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레즈 기타에 대하여

by 최동수 posted Sep 13, 201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아랫 글은 제가 준비중인 [기타이야기]라는 책차의 초고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아직 마무리가 덜 되어 오류가 있더라도 양해하고 흥미삼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기타의 명가 라미레즈 

 

기타제작에 관한한 스페인의 전통적인 명가인 Ramirez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호세 라미레즈가에 관한 고찰을 하려면 스페인 기타제작사를 둘러보게 되고

그러자면 역사라기보다는 세계적인 시대의 변천상을 이해하는 길이 첩경입니다.  

 

1) 기타와 세계의 변천사 : 

 

□ 무적함대의 패퇴 (1588년) :

신대륙발견 이래 스페인은 중남미와 동남아에 걸친 광대한 식민지를 소유하게 된다.

식민지로부터 들여오는 금은보화 덕분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소말리아처럼 신사의 나라인 영국 해적의 출몰이 극심한데다,

영국정부는 이를 방조하는 입장에 있었다. 

수차의 경고에도 해적의 소탕은 커녕 날로 번성하자, 마침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맹군이 영국을 정복하고자 출병하기에 이른다.

무적함대라 일컫던 127척의 함대가 출범하였으나 해전에서 기습을 당해 패퇴한다.

 

결과, 해상권을 영국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델란드가 장악하게 되고 스페인의

쇠퇴기가 시작된다.

 

 

 

□ 산업혁명 (18세기 중반 이후) :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기술상의 혁신은 이후 2세기에 걸쳐 유럽을 위시하여 전 세계로

확산되어 산업화시대로 돌입한다.

그동안 식민지에서의 수탈로 번영을 누리던 스페인은 산업혁명에의 관심을 게을리

한 탓에 근대공업의 발전이 늦어지고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한다.

 

□ 아르헨티나의 독립 (1810) :

아르헨티나의 독립선언에 이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 마드리드의 국민반란 (1808∼1814) :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군이 퇴각하자, 이베리아반도의 지배에 저항하여

반도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 Francisco Gonzalez(1818 〜1880) :

1845〜1880까지 그라나다의 같은 공방거리에서 토레스보다 7년이나 먼저 기타를

제작하였고, 호세 라미레즈 1세가 그에게 사사하였다.

 

◈ Antonio De Torres(1817〜1892) :

생업이 목수였던 토레스는 1852년부터 기타를 제작하였으나,

1869년경에 중단하고 한때 도자기 가게를 운영한다.

제작중단 직전에 Julian Arcas의 소개로 Tarrega가 방문하여 기타를 구입한다.

1875년부터 다시 기타제작을 시작한다.

 

◈ Benito Ferrer(1845∼1925) : 세고비아의 첫 악기를 제작함.

스승인 Jose Ortega와 함께 그라나다 기타제작학교를 창설했다.

 

◈ Jose Ramirez 1세(1858∼1923) :

Francisco Gonzalez로부터 기타제작을 배운 유일한 제자로 알려짐.

그는 기타제작의 Maestro로 명성을 날리며 라미레스왕국의 초석을 굳건히 한다.

 

◈ Manuel Ramirez(1864∼1916) :

호세 라미레즈1세의 6살 아래 동생으로 라미레즈의 기타학교에서 기타제작을 배움.

1891년경에 빠리로 진출코자 하여 형이 큰돈을 지원해주었으나, 프랑스의 내란으로

포기하고 마드리드에서 독립하자 라미레즈1세와의 관계가 소원해진다.

제1차세계대전 말기에 전유럽을 휩쓴 독감으로 인해 후사도 없이 사망한다.

 

◈ Santos Hernandez(1874∼1943) :

Manueal Ramirez공방에서 가장 우수한 작업반장으로 세고비아가 연주한 악기를

만들었다.

마뉴엘 사후 3년간 마뉴엘 부인공방에서 제작을 계속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하다.

같은 시기에 많은 기타제작가들도 스페인어권의 중남미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진다.

 

 

□ 스페인 전쟁(1898) :

큐바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스페인이 무력으로 평정하고자 한다.

