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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쥴리아니는 바이올린의 N. Paganini(1782~1840), 피아노 연주의 F. Liszt(1811~1886)에 필적하는 명성을 지닌 기타 연주의 대가였으며 F. Sor와는 3살의 차이가 있었지만 런던 음악계에서는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바를레타에서 1781년에 태어나 바이얼린과 기타, 플룻을 공부했다. 그가 기타연주가의 대가로서 유럽전역에 걸친 연주여행을 처음 갖게 된 것은 1800년 경이었고 1807년에는 비엔나에 정주하였다. 비엔나에서 그는 수베르트, 베토벤, 베버, 훔멜과 같은 당대의 대작곡가들과 사귈 수 있었다. 베토벤은 자기작품 몇가지를 쥴리아니를 위해 편곡하여 1813년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초연시 바이올린이나 플룻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악기로 반주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 곡들이 확실히 발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823년 런던으로 건너가 연주했는데 거기서 그는 매우 유명해져서 런던에서 새로 발간된 한 기타연주 관계지는 그의 이름을 따라 「쥴리아니아드(Giulianiad)」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쥴리아니의 연주용 작품이라면 기타와 현악을 위한 협주곡 A 장조 Op. 30(이 곡은 모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음악으로 쓰이고 있지요)으로 이 곡은 그가 작곡한 네 개의 협주곡 중의 하나이다. 이 밖에 독주기타를 위한 작품으로는 전주곡, 소나타, 연습곡등 대단히 많다. 그의 Sonata Op. 15, C장조 Allegro 제 1악장과 Grand Overture A장조에 있어서는 피아노 소나타와 유사한 소나타 기법을 기초로하여 작곡된 Full Scale Piece가 그 특징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쥴리아니의 고도로 발달된 기교를 필요로 하는 것인데 다이나믹에 대한 구조적 감각의 세련도를 요구하고 있다.

출처: 기타 연주가를 위한 세계명곡집, 허병훈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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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있던 '쥴리아니'님의 글을 여기에 합칩니다. 양해바래요..

18세기 후반에 들어 기타아는 다시 일어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5선 악보로 된 교칙본이 나왔다. 다음 기타아는 겹줄에서 외줄인 6줄 기타아로 바뀌었다. 드디어 안토니오 데 토레스(Antonio de Torres)가 근대 표준형 기타아를 확립시켰다. 이 성능 좋은 기타아로 고전파 기타아리스트들은 단성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전적인 작곡기법과 악기특성을 연구하여 아름답고 알찬 작품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19세기 고전파의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이 가운데 이른바 '표현파'를 대표했던 마우로 쥴리아니(Mauro Giuliani)는 이탈리아 악파 중 가장 유명했다. 1781년 7월 27일 바를렛타(Barletta)에서 태어난 그는 기타아를 독학했지만, 20대에 벌써 이탈리아 제1의 비루투오소(Virtuoso)로 각광을 받았다. "예언자는 그 고장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란 말과 같이 쥴리아니는 약속이나 한 듯 북쪽 볼로냐로 갔다. 이보다 앞서 훼데리꼬 모렛티(Federico Moretti)는 1800년 이전에 이미 비엔나에 있었다. 훼르디난도 카룰리(Ferdinando Carulli)도 빠리로 옮겨가 살았다. <기타아 교칙본>으로 유명한 마테오 가르캇시(Mateo Carcassi) 역시 1802년 빠리에 나갔다가 2년 뒤 런던으로 갔다. 또 자니 디 훼란티(Zani Di Ferranti)는 조금 뒤늦었지만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탈리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스페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훼르난도 소르(Fernando Sor)는 망명생활이었지만, 빠리에서 활약을 했다. 디오니시오 아구아도 두 번이나 빠리의 소르를 만나러 가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 무렵 음악의 중심은 비엔나와 빠리 그리고 런던이었다. 18세기까지 기타아는 알프스 북쪽에서 많이 쓰이지 않았으나, 19세기에 들어와 흥성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의 남·북 문화교류를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쥴리아니가 비엔나로 들어간 1806년 가을 무렵, 이 도시는 고전파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에 이어 베토벤, 슈베르트가 두각을 나타낸 시대였다. 여기에 쥴리아니가 나타나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기타아의 진가(眞價)를 묻게 된 것이다.

