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GuitarMania

진성님 글에서 저도 생각이 나서 찾아 올려봅니다


[가난한 날의 행복]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歡迎)할 것이 못 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回想)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夫婦)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 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感動)을 안겨다 주는 실화(實話)들이다.

이야기 하나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新婚夫婦)였다. 보통(普通)의 경우(境遇)라면, 남편이 직장(職場)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反對)였다. 남편은 실직(失職)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會社)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出勤)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 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瞬間),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幸福)했다. 만금(萬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幸福感)에 가슴이 부풀었다.

이야기 두울

다음은 어느 시인(詩人) 내외의 젊은 시절(時節) 이야기다. 역시 가난한 부부였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세수를 하고 들어와 아침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시인의 아내가 쟁반에다 삶은 고구마 몇 개를 담아 들고 들어왔다.

"햇고구마가 하도 맛있다고 아랫집에서 그러기에 우리도 좀 사 왔어요. 맛이나 보셔요."

남편은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식전(食前)에 그런 것을 먹는 게 부담(負擔)스럽게 느껴졌지만, 아내를 대접(待接)하는 뜻에서 그 중 제일 작은 놈을 하나 골라 먹었다. 그리고, 쟁반 위에 함께 놓인 홍차(紅茶)를 들었다.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한 개만 더 드셔요."

아내는 웃으면서 또 이렇게 권했다. 남편은 마지못해 또 한 개를 집었다. 어느 새 밖에 나갈 시간이 가까와졌다. 남편은

"인제 나가 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

하고 재촉했다.

"지금 잡숫고 있쟎아요. 이 고구마가 오늘 우리 아침밥이어요."

"뭐요?"

남편은 비로소 집에 쌀이 떨어진 줄을 알고, 무안(無顔)하고 미안(未安)한 생각에 얼굴이 화끈했다.

"쌀이 없으면 없다고 왜 좀 미리 말을 못 하는 거요? 사내 봉변(逢變)을 시켜도 유분수(有分數)지."

뿌루퉁해서 한 마디 쏘아붙이자, 아내가 대답했다.

"저의 작은아버님이 장관(長官)이셔요.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人生)에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잔잔한 미소(微笑)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아내 앞에, 남편은 묵연(默然)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에는 형언(形言) 못 할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 왔다.

이야기 세엣

다음은 어느 중로(中老)의 여인(女人)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여인이 젊었을 때였다. 남편이 거듭 사업(事業)에 실패(失敗)하자, 이들 내외는 갑자기 가난 속에 빠지고 말았다.

남편은 다시 일어나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사과를 싣고 춘천(春川)에 갔다 넘기면 다소의 이윤(利潤)이 생겼다.

그런데 한 번은, 춘천으로 떠난 남편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제 날로 돌아오기는 어렵지만, 이틀째에는 틀림없이 돌아오는 남편이었다. 아내는 기다리다 못해 닷새째 되는 날 남편을 찾아 춘천으로 떠났다.

"춘천에만 닿으면 만나려니 했지요. 춘천을 손바닥만하게 알았나 봐요. 정말 막막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여관(旅館)을 뒤졌지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다 뒤졌지만, 그이는 없었어요. 하룻밤을 여관에서 뜬눈으로 새웠지요. 이튿날 아침, 문득 그이의 친한 친구 한 분이 도청(道廳)에 계시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분을 찾아 나섰지요. 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정거장(停車場)에 들러 봤더니……."

매표구(賣票口) 앞에 늘어선 줄 속에 남편이 서 있었다. 아내는 너무 반갑고 원망(怨望)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트럭에다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남편은, 가는 길에 사람을 몇 태웠다고 했다. 그들이 사과 가마니를 깔고 앉는 바람에 사과가 상해서 제 값을 받을 수 없었다. 남편은 도저히 손해(損害)를 보아서는 안 될 처지(處地)였기에 친구의 집에 기숙(寄宿)을 하면서, 시장 옆에 자리를 구해 사과 소매(小賣)를 시작했다. 그래서, 어젯밤 늦게서야 겨우 다 팔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보(電報)도 옳게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8·15 직후였으니…….

함께 춘천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그 때만 해도 세 시간 남아 걸리던 경춘선(京春線), 남편은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아내는 한 손을 맡긴 채 너무도 행복해서 그저 황홀에 잠길 뿐이었다.

그 남편은 그러나 6·25 때 죽었다고 한다. 여인은 어린 자녀(子女)들을 이끌고 모진 세파(世波)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대학엘 다니고 있으니, 그이에게 조금은 면목(面目)이 선 것도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춘천서 서울까지 제 손을 놓지 않았던 그이의 손길,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지난날의 가난은 잊지 않는 게 좋겠다. 더구나 그 속에 빛나던 사랑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행복은 반드시 부(富)와 일치(一致)하진 않는다."는 말은 결코 진부(陳腐)한 일 편(一片)의 경구(警句)만은 아니다.


-fin.

작가 김소운님은 젊었을 때(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활동하셨는데요, 주로 조선의 작품을 일본에 소개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과서에 실려 유명한 이 수필말고도 [일본 국민에게 고함]이었던가요? 조금 유명한 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마 돌아가셨을 듯 합니다..  