큐바에 이미 많은 투자를 한 미국이 방관하지 않자, 미국∙스페인간의 전쟁 시작된다.

마닐라만에서 스페인이 대패하자, 큐바를 독립시키고, 푸에르토리코, 괌과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하게 된다.

이에 스페인의 국력은 급속도로 쇄잔하게 되었다.

 

□ 제1차세계대전 (1914∼1918) :

독일의 선전포고에 따라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4년만에 항복한다.

 

 

□ 세계경제공황 (1922∼1933) :

1922년 미국의 경제공황은 급기야 유럽까지 파급되어 세계경제공황 사태를 맞는다.

   

□ 스페인 내란 (1935∼1939) :

부르봉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내전이 시작되어, 1939년에 프랑코 장군이 정권을 장악,

종결될 때까지, 8년간의 내전으로 인해 국력을 소진하여 경제는 파탄 위기에 몰린다.

 

 

□ 제2차세계대전 (1939∼1945) :

독일, 이태리 및 일본이 주축국이 되어 전 세계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다.

독일과 이태리의 지원으로 정권을 장악한 프랑코총통의 파시즘 정권은 명목상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독일과 이태리를 지원하므로서 전후에는 UN가입이

거부되어 국제적으로 고립된다. 

독일의 스프루스재도 금수조치 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유보상태에

있었다.  

미∙쏘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과의 관계가 깊어지자, 1953년에 미군기지가 설치됨.

이에 따라 1955년에 유엔에 가입되면서부터 우방 국가와 교류가 시작된다. 

1960년대부터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기타제작에도 중흥기가 온다.

   

백화점이나 악기점에 독일제 일제 등 수입기타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저가 내지 중고가의 국산기타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였다.

낙천적인 스페인의 수제작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빠져 있었다.

 

 

 

라미레즈 3세의 술회에 의하면 ........

스페인의 많은 사람들이 라미레즈 악기를 갖고싶어서 졸라대었다.

한편 라미레즈도 스페인의 상공부로부터 종용을 받게 된다.

오래전에 라미레즈 1세도 물론 저가형의 기타를 만들었지만 규모는 달랐다.

실제로 세계적인 명기를 내놓은 사람도, 다량생산방식의 기타제작을 시작한 사람도

다름 아닌 라미레즈3세로 봐야 된다.

 

[주석] :

대량생산 : 자동차나 전자공장처럼 공원들이 라인작업으로 특정부품만 설치하는 방법

일반적인 저가 기타공장에서도 대량생산 방법으로 제작한다

 

다량생산 : 작업반장의 책임하에 각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제품을 완성시키는 방법

라미레즈공방은 산하에 여러 작업반장을 두고 일괄제작방식으로 제작하며

작업반장의 이니셜을 라벨에 서명하였다.

출중한 작업반장이 명성을 얻게되면 독립하는걸 지원하였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기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라미레즈 악기에 대해서는 극찬에서부터 혹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도 사실입니다.

돈 벌려고 Estudio를 많이 만든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 

  얘기가 잠시 빗나가지만,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기타의 연간 출하량이 4만대쯤 된다고 제작업계에서 들었습니다.

- 300호급 이상의 클래식기타는 연간 400대로 어림 잡고,

- 중저가의 클래식기타는 각종 기타의 연간 출하량의 1/20이라고 가정할 경우,

중저가의 클래식기타가 2천대가량 되겠는데, 이는 300호급 이상의 5배는 족히 되겠군요.

 

이건 정확성도 없고 통계자료조차 없는 얘기이지만,

저가의 기타가 고가의 기타보다는 훨씬 많이 소요된다는 짐작은 가능하겠습니다.

