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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바로 어제, 나와 보노보노(둘째동생)는 아주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내가 학교로 학원으로 하루종일 바삐 돌아다니는 중에 "전업학생"인 보노는 하루종일 아빠와 함께 장식장에 프라모델을 정리했다고 한다. 거의 이십년 다 된 콜렉션을 아빠는 맞춤 유리상자에 넣어서 다녔는데 이번에 이사하면서 장식장을 장만한 것이다. 가장 균형잡힌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하여 특히 롬멜 장군과 그 부하들 세트는 장식장 안에서 자리를 네번 옮겼다나..

어휴.. 아까 제로전투기.. 넣으려구 하는데 아빠가 떨어뜨린거야.. 그래서 그거 뭐지? 왜 삐죽 나온거.. 비행기 속도재는거..
피토관?
어.. 피토관이 똑 부러진거야.. 그런데 프라모델 접착제가 없어서 순간접착제로 붙이는데.. 그게 잘 안붙잖아.. 꼭 누르고 있어야 하는데 수통이나 쌍안경은 그냥 애들 몸통에 척 붙이면 되지만.. 피토관을.. 흑.. 암튼.. 꼭 붙들고 있는데.. 나 방구석에 쪼그리고 꼼짝도 못하고 숨도 못쉬고..

그리고 아빠가 또 막 이거 넣으면서 자랑하자나.. 여기 통신병 깔고 앉은 석유통 이거 아빠가 다른데서 찾아서 엉덩이에 붙여준거라구.. 원래는 없었대.. 그런데 뭐 높이가 딱이라구 그러면서.. 그래서 내가 이쁘다구 해줬자나..

또 얘는 눈동자에 흰자위랑 검은자위까지 붓으로 찍은거라구 하면서..

또 여기 탱크에 안테나.. 이거 기억나지.. 아빠가 바닥에 촛불켜놓구 이거 쭉 늘이던거..

...


기억이 난다.

나이차가 동생들과 꽤 나는 탓에 나는 어린시절을 조금 더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아빠는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배신을 당하고, 수중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계를 위해 엄마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서 일을 했다. 한달에 한번, 아니 어떨 때는 두달가까이 되기도 했다. 엄마가 오는 날, 나는 뼈속까지 들뜨고 기대로 가득찼다. 어쩌면 기다림과 그리움을 내가 친근히 느끼는 것은 이 때 이후일런지도 모른다. 아빠는 엄마가 없는 하루종일 단칸방 구석에서 아빠의 책상(지금 생각하면 사과나무 궤짝에 유리판 하나를 얹어놓은 것이었다)에 에나멜 세트, 붓, 신너, 조잡한 아카데미의 타미야 카피버젼 프라모델을 갖고 씨름했다. 밤에 자다가 스탠드 빛에 눈이 가만히 떠지면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아빠가 지금 뭘 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에나멜과 신나의 냄새, 혹은 전사지를 불리는 냄새가 제 각각 달랐다.

하루는 스탠드가 켜져있었는데,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부품들을 똑똑 떼어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부스스 일어났다. 아빠.. 뭐하세요?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아빠의 큰 어깨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일기를 쓰면서 엄마에게 편지를 한 통씩 썼지만 아빠의 편지쓰기 시간은 그렇게 한 새벽이었던 것이다.

아빠의 프라모델 콜렉션은 그렇게 생긴 것이다.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빠는 그 때 조그마한 프라모델 가게를 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아빠가 콤비락 책장 싼 데를 알아보겠다고 며칠간을 발품팔면서 이따금 엄마와 전화통화한 내용을 떠올려보면 그런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때는 잘 몰랐다. 아빠가 왜 저걸 저렇게 열심히 만드는지.

가게를 내려고 했든 뭘 하려고 했든 아빠는 정말로 이걸 좋아했다. 젊어서 부족함 없이 취미생활을 즐겼던 경험, 미군 복무 경험.. 글쎄, 당시 우리집 티비는 늘 AFKN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무엇이든 나오기만 하면 아빠는 이름을 맞췄다. 저건 브래들리, 거기 포는 부시마스타. 저건 메사추세츠, 저건 콜세어, 저건 해리어.. 수직이착륙기..

