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헤지스.

by 지얼 posted Jun 2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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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칭구 음악 듣기>에 가시면 들을 수 있어요....

----마이클 헤지스

'먹구름이 잔뜩 찌푸렸고 바람마저 이제 겨울을 느끼게 하는...'라고 기록되어 있는 97년 11월 4일의 저녁 미국 캘리포니아주 멘도시노의 외곽쪽 128번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차량이 발견되었다. 이미 운전사는 숨진 상태였고, 이미 시간은 꽤 흐른 뒤라고 추정되었다. 이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된 이가 바로 다름 아닌 마이클 헤지스였다.

마이클 헤지스를 이야기 할 때 기타리스트, 싱어, 작곡가, 음향 엔지니어,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자연주의 사상가 등으로 수식되며 많은 음악인의 존경을 받던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훌륭한 뮤지션의 입에 존경하는 인물로 자주 오르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그의 죽음은 너무나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다. 어이없게도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그와 이름이 비슷하고 미국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던 호주밴드 INXS의 보컬리스트 마이클 하친스의 죽음으로 잘못 보도되면서였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우연의 일치일까? 실제로 마이클 허친스는 비슷한 시기인 11월 22일 시드니의 모 호텔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마이클은 1958년 12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새크라멘토에서 태어났고, 곧바로 오클라호마의 에너드로 이주했고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4살이 되던해에 그는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고, 이후 고등학교에 가서는 첼로와 클라리넷, 그리고 플롯을 가장 나중에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그의 자연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도, 그는 상당히 체계적인 공등 음악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클라호마의 필립스대에서 플롯과 작곡을 전공했고, 이후 교육과정이 가장 까다롭다고 알려진 벌티모어의 피바디대에서 클래식 기타와 전자음악을 수료했다. 80년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돌아왔고, 다시 스탠포드에서 컴퓨터 음악을 전공하던 중, 뉴에이지계의 대표적 레이블인 윈댐힐 레코드와 계약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너무도 유명한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죠지 윈스턴이 소속된 레이블로 유명한 윈댐힐은 죠지 윈스턴 이외에도 베이시스트 마이클 맨링, 알렉스 드 그라시, 턱 앤 패티로 우니나라에 내한했던 턱 안드레스, 그리고 윈댐힐의 사장이자 기타리스트인 윌리엄 애커맨등이 소속되어 있다. 윌리엄이 마이클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고한 인터뷰에 의하면......



"랜디 루지라는 뉴 바시티 극장의 관계자를 우연히 길에서 만났어요. 그가 그러더군요. '이보게 만약에 내가 소개하는 이 사람의 연주를 보러 와 주겠나? 그러면 내가 저녁식사와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는 티켓을 두장 주겠네'라고요. 나는 괜찮은 제의라고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그를 따라갔죠. 그는 저를 이층의 조그만 방으로 안내했고 거기서 마이클을 처음 보았어요. 나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죠. 그때 그가 연주하던 곡들은 이후 그의 데뷔앨범에 수록된 곡들이었고 나는 완전히 빠졌어요. 나도 모르게 테이블에 있던 냅킨을 집어 들고 계약서 양식을 써내려 갔어요. 그리고 그에게 가다갔죠. '여기에 사인하겠나?'하고 물었더니 그가 그냥 물끄러미 나를 쳐다 보더군요. 전 그때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의 시선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어요. 마치 선계의 사람 같았다고요. 그는 아무말 없이 냅킨 계약서에 사인을 하더군요" 이일은 마이클과 윌리엄의 유명한 일화이다.





결국 마이클은 이듬해인 81년 피아노에 죠지 윈스턴과 베이스에 마이클 맨링이 참여한 데뷔 앨범인 Breakfast in the Field를 발표하게 된다. 84년 2트랙 녹음 방식에 완전 라이브 레코딩으로 진행된 Aerial Boundaries를 발표하였고 지금가지 가장 마이클 헤지스다운 앨범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35만장 이상의 세일즈를 기록해 가장 성공한 앨범으로도 기록되었고, 이듬해인 85년에는 실험적인 시도로 와인잔을 이용한 타악기 연주를 비롯해, 기타, 하모니카, 플룻 그리고 보컬가지 담당한 밴드형태의 앨범 Wacthing My Life Go By를 완성했다. 그리고 본격 라이브 활동에 돌입, 그가 고안한 하프기타를 선보이기도 했다. 투어의 마지막 무렵인 87년 4월과 5월 사이에 연주를 모은 라이브 앨범 Live on the Double Planet을 발표하였는데, 스튜디오 레코딩을 방불케 하는 정교한 연주로 많은 뮤지션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그의 실험정신은 계속 이어져 90년 보컬, 기타, 플룻, 피아노, 베이스, 드럼에 프로듀싱까지 담당 원맨밴드 앨범 Taproot를, 94년엔 The Road to Return을 각각 발표했다. 96년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앨범 Oracle이 소개되었고, 안타깝게도 98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뉴에이지 앨범으로 선정되는 순간을 하늘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윈댐힐은 그간의 미발표 곡을 수록한 앨범Torched를 99년 내놓고 더 이상 없을 마이클을 애도했다.

많은 평론가와 뮤지션들은 마이클을 재즈 기타리스트 스탠리 조던과 비교를 한다. 아마도 양쪽 모두, 고난도의 태핑 테크닉을 구사하며, 기타 한 대로 여러명이 연주하는 효과를 내는 점이 유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일렉트릭 기타를 고집하는 스탠리는, 같은 연주를 하더라도 훨씬 많은 힘과 기술이 필요한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는 그를 높이 사고 있으며, 레이블 메이트이며 그의 전임 베이시스트 마이클 맨링은 위대한 코드 진행에 거수하고 있다. 한 코드, 한 코드의 움직임이 특이한 이유는 오랜 시간 투자하며 이론에 힘을 쏟은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오히려 그가 피바디나 스탠포드에서 전공하던 일반적이지 않은 진행과 효과들을 어쿠스틱으로 반영한 그만의 플레이를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



Oracle앨범에서 들을 수 있는 헨리 맨시니, 프랭크 자파등의 커버곡에서 들을 수 있는 진보적인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프랭크 자파에서 영향을 받은 기타리스트 스티브 바이 역시 그를 신의 창조물에 비유하며 그토록 아름다운 소리는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다고 극찬하였다. 때로는 팝적인 부분이 보여지는 것은 언제나 인터뷰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틀즈에게서 받은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진정 위대한 음악은 정신이 담겨야 한다고 했던가?






그의 자연주의 사상은 80년대 번성하던 뉴에이지 운동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인터뷰에 의하면 신에게 반대하며 지상에 낙원을 세우자는 것이 아닌, 신이 만들어 놓은 자연에 동화하자는 의미라고 한다. 평소 그의 친구이자 조언자인 죠지 윈스턴의 코멘트는, 자신이 악마적이라면 마이클은 순수한 자연적인 음악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주검을 둘러싸고 있는 자살인가? 사고인가? 하는 소문사이에는 조용한 뉘앙스를 안겨준다. 그저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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