개인 생각이지만, 어느 나라나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 전에 스페인제 명기로 연주하는 세계적인 연주가의 명단을 훑어보았더니,

스페인의 연주가가 그리 많지 않은걸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명기급 악기는 일반적으로 연주가들이 소장하는데 외국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2) Tablao Guitar 시대(19세기 후반부터) : 

 

식민지의 상실, 전쟁, 내란 등의 역경 속에서 장기간 동안 쇠락에 쇠락을 거듭한

스페인의 시대상이야말로 나락의 암흑기였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변천사와 대조해보면 위에 열거된 기타제작가들은 거의 스페인의 암흑기에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중산층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그 시대에는 빈부의 차이가 컸다. 

노동자나 농민들은 부지런한데 반하여, 도시의 중산층들은 게을렀다.

도시인들은 지주, 귀족과 군벌 등 지배계층이 누렸던 지난날의 습관을 이어 받는다.

점심과 시아스타(낮잠)로 3∼4시간씩 시간을 허비하고는, 한밤중까지 극장, 식당과

카페에서 지내는 등, 업무에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낙천적이고 다혈질인데다 낭만적 기질이 있는 스페인 사람들의 사회적 풍조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은 노래와 기타를 즐겼다는 것도 역사에도 나와 있다. 

 

스페인의 제작가들은 고가와 저가의 기타를 만들었는데, 대중들이 선호하는 악기는

저가형이 더 많았다.

 

전술한바와 같이 몇백년에 걸친 외우내환을 겪어오다보니 서민들은 좋은 기타를

갖고 싶어도 살만한 돈이 없었다.

하물며 플라멩코로 생계를 유지하는 집시악사들의 형편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기타가 바로 “Tablao"이다. 

Tablao는 살롱 같은 작은 스테이지에서 연주하기 알맞은 가볍고 작은 악기이다.

토레스의 영향으로 전면판은 점차로 커젔으나, 측판이 상대적으로 얇아서 안고

연주하기에 편리하다.

당연히 플라멩코 기타도 이 범주에 속하며 값싼 재료를 사용한다는게 특징이다.

 

 

 

3) 호세 라미레즈 1세(1858∼1923) :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Jose Ramirez 1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Francisco Gonzalez

공방에서 제작을 배운다.

그 시절에는 어릴 때부터 공방에서 잔일을 도우며 기타제작을 배우는게 관행이었다.

곤잘레스도 명장으로 그의 악기는 지금도 Paris Conservatory에 소장되어 있다.

 

 

1882년경에 라미레즈1세도 마드리드에 공방을 차렸고, 1890년에는 제자를 양성하는

작업실도 병설하였다.

제자는 그의 동생인 Manuel Ramirez, 그의 장남 라미레즈2세, Francisco Simplicio,

Enrique Garefa 와 Julian Gomez Ramirez인데 그는 훗날 프랑스 빠리로 이주한다.

 

마뉴엘 라미레즈와 라미레즈 2세가 작업반장이 될 무렵에 Antonio Viudes와 Rafael

Casana가 합류한다.

 

얼마 후 Alfonso Benito와 Antonio Gomez도 제작을 배우러 들어왔다.

 

 

1987년 라미레즈1세는 지역전시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데 이어 다른 전시회에서도

여러번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은 넓은 나라인데다 지방색이 짙고 악기의 성향도 다른 까닭에 악기전시회도

마드리드나 세비야에서 따로 개최하는게 관례였다. 

라미레즈1세는 1882년경에 공방을 개설하였으므로, 그는 미국 ∙ 스페인간의 전쟁과

제1차세계전을 겪은 셈이다.

스페인으로서는 해외의 식민지를 거의 모두 상실한 쇠퇴기의 시작라고 보면 되겠다.

 

19세기말에는 지금처럼 클래식기타보다는 플라멩코 기타를 찾는 사람이 더 많았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플라멩코가 더 잘 알려져 있었고, 살롱이나 카페 등의 작은 장소에서

자주 연주되었다.

그런 장소에서는 작고 가벼운 기타가 적당한 까닭이다.

한 예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장 토레스가 만든 플라멩코 기타도 작고 가볍다.

  

20세기 초부터 플라멩코 기타 Tablao가 음량의 한계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늘어난 청중을 위해 살롱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 플라멩코의 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극장에서의 연주는 더 심각하였으니, 5대의 플라멩코 구룹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는 당시 가장 우수한 제작가인 라미레즈1세로 하여금 큰 몸통의 Tablao의 고안을

유발하였다.

