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용어가 뭐길래
마치 구제역처럼 때만 되면 자꾸 반복되는 의견들이-그러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있다. 바로 ‘클래식 음악’은 다른 장르의 음악에 비해 우월하며, 음악적으로 순수하고, 따라서 클래식 뮤지션들은 소위 ‘딴따라’들과는 몸을 섞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견은 과연 음악사에 기초한 논리를 가지고나 있는 걸까?
어떤 사안에 대해 토론을 할 때에는 먼저 용어의 확실한 의미를 규정해 놓는 것이 좋다. 클래식음악의 순혈주의를 주장하고 싶을 때는 먼저 ‘클래식 음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순수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규정할 필요가 있다. 우스개 소리로, 예전에 ‘성적 순결’에 대해 한 친구와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 친구의 말에 의하자면 자기는 성적으로 순결하다는 거다.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구와 몇 달 전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짓 다 한 놈이 왠 순결?”이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사정은 안 했으니까 난 순결한 거야.”
대부분의 우격다짐은 이처럼 ‘정의 내림’의 자의적 판단에 기인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진부한 얘기를 또 해야겠다. ‘클래식 음악’이란 뭘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렇다.
-광의 :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와 고전, 그리고 낭만을 거쳐 20세기 현대음악을 아우르는 음악. 더 넓게는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 이후의 음악도 포함.
-협의 : 바로크 시대 이후의(음악사학적으로 바로크 시대는 바흐 사망 년도까지로 규정한다), 그리고 낭만주의 음악사조 이전의 이른바 ‘고전파 시대’의 음악.
여러분들은 혹시 소르의 그랜드 솔로와 줄리아니의 C장조 소나타, 그리고 안톤 디아벨리의 A장조 소나타가 수록되어 있는 줄리안 브림의 위대한 음반을 기억하시는가? 그 음반의 자켓을 보라. 즐리안 브림의 이름 바로 아래에 ‘Classic Guitar'라고 적혀있다. 어떤 애호가가 이 음반을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손 치자.
“아니, 음반 제목은 ‘클래식 기타’인데 왜 바로크나 낭만 음악은 한 곡도 없고 오로지 고전시대 음악 밖에는 없는 거야? 편협하게 굴면서 ‘클래식’이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이면 안 되지!”
‘정의 내림’의 혼선에서 오는 오해의 대표적인 경우다.
2) 가족유사성
그러나 이렇게 협의와 광의로 명확하게(?) 정의를 내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낱말’을 그렇게 일도양단으로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간혹 여기저기에서 ‘통기타’라는 낱말의 불합리성을 꼬집는 얘기를 듣곤 한다.
“어차피 첼로나 바이올린이나 기타나 다 나무‘통’을 이용하는 건 매 한가지인데, 어째서 ‘통바이올린’이나 ‘통첼로’라는 말은 안 쓰면서 유독 기타에만 ‘통기타’라는 낱말을 쓰는 걸까? 이건 기타를 얕잡아 보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거 아닐까?”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다. 왜 기타에만 ‘통기타’라는 말을 쓰냐하면, 그것은 우리가(한국 사람이) 그냥 쇠줄로 된 기타는 ‘통기타’라고 부르자고 사회적 합의를 봤기 때문이다(여기서 “우리가 언제 그런 합의를 했지?”라고 따지지 않기 바란다. 언어의 사회적 합의란, 유엔 안보리 이사회나 기업의 주주총회처럼 회의로 이루어지는 걸 말하는 건 아니다). 만일 ‘통기타’라는 말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 분들은 그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해야 한다.
“어째서 ‘수산물(水産物)이라는 말을 쓰는 걸까? ‘농산물(農産物)’에서 ‘농(農)’의 반대말이 ‘수(水)’는 아니지 않는가? 수산물이라는 낱말이 가능하다면 ‘농산물’ 대신 ‘토산물’이라고 해야 논리적으로 옳은 것 아닌가?”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초등학생’이라는 말을 쓰는 걸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라는 낱말과 범주를 맞추려면 ‘고등’에 반대되는 낱말로 ‘초등’이 아닌 ‘저등’이라고 써야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교육부 장관의 지시 하에 ‘저등생’이라고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치자. 만족스럽나? 아마 초등생들은 저급, 저질, 저하 등의 낱말을 연상시키는 ‘저등생’이라는 말에 짜증이 밀려 올 거다.
낱말은....논리 이전에 사용(습관)이 그 정당성을 보증하는 거다.
우리는 어떤 낱말이 확고한 경계를 가진 명료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논리적으로, 또는 명료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게임’이라는 범주를 예로 들어보자. 누군가 “‘게임’이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치자. 그러면 대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할 것이다.
1. 재미나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것.