Comment '2'
  • 알파 2003.07.22 05:01 (*.62.226.23)
    정말 아름다운 글입니다. 예전엔 왜 아름답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남편은 한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갑자기 아내에게 미안해지는군요. 으니님 고마워요.
  • 아스 2003.07.23 14:53 (*.122.13.96)
    그시절 기억이 새롭군요. "면목이 선다" 이말만큼 우리 부모님세대에서 무게를 가진 말이 또 있을까요. 서로에게 면목이 서는 삶, 그것이 옛분들이 서로를 엮어가는 초강력끈이었지요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738 [re] 강원도의 힘......미천골계곡의 알밤 3 file 콩쥐 2005.09.28 4094
6737 [re] 강원도의 힘......설악산의 머루 1 file 콩쥐 2005.09.28 3847
6736 [re] 강원도의 힘.....강릉 주문진과 속초 대포항 12 file 콩쥐 2005.09.28 4184
6735 [re] 강원도의 힘.....오대산주변시골집의 나무땔감. 1 file 콩쥐 2005.09.28 3906
6734 [re] 거꾸로 들어도 같은 음악 2 오덕구 2010.09.28 4430
6733 [re] 경운기배경 연주 4 file 콩쥐 2011.08.26 4611
6732 [re] 경운기배경 연주 1 file 콩쥐 2011.08.26 4960
6731 [re] 경이롭고 아름다운 물고기...바다의 룡(Sea Dragon) 3 오덕구 2010.10.11 4045
6730 [re] 계란찜 file 계란찜 2010.09.25 4265
6729 [re] 고구마 ,옥수수 쏫아지는별들 2 file 2004.10.07 3246
6728 [re] 고맙네요~ 장대건님 사진~ 1 file 오모씨 2005.11.10 3083
6727 [re] 광고2 pepe 2004.01.21 3059
6726 [re] 광주여행.....무등산 file abrazame 2005.11.09 2786
6725 [re] 광주여행.....무등산 1 file abrazame 2005.11.09 2940
6724 [re] 광주여행.....무등산 1 file 콩쥐 2005.11.09 3166
6723 [re] 광주여행.....무등산 1 file 콩쥐 2005.11.09 3411
6722 [re] 광주여행.....백양사단풍 4 file 콩쥐 2005.11.09 3771
6721 [re] 국화와 문화 3 file 콩쥐 2006.10.15 3065
6720 [re] 군사보호구역에서 이제 막 해방된 해수욕장. 1 file 2004.10.07 3419
6719 [re] 군사보호구역에서 이제 막 해방된 해수욕장.....발도장찍고. 2 file 2004.10.07 3054
6718 [re] 그 거시기하고 민망스럽고 아름다운 표지.. ^^;;; 19 file 옥용수 2004.04.08 3945
6717 [re] 그렇다면 빌어먹을 국민연금에 드셔요. 14 2004.05.05 3920
6716 [re] 그렇다면... pepe 2003.10.01 3472
6715 [re] 그림그리기 Tool 입니다... file 김동현 2004.04.24 2798
6714 [re] 그만들 닥쳐요! file 오모씨 2004.04.21 3904
6713 [re] 금모래님 글을보구 청계천으로 file 콩쥐 2010.08.15 3918
6712 [re] 기타는 과연 마이너 악기인가? 메이저 악기인가 2 2011.11.15 4352
6711 [re] 기타드림 새잡지 창간. 5 file 콩쥐 2006.12.28 3952
6710 [re] 기타매니아로고 완성판(대). file 2004.07.12 2926
6709 [re] 기타매니아창고. 12 file 콩쥐 2006.09.11 14625
» [re] 김소운, [가난한 날의 행복] 2 으니 2003.07.21 4422
6707 [re] 꽃미남 야마시타 2 2 file 희주 2006.07.10 3206
6706 [re] 나는 죽서방 file 1000식 2005.07.22 4593
6705 [re] 난 최첨단 디지털 죽부인이여. 2 file 1000식 2005.07.22 3953
6704 [re] 남의일같지 않네요... 16 차차 2003.06.03 3164
6703 [re] 논과 샘터 5 file 콩쥐 2011.09.05 4786
6702 [re] 논과 샘터 1 file 콩쥐 2011.09.05 4705
6701 [re] 누구 컴퓨터 잘하는분...사진나눌수있는분. 2004.04.29 3060
6700 [re] 누구일까요? 5 file 정천식 2004.03.09 5724
6699 [re] 누군가를 기다릴 때 혼자서 할 수 있는 놀이 3 으니 2004.07.18 4168
6698 [re] 눈 치운 우리집.. 3 file Jason 2007.02.15 3143
6697 [re] 다소 한국적인 길.. ^^;;;; 4 file 옥용수 2004.03.01 5979
6696 [re] 다했으면 시쳐야죠? 1 enigma 2004.04.22 3272
6695 [re] 단풍여행....구절리 레일바이크 1 file 콩쥐 2005.10.24 3503
6694 [re] 단풍여행....안흥찐빵 file 콩쥐 2005.10.24 2910
6693 [re] 단풍여행....정동진해변가의 파도 3 file 콩쥐 2005.10.24 2886
6692 [re] 단풍여행...아우라지의 돌다리 1 file 콩쥐 2005.10.24 3665
6691 [re] 대추.밤 같이드실래요? 1 file 도이 2006.10.01 3621
6690 [re] 대추.밤 같이드실래요? file 도이 2006.10.01 3553
6689 [re] 더맛있는 벌레... 5 file Jason 2007.02.14 3854
Board Pagination ‹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 151 Next ›
/ 151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hikaru100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