미레즈3세는 다량생산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는 중고가의 기타를 다량으로 제작하기로 하고 [GUITRRA DE ESTUDIO]라는
    라벨을 처음으로 붙이게 된다.
    비록 오래 전에는 라벨이 없는 악기를 출고하기도 했으나, 출고된 악기의 A/S등의
    사후관리를 위해 법적으로 요구된 절차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대량생산체제와 다량생산체제에 대해 설명 해야겠다.

    -대량생산체제 : 공장 생산을 말하는 것으로, 생산라인에 의한 작업.
    전문가가 아닌 숙련된 공원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부분만 분업적으로 조립하는
    체계로 흔히 자동차나 전자공장에서 적용하는 생산방식이다.
    이는 형식이 정해진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품질을 관리할 때에 적합하다.

    - 다량생산체계 : 수제기타의 제작과 같이 전공정을 노련한 숙련공이 책임지는
    생산체계로, 작업반장 책임 하에 일사분란하게 악기 전체를 완성하는 체제이다.
    여러 군데에 나누어져 있는 소규모 공방에서 일관성 있게 악기를 완성시키므로
    소리를 중요시하는 수제기타의 제작에만은 적합한 방식이다.

    기타를 개인이 혼자 제작하면 1년에 30대 정도는 만들 수 있다.
    대비 해보면, 라미레즈3세가 제작한 수량은 1년에 1,200대 정도로 기록되어있다.

    이를 위해 6명의 출중한 작업반장을 엄선하였고, 그 배하에 도제들을 두어 철저히
    라미레즈3세의 디자인대로만 제작하도록 작업을 감독하고 관리하였다.


    이로부터 배출된 사람들이 거의 모두 당대에 유명한 명장이 된다.

    [참고] :
    당시 스페인에서는 기타제작가를 3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함
    Maestro : 장인 - 장인조합에서 시험에 합격하거나, 전시회에서 입상한 사람.
    Journyman : 작업반장(책임기술자) - 기타제작 경험이 많은, 장인문하의 숙련공.
    Apprentice : 도제(실습생) - 목공 내지 제작경험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선발함.


    ○ 라미레즈3세의 문하생들 : 알파벳순(작업반장과 도제 포함)

    Manuel Alfonso Gimenez • Cayetano Alvarez Luna • Paulino Bernabe almendariz
    • Jose Luis Alvarez Mariblanca • Carlos Blanco Pena • Manuel Borrguero Marcos
    • manuel Cacerez Pizarro • Alfonso Contreras Valbuena • Pedro Contreras Valbuena
    • Jose Flores Duro • Juan Garcia Rey • Manuel Gonzales Contreras
    • Juan Miguel Guardiola Moreno • Pedro Gimenes Posadas • Jose Lopez Cubillo
    • Carmelo Llerena Martinez • Miguel Malo Martinez • Felix Manzanero Cabrera
    • Pedro Manzanero Cabrena • Ignacio Manzano Rozas • Antonio Martinez Ortega
    • Julian Moraga Rodriguez • Fernando Morquende De Cruz • Ramon Penalver soler
    • Tedoro Perez Mariblanca • Manuel Rodrguez Fernandez • Jose Romero Garrido
    • Artuso Sanzano Moreno • Mariano Tezanos Castro • Mariano Tezanos Martin

    자신의 악기가 어느 계열의 제작가인지 흥미삼아 찾아보시기 바람.


    ○ 라미레즈 3세의 기타 소장 연주가 :

    세고비아에게는 20대가 넘는 악기가 오고갔다.
    그 중에는 세고비아가 줄곧 3년간이나 연주회에 사용한 기타도 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라미레즈3세의 기타의 음질향상에 기여하였다.

    시더기타도 세고비아가 연주함으로 인해 세계도처의 제작가들이 만들게 되었다.

    세고비아를 위시해서 당대의 수많은 연주가들이 라미레즈3세의 악기를 찾았다.