2. 여가 활동
3. 대개는 아이들이 하는 것.
4. 특정 규칙을 따르는 활동.
5. 어떤 식으로든 경쟁이 있는 것.
6. 두 명 이상이 하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정의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얼마든지 반박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
1.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재미있을까?
2. 프로축구는 여가활동일까?
3. 포커는 게임이지만 어른들이 주로 하지 않는가?
4. 아이가 벽에 공을 던지며 노는 것에 무슨 규칙이 있는가?
5. 수건돌리기 게임에는 경쟁이 없다.
6. 솔리테르는 혼자서 하는 게임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범주의 일원이 되는 자격이 정의가 아니라 가족유사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 이미 게임이라고 불리는 다른 것과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모임에 참석한다면, 그들 가족을 보았을 때 그 어느 누구도 모든 가족이 갖고 있는 공통의 신체적 특징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대니얼 레비틴 저 ‘뇌의 왈츠’ 중에서.
이 얘긴 대강 이렇다. 내 친구 중에 ‘궁’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다. 이 친구의 눈은 아버지 닮았다. 근데 그 동생은 입이 엄마 닮았다. 사촌은 엄마의 코를 닮았다. 그런데 이 사촌의 동생은....
이런 식으로 닮은 것이 서로 맞물릴 뿐, 모든 궁 씨 집안에 공통되는 단 하나의 특징은-예컨대 모두 다 코가 매부리코라든가, 모두 다 입술이 두껍다든가-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자, 머릿속에 ‘나뭇잎’의 상을 그려보라. 무언가 떠오르는가? 그 이미지를 종이에 그려보자. 그리고 내가 그 그림을 보았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왜 ‘나뭇잎’이 이렇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거지?”
“무슨 얘기인지?”
“너는 지금 아주 ‘일반적인’형태의 나뭇잎을 그려놓았어. 하트 모양에, 하트의 뾰족한 부분과 홈이 파인 부분에 선을 잇고 그 선을 중심으로 좌우로 빗살을 그려놓았지.”
“그런데 뭐가 잘못 됐지?”
“ 왜 나뭇잎이 이렇게만 생겼다고 판단한 거지? 예컨대 은행나무 잎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지. 소나무 잎도 마찬가지고. 실제로 여러 종류의 나무를 보면 그 잎들이 천차만별로 생겼다는 걸 알게 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뭇잎은 이렇다’는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있어.”
비슷한 예로 ‘스포츠’의 경우가 있다. 스포츠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누군가 대답한다.
“공으로 하는 편 가름 게임이요.”
“그렇지만...권투나 수영은 공을 사용하지 않는 걸.”
“그럼, 서로 승패를 다루는 게임이요.”
“그렇지만, 포커 게임도 승패를 나누는데.”
“그렇군요...아, 맞다. 그럼...육체적 에너지를 제법 많이 사용하면서 서로 승패를 겨루는 것?
“그럼...만약 너랑 나랑 여기서 주먹다짐을 했다고 치자. 그래서 네 이빨이 두세 개 부러졌다고 해봐. 그렇다고 해도 너는 내게 치료비를 요구할 수는 없어.”
“왜요?”
“네 말대로라면, 우리는 단지 스포츠를 했을 뿐인 걸.”
“.......”
여기에서도 가족유사성이 확인된다. 야구와 축구는 공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축구는 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다름’이 있다. 농구와 야구는 공으로 플레이하고 손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농구의 경우 공을 도구(방망이)로 치면 안 된다. 골프와 야구는 도구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골프의 경우 공을 손으로 던지면 안 된다. 아이스하키도 손으로 공을 던지면 안 되지만 도구를 쓴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이스하키는 몸싸움이 허용되고 스케이트를 신어야 하지만 피겨스케이팅은 몸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할 수도 없다).....끝없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스포츠’란 무엇인가? 스포츠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비트켄슈타인이 이런 얘기를 꺼낸 건 다름 아닌 ‘본질주의’에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의 낱말에 본질적인 그 무언가의 확고한 본질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예컨대 ‘국가’라는 개념이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말을 듣는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현세의 만화처럼, 한 재일교포 주인공이 무리를 모아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도쿄 한 가운데 자신의 ‘나라’를 세우면, 이런 것도 ‘나라’가 되나? 전두환 시절에 나라에 충성하라고 해서 광주에 가서 열심히 반정부 주민들을 학살하면 이런 것도 ‘충성’이 되는가? 석기시대에 부락을 이루고 우두머리를 뽑아 법을 제정하면 그것도 나라가 되나? 아니면 대한민국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처럼, 한나라당 정부가 곧 ‘국가’인가? 이처럼 ‘국가’라는 개념은 대단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마치 ‘자유’라는 개념어처럼. 자유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중고딩이들은 감옥의 죄수들을 보면서 자신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럽의 교육선진국 국가들의 중고딩이들이 봤을 때 한국의 학생들은 대단히 부자유스러워 보인다. 사적인 여가활동을 즐길 시간도 없을뿐더러, 두발도 맘대로 하지 못하므로. 또한 북한 주민들은 돼지나 소를 보면서 자신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국가’의 본질은 한나라당이다.”라거나, “‘자유’라는 건 대한민국 상의 1%의 사람들이 누리는 생활 같은 것이다.”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이 곧 본질주의에의 오류가 된다.
