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GuitarMania

애한테 숙제를 내주고 공부를 마무리하려 하는데, 타다다닥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히 주방이 살짝 보이는 복도 비스무레 한 것을 지나쳐 현관까지 나가는데, 주방쪽에서 그 애의 엄마가 선생님 잠깐만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몇달만에 처음으로 그 집의 공부방이 아닌 곳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무슨무슨 팰리스라는 이름에 맞게 화려하게 꾸며진 주방이었다. 검은 대리석으로 덮인 조리대와, 여러가지 기기들, 화려한 식탁과 군데군데 아름다운 조명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가 양파를 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을 하러 가거나, 양손 한가득 쇼핑백을 들고 들어오기나 하던 그녀가 양파를 썰고 있었다. 평소에 일하는 아줌마도 있었는데, 아까 그 칼질 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였던 것이었다.

어지간히 잘꾸며진 집에선 놀라지도 않는 나는, 또 그렇다고 부자들에게 적개심 따위는 더더욱 없는 나는, 그냥 누구나 자기 능력껏 나쁜 짓 하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어 살면 좋다.. 고 데면데면히 여기던 나는. 그 집에서 다른 어떤 걸 보고 놀란 게 아니라, 그녀의 양파써는 모습에 놀란거다. 그런 집에서도 여자가 결국 살림을 하는구나 라든가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살림은,

숙명.

제 아무리 돈많다 해도 요리는 해먹는구나 라든가 아무리 날고기는 여자라도 결국 밥도 하고 그러는구나 하는게 아니라,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엄마, 혹은 아내라는 이름의 여자에게서 가족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살림하는 기쁨을 빼앗을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

주방이 화려하든, ㅡ 자형 좁은 주방이든, 주방이라고 말하기도 못내 민망한 지경의 가스렌지 달랑 하나이든간에, 주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피로하고 반복되는 일일지라도 꽤 기쁜 것이다.

나도 내가 다른 일을 하지 않았던 한동안 주방에서 음식을 한 적이 있다. 서랍을 열어 칼을 꺼내고, 도마를 놓고 처음하는거 치고는 잘한다 생각하며 어설픈 칼질도 하고, 양파를 썰고, 당근을 작게 깎아 다듬고, 그 동안에 뭔가를 끓이고 삶고, 또 다 되어서 소쿠리에 넣어 찬물에 헹구고, 부지런히 냉장고에 뭔가를 넣었다가 빼었다가 하고.. 그렇게 음식을 한 적이 있다. 그냥 한 두번 한게 아니라, 매 끼 그리 하고 또 설겆이도 죄다 하곤했다. 아니 음식만 한게 아니라, 빨래도 돌리고 널고 말려서 개고, 다림질을 하고, 청소도 하고.. 꼭 엄마처럼 아내처럼 그렇게.

그건 엄청나게 행복한 일이다. 내가 가족을 위해서,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굉장히 본질적인 일이고, 그것이 없어서는 안되는 일이고, 해도 티는 안나고 안하면 금새 티나는 일이다. 그래서, 피로하고 귀찮기도 하지만, 정말로 행복한 일이고, 기쁜 일인 것이다.

나는 와아 정말 잘해놓고 사는구나. 라든가 혹은 이야, 요리도 잘하고 집안도 예쁘게 꾸몄구나. 하는 말보다,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살림을 하고 싶다. 밤중에 깨어 일어나 부엌에 와 냉장고를 열었을 때 시원한 냉수와 바나나 우유 하나쯤은 꼭 있는, 집안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아주 번쩍 번쩍 광을내어 닦은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것을 느낄 수 없는 그런 편안한 살림. 바깥에서 시달리던 가족들이 집에 왔을 때, 여기서만큼은 정말 두 다리 뻗고 누울 수 있구나 하는 그런 집을 만들고 싶다.

십년쯤 후에, 마사스튜어트를 능가하는 살림에 관한 책을 쓸지도 모른다. 제목은 "모두가 편안한 우리살림" 살림을 하는 안주인도 편하고, 도와주는 신랑도 편하고, 아이들도 편하고, 그 집에 살고 있는 가족들 모두가 편안한 살림. 적게 노력하고도 좋은 효과를 내는 살림법이라든가, 적절히 인스턴트를 이용하는 법, 빠른 시간안에 장보는 법, 좀더 오래 가는 청소법 같은 것들. 그리고, 가족끼리 더욱 더 사랑할 수 있는 방법 같은것들.

웅.