당시 신문의 음악란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쥴리아니의 이름이 비엔나 신문에 처음 나온 것은 1807년 10월이었다. 그 달 21자 신문에는 작품번호 2와 3이 출판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작품번호 6은 <8개의 변주곡>의 대작으로 쥴리아니의 이름을 널리 유명하게 한 출세작이다. 다음 해 1808년 4월 3일 레두렌잘 아카데미에서 쥴리아니의 <기타아 협주곡 제1번 A장조, 작품번호 30>이 초연되었다. 그는 작곡 뿐만 아니라, 기타아도 직접 연주했다. 이 날 연주장에는 청중의 한 사람으로 베토벤이 와 있었다. 악성 역시 쥴리아니의 기타아에 도취되어 열광했다 한다. 또 베토벤은 "기타아는 그 자체가 작은 오케스트라이다"라 극찬했다 하며, 이것은 쥴리아니의 연주를 듣고 감명받아 한 말이다.

비엔나에 있는 동안 쥴리아니는 많은 활동을 했다. 베토벤 <7번 교향곡>과 <웰링톤의 승리> 초연에 첼로로 직접 연주했다. 두카텐 콘체르테(Dukaten Koncerte)에 훔멜(Hummel)과 마이세더(Mayseder) 등과 함께 출연했다.

명성을 얻은 쥴리아니는 연주·작곡가로 활약했고, 음악가·음악출판사 사장들과 친해졌다. 더욱이 많은 왕후귀족의 여자가 그를 도왔으며, 그를 따르며 사랑했던 뭇 연인이 줄 서있었다 한다. 사실 쥴리아니는 조국 이탈리아에 부인과 딸 에밀리아가 있었다. 그러나 비엔나에 도착하자마자 빌무트라는 애인을 사귀어 딸 마리아를 얻었다. 특히 부르봉왕가의 마리 루이왕비의 보살핌은 대단했다. 쥴리아니에 매료된 그녀는, 궁정명예 실내악단원의 임명과 리라 기타아를 하사했다. 또한 값비싼 보석 기념반지가지 쥴리아니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쥴리아니는 궁정을 나오기가 무섭게 팔아 치웠다. 니이나라는 애인을 위해서는 아깝지도 않았던지... 어쨌든 그 시절에는 예술가들에게 스캔들이 흔했던 모양인지는 몰라도, 쥴리아니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1817년 음악가들의 비밀 친목클럽이 생겨 베토벤, 슈베르트, 케루비니 등 유명 음악인들이 멤버였으며, 쥴리아니는 싫증내지 않고 끊임없이 기타아를 공부하여 최고의 지위를 얻었다"고 적고 당대 최고 비르투오소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때 비엔나에서는 외국 연주가에 대해 높은 세금을 부과했던 모양이므로 쥴리아니는 이를 피하기라도 하듯 한 때 비엔나에서 모습을 감춘 흔적이 있다. 1818년 9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쥴리아니의 동정(動靜)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4월 이후 연주회를 갖고, 아르타르아사와 디아벨리사에서 출판을 했다. 그 무렵 출판한 작품번호 99의 테마는 오스트리아 민요로서 "돈 따위는 있거나 없거나 매양 한가지"라는 가사가 붙어있다.

이 노래를 들어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뜻을 알 수 있다. 그 뒤 1819년 여름 이후 쥴리아니는 비엔나를 떠나 다시 되돌아 온 일이 없다.

어쨌든 쥴리아니는 1806년부터 약 13년간 비엔나에 머무르면서 눈부신 활약과 기타아 보급에 기여한 공로가 지극히 켰다. 더욱이 작곡활동에서 눈에 띄는 점은 기타아 독주에 한정하지 않고 노래나 다른 악기와의 중주(重奏)와 협주에 뜻을 두어 기타아의 위치를 확고하게 성공을 거둔 점이다.