예전에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에서 작가 김훈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아나운서가 김훈에게 “선생님은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김훈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인생은 고독입니다, 또는 인생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한조각 나룻배 같은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을까? 김훈의 대답은 이렇다.
“저는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을 싫어해요.”
김훈에 의하면, 그런 낱말은 대단히 모호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정의할 수 없다는 거다. 동감한다. 저마다 다른 삶의 편린들을 어떻게 하나의 정의로 규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하나의 언어독재(?)에 다름 아니다.
삶이란 뭘까? 이 대답은 오로지 대한민국의 기차를 타 봐야 알 수 있는 대답이다. 삶이란 뭔가 한참 사색하다보면, 철도공사 소속 매판원이 그에 대한 답변을 내려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은 계란, 음료수, 김밥 있어요.”
그렇다. 삶은 계란일 뿐이다.
(물론 썰렁하기 그지 없는 농담일 뿐이다.)
3)클래식 음악은 없다.
눈치 빠른 분들이라면 내가 왜 가족유사성을 들먹이고 있는지 알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은 없다.
너무 성급한 결론인가? 그렇다면 다시 말한다.
“클래식음악은 없다. 단지 우리가 클래식음악이라고 부르는 것들만 존재한다.”
우리는 종종 본질주의의 오류에 빠진다. 대단히 추상적인 것에 대해 마치 어떤 본질적인 것이 존재하다고 여긴 후에 판단하고 편견에 빠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학교의 음악 선생이 다음과 같은 문제를 냈다고 치자.
문) 다음의 음악들 중 이질적인 것은?
1. 푸치니 <나비부인>
2.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3. 나탈리 콜의 <Autumn leaves>
정답은? 아마도 십중팔구는 1번을 꼽을 것이다. 왜냐하면 1번은 ‘클래식음악’이고, 나머지 2번과 3번은 ‘대중음악’이니까. 음악 선생님은 2번이나 3번을 꼽은 학생들의 답안은 틀린 것으로 간주했다. 자, 과연 이 선생님의 판단은 옳은 것일까? ‘장르’라는 하드웨어적인 관점(?)에서 보면 옳다고 할 여지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음악적 내용’이라는 소프트웨어적인 관점(?)에서 보면 옳다고 말할 여지는 거의 없어진다. 왜 그런가?
‘나비부인’이라는 오페라에는 당연히 오케스트라가 사용된다. 나탈리 콜의 <Autumn leaves>는? 그 유명한 데이비드 포스터가 아주 멋지게 작업한 오케스트레이션 반주에 맞춰 나탈리 콜은 아름답게 노래를 부른다. 그렇다면 헤비메탈 밴드인 메탈리카의 노래는? 오케스트라는커녕 바이올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리듬악기 이외에는 오로지 디스토션에 의한 일렉트릭기타의 거친 소리만 들릴 뿐.
장르의 편견에 빠질 수가 없는 화성인이 이 세 가지의 음악을 접한다고 상상해보라. 이 화성인은 과연 메탈리카의 음악과 나탈리 콜의 음악이 비슷하다고 생각할까?
클래식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과연 모든 클래식 음악을 관통하는 하나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협의의 클래식음악 개념에 만족하는가?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베를린 필이 바그너의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바그너는 고전 시대가 아닌 낭만주의 시대 인물이므로 베를린 필의 연주는 클래식 연주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 ‘클래식음악’의 정의를 광의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클래식음악’의 정의내림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협의로서 인가 광의로서 인가? 답은 이미 주어졌다. 우리는 대체로 ‘클래식음악’의 개념에 대해서 광의적으로 접근한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이 ‘고전시대음악’이 아니라는 이유로 “클래식이 아니다.”라고 말하기에는 관습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르네상스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얘기를 할 수 있다. 그건 현대 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서점에서 흔히 보는 ‘음악사’책을 보라. 그냥 ‘음악사’라고 책 표지에 적혀있다면, 여기엔 분명 비틀즈나 마이클잭슨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나 조지 거쉬인은 반드시 소개된다. 만일 비틀즈에 대해 알고 싶다면 ‘팝 음악사’를 찾아야 한다. 존 콜트레인에 대해 알고 싶다면 ‘재즈 음악사’책을 봐야 한다. 그런데 클래식 음악사는 그냥 ‘음악사’책을 찾으면 된다. 분명 대중음악(이라고 불리어지는 것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다. 어쩌겠나. (클래식 우선 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주류가 아닌 걸. ‘서울여고’는 존재했어도 ‘서울남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화음은 그냥 C, G, A등으로 알파벳만 표기하면 되지만 단화음이나 감, 증화음 따위들은 반드시 꼬리표를 달아야 한다. Cm, Gdim, Aaug.....니미럴(어쩔수 없어. 이게 세상의 이치야).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에 관한 사고방식은 오늘날 ‘음악’이라는 협소한 말로 지칭되는 다양한 실재와 경험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백 년 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이 ‘음악’을 지칭했을 때, 그 용어는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안정된 지시체를 갖고 있었다. ‘음악’은 바흐나 베토벤, 브람스 등의 거장에 초점을 둔 유럽의 예술 전통을 의미했다.”