전면은 토레스 악기보다 더 넓으면서 측판의 깊이는 얕은 형태였는데, 잠정적으로는

이런 방식이 해결책이 되기도 하였다.

덩치 큰 Tablao의 성공으로 라미레즈 1세는 큰돈을 만지게 된다.

 

그는 기타제작의 Maestro로 명성을 날리며 라미레스왕국의 초석을 굳건히 한다. 

그러나 동생인 마뉴엘 라미레즈와는 달리, 완고한 라미레즈 1세는 만년까지도 한때

성공하였던 그의 Tablao를 고집하였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제작가도 많았다.

 

타레가(1852∼1909)도 토레스 뿐아니라 라미레즈 1세의 기타를 사용하였으며

어거스틴 바리오스 망고레도 그의 악기로 연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Tablao를 훨씬 더 많이 제작하였고, 이런 저가품 기타에는 라벨조차

붙이지 않았다.

 

 

4) 마뉴엘 라미레즈 (1864∼1916) : (1869∼1920)설은 오류임. 

 

호세 라미레즈가의 직계는 아니지만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〇 마뉴엘 라미레즈의 일화 : 

토레스의 사후 얼마 안되어서 마뉴엘 라미레즈에게 우연히 토레스 기타의 라벨

2장이 입수되었다.

마뉴엘 라미레즈는 최선을 다하여 토레스기타의 짝퉁 2대를 만들었다.

기타의 안쪽에는 먼저 자신의 라벨을 붙인 다음, 그 위에다 토레스의 라벨을 살짝

붙여 두었다.

 

마뉴엘은 토레스의 악기 2대를 새로 구하였으니 시연해보라고 연주가들을 초대

하였다.

2 악기를 연주해본 연주가들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우수한 악기라고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마뉴엘은 나중에 뒷말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 2악기의 성능에 대한 의견을

자세히 수렴하고 다짐을 받았다. 

마뉴엘이 2 기타의 안쪽에 붙어있던 토레스의 라벨을 뜯어내니, 마뉴엘의 라벨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Manuel Ramirez는 Jose Ramirez 1세의 친동생으로 일찌감치 형의 문하에서

기타제작을 배웠는데, 그중에서 가장 탁월한 재능이 돋보였다고 한다.

6살 아래였으나 제1차세계대전 중 유럽을 휩쓴 독감으로 52세의 젊은 나이에

형보다 7년이나 먼저 사망한다.    

마뉴엘은 1891년에 빠리로 진출코자 하여, 형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프랑스의 내란 등으로 인하여 취소하고 같은 마드리드에서 공방을 개설한다.

이로 인해서 평생동안 형제간에 대면을 하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다 

타고난 창의력과 추진력의 소유자인 마뉴엘 라미레즈가 독립하자,

그는 새로운 기준에 의한 디자인으로 플라멩코 기타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그의 이상적인 모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채 플라멩코 기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뉴엘은 클래식 기타의 연구개발에도 정열을 쏟아 붓는다.

드디어, 마뉴엘은 1893년 국제적 악기품평회인 미국의 시카고 악기전시회에서

메달을 딴다. 

마뉴엘은 기타의 연구와 제작에만 매달리지 않고 바이올린의 수리와 제작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 그는 마드리드의 Royal Conservatory로부터 현악기 제작가로 인증 받는다.

- 나아가, Madrid Royal Chapel로부터 스트라디바리 4중주용 현악기 수리의

책임자로 임명 받기도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Santos Hernadez, Domingo Esteso, Modesto Borreuero 등의

명장을 배출하였다.

당시 잘 알려진 연주가 Gimenez Manjon의 의뢰를 받아 만들었던 11현 기타를

 Manjon이 값을 깎으려고 생트집을 잡자 성깔있는 산토스가 돈을 되돌려주고

기타를 내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십대의 세고비아가 찾아와 등단에 사용할 기타를 좀 빌려달라고 하자, 산토스를

시켜서 진열장에서 잠자고있던 그 11현기타를 개조하여 6현으로 만들었는데...

