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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정천식2012.12.12 14:12

아래는 유종화 시인의 [어허, 만사 풍년이로다]라는 글입니다.


안상학 작시. 유종화 작곡. 꼬두메 노래.

보리밭

꽃이 피기도 전에 봄이 왔나봐
꽃이 피기도 전에 봄이 왔나봐
엄마 생각나 엄마 생각나
너무 일찍 잠 깬 호랑나비 한 마리
청보리밭에 잠시 앉았다
날아가는데 엄마 생각나
고생만 하고간 엄마 생각나
우우우우 엄마 생각나



4월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들은 어린애들 발자국에도 다져질 것이고, 새싹과 함께 보리도 그 잎을 피울 것이다.

어려서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남달리 새싹 중에서도 보리싹을 좋아한다. 가서 힘껏 밟아 주어야 튼실한 보릿대가 자라고 어린 싹은 솜털처럼 보드랍기도 하다. 또 이제 갓나온 싹은 어머니나 누나의 나물 바구니 속에 담겨와 구수한 봄내음을 풍기는 맛있는 된장국도 되어 주었다.

그런데 또 하나, ‘보리밭’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물레방앗간이다. 언뜻 보아서는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마는 찬찬히 생각해보면 우리네 조상들의 낭만이 서려있다는 점에서 같다. 벌써 이 말을 눈치채고 속으로 웃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보리밭과 물레방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남녀가 은근히 만나는 일종의 러브호텔(?)의 역할을 해주었었다.

이제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리라고 본다. 그럼 그런 얘기를 담고 있는 시 두어 편 보고 가기로 하자.

바람난 처녀총각
단오 무렵 보리밭에서 껴안고 뒹군다
지나던 밭임자 먼 산 보며 하는 말
풍년이로다 어허, 만사 풍년이로다

정동주의 「전설」이라는 시이다. 지나던 밭임자의 넉넉한 마음과 함께 우리 조상네들의 생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옛날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물레방앗간과 함께 보리밭이 은근한 정을 나누는 최고의 장소였다.

말이 나온 김에 송기원의 「숫처녀」도 마저 감상하고 가자.

열 아홉, 스무 살짜리 떠꺼머리 손님이
아짐씨 함시롱 달려들면은
오매, 벌받을 소리제만
나가 꼭 그만한 나이의 숫처녀 같어라우
뭣이냐, 보리밭 속에서 하늘이 빙빙 돌고
종달새가 지지배배 지지배배 울어쌓고
보리까시라기는 가심이며 귓볼을 찔러대고……
나이가 먹응께 이런 것까장 헛보인단 말이오.

어느 늙은 창녀의 말을 옮겨 놓은 시이다. 그 창녀에게도 귀한 낭만의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보리밭을 통해서 지금도 가슴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다. 참 눈물겹기도 하고, 처지와 상관없이 가슴에 살짝 간직한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을 읽게 해준다.


--<<봄날이 오면 까닭도 없이 그리워진다>>--


이제 빗나간 보리밭 얘기는 잠시 제쳐두고 오늘 얘기하려는 보리밭으로 넘어가 보자.

꽃이 피기도 전에 봄이 왔는가 보다
너무 일찍 잠 깬 호랑나비 한 마리
청보리밭에 잠시 앉았다 날아간다
고생만 하고간 엄마 생각이 난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어느 문학지에서였는데, 적어도 5년은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며 가끔 이 시를 떠올리곤 한다. 참 단아하면서도, 그냥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고, 정갈한 노래 같기도 한 시이다. 안상학의 「보리밭」이라는 시의 전문인데 시인은 보리밭을 보면서, 일만 하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한다.