-니콜라스 쿡 저 <음악이란 무엇인가?> 중.
말이 좀 어렵긴 하지만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 100년 전 유럽에서는 그냥 ‘음악’하면 망설일 것 없이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등의 음악을 의미하는 ‘클래식음악’이었다는 얘기다. 이제는-음악 현상이 좀 더 다양해진 현재는 그러한 우격다짐이 통하지(가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사고방식'은 21세기인 현재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음의 대화를 보라. 한 쌍의 남녀가 미팅을 하고 있는 자리다.
갑 : 을순 씨는 취미가 뭐예요?
을 : (고리타분하게 그딴 건 왜 묻냐...)음악 감상이요. 갑돌 씨는요?
갑 : (꼴에 무슨 음악 감상이냐...)와~저도 음악 감상인데.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을 : (짜증나 정말...)서태지요. 갑돌 씨는요?
갑 : (헉...그게 음악 ‘감상’이냐...)아..그렇군요. 저는 바흐를 좋아해요.
을 : (너 잘났어, 정말...)와...저보다 훨씬 수준이 높으시네요(얼꽝 주제에).
갑돌이의 태도는 100년 전 유럽에서의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그는 ‘서태지’의 음악은 음악‘감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바흐 정도는 되어야 ‘감상’할 수 있다는 거다. 을순이도 이러한 관념으로부터 그리 자유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클래식음악에 비해 대중음악은 상대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자격지심이 내재화 되어있다. 서태지를 그렇게도 좋아 하면서도 말이다. 이 ‘감상’이라는 현상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한 번 언급하겠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자, ‘음악사’책은 다름 아닌 ‘클래식 음악사’책이다. 따라서 비틀즈나 메탈리카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바흐와 베토벤과 쇼팽과 드보르작, 드뷔시, 라벨, 그리고 스트라빈스키나 거쉬인, 쇤베르크, 그리고 존 케이지 등이 소개될 뿐이다. 왜냐고? 나도 모른다. 그냥 이들을 ‘클래식’이라고 누군가가(아마도 유럽의 음악가와 음악학자, 그리고 클래식음악비즈니스계에 있는 분들이)광의적이라고 묶었을 뿐이다. 적어도 ‘하드웨어적’으로는 그렇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용(소프트웨어)을 들여다볼까? 자, 다음의 문제를 풀어보자.
문)다음의 음악들 중 이질적인 것은?
1. 존 케이지 <4분 33초>
2. 멘델스존 <노래의 날개위에>
3. 핑크플로이드 <The Grand Vizer's Garden Party Part2>
3번이 답이라고 추측할 사람들이 많을 거다. 그거야 뭐...존 케이지와 멘델스존은 ‘팝 음악사’나 ‘재즈 음악사’가 아닌 그냥 ‘음악사’에서 나오는 인물들이고-따라서 ‘클래식음악가들’인 것이고-핑크플로이드는 소위 대중음악 하는 밴드니까. 이게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음악 내용적으로는 어떨까? 위의 음악들 중 소위 ‘악음’ 이외의 소음이 나오지 않는 음악은 멘델스존의 음악뿐이다. 존 케이지의 ‘4분33초’는 악음 대신 소음(청중들이 웅성대거나 부스럭거리는 소리)이 나오고 핑크플로이드의 곡도 마찬가지다. 핑크플로이드의 이 곡(이것을 곡이라고 할 수만 있다면)은 드러머인 닉 메이슨의 작품인데,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고로,
<4분33초>,<노래의 날개위에>는 클래식뮤직, <The Grand Vizer's Garden Party>는 대중음악(왜냐하면 핑크플로이드는 대중음악을 하는 밴드이므로)라는 2분법에서 벗어나,
<4분33초>,<The Grand Vizer's Garden Party>는 아방가르드, <노래의 날개위에>는 전통(조성)음악이라는 범주로 재배치 될 수도 있다(물론 아방가르드 음악의 반대편 범주에 놓이는 것이 ‘전통음악’인지는 두고 볼 일이기는 하다).