세고비아의 연주를 듣고 감동한 마뉴엘이 그 악기를 세고비아에게 헌정한 것이다.

 

몇년 안되어 세계적인 기타리스트가 된 세고비아는 돈을 갚는 대신 엄청난 명예를

마뉴엘에게 안겨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세고비아는 그 기타를 무려 23년간이나 연주에 사용한 것이다

줄리안 브림도 마뉴엘의 악기로 연주하였다.

 

마뉴엘은 자식이 없으므로 그의 사후에는 실제 제작자의 이니셜을 악기에 명기하는

조건으로 [VIUDA DE MANUEL RAMIREZ-마뉴엘의 부인]이라는 기타를 제작

하기도 하였다.

 

  

5) 호세 라미레즈 2세(1885∼1957) : 

 

라미레즈 1세는 네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인 라미레즈 2세를 제외한 세 아들은

다른 직업에 종사하였다.

 

라미레즈 2세는 알아주는 기타 연주가 였다

그는 1904년부터 2년간에 걸처 민속음악단의 일원으로 중남미의 여러 나라를

순회연주 하던 중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정착한다.

거기서 낳은 아들이 호세 라미레즈 3세이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기타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가 1919년 세비아에서 개최된 범 라틴국가 박람회에서 최고금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923년 라미레즈 1세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40세에 귀국하여 가업을

잇게 된다.

당시 Alfonso Benito와 Antinio Gomez가 작업반장이었고, Jesus Martinez가

도장을 맡았다.

Marcelo Barbero는(수습생)로 있었는데, 머지않아 독립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작업반장들을 열거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훗날 모두 유명한 제작가가 되므로

명기급  소장자들은 참고하시라고... 

 

라미레즈 2세는 제1차세계대전, 세계경제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골고루 겪었다.

특히 스페인내란 때 마드리드에서 공방을 운영한 탓으로, 외우 내환으로 인하여

악기재료와 각종 기자재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악기의 수요도 감소되어 작업반장도 줄여서 홀로 작업하다시피 한 적도 있다. 

그의 기타를 소장한 연주가는 Barrios Mangore, Carlos Montoya, Miguel Llobet,

등이다

 

 

○ 헤드의 모양 :

라미레즈 2세의 기타도 헤드의 모양은 라미레즈 1세의 헤드와 비슷한데,

이는 가업 전승의 상징이라 봐야겠다.라미레즈 1세 기타의 헤드는 프랜시스코 곤잘레스의

헤드와 똑같은바, 이것도 스승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헤르만 하우저가의 헤드모양은 1,2세와 3세 모두 토레스의 헤드와 거의 같다.

이는 하우저 1세가 처음에 토레스를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모델을 고안 하였으므로

토레스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걸로 유추할 수 있다.

 

 

 

 

6) 호세 라미레즈 3세(1922∼1995) :

 

 

Jose Ramirez 3세야말로 라미레즈 왕국을 굳건하게 건설한 장본인이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를 따라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18세인 1949년부터 가업인 기타제작에 합류한다.

 

아버지는 다른 도제들과 마찬가지로 가차 없이 제작을 배우도록 하였고,

엄격하게기준 디자인대로만 제작하도록 감독하였다.

그는 1957년 라미레즈 2세의 사망 후 가업을 계승하게 된다.

 

기타의 성능개발이 이미 완성된 것도 아니고,

오케스트라나 다른 악기 앞에서는맥도 못추는 처지에 기타의 형태가 그대로 머무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미레즈 3세는 비록 기타음향에 관한 충분한 자료는 없지만 관련분야에 지식이 있는

과학자들과 함께 발현음을 증폭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로 한다.

