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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최동수기타2015.01.09 11:44

중동건설 시대에 참여했던 제1세대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이 있는 듯하여
제 자서전에 실린 시대상에 대애서 일부반 발췌해 올리겠습니다


혹시라도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을 모르는 사람의 이해를 돕고자 조금 소개하려한다.
그 시절은 오늘날과 같은 대재벌이 생기기 전이다.

지금 재벌이 된 대기업도 대부분 생필품 위주로 성장하였다.


롯데는 껌과 과자를 만드는 수준이었고,
지금의 LG와 LS의 전신인 럭키그룹은 럭키치약과 금성캐러멜, 금성라디오(당시
트랜지스터라디오도 없었다) 등을 생산하는 회사에 지나지 않았다.
삼성은 당시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메리야스와 양말 공장, 해태제과와 대영제빵 등이 있었다.
현대건설을 비롯한 건설사들은 주로 미군공사를 청부받는 게 고작이었고,
순수한 국내공사로서 큰 규모로 진행하는 것이 없었다.


당시에 국내에는 현대식 아파트란 건물은 전무하였다.

시내에 몇군데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일제강점기에 서민들을 위해 마련되었던

가운데 복도가 있는 컴컴한 가난뱅이 아파트였다

비료공장, 시멘트공장이나 발전소건설 역시 외국의 설계와 기술자들을 들여와
외국차관으로 주관하였다.
ADB(Asian Development Bank, 아시아개발은행)의 차관을 들여와 주택공사에서
18평짜리 국민주택을 불광동 등지에 건설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ADB와 같은 후진국에의 원조 외에는, 은행과 정부가 보증을 서도
국가신용도가 낮아서 기업용 차관을 들여올 수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GNP(Gross National Product, 국민총생산)가 60달러에서
70달러 밖에 안 되어 필리핀이나 북한보다도 경제수준이 낮았다.
우리나라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2년 후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실천하면서부터 산업경제가 급격히 발전하여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우리나라가 건국 때부터 지금처럼 잘 살아온 것으로
막연히 착각하고 있다.
당시에는 한국전력공사가 가장 규모 있는 일류기업이었다.
미국정부가 혁명정부를 달가워하지 않아서 경제발전을 위한 차관을 꺼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광부와 간호사를 보러 갔을 때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정부의 지원 약속을 받아 산업발전을 위한 차관선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미국은 물론 여러 나라로부터 차관과 지원이 쇄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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