좀 더 쉬운 문제를 풀어보자.
문)다음 음악들 중 이질적인 것은?
1. 쇤베르크 <달에 홀린 삐에로>
2. 베토벤<엘리제를 위하여>
3. 폴모리아 악단 <Love is blue>
‘그냥 서양음악사 책에 나오니까...’는 관점으로는 아무래도 3번을 답으로 찍을 수밖에 없다. 왜? 폴모리아 악단의 음악은 클래식이 아닌 경음악 혹은 세미클래식이라고 불리는 것이니까(폴모리아악단은 1960년대에 활동했음). 그러나 내가 원하는 답은 1번이다. 왜냐하면 2와 3번이 ‘조성음악’임에 반해 1번은 ‘무조성음악’이기 때문이다. 쇤베르크의 음악이 기존의 조성음악과 단절된 새로운 차원의 것이라면, 폴모리아 악단의 곡은 기존의 조성음악의 범주에서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다. ‘그건 경음악 아냐?’라는 하드웨어적 편견만 집어 던진다면 폴모리아의 음악은 베토벤의 그것과 유사한 조성음악-화성법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물론 이런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폴모리아의 음악엔 드럼(Drum set)이 나오잖아!” 그래서 내가 ‘하드웨어적 편견에서 벗어난다면’이라고 말한 거다).
화성인에게 물어보라. 열이면 열, 모두 1번만 다르다고 할 거다.
http://www.youtube.com/watch?v=veUJxETj7-c
화성인 왈 : “2번과 3번은....우리가 듣기에는 너무 이상해. 속을 뒤집어 놓는다고나 할까...참으로 기괴한 소리야. 그러나 1번은...오...아름다워....”
(그래서 화성인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본질주의의 함정에서 여전히 허우적거려야 하는 걸까?
물론, 문제의 예들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쇤베르크나 존 케이지는 너무 예외적으로 기존 클래식음악에서 일탈한 경우 아닌가? 이렇게 반론을 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조성음악의 범주에서도 시대와 음악가에 따른 정체성은 분명히 구분되고 어떤 경우엔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비발디의 ‘사계’와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 듣기에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목신의 오후...’라는 곡과 비교할 것 까지도 없다. 그 유명한 ‘월광(드뷔시)’과 역시 유명한 또 하나의 ‘월광(베토벤)’은 동질성이 느껴지나? 조성음악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화성법에 있어서는 역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시대적으로 보나 개성의 차원에서 보나 당연한 일이다.
(오해하지 말아야한다. 나는 지금 베토벤의 음악과 드뷔시의 음악은 음악사에서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독립된 각각의 사막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서양음악이라는(정확하게는 유럽의 음악) 망망대해에서 베토벤이라는 섬이 있고 좀 더 지나면 드뷔시라는 섬이 있다고 말하는 게 옳으리라. 각각의 섬들은 음악이라는 망망대해에 자기만의 음악적 유산을 남긴다. 그것은 작품이라는 외형만이 아니라 선율법이나 관현악법, 그리고 화성법등 다양한 유산일 것이다. 후대의 음악가들은 비록 개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섬처럼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모두 과거의 그러한 유산들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천하의 드뷔시가 기존의 전통적 화성법에 불만을 토로했다손 치더라도. 따지고 보면, 불만의 대상(음악적 유산)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온전히 자유스럽지만은 않은 상황임을 뜻하는 지도 모른다. 불만의 대상이 존재해야 개선의 여지가 있을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인지심리학자이자 신경 과학자, 그리고 레코딩 프로듀서인 대니얼 J.래비틴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정의를 가지고 음악을 정의할 수 있을까? 헤비메탈이니 고전음악이니 컨트리음악이니 하는 음악 유형은? 이런 시도는 '게임'을 정의하려 할 때와 마찬가지로 분명 실패하고 말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헤비메탈이
1. 거친 전기 기타와 2. 무겁고 시끄러운 드럼 소리가 등장하고 3. 스리코드 또는 파워코드 진행이며 4. 보통 섹시한 리드보컬리스트가 무대에서 셔츠를 벗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마이크 스탠드를 빙빙 돌려대고 5. 밴드명에 움라우트 표기가 들어가는 음악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의를 반박하기란 아주 쉽다. 대부분의 헤비메탈 노래에 거친 전기기타 소리가 등장하지만 이 악기 소리는 마이클 잭슨의 'Beat it'에서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기타를 담당한 사람은 헤비메탈의 신 에디 밴 헤일런이었다. 카펜터스도 전기기타가 등장하는 노래가 있는데 이들을 '헤비메탈'이라고 부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편 헤비메탈의 정수이자 그 장르를 태동시킨 밴드로 추앙되는 레드제플린은 으르렁거리는 전기기타가 전혀 나오지 않는 노래들이 꽤 있다(브로니어, 고잉 투 캘리포니아, 다운 바이 더 시사이드, 배틀 오브 네버모어). '스테이어웨이 투 헤븐'은 헤비메탈의 송가이지만, 노래의 90%는 무겁고 시끄럽고 거친 전기기타 소리없이 진행된다. 이 곡은 또한 '쓰리 코드'만으로 이루어진 곡도 아니다. 헤비메탈이 아니더라도 스리코드와 파워코드로 된 노래는 많은데, 라피의 대부분의 노래들이 그렇다. 메탈리카는 분명 헤비메탈 밴드이지만 그들의 리드보컬이 섹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머틀리크루, 블루 오이스터 컬트, 모터헤드, 퀸스라이크 등은 밴드명에 이유없이 움라우트 표기가 들어 있지만, 메탈리카, 블랙사바스, 데프 레파드, 오지 오스본, 트라이엄프 등 그렇지 않은 밴드들도 많다.