- 그는 전면판의 대체 재료로 레드시더(Thuja Plicata)를 선정하였다

- 여러 가지 바니쉬의 진동전달과 Crystallization을 비교 분석한다-

- 타현 및 공명통으로서의 측판의 기능과 효율.- 발현에 적합한 현장과 공명통 크기의 상관관계

- 사용할 목재의 건조를 위한 재래식 방법 외에 자외선의 사용 등.아직도 갈 길은 멀었지만,

 

그는 세고비아가 1937년 이래 독일제 기타만 연주하는데 무척 속상해 하였다.

세고비아는 그동안 몇 번 악기를 가져갔으나 콘서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드디어 1960년에 세고비아가 그의 악기로 콘서트를 하는 날이 찾아왔다.

그 때부터 세고비아와 40년에 걸친 오랜 교분이 시작된다.

세고비아가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라미레즈 기타는 거의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 라미레즈3세의 수상내용

:- 1962년 시카고에서 기타협회주최 전시회에서 금메달 수상

.- 마드리드 상공회의소로부터 동메달(전 기업을 대상으로 하므로 큰 상임).

- 1968년 로마의 Centro Culturale Chitarra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감.

- 1972년 마드리드에서 명장에 선정되어 금상 수상.

- 1983년 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명예 작곡가상 수상

- 1986년 인간문화재로 지명됨.

- 1987년 마드리드상공회의소로부터 왕조100주년기념 포상.

- 1987년 빠리의 문화교육성으로부터 금제 소리굽쇠 수상.

 

 

- 무엇보다도 귀중한 상은 세고비아가 타계하기 수개월 전에 라미레즈 3세에 관해서 쓴

짧은 헌정사이다.

 

 

『 A FEW WORD ABOUT JOSE RAMIREZ :

 

호세 라미레즈 3세는 훌륭한 기타 제작가일뿐만 아니라

기타의 발전사에 기여한 지칠 줄 모르는 연구가이다.

그는 찰현 및 탄현악기의 신비한 진동파와 음질을 연구하였다.

 

그는 아주 소수의 현악기제작가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 그 이상의 방대한 지식을 소유하였다.

그는 그러한 지식을 끊임없이 실질적인 작업에 적용하므로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라미레즈는 그를 돕는 탁월한 제작기술자들의 협력을 받아 창조적인 솜씨로 기타제작의

지도와 감독, 개선과 수정 작업을 하므로서 날이 갈수록 성능을 향상시켜 왔다.

 

나는, 지금까지 20대가 넘는 그의 기타로, 녹음실 뿐아니라, 청중이 3,000명, 4,000명,

때로는 5,000명도 넘는 콘서트 공연장에서 나홀로 라미레즈가 흘린 땀의 열매를 맛보았다.

일례로, 미국 디트로이트 근교의 Ann Arbour 공연장에서는 청중 5,000명이 넘는데도

마이크를 사용치 않고 연주하였는데, 그 이유는 예술보다 상업적인 면에 비중을 두는

이즘 젊은이들이 이용하는 확성기를 반기지 않는 까닭이다.

 

전 생애를 걸고 목표의 실현을 추구하는 강한 집념으로, 호세 라미레즈 3세는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색으로 울려퍼지는 기타를 만들어 낸 것이다』

 

Andrez Segovia  Maraquis of Salobrena

 

 

 

세고비아는 연주 여행에 기타를 한 대만 갖고 다니는데, 너무나 잦은 연주를하다보면 악기가

고장이 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라미레즈는 이에 대비해서 늘 기타를 포장해두었다가 보내주곤 하였다.

 

한번은 미국에서 연주 중에 악기가 고장났는데 보내줄 시간이 모자랐다.

하는 수없이 가까이 있던 어거스틴 기타줄 회사(듀퐁) 사장부인이 소장하고있던 라미레즈 2세 악기를

헌정했다고 한다.

 

그는 세고비아가 지적한 바와 같이 문제의 여린 음정과 울프노트를 해결하고자 노력을 경주하였다.

 

거트현 시대가 저물며 1940∼1950년대에는 나일론 현이 범용화 되기 시작한다.

