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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18민주화운동 홍보영상(5.18기념재단)

2015년 5.18민주화운동 홍보영상(5.18기념재단)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 생중계

오늘은 5‧18민주화운동 제37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5.18 광주의 피와 통곡의 역사위에 피어난 꽃, 자유. 
그 자유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현재만을 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입니까?”

1980년 오월 그때 우리에게 SNS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나의 촛불이 옆 사람의 꺼진 촛불을 살리는 불씨가 되듯 민주주의는 

그렇게 공감하는 마음을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갑니다. 끝을 알 수 없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네트워크, 그 개방적 확장성이

민주주의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피로 물든 역사가 지나가고 그 자리에 자유라는 꽃이 피어났습니다. 쾌적한 환경, 자유로운 분위기, 소중한 권리를 지켜주는 법과 제도, 

그 모든 것들의 틈 사이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이전 세대들의 핏방울들이 스며있죠.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와 자유를 활짝 꽃피우게 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5.18은 현행 법률과 판례에 따라서 민주화운동으로 명백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 대법원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5.18은 폭동이나 내란이나 간첩 이런 게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중심적 사건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광주는 그만큼 우리 모두를 거듭나게 하는 (것이죠.)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

“5.18은 새로운 역사를 여는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 최정운 서울대 교수 -

2011년 5.18 민주화운동의 기록물들이 한국현대사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에서 나타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민주, 평화’의 정신이 전세계 모든 사람들과 

공유되고 계승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계인들의 뚜렷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1980년 당시 신군부의 언론통제와 왜곡. 신군부는 광주 상황이 북한 간첩단의 소행이었다고 거짓으로 보도했고 

계엄군의 폭력은 은폐하고 시민들의 폭력적인 모습만 강조했습니다. 왜곡된 보도내용은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일부 국민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신군부가 계획적으로 전파한 5.18에 대한 부정적인 첫인상은 오늘날 

지역적, 정치적 갈등의 요소로 남아 희생자들을 괴롭힙니다.

유족들을 가장 외롭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였습니다. 1980년 5월 당시에도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신군부에 의해 시외전화가 두절되었고 광주로 들어오는 모든 육로도 완전히 차단됐기 때문입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이듬해 정권을 차지한 군부의 중심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폭압성을 더해 가던 그의 독재에 시민들은 저항했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정권은 부하 김재규의 총탄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12.12 군사쿠데타는 

민주화를 열망하던 전국의 대학생들을 1980년 5월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린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정문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그 열흘간의 악몽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988년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 야당은 12.12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을 쟁점화시켰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른바 광주청문회를 통해 그동안 왜곡되고 은폐되었던 현실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끝을 알 수 없었던 열흘간의 항쟁동안 외부로부터 철저히 단절되고 고립되었던 이곳,

 거짓말처럼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던 5년간의 침묵. 책임자가 처벌되기까지 걸린 17년의 세월.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침묵의 역사이자 왜곡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위대한 항쟁의 힘은 대한민국 역사를

 마침내 평화의 역사 민주주의의 역사로 바꾸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하겠습니다.

왜 우리는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해야 하는가?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불필요한 폭력을 최대한 줄이자는 시민들 사이의 합의.

 그것은 광주시민들을 더욱 결집시키게 만든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대동세상을 꿈꾸며

 평화를 지켰던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21일 자정, 시외전화가 일제히 두절됐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이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오후 한시, 스피커에서 돌연 애국가가 흘러나왔습니다. 공수부대는 애국가를 배경으로

 2만여 명의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했습니다.

5월 27일 자정, 광주전역에 시내전화가 두절되었고 새벽 세시 신군부가 탱크와 헬기를 동원하여

 도청을 죄어왔습니다.

새벽 4시 10분, 공수부대의 일제사격으로 시작된 최후의 항쟁. 그곳을 마지막까지 지킨 이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끝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피와 통곡의 역사위에 피어난 꽃, 자유. 그 자유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현재만을 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입니까?’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한다.” 
-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


5·18 발포·진압 명령 거부한 경찰국장

아들이 증언하는 '숨은 영웅' 안병하…고문당한 후 신앙생활 시작

이용필 기자   기사승인 2017.05.17  18:13:19

이 기사는 1443번 공유됐습니다

5.18 민주화운동과 꼭 기엌해야 할분 - 안병하 경무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민주경찰관 안병하 경무관"

5·18 발포·진압 명령 거부한 경찰국장

아들이 증언하는 '숨은 영웅' 안병하…고문당한 후 신앙생활 시작.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 어찌 선량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린단 말입니까? 난 못합니다!"

 - 1980년 5월, 안병하 전남지방 경찰국장

안병하 경무관은 발포하라는 신군부 명령을 거부하고 경찰이 소지한 무기를 회수하고, 

시위대에 치료와 음식 등 편의를 제공한 일로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 숨을 거뒀다.