앞의 시들과는 그 정서가 사뭇 다르다. 보리밭을 보고 봄을 느끼고, 보리밭에 잠시 앉았다 떠나는 호랑나비 한 마리를 보면서 이제는 내 곁에 안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이다. 내가 시골에서 자라서 잘 아는데, 일 중에서 보리밭일이 제일 어려운 축에 든다. 보리타작을 할 때 목이며 겨드랑이에 찔러오는 까시라기의 느낌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게 견디기 어렵다. 거기다 땀까지 범벅이 되면 더욱 더하다. 시인의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보리밭 고르는 일에서부터 이런저런 잔손이 많이 가는 밭일에 시달리고, 또 타작할 때의 어려움을 다 겪었을 것이다. 시인은 또 그런 모습을 다 보고 자랐을 것이고, 보리밭을 보면서 그런 모습의 어머니와 중첩된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고생만 하고간 엄마 생각이 난다”고 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어머니도 보리밭에서 이런저런 고생을 다 겪으셨다. 지금도 시골에서 살고 계신데, 나는 이 시를 보면서 우리 어머니를 떠올렸고, 그래서 나직이 노래로 불러 보았다.

꽃이 피기도 전에 봄이 왔나봐
꽃이 피기도 전에 봄이 왔나봐
엄마 생각나 엄마 생각나
너무 일찍 잠 깬 호랑나비 한 마리
청보리밭에 잠시 앉았다
날아가는데 엄마 생각나
고생만 하고간 엄마 생각나
우우우우 엄마 생각나

시골에서 고생을 하신 어머니를 둔 모든 자식들이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불렀으면 좋겠다. 새봄을 맞이해서 너무 예쁜 꽃에만 취해있지 말고 가슴에 녹아 있는 추억을 다시 한 번 꺼내어 쓰다듬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어쨌든 이 시를 보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안상학 시인이 그리워진다. 이런 봄날 그와 만나서 보리밭에 앉아 소주 한 잔 기울이면 한세상 그렇게 흘러가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서로에게 흠뻑 취해버릴 것만 같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는 안상학은 바로 그런 사람일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봄날이 오면 까닭도 없이 그의 시가 생각나고, 또 그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심심해지면 동네청상과 보리밭으로 들어가……>>--


소주 얘기가 나왔으니 그 얘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한다. 어젯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그의 시집을 다시 꺼내 읽었다. 공교롭게도 제목이 『안동소주』이다. 내가 전라도 땅에서 소주를 기울이는 동안 그도 경상도 어느 땅에서 소주와 함께 한세월을 껴안고 그렇게 보내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시집 제목으로 쓰인 「안동소주」라는 시를 읽다가 나는 또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부분을 발견했다. 한참동안 눈을 붙박아 놓고 그 구절을 읽다가, 속으로 빙그레 웃음지으며 이 글을 쓴다. 아뿔사! 그의 가슴에도 또 다른 보리밭의 추억이 있다니……그것도 나보다 한술 더 떠 ‘청상’과의 낭만을 꿈꾸고 있다니. 오늘은 내가 졌다.

이제 많은 추억을 다시 불러 일으켜주는 좋은 시를 쓴 경상도의 어느 시인, 안상학의 시 「안동소주」를 읽으면서 마치도록 하자. “동네 청상과 보리밭으로 들어가”던 옛날 우리 조상네들의 낭만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말이다.

나는 요즘 주막이 그립다
첫머리재, 한티재, 솔티재 혹은 보나루
그 어딘가에 있었던 주막이 그립다
뒤란 구석진 곳에 소주고리 엎어놓고
장작불로 짜낸 홧홧한 안동소주
미추룸한 호리병에 묵 한 사발
소반 받쳐들고 나오는 주모가 그립다
팔도 장돌뱅이와 어울려 투전판도 기웃거리다가
심심해지면 동네 청상과 보리밭으로 들어가
기약도 없는 긴 이별을 나누고 싶다
까무룩 안동소주에 취한 두어 시간 잠에서 깨어나
머리 한 번 흔들고 짚세기 고쳐매고
길 떠나는 등짐장수를 따라 나서고 싶다
컹컹 짖어 개목다리 건너
말 몰았다 마뜰 지나 한 되 두 되 선어대
어덕어덕 대추벼리 해 돋았다 불거리
들락날락 내 앞을 돌아 침 뱉었다 가리재……
등짐장수의 노래가 멎는 주막에 들러
안동소주 한 두루미에 한 사흘쯤 취해
돌아갈 길 까마득히 잊고 마는
나는 요즘 그런 주막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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