결국 음악 장르를 규정하는 것은 썩 유용하지 않다. 우리는 무언가 헤비메탈과 닮았을 때 그것을 헤비메탈이라고 가족 유사성에 따라 장르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을 보자.
"비트겐슈타인을 제대로 이해한 철학자 엘리노어 로슈는 범주의 개념을 유연하게 잡아 뭔가를 범주의 일원에 좀 더 가까운 것, 덜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범주의 일원에도 미묘한 정도의 차이, 적합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개똥쥐바귀는 새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닭은 새일까? 펭귄은? 많은 사람들이 약간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곧이어 닭과 펭귄은 새를 나타내는 적절한 예가 아니라고 덧붙일 것이다. 이런 경향은 일상 언어 습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닭은 학술적으로는 새다"라고 말하거나 "그래, 펭귄은 새야. 하지만 대부분의 새들처럼 날지는 못해"하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이어 엘리노어 로슈도 범주가 항상 명확한 경계를 갖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무엇이 범주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대상이며 다양한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흰색은 색깔일까? 힙합은 정말 음악일까? 퀸의 남은 멤버들이 프레디 머큐리 없이 연주한다면 그래도 퀸의 연주라고 할 수 있는가?
...중략..............
'불안정의 지혜'의 저자인 영국의 철학자 앨런와츠는 이렇게 말했다.
"강을 연구하고 싶다면 강에서 물을 한 양동이를 퍼내 그것만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된다. 강은 물이 아니며, 강에서 물을 떠내면 강의 본질적 특징인 흐름, 움직임을 잃게 된다.'"
4) 등질화의 폭력
자, 이제 결론을 말해보자.
앞 장에서 나뭇잎에 관한 이야기가 기억 나시는가? 철학자 니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제 개념의 형성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해보자. 모든 말이 어떻게 개념으로 될까?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된다. 곧 말이라고 하는 것이, 그 발생을 떠맡고 있는 어떤 한 번의 철두철미한 개성적인 원체험(기억에 오래 남아 있어 어떤 식으로든 구애를 받게되는 어린 시절의 체험)에 대해서 뭔가 기억이라는 것으로서 도움이 될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수한, 다소라도 유사한, 엄밀하게 말하면 결코 동등하지 않은, 곧 전혀 똑 같지 않은 경우에도 동시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점에 의해서이다. 모든 개념은 동등하지 않은 사물을 등치시킴으로서 발생한다. 하나의 나뭇잎이 다른 나뭇잎과 완전히 똑같은 경우가 없는 것처럼, 나뭇잎이라는 개념이 나뭇잎의 개성적 '차이성'을 임의로 탈락시키고, 다양한 상이점을 망각하게 하여 형성된 것임은 확실하다. 이렇게 하여 이제 그 개념은 현실의 다양한 나뭇잎 이외에 자연속의 '나뭇잎'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뭔가가 존재하는 것 같은 관념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현실의 나뭇잎이 그것에 의해 구성되고 묘사되고 컴퍼스로 측량되고 꾸며지고 오그라들며 채색되는 것처럼 보이는, 뭔가 어떤 '원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한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말을 좀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위의 얘기를 좀 더 쉽게 설명해준 철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철학자 이정우는 ‘범주의 폭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
“‘하나’라는 말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통일성’이고 다른 하나는 ‘단위’죠. 통일성이란 어떤 존재가, 그 안에 어떤 것들이 속해 있는가를 불문하고 하나로서 취급될 때 성립합니다. 이 교실에 여러 사람이 있지만, 이 교실을 하나의 단위로 볼 때는 한 ‘클래스’죠. 즉 하나의 통일성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하나라는 개념은 마술과도 같은 힘을 가집니다. 인사동에 수많은 건물이 있고 사람들이 있지만, ‘인사동’이라고 부르는 한에서는 하나의 동네죠. 하나는 이런 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중략...