    • Laurindo Almeida(Cedar) • Ernesto Bitetti • Pietro Bonagiuri(1969)
    • Liona Boyd • Oscar Ghiglia • William Kanengiser • Alexandre Lagoya
    • Vladimir Mikulka • Santiago Navasquez • Douglas Niedt,
    • Christopher Parkening(1966,1967-Cedar), (1962,1964,1973-Spruce)
    • David Russell • Andres Segovia(1960,1963-Spruce), (1967,1985-Cedar)
    • Goran Sollscher • Jose Tomas(8-String) • Gallina Vale • Alirio Diaz
    • Narcisco Yepes(10-String) • Virginia Luque(1963-Flamenco)
    • Santiago Navasquez • Douglas Niedt • Scott Tennant • Jose Tomas
    • Kazuhito Yamashita,

    비단 연주가에게 한정되지 않고 여러 나라에 대리점이 생겼고 기타애호가의
    선망의 수집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 최동수 2011.09.02 19:29 (*.255.17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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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호세 라미레즈 4세(1953∼2,000)와 아말리아 라미레즈 :

    라미레즈 3세는 슬하에 아들 Jose Ramirez4세(José Enrique Ramírez García)와
    딸 Amalia Ramirez를 두었다.

    라미레즈4세는 18세 되던 1971년에 공방에 합류하여 1977년에 작업반장이 된다.
    아말리아도 1976년에 가업의 관리를 돕기 위해여 공방에 합류 한다

    1979년에 라미레즈4세가 만든 악기를 처음으로 Maestro Segovia에게 헌정한다.
    세고비아는 놀라움과 큰 만족감을 친필로 기재한 표지를 기타 속의 라벨 옆에다
    붙였으며, 같은 내용을 서술한 메시지도 보내왔다.
    그러므로 라미레즈4세도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고 봐야 된다.

    안타깝게도 라미레즈4세는 2000년에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때부터 아말리아가 가업을 전승하게 된다.


    1988년부터 그는 전에 제작되었던 악기들의 모델별 개성과 특성을 정리하였다.
    따라서 그 이후에 제작된 기타의 음색이 뭔가 달라진 것을 연주가들이 감지한다.

    그는 1960∼70년대에 제작되었던, 음질상의 특성을 갖는 악기에는 [Traditional]
    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고, 1992년부터는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예전의 음질과는
    관련 없는]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경향에 입각한 투명하고 지향적인 음질의 악기에는
    [Special]이란 명칭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라미레즈4세는 악기의 제작공정을 크게 2가지로 나누게 되는데, 하나는
    아버지 대에 유명했던 악기이고,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예전 모델의 단점을 개선한
    것과, 그자신이 새로 고안한 악기이다.

    새로 개발된 악기는 현대의 새로운 경향을 수용하면서, 악기의 변형 방지 차원에서
    보다 견고하고, 연주하기 쉬운 형태로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아버지 대에 다량으로 만들기는 하였으나, 라미레즈3세 자신이
    콘서트용 수제품 외에는 관심이 덜 했던 연습용 기타이다.
    과거에는 이런 악기들도 같은 공방에서 만들었으므로 품질은 우수하였으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전세계적으로 산업경제가 발전하면서, 악기도 대량생산 체제로 바뀌면서 생산기지도
    여러 나라에서 번영하게 된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대만, 한국 등의 악기가 세계시장에
    나왔지만, 최근에는 중국이 거대 생산 기지로서의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라미레즈 공방은 이미 그 전부터 어려움에 봉착한다.
    1,2차 산업의 기반이 취약한 스페인은 기타제작도 수출산업의 한몫을 맡아야 했다.
    외국제 중저가악기 뿐아니라 스페인 내에서도 중저가 악기가 여러 곳에서 생산되어
    포화상태를 이루게 된다.
    스페인의 노동법에 의하면 종업원의 규모를 줄이는게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한편, 경제성장에 따라 기타의 문화도 발전하기 마련이다.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세계 각국에 기타제작가협회가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명기에 관한 평가와 설계도면까지 도처에 널린 세상이 되었다.
    때를 맞추어 기라성 같은 당대의 명기급 장인이 나라마다 나타나는 시대가 된다.

    세계적인 연주가들도 각자가 선호하는 악기를 여러 장인들로부터 구하게 된다.
    전에는 없었던 파격적인 디자인의 악기도 출현하고, 전통적인 제작가의 의미자체가
    퇴조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것이다.