드디어, 나, 가을타기 시작했다.
oTL





  
Comment '3'
  • 에혀2 2005.09.19 12:57 (*.117.182.155)
    저는 2주전부터 가을입니다..ㅠㅠ
  • 토토 2005.09.20 23:08 (*.210.231.62)
    으니님은 정말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실 것 같아요.
  • jazzman 2005.09.21 00:15 (*.207.64.67)
    음... 으니님, 또 다른 한 방법은요, 남자 하날 팍~~ 잡아가지고서는... 죄다 시키면 되죠.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38 점심 도시락.... 8 file 콩쥐 2005.10.06 3394
1737 홍옥과 책 3 file 콩쥐 2005.10.05 4065
1736 옛날 옛적에. 4 Z 2005.10.03 3274
1735 [re] 바다가 부른다..........개뿔? 7 file 콩쥐 2005.10.03 3068
1734 [re] 바다가 부른다..........명란젓 9 file 콩쥐 2005.10.03 3047
1733 [re] 바다가 부른다..........젓 1 file 콩쥐 2005.10.03 3026
1732 [re] 바다가 부른다.........전어 한마리 file 콩쥐 2005.10.03 2420
1731 [re] 바다가 부른다.........전어구이 3 file 콩쥐 2005.10.03 2977
1730 [re] 바다가 부른다.........박게 2 file 콩쥐 2005.10.03 3212
1729 바다가 부른다.........소라 2 file 콩쥐 2005.10.03 3227
1728 [re] 콩쥐님만 보세요. 1 nenne 2005.10.02 3360
1727 [re] 청계천에 미로가 다녀갔나요? 1 file 2005.10.02 3050
1726 오늘밤 다시 살아난 청계천 다녀왔어요. 1 file 콩쥐 2005.10.02 2874
1725 푸념.. 6 file 괭퇘 2005.10.01 2837
1724 希望 - 도종환 1 소공녀 2005.10.01 2692
1723 온돌문화에 대해 누구 아시는분. 4 콩쥐 2005.10.01 2425
1722 한국의 문화 1 콩쥐 2005.10.01 2863
1721 한국의 자랑거리가 뭐가 있을까요? 32 대한민국 2005.10.01 7794
1720 연예인들이 너무 많아요!!! 9 nenne 2005.10.01 3392
1719 네이버에 있길레.. 퍼왔어요.. 9 file 나그네.. 2005.09.29 3250
1718 어렸을땐 말이죠. 정말 어른이 되고 싶었더랍니다... 3 쑤니 2005.09.29 2760
1717 이것은 무슨 벌레인가요? 3 file 시니 2005.09.29 3113
1716 전지연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펌) 6 file 나잡아봐라 2005.09.28 3764
1715 [re] 강원도의 힘.....오대산주변시골집의 나무땔감. 1 file 콩쥐 2005.09.28 3998
1714 [re] 강원도의 힘......설악산의 머루 1 file 콩쥐 2005.09.28 3979
1713 [re] 강원도의 힘......미천골계곡의 알밤 3 file 콩쥐 2005.09.28 4236
1712 [re] 강원도의 힘.....강릉 주문진과 속초 대포항 12 file 콩쥐 2005.09.28 4296
1711 강원도의 힘.....양양의 능이와 노루궁뎅이 3 file 콩쥐 2005.09.28 4050
1710 선녀가 나타날듯한... 7 file 오모씨 2005.09.27 3387
1709 어제부로 밤낮이 바뀌어버렸군요..-_- 2 술먹고깽판부린놈 2005.09.27 3195
1708 우문현답 2 file 차차 2005.09.27 3556
1707 유 시민 (항소 이유서) 7 야맛있다 2005.09.27 4683
1706 술마시고 여기다 풀어야지.. 8 에혀2 2005.09.26 3335
1705 "아만자" 이후 최대 사오정 답변 사건 6 file 으니 2005.09.25 3826
1704 오늘 날씨 너무 좋아서 기분 좋았어요 11 으니 2005.09.24 3215
1703 까탈이의 세계여행 4 file 1000식 2005.09.24 3371
1702 이 새벽에 전 뭘하고 있는걸까요.... 10 消邦 2005.09.21 3416
1701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첫 방송 10 야맛있다 2005.09.20 3900
1700 에피소드#3 경고 : 미성년과 여인들은 절대 보지마셈.. 2 조아 2005.09.19 4172
1699 에피소드...#3 (달은 무엇인가????) 2 조아 2005.09.19 2775
1698 에피소드...#2 2 조아 2005.09.19 3027
1697 에피소드...#1 조아 2005.09.19 3751
1696 89년 우리의 상은누님..ㅋ 1 에혀2 2005.09.19 3642
» 살림, 나를 살리고 가족들을 살리는 살림 3 으니 2005.09.19 3359
1694 친절한 금자씨 (먼저 올린 분 있나요?) file 꼭두각시 2005.09.17 3906
1693 [re] 정말 신기하네요. 2 file 아랑 2005.09.15 2890
1692 전화받는 강아지(?) 4 file 토토 2005.09.14 4445
1691 난초가 꽃이 피어서... 11 file jazzman 2005.09.14 7334
1690 호신술... 배웁시다!!ㅋ 11 file 쑤니 2005.09.14 4352
1689 아빠한테 문자보냈다. 오모씨 2005.09.14 3487
Board Pagination ‹ Prev 1 ...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 ... 151 Next ›
/ 151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hikaru100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