하나라고 하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연속성과 동일성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보면 그 사이에는 불연속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교실 전체를 하나로 보는 한에서는 연속성을 띄게 되죠. 그리고 이 교실 전체를 다른 교실들과 함께 생각할 때는 다시 연속성이 성립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로 보는 한에서 그 하나 안에 포괄되는 여럿 사이의 차이는 무화(無化)됩니다. 그래서 하나, 연속성, 동일성은 흔히 같이 갑니다. 그런데 이 하나, 동일성, 연속성의 개념은 때때로 중요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컨대 지방에서 ‘서울사람’이라고 하나로 보는 한에서 서울 사람 그 하나하나의 차이는 일단 무시됩니다. 마찬가지로 서울 사람들에게는 금산도 공주도 함양도 모두 ‘시골’입니다. 우리가 ‘유럽’이라는 하나의 말로 부르는 한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 등의 차이점은 접어두는 것이고, 서구 사람들이 ‘동양’이라는 말을 쓸 때는 오리엔트 지방, 인도, 중앙 아시아, 동북아, 동남아 등의 차이는 염두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부를 때 그들 사이의 이질성은 사라져 버리죠. 동일성과 연속성만이 존재하고 차이와 불연속은 증발됩니다. 이런 매커니즘을 우리는 ‘등질화(等質化)’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는 ‘범주적 폭력’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는 뜻이죠.
우리가 쓰는 언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등질화의 매커니즘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쓰는 한, 인간이 일반화/추상화하는 동물인 한 이런 등질화의 폭력을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조심할 수는 있죠. 때로 등질화는 ‘동일성’과 통하죠. 현대철학에서는 ‘동일성’개념이 함축하는 폭력을 비판하고 ‘차이의 철학’을 펼칩니다. 물론 일방적으로 가면 곤란하죠. 동일성과 차이, 하나와 여럿,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어차피 서로 맞물려 있는 개념쌍이니까요. 사실 인간의 문명이란 동일성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짐승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나무들은 지각해도 ‘나무’라는 일반명사는 가지지 못하죠. 더구나 ‘생명체’같은 더 추상적인 개념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이런 추상화=등질화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다만 인간의 그런 능력이 때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죠. 어떤 개념도 좋다/나쁘다는 식으로 가치론적 실체화를 통해 고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독일어에 'Gift'라는 말이 있는데 재미있는 말이죠. 이 말은 선물이라는 뜻(또는 樂이라는 뜻) 외에 독(毒)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어요. 추상적 사유는 인간에게 ‘Gift'입니다. 그것은 선물이자 독이죠. 인간은 추상적 사유를 할 수 있었기에 모든 위대한 문화들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상적 사유는 개별적인 차이들을 등질화한다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추상적 사유란 인간의 영광이자 질곡이기도 합니다.
철학사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전통철학들-물론 이 표현도 등질화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통철학’이라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이니까요-은 대체적으로 ‘하나’에 대한 열망, 궁극적 하나를 찾고 싶은 갈망,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었어요. 그에 비해서 현대철학-물론 이 또한 여러 이질적 계열들을 포함합니다-은 대체적으로 전통철학의 이런 경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다시 말해 여럿을 하나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서 보고자 하는 것이죠. 그래서 현대철학은 ‘복수성’의 철학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철학적으로 매우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이정우 강의록 <개념뿌리들>중에서
클래식/대중음악이라는 이분법이야 말로 범주폭력의 대표적인 예다. 대중음악이란 무엇인가? 어떤 종류들이 있는가? 다음을 보라.
알앤비,브릿팝,컨트리,아카펠라,뉴웨이브,디스코,하드코어,얼터너티브,메탈,펑크,블루스,훵크,싸이키델릭,소울,포크,프로그레시브/아트록,힙합,유로댄스,테크노/일렉트로니카,정글,애시드하우스,트립합,파두,레게,칸초네,샹송,재즈,보사노바,뉴에이지,씨씨엠,크로스오버,가요,제이팝.......
이렇게 나열해 놓았지만 실상 세분해 놓은 목록들조차 이미 등질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컨대 ‘재즈’만해도 그렇다. 컨템퍼러리 재즈,뉴올리언재즈,퓨전재즈,웨스트코스트재즈.....‘가요’도 마찬가지다. 조용필의 노래와 소녀시대의 노래가 비슷한가?