나일론 현의 효능을 극대화하여 오늘날과 같이 힘차고 아름다운 소리를 발현할 수있도록 이에

적합하게 악기를 성능을 개선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1950년대에 들어서서 그는 연구실에서 실험한 결과 얇은 측판으로는 발현효과가 미진함을 발견하였다

먼저 측판의 변형을 방지하므로서 내부응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안쪽에 라이닝을 한 이중측판을

고안하였다.

 

몸통내 공기의 진동을 더욱 활력있게 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664mm로 늘리는게 최선임을 깨달았다.

이는 3프렛에서 1.5mm정도 프렛간격이 커지는 만큼 운지의 어려움은 있겠으나  실보다는 득이 더 크다는

판단이 섰다.

라미레즈의 영향으로 60∼70년대에는 전세계에 현장 664mm 악기가 유행하게 된다.

심지어 일반현장인 650mm의 기타는 잘 안팔릴 정도 였다.

 

네크도 습기에 의한 변형을 방지하기 위해 안쪽에 흑단 심을 심었다.

네크의 두께와 폭은 누가 뭐래도 세고비아의 힘 있고 큰 손을 기준으로 삼았다.

전통적으로 악기에 입히던 쉘락이 습기로 인한 변형에 취약함을 고려하면, 오히려 두터운 락커가

전면판의 횡적진동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락커 마감을 개발한다.

 

[De Camara Model]의 경우, 측판의 중간을 따라서 얇은 날개를 부착하므로서 울프 노트를

방지하도록 개발된 것이다.

 

그라나다의 기타학교와 같이 마드리드의 라미레즈가도 기타학교의 소임을 갖고 있었으므로

3세의 문하에서 작업반장으로 있다가 배출된 제작가가 빠우리노 베르나베, 콘트레라즈,

만자네로와 산자노 등이 있다.

 

라메레즈 3세가 개발한 1a야말로 많은 세계적인 연주가들이 애용하였다.

크리스토퍼 파크닝과 줄리안 브림도 그 중의 하나이다.

지금도 가쯔히도 야마시다는 아직도 1a로만 연주하고 있다

 

 

7) 호세 라미레즈 4세와 아말리아 : 

 

라미레즈4세는 1953년에 태어났다.

그는 1977년에 명장의 칭호를 받게되며 세고비아도 그의 악기를 연주에 사용하였다.

세고비아가 사용하던 4세의 기타는 $50,000에 수집가에게 팔린 기록이 있다. 

1995년에 타계한 라메레즈 3세의 생존 시인 1988년에 라미레즈 4세와

누이 아말리아가 사업을 승계 받게 된다.

아말리아도 라미레즈3세 문하에서 기타제작기술을 전수 받았다. 

라미레즈 3세 때는 연간 120대를 제작하였는데,

1990년대에 라미레즈4세가 제작규모를 연간 1,000대로 확장하면서

다양한 수준의 기타를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배급처를 잘못 선택함에 따라 악기의 품질이나 성능과 관계없이

흔해빠진 악기가 되자, 유명 연주가들이 라미레즈기타를 내려놓는 바람에

일순 평가절하 되고 만다. 

라미레즈3세의 유시에 따라 현재의 규모와 같은 연산 120대의 규모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스페인의 사회노동법 때문에 규모를 줄이는게 불가능하였다.

몇년이 걸려서 해결한 방법이 지금과 같은 전문하청제도이다.

 

불행히 라메레즈4세는 2000년 6월에 사고로 타계하고 아말리아가 사업을 책임지게 된다. 

196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현장664mm의 명기 1a를 라미레즈4세는 현장을 650mm로

줄여서 Traditional과 Especial model로 개량하였다.

이 악기들은 예전 라미레즈3세의 1a와 비교해 손색이 없어 보이는바 판매가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라미레즈 공방에서는 아말리아의 직간접 감독아래 연주용 기타만 만들고 있다고 한다

  

 

현재 라미레즈의 보급용 기타는 각각 개별적으로 명망 있는 제작가들이 하청형식으로 제작하여

아말리아의 감수를 받는다는데 그 이하는 매니아님들이 잘 아실터이므로 생략합니다.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