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청계천 - 3

by 최동수 posted Aug 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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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어제와 오늘
                                    

오래 전부터 옛 서울의 4산 즉 북악. 남산, 인왕산과 낙산의 산마루로
둘러싸인 사대문 안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시내를 개천開川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강물이 대부분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 시냇물만은 동쪽으로
흘러나가므로 사람들이 정도正道를 얻었다 하였다.
개성의 명당수明堂水를 개천이라 하였으므로 서울의 명당수도 개천이라
하였을지? 혹은 잦은 범람에 대비하여 시내 밑바닥을 파고 폭을 넓히는
공사를 계속 해온 까닭에 활짝 터놓은 시내라는 뜻이 담긴 개천인지?
청계천이라는 명칭도 일제강점기 이후라고는 하지만 어느 때부터 바뀌게
되었는지 한낱 입으로 전해지는 얘기일 뿐이다.


개천의 관점에서 보면 이조 500년 역사야말로 4산9지四山九支로 이루어진
초대형 시내인 이 개천의 범람과 준천濬川으로 이어진 역사이기도하다.
중랑천과의 합류 지점에 뚝섬이 생길정도로 바닥이 낮아 폭우가 며칠간만
계속해 내리면 넘쳐흘렀다고 한다.
세종3년 6월에는 큰 홍수가 나서 집이 75채나 떠내려갔고 개천 근처
사람들은 지붕이나 나무 위로 올라가서 곤경을 피하였으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아서 거리에 곡성이 가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최근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무교동 네거리어귀에서 조선시대에 쌓은
호안석축護岸石築이 발굴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호안은 범람을 막기 위해 자연하천이던 개천의 바닥을 파내고 폭을 넓히며
물길을 직선화시키는 과정에 석축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청계천의 호안은 조선초기인 태종과 세종 때, 그리고 후기인 영조와 고종 때
건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호안 쌓기는 인력과 물자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태종과 세종 때는
개천 양쪽둔덕에 초목을 정비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며, 대대적으로 호안을
쌓은 것은 영조 때인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1773년 8월초 청계천 호안공사가 끝나자 영조는 79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광교로 직접 나가 석축을 시찰한 뒤 공사를 담당한
군사들에게 엽전을 건네주고 다리 밑에 모인 아이들에게도 엽전을 던져
줍게 했을 정도로 큰 기쁨을 표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 8월께 동문 이만익 화백의 64년도 작품인 120호 화폭의 ‘청계천’이라는
풍경화를 보게 되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청계천 복원사업 기념전시회에서였다.
내가 설명하고 싶은 청계천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땀내 나고 신산했던 청계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요즈음에는 그곳을 쓰레기 고고학의 보고寶庫라고 높여주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오염된 악취의 하수도 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시빈민이 증가하면서 개천의 오염이 심해져 전염병과 범죄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한 그런 동네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워커힐 나들이를 위해 건설되었다는 괴물 같은 청계고가도로가
드디어 지난 8월 31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돌이켜 보면 고가도로는 그런대로 쓸만하기는 했다.

개발독재 시대에 불도저라는 별명의 서울시장이 저지른 대담, 기발 내지 부조리는
지금은 불도저로도 허물어 낼 수 없는 도시의 흉물이 되어 도처에 어울리지 않게
남아있다.
청계로 7가의 삼일아파트며, 시청에서 남산의 판자촌이 보일세라 시청 앞 광장에
프라자호텔을 지어 남산 조망을 좍 가려버린 일이며, 낙원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개천을 복개하면서 한가운데를 건너지르는 낙원상가아파트를 세운 것 등 많기도 하지만,
요새말로 주제에서 오버? 할까봐 이만 줄인다.


  긴긴 가난 속 우리의 삶터였던 청계천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어렵던 일상을 이겨낸 청계천 사람들에게 봄이 온 것이다.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거리 이름도 청계로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모든 지류도 덮이기 시작하여 어느 사이 사대문 안에
모든 개천이 덮여 버리고 그 위로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그 시대에 걸맞는 역사라고나 할까?
덕분에 도시가 온통 회색빛으로 변하여 삭막하여짐에 따라 인심마저 갹박하여졌는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차량과 인파가 붐비는 소위 청계로 시장거리로 탈바꿈한 것이다.
없는 것이 없는 곳,
시장 속을 뒤지면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다는 곳,
세계에서 유일무이? 하게 상설 벼룩시장이 있는 곳, 황학동 골동품 시장 말이다.
중소기업의 모태이자, I.M.F도 비켜 갔다는 곳.
이곳에서 장사하다 거덜 난 사람이 드물다는 말도 헛소문은 아닌 듯하다.
헙수룩한 점퍼를 걸치고 가게 앞을 어슬렁대는 그네들이 실은 잘 알려진
대 기업의 주주보다 알부자란 것이다.

청계천이야말로 우리네 삶의 뒤안길이며, 무질서의 마당이자, 활력의 분신이고,
성공에의 나루터이며, 황금만능시대의 주역이다.


  산업화와 도시집중화 현상에 이끌려 회색빛 콘크리트 숲이 되어버린 특히
대도시의 도심에 자연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세계적인 추세로 돌아오고 있다.
이에 따라 청계천의 복원공사는 70년대 말 완전 복개된 이래 이곳에서 삶의
현장을 지켜온 상인들의 애환을 뒤로하며 그런대로 지지를 받고 있다.
  바야흐로,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복개도로 철거작업이 한창이다.


  나에게도 한 바램이 있다.
청계천의 복원이 장차 자연과 인간의 상생相生을 추구하는 문화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남아 있는 이와 떠나야만 하는 이의 갈림길이 있다.
기대에 부푼 사람들이 있는 반면 갈 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떠나야만 하는 그네들에 대한 기억만큼은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우리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끝.

2003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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