클래식음악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와 바그너의 음악을 비슷하다고 말할 음악치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클래식음악의 순혈성이 허구라는 점을 밝히고자 하는 반론들도 그렇다. 예컨대, 클래식음악가들이 ‘민속음악’을 응용한 사례가 많기 때문에 클래식음악 자체에 이미 ‘대중음악’이 녹아 있는 것이라는 논의가 그렇다. 사실, 나도 이런 입장을 고수할 때가 많다. 적어도 전라남도의 뱃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면서 부르는 전래민요는 ‘대중음악’이지 ‘귀족음악’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에도 등질화에의 오류가 작동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중음악’이라고 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수퍼주니어’의 음악과, 경상남도 어딘가에서 김을 맬 때 부르는 노래가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논의를 할 때는 먼저 개념을 확립해야 사소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는다.
범주화의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만일, 이런 선입관이 전혀 없는 오지의 어린이에게 비틀즈의 ‘예스터데이’와 베르디의 ‘가라, 상념이여 황금의 나래를 타고’, 그리고 캐미컬 브라더스의 ‘Block Rockin`beats'를 들려주고 물어보라. 셋 중에 어느 음악이 이질적이냐고. 대개 캐미컬 브라더스의 음악이라고 대답할 것이 뻔하다.
http://www.youtube.com/watch?v=iTxOKsyZ0Lw
왜냐하면 이 음악에는 베이스 기타 이외에는 선율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클래식/대중음악의 2분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면 오로지 대중음악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틀즈와 케미컬 브라더스의 곡을 같은 범주에 넣어버리고 베르디의 것만 이질적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물론 이 얘기를 "우리는 이제부터 '클래식'이라는 말은 물론, 모든 범주적 개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건 '사용'의 차원이 아니라 '의식'의 차원이다.
나는 한 때 헤비메탈 음악광이었다. 따라서 누군가 "'아이언 메이든'의 음악이나 '메탈리카'의 음악을 뭐라고 부르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헤비메탈"이라고 말할 것이다(그것들을 '클래식'이라고는 절대 말하지는 않는다).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해서 그것이 곧, 헤비메탈 장르는 다른 장르와 일도양단의 명확한 경계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클래식음악은 없다"고 내가 얘기해서 불쾌해지신 분들을 위해 다시 언급한다. 나는 같은 이유로 "헤비메탈은 없다. 단지 우리가 헤비메탈이라고 부르는 것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헤비메탈은 없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단지 '편의상' 범주를 나눈 것에 불과하며, 명약관화한 헤비메탈의 샘플이라고 부르는 본질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헤비메탈'이라는 추상적인 말만 존재한다는 얘기다. 클래식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바흐같은 클래식음악은 역시 아름답다"라는 따위의 대화를 하지 않을까? 물론 한다. 경계의 모호함을 알면서도 '클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명제와 만난다.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
왜 음악의 장르(어디 음악뿐이겠냐만은)는 명약관화하지 않고 그 경계가 흐리멍덩한 걸까?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앨런 와츠가 잘 설명했다. 헤비메탈이든 클래식이든 그것들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항시 흘러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미주의적 '절대음악'의 개념도 결국 한시대의 이데올로기일 뿐이지, 영원불멸의 진리는 아니다. 한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음악 전체의 본질인양 왜곡해서는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그리고 클래식음악이라는 '하나'에 집착한 나머지 '여럿'의 귀중한 음악적 유산(월드뮤직)을 간과하고마는 우를 범하게 된다.
누군가 클래식의 특징에 대해 "유려하고 지적인 화성"이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화성은 어느날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인가? 화성 이전에 대위법이 있었고 3성부 음악 이전에는 2성부 음악이, 2성부 음악 이전에는 단선율 음악이 존재했다(게다가 다성음악에 대한 개념도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 예컨대, 지금으로서는 당연하게 여기는 3도 병진행은 1000년 전에는 사용되지 않는 불쾌한 음이었다). 결국 기원 후 7,8세기 경의 그레고리안 성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시대 음악이 나온다. 더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 음악이 나온다. 청동기 시대를 지나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음악학자들은 음 높이가 다른 두 개의 소리(우~아~)를 음악의 시초로 파악한다.
"우~아~"는 클래식음악인가?
하나가 아닌 여럿을 말하는 복수성의 철학이 현시대의 철학이라고 위에서 얘기한다. 복수성을 부정한 채 오로지 단일성만을 고집하는 배타성은 유독 클래식순혈주의자들에게 강하게 드러난다. 이를 보면 위 철학자는 뭐라고 그럴까? 아마 ‘시대도착적’이라고 할 것이 틀림없지 않을까?
* 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3-24 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