    라미레즈 악기만 해도 예전보다 더 개선되면 되었지 나빠진 적이 없는데(연주가의
    평가)도 불구하고, 전만 못하느니, 맛이 갔느니 등 상대적 열세에 놓이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라미레즈1a가 훌륭한데 왜 굳이 다른 악기를 만드느냐고도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Maestro의 자격이다.

    아무리 악기를 잘 만든다 하여도 카피만 만들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에서 Maestro가 되려면 자신의 창작품으로 이전의 악기를 능가해야 된다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주] : 나는 라미레즈4세와 아말리아 라미레즈의 기타를 몇 대씩은 만져보았으나,
    세간의 소문은 그저 입에 오르내리는 까십거리 정도로 느껴젔다.
    라미레즈 1세 100주년 기념악기(Centanario)가 나올 즈음해서는 라미레즈 악기가
    평가절하 되었던 사실도 그때 가서 보았다.

    그러나 세계 악기시장의 냉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재 라미레즈 기타의 가격이
    세계의 정상가로 회복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뿐아니라 새로 개발된 악기가 그 유명했던 60∼70년대의 라미레즈1a보다 음질이나
    볼륨면에서 더 우수하다는 얘기도 어느 외국연주가에게서 들었다.

    문제는, 다른 외국제작가들의 악기가 라미레즈보다 낫다고 하면 나도 할 말 없다.

    한 때 전세계적으로 붐을 일으켰던 저가악기 공장들이 폐업하는 등 자연도태 되고
    이제는 품질이 우수한 몇몇 업체들만 남았다.

    그 중에서 라미레즈와 야마하가 품질과 수량면에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 리브라 2011.09.02 19:45 (*.32.131.76)
    늘 감사한 마음으로 최동수님의 좋은 글들을 즐겨 읽고 있습니다.^^

    저도 라미레즈 4세작 기타를 한대 가지고 있는데요,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이 악기가 저를 거쳐간 여러대의 라미레즈 1A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악기입니다. 4세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까지 좋은 악기를 많이 만드셨을텐데 일찍 돌아가신게 참 안타깝습니다.
  • 최동수 2011.09.03 11:52 (*.255.173.43)
    9) 라미레즈 기타의 하청에 대하여 :

    일반인들은 라미레즈가 하청을 주어 만든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모든 수제 콘서트용 악기는 본 공방에서 프로제작가가 만든다.
    콘서트용 악기를 직접 제작한 프로가 라벨에 자신의 이니셜을 기재한다.

    라미레즈는 그 예하에 독립채산제인 제작분소가 있는바, 여기서 Sp Guitar와
    Studio Guitar만 제작한다.
    제작된 악기들은 본 공방 프로팀의 책임 하에 검수를 거처야 라벨에 서명한다.

    예전에는, 라미레즈의 중,저가 악기의 경우, 여러 개의 작은 공방에서 분업적으로
    직영하였으므로 제작량이 줄어도 노동법상 감원이 힘들어 임금을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기타제작 공장이 전세계에 우후죽순처럼 난립되자, 라미레즈 공방도
    한 때 적자운영을 면치 못하였었다.

    지금은 세계각국에 있는 Distributor로부터 받은 쿼터만큼만 분소에서 만들므로
    손익의 책임이 분소에 있는 독립채산제가 되었을 뿐 직영과 다름없다.
    모든 악기들은 라미레즈 본 공방의 프로 제작팀에서 책임지고 감수하므로 우수한
    품질이 유지된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이자 특징은, 선임 반장은 콘서트용 수제품을 만들면서
    분소를 관장하다가 때가 차면 독립을 지원해주기로 약속이 되어있다고 한다.

    제작기술이 탁월하면서도 자신고유의 공방을 차리기 어려운 제작가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이므로, 신명을 다해 악기를 제작하면서 라미레즈와 함께 자신의 명성을
    쌓아가는 유일한 길인 까닭이다.
    라미레즈3세가 배출한 베르나베, 만자네로, 콘트라레스와 산자노도 이런 과정을
    거처서 독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것은, 우리네 제작가와는 달리 라미레즈 공방에서는 전통적인
    옛날방식으로 기타를 제작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몸통 외부의 바인딩 턱도 Router로 따내지 않고 수공으로 따낼 정도로
    엄격히 선발된 손재주가 있는 고도의 숙련공이 제작한다는 것이다.

