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19 09:20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소유가 아니었다
(*.152.70.244) 조회 수 4613 댓글 6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고 키웠던 오죽헌은 누구의 집이었을까? 신사임당?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죽헌을 떠올리면 동시에 신사임당을 생각한다. 하지만 오죽헌이 신사임당의 소유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집이었을까?
국세청 조세박물관에 가면 이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조세박물관에는 조선시대 땅에 대한 상속·증여·매매의 기록을 담은 ‘분재기(分財記)’들이 전시돼있다. 이씨 분재기(강원유형문화재 제9호)에 따르면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조카 권처균의 소유인 것으로 기록돼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조선전기에는 아들·딸 차별 없이 재산을 분배했고, 출가한 딸들도 재산 상속에서 차별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여 제사를 맡겼던 조선후기와 달리 외손에게 제사를 잇게 했다.
원래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의 소유였다. 당시 관습대로 이씨는 다섯 명의 딸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분배했다. 그러나 딸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이후에도 제사를 누가 지낼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이씨는 외손자들 중에서 제사를 맡길 만큼 믿음직스러웠던 두 명을 골랐다. 두 명의 외손자가 바로 율곡 이이와 권처균이다. 이씨는 두 외손자에게 제사를 지내고 묘를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율곡 이이에게는 땅을, 또 다른 외손자 권처균에게는 기와집 한 채를 줬는데, 권처균이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바로 그 집이 오죽헌이다. 오죽헌이라는 이름도 나중에 권처균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조세박물관 최윤희 학예사에 따르면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고 기를 때에는 어머니 이씨가 오죽헌에 살았기 때문에 불편함 없이 그곳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근 한 기업의 오너 일가가 재산 분쟁에 휘말렸다. 딸들이 상속받은 재산이 너무 적다며 오빠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는 남녀 가리지 않고 재산을 분배했으며 가족의 화합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와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관련기사
'5만 원권으로 부활하는 신사임..한국은행, 10만원권 '독도 논란'에 .."친일파가 그린 영정을 새 지폐 모델..조선시대 땅에 대한 상속·증여·매매의 기록을 담은 분재기는 현재 국세청 조세박물관 특별기획전 ‘땅, 나눔과 소유’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는 조선시대에 재산상속과 토지매매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고문서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재산상속과 토지매매와 어떻게 다른지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는 올해 8월까지 계속된다.
-2010-01-19 06:00 노컷뉴스 엄해림 대학생 인턴기자-
국세청 조세박물관에 가면 이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조세박물관에는 조선시대 땅에 대한 상속·증여·매매의 기록을 담은 ‘분재기(分財記)’들이 전시돼있다. 이씨 분재기(강원유형문화재 제9호)에 따르면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조카 권처균의 소유인 것으로 기록돼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조선전기에는 아들·딸 차별 없이 재산을 분배했고, 출가한 딸들도 재산 상속에서 차별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여 제사를 맡겼던 조선후기와 달리 외손에게 제사를 잇게 했다.
원래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의 소유였다. 당시 관습대로 이씨는 다섯 명의 딸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분배했다. 그러나 딸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이후에도 제사를 누가 지낼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이씨는 외손자들 중에서 제사를 맡길 만큼 믿음직스러웠던 두 명을 골랐다. 두 명의 외손자가 바로 율곡 이이와 권처균이다. 이씨는 두 외손자에게 제사를 지내고 묘를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율곡 이이에게는 땅을, 또 다른 외손자 권처균에게는 기와집 한 채를 줬는데, 권처균이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바로 그 집이 오죽헌이다. 오죽헌이라는 이름도 나중에 권처균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조세박물관 최윤희 학예사에 따르면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고 기를 때에는 어머니 이씨가 오죽헌에 살았기 때문에 불편함 없이 그곳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근 한 기업의 오너 일가가 재산 분쟁에 휘말렸다. 딸들이 상속받은 재산이 너무 적다며 오빠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는 남녀 가리지 않고 재산을 분배했으며 가족의 화합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와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관련기사
'5만 원권으로 부활하는 신사임..한국은행, 10만원권 '독도 논란'에 .."친일파가 그린 영정을 새 지폐 모델..조선시대 땅에 대한 상속·증여·매매의 기록을 담은 분재기는 현재 국세청 조세박물관 특별기획전 ‘땅, 나눔과 소유’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는 조선시대에 재산상속과 토지매매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고문서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재산상속과 토지매매와 어떻게 다른지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는 올해 8월까지 계속된다.
-2010-01-19 06:00 노컷뉴스 엄해림 대학생 인턴기자-
Comment '6'
-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1592)을 거치면서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여성의 지위 하락과 비하입니다.
임진왜란 전에는 결혼을 하면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때는
'장가가다'라는 말(물론 그 뜻은 '장인'의 집으로 가는 것임)이 많이 쓰였는데 임란 후 '시집가다'라는
말이 부각되고(시댁으로 가다) 며느리를 종부리듯 했다는 거죠.
고려 시대를 보면 남녀 간의 사랑 표현이 자유롭고 신라 시대에는 여자가 왕도 하고 했잖습니까.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는 아들이든 딸이든 똑같이 50%씩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유독 아들에게만 연연하는 것은 조선 후기의 고착화, 고질화된 유교의 영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들이 그것도 큰아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재산 물려 줄 어르신들, 아들에게만 연연해 하지 말고 이제라도 딸들에게 사랑과 애정을 보내고 재산도 똑같이
나눠줘야 할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야 편견이 없겠죠? ^^
-
조선후기시대의 학자(정치가)들 보면 아주 가관입니다.
시대의 흐름은 완전히 놓치고,
힘센나라 중국(명나라)에 의존하여 약한자를 업신여기고,
당리당략에만 매달려 자기와 다른생각을 갖는사람(실학자) 혼내주는일만 관심같고..
요즘 정치하고 완전히 똑같더군요...
그 결과 나라가 엉망이 됐죠.
지금의 한국은
조선시대보다 더하죠.
나라는 반으로 나뉘었는데 더해 지방마다 이기주의로...
특히 정신적으로는 진창으로 더욱 깊숙히 빠지고 있고.....
김연아 하나보고 살아가는것도 참 힘들지 않나요...? -
그런데 저는 "신사임당이 오만원권에 올라갈 정도로 우리들에게 중요한 인물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네요. -
콩쥐 님에게 한 표,
여자를 넣고 싶었던 모양인데 넣는다면 누구를 넣어야 할까요?
지난 정부는 역대 정권에 비해서 여권 신장과 서민 정책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는데,
여성이 인구의 반이죠, 그리고 서민들은 70%(?) 정도, 그런데도 표는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는 거,
속았을까요, 아니면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서민은 재벌을 부러워해서였을까요?
옛날부터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하니 그런대로 이해를 하겠지만 서민들은 뭘까요?
참으로 알 수 없는 마음들..........
-
아... 금모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게 ...
그런데 저에게도 좀 그렇게 보이네요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재산과 제사는 남자만 차지하는 이런 유교문화의 초라한 상황.
편견은 시대마다 항상 가득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