올해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이듬해 5월 17일 확대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계엄령에도 빛고을 광주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계속됐고, 신군부는 총칼로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168명이 죽고 4,782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행방불명자, 암매장, 소각된 사람까지 더하면 5·18 희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라남도 안병하 경찰국장(경무관)은 5·18 '숨은 영웅'으로 불립니다. 시민을 향해 발포하고 진압에 앞장서라는 신군부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상대는 우리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시민인데, 경찰이 어떻게 총을 들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안 경무관은 보안사로 끌려가 8일간 고문을 받고, 직무 유기로 옷을 벗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고문 후유증으로 8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5·18은 알아도 안병하 경무관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5월 16일 경기도 고양시 한 카페에서 그의 삼남 호재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 기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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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폭력 진압 지시를 거부한 고 안병하 경무관(사진 가운데). 사진 제공 안호재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안병하 경무관은 1928년 7월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양양공립학교와 서울 광신상고를 나온 뒤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등과 육사 동기다. 한국전쟁 당시 포병 관측장교로 전투에 임했고,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군 생활을 하던 안 경무관은 1962년 11월 경찰 총경으로 특채됐다. 부산·강원·경기를 거쳐 1979년 2월 전남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 10·26 이후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이 들어서던 해였다. 이듬해 5월 광주 대학가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전남대는 병영 집체 훈련 거부 투쟁을, 조선대는 비리 사학 퇴출 시위를 벌였다. 대학가 시위가 확산될 무렵 안 경무관은 부하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아들 안호재 씨는 "아버지는 '시위 진압 안전 수칙을 잘 지켜라',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시민 안전에 유의하라'고 당부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촛불과 횃불을 들도록 유도했다. 시위는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안 씨가 언급한 내용은 안 경무관이 숨지기 직전 작성한 비망록에 담겨 있다.

그런데 공수부대가 투입되며 광주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안 씨는 "신군부는 당시 경찰국장이던 아버지에게 시민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리고, '군인보다 경찰이 앞장서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공수부대는 대학생과 시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진압을 가했다. 5월 20일경 안 경무관은 보안사 요원들에게 끌려갔다. 한참 후배인 군인들이 안 경무관을 고문했다.

안 씨는 "보안사에서 나온 아버지 몸에는 외상이 없었는데, '힘들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중에 말씀하기로, 일어설 수 없는 책상에 강제로 앉힌 다음 재우지 않고 계속 신문했다고 하더라. 당연히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풀려나는 날 고기 없는 곰탕 국물을 먹고 나왔다"고 말했다.

안 경무관은 신군부 명령을 거부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 씨는 "아버지가 끌려가기 전 어머니에게 통화로 '식구들만이라도 잘 살아'라고 전했다. 마침 저녁 식사 중이었는데, 부하 직원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밥 한 그릇 더 달라고 했다. 자기 앞날을 내다본 것"이라고 말했다.

고문받고 나온 안 경무관은 직무 유기 등의 이유로 해직됐다. 부인과 함께 광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고혈압, 신부전 등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다녔지만 차도는 없었다. 안 경무관은 1988년 10월 10일 생을 마감했다.

유족들은 숨진 안병하 경무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애써 왔다. 결국 2003년 '광주 민주화 유공자', 2006년 '순직 판정'을 이끌어 냈다. 안 경무관은 서울 현충원 경찰 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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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경무관 아들 안호재 씨는 5·18민주화운동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안 경무관, 숨지기 전 신앙생활
"북한군 소행? 터무니없는 주장
'역사의 희생물' 된 아버지
기억하는 게 제2의 5·18 막는 길"

숨지기 전 안 경무관은 방배동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고, 틈틈이 성경을 보고 찬송을 불렀다. 안호재 씨는 "아버지는 찬송 '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즐겨 불렀다. 갑자기 신앙생활을 하는 바람에 가족 모두가 놀랐다"고 말했다.

안 경무관이 교회를 다니자 부인과 세 아들, 며느리도 덩달아 교회에 출석했다. 가족들은 지금도 안 씨가 신앙생활을 하게 된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안 씨는 "할머니가 교회 집사님이다. 할머니를 극진히 모셨던 아버지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버지 덕분에 지금 가족들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 씨는 고양시에 있는 한 교회에 20년 넘게 출석 중이다.

안호재 씨는 "아버지는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표현했다. 

5·18과 총칼에 스러져 간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5월이 되면 어딘가 모르게 헛헛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지금은 나아졌다고 한다. 

안 씨는 "'SNS시민동맹'이라는 소셜미디어가 있는데 많은 분이 

안병하와 5·18 경찰들의 희생을 기억해 줘서 힘이 난다.

 다니는 교회에서도 아버지를 아는 분들이 순교자로 생각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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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하 경무관을 기억하는 이들은 늘어나고 있다. 국립 현충원에 마련된 안 경무관의 동판. 사진 제공 안호재

극우 성향 지만원 씨를 포함해 일부 기독인은 5·18 당시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 투입돼 시민을 선동하고, 무기고를 탈취했다고 주장한다.

 5·18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안 씨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과 경찰 대표 측 비밀 협상에 따라 5월 17일 저녁부터 시위는 차분해졌다. 이날 등장한 게 바로 촛불과 횃불이다. 북한군이 개입, 선동했다면 과연 그렇게 했을까. 도청 앞 분수대에서 촛불 들고 시위하는데 특전사가 투입될 명분도 없었다. 자제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폭력 진압을 하니, 시위도 덩달아 거세진 것이다. 거기에 시민들도 뛰어든 것이고. 그걸 공작원 소행이라고 하는 건, 터무니없는 주장에,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안호재 씨는 5·18민주화운동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자산이라고 했다. 

이를 기억해야 제2의 5·18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군인이 죄 없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죽였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경찰을 고문하고 업신여겼다. 1980년 5월 대한민국에는 인권이 없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왜 학생과 시민을 향해 총을 쐈는지 모른다. 제대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본다. 5·18을 잊는 순간 제2의 5.18이 일어날 수 있다. 기억하고 진상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상흔을 안고 있는 구도청과 전일빌딩을 철거하지 말고 보존했으면 한다.

나는 아버지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 바라기는 신앙인들이 5·18과 희생자들을 기억해 줬으면 한다. 관심과 지지가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는 걸 최근 들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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