딸만 셋을 낳은 아빠는 곧잘 과자나 빵 따위를 차려놓고 우리 반 남자애들을 집으로 불러다가 자기 콜렉션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싶어했는데, 두세번의 시도 이후 "너희 남자애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더라.."는 말과 함께 완전히 그런 생각을 접었다.

글쎄.. 아빠가 안쓰러웠던 걸까? 나는 차츰차츰 아빠에게 묻기 시작했다. 아빠, 쟤는 왜 포 앞에 저렇게 띠를 둘렀죠? 응, 그건 상대편 탱크를 네마리 잡았단 뜻이지. 아.. 그러면 여기 비행기 옆구리에 붙인 이것도.. 독일군 비행기 격추한 거 세느라구? 그렇지 그렇지..

목욕탕을 함께 갈 아들이 없었던 아빠에게 나는 취미를 공유하는 기쁨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불순한 의도로 시작했지만, 결국엔 나도 이걸 너무나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엄마가 돌아와 가족이 함께 살고, 단칸방이었던 집이 두 칸이 되어도.. 아빠와 나는 프라모델을 열심히 만들었더랬다. 지금도 내가 만든 미그기 같은 것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처음으로 성남비행장에서 에어쇼를 한다길래 학교를 땡땡이치고 아빠랑 둘이 놀러갔던 기억이 나는데..


...


언젠가부터 잊고 살았다. 유리상자 속의 콜렉션은 말이 없을 뿐이었고 아빠는 이제 돋보기를 쓰고서가 아니면 잠시도 무엇엔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이번에 장식장을 사서 프라모델을 그럴듯하게 정리해보자고 한 건 내 아이디어였는데, 애초에 그건 로망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다만 유리상자가 쌓아두기엔 처치곤란이었기 때문에 더 좋은 방법이 없나 생각해본 것일뿐이었다.

보노와 나는 프라모델을 들여다보면서 예전 생각을 했다. 기침을 콜록콜록하면서 발가락에 독일군 병사를 끼우고 색칠하던 아빠.. 이유도 없이 눈이 빨개졌다. 아마 아빠도 지금쯤 아빠방 침대에 누워 예전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들끼리 이야기하면서 밤을 새웠다.

우리 집 딸 셋은 이미 어릴 때 아빠의 콜렉션을 시집가면서 누가 가져갈 것인지 나누었는데, 엄청난 책은 내가, 그리고 프라모델은 둘째가, 아빠가 기를 쓰고 녹화한 옛날 영화 비됴테입들은(이것에 관해서도 차후에 기록해둘 필요성이 있다) 막내가 가져가기로 했다. 지금생각해도 잘 나눈 콜렉션이다. 나는 특히 프라모델에 욕심이 나긴 하지만, 나보다는 둘째가 더 그럴듯한 상속인이 될 것이다. 엄벙덤벙하여 수전증이 있는 나로서는 피토관 순간접착제가 마를 때까지 꼭 붙들고 숨죽이고 있을 자신이 없기 때문에.


  
Comment '6'
  • 2004.02.10 15:47 (*.195.225.249)
    보노한테 그런면이 있엤네여...하하...프라모델이라...
  • 희주 2004.02.10 18:13 (*.83.152.66)
    아버님이 정말 재밌는 분이시네요....부럽습니다..ㅎㅎㅎ
  • 아이모레스 2004.02.10 19:30 (*.158.12.112)
    왠지 여기저기 슬픔이...
  • 별빛나래 2004.02.11 10:06 (*.235.14.181)
    으니님 글은 언제나 느낌이 참 좋아요. 본격적으로 글을 쓰실 생각은 없나요?
  • 아랑 2006.02.26 00:08 (*.218.205.220)
    이 글이 왜 이제사 내 눈에 띄었을까.. 아...
  • Jade 2006.02.26 01:21 (*.200.176.10)
    우연히 새벽 1시가 넘어서 메냐에 들어왔는데..............
    근데 읽어갈수록 왜 이리 마음 한 구석이 저리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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