    흔히, 여자인 아말리아 기타만드는데 뭘 제대로 알겠느냐고 백안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동영상 중에는 아말리아 자신이 바인딩 턱을 수공으로 따내는데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놀라버렸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그런 작업을 수공으로 하는 제작가는 지금은 없다시피 하다.
    오래 전에 고 엄상옥님은 일일이 수공으로 작업하시는 걸 보았다.
    이것은, 기계를 쓰면 나쁘다는 뜻은 전혀 아니고,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만큼의 정성이 악기에 깃든다는 의미이다.

    나의 경우, 워낙 솜씨가 서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


    ○ 현재 라미레즈 본 공방의 조직은 아래와 같다 :
    본 공방 팀에는 아말리아 라미레즈를 포함해서 14명이 일하고 있다.

    가) 제작팀 :
    - Amalia Ramirez : 기타제작가 라미레즈 가업 총괄 - 라벨에 이니셜을 기재.
    - Carmelo Llerena : 프로1급 제작가 - 라벨에 이니셜을 기재.
    - Fernando Morcuende : 프로1급 제작가 - 라벨에 이니셜을 기재.
    - Ricardo Sáenz : 프로1급 제작가 - 라벨에 이니셜을 기재.
    - Samuel Pérez : 프로2급 제작가.
    수습도제 3명 : Gabriel Saar, Fernando García Mauriño, Enrique Ramírez(아들).

    나) 영업관리 :
    - Marisa Sanzano : 아말리아 보좌역 - 아말리아를 수행.
    - Aranzazu Prieto : 영업, 행정 - 악기점 배치.
    - Cristina Ramírez(딸) : 그래픽 및 음향기술전공 - 홍보 담당 - 악기점 배치

    다) 튜닝 및 시연 연주가(제작공방에 배치) :
    - Isaac Alvarez : 튜닝 팀장, 피아노 및 음향학 전공
    - Manuel Casas : 기타리스트, 르네쌍스 및 바로크 악기 전공
    - Alejandro García : 기타리스트, 조형미술 전공


    괄목할만한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제작 공방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튜닝팀이 있다.
    이들은 기타를 제작하는 전공정에 걸처 튜닝 등 매악기의 공명특성을 살리기 위한
    조율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우리네 제작가들도 악기의 향상을 위해 깊이 생각해봄직 하다.


    ○ 라미레즈 악기의 각종 모델 :

    1) Old Model : 본 공방에서 특정 프로가 직접제작하고 자신의 이니셜을 기재함.

    - Manuel Ramirez : 세고비아가 데뷰하면서 25년간 사용한 모델
    - Traditional Guitar : 라미레즈1a라는 모델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주가가 사용.
    - Centanary Guitar : 라미레즈4세가 10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우수한 모델
    - Camara Model : 세고비아가 만년에 극찬한 모델로 볼륨이 크고 울프톤이 미약함.


    2) New Model : 본 공방에서 특정프로가 직접제작하고 자신의 이니셜을 기재함.

    - Special Classic : 라미레즈4세가 1979년에 세고비아에게 헌정하여 만년에 연주.
    - Elite Model : 아말리아 라미레즈가 개발한 최신 모델
    - Anniversary Guitar : 가업 125주년 기념으로 2011년까지만 제작하는 한정품
    - Flamenco/ FL1 : 콘서트용 플라멩코 기타


    3) SP Guitar(중고가) : Semi Professinal Guitar로 라미레즈 전용 외부공방에서
    제작하고 본 공방팀이 감수함.


    4) Studio Guitar(중저가) : 연습용 기타로 라미레즈 전용 외부공방에서 제작하고
    본 공방팀이 감수함.

    - New E. Series : 1NE / 2NE / 4NE / NAE
    - Line R Series : R1 / R2 / R4
    - Model GH : Beatles가 사용하던 기타의 기념 모델임
    - Cutaway/New CWE Series : S1CWE / R1CWE / 2NCWE /4NCWE. 픽업옵션
    - Cutaway/Line FL-CWE Series : FL-CWE-AC / FL-CWE-AP / FL-CWE-R
    - Flamenco/FL2 : 플라멩코 연습용 단일품.
    - Midi Guitar : MIDI electroacustic converter 포함. Roland interface 호환.



    ※ 지루한 글을 참을성 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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