1819년 12월 20일 쥴리아니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비엔나 친구인 아르타리아 사장에게 어려운 사정을 편지로 썼다.

12월 14일 당신의 편지를 잘 받아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다시 비엔나에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이탈리아는 가난한 나라여서 기악에 관해 전혀 무관심하고 더구나 무지해 큰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콘서트 입장료가 단 50센테시미입니다. 더욱이 청중 200명 정도 모으기가 힘들답니다.···베로나에서는 친구가 파가니니에게까지도 콘서트는 적자를 본다며 만류했지오. 파두아 역시 가난한 도시라 가망이 없었지요. 베니스는 좀 나은 것 같으나 파가니니조차 3프랑의 입장권으로 300명의 청중을 간신히 모아서 수익은 1000프랑이 채 못 되었답니다.··· 앞서 파르마, 밀라노, 볼로냐에 가서도 또 훌로렌스에 갔을 때도 가망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훌로렌스에서 마차로 빠리에 나가겠습니다. 다음 네덜란드 각지를 돌고 함부르크, 베를린, 후랑크후르트를 경유해 조금은 돈을 갖고 집에 돌아갈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도메니코여! 이것이 나의 계획이지요. 무론 '사람이 계획을 하더라도 이를 해결해주는 것은 하느님이다(일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라.)'라는 격언이 있지요. 아무튼 건강하게 또 건강이 허용하는 한 일을 해야겠습니다.···우편 배달부가 기다리고 있어 이만 줄이면서 ···

덧붙이는 글 : 되도록 길고 긴 회답을 꼭...

쥴리아니 올림

쥴리아니의 전기를 최초로 쓴 이스나르디에 의하면 1820년 말부터 1821년에 걸쳐 쥴리아니는 로마에서 파가니니 및 롯시니와 공연(共演)하고 엄청난 음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가니니와 롯니 전기작가들이 여기에 대해서는 적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시기적으薩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 쥴리아니는 로마에 살며 기타아 레슨을 하는 한편 작곡에 전념했다. 작품번호 119부터 124에 이르는 일련의 <롯시니아나> 6작품과 변주곡이 바로 쥴리아니와 롯시니의 친한 우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1823년 11월 쥴리아니는 로마로부터 예정에 없던 나폴리로 돌아왔다. 딸 에밀리아를 불러들여 기타아를 가르친 그는, 1828년 2월 부녀(父女)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에밀리아는 이제 겨우 12살이 된 소녀로서,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기타아리스트였다.

1829년 5월 8일 나포리 신문은 쥴리아니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유명한 기타아리스트 쥴리아니의 손에 걸리면 기타아는 변신하여 마치 남성의 마음에 끌려오는 하아프 같은 악기로 바뀌었다. 그의 뒤는 딸이 이었으며, 아직 어린 딸 에밀리아도 그 재능을 부친에게 물려 받은 기타아의 명수로서 기대된다. 좌우간 쥴리아니의 죽음은 달리 바꿀 길이 없는 일대 손실이다.

토머스 헤크(Tomas Heck) 박사는 그의 <학위논문>에서 위와 같이 끝맺었다. 그러나 예전 기타아 연구 정본(定本)이라 할 만한 본(Bone)의 명저 <기타아와 만돌린>에 의하면 1840년 이후라 적고 있다. 한편 쥴리아니를 찬양하며 영국에서 1933년에 출판한 잡지 <쥴리아니드, Giulianiad>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쥴리아니가 울려주는 음색은 기타아라는 악기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순수한 것이다. 그가 손에 기타아를 쥐면 음은 금방 살아 움직이듯 느껴지고 빛나며 흐느껴 운다. 그는 느린 아다지오를 스타카토 악기인 피아노와는 틀리게 멋진 가락의 흐름으로 노래한다. 그리고 하모니를 교묘히 짜낸다. 물론 이러한 점은 기타아라는 악기가 본래의 특성으로 갖고 있는 독특한 것인지도 모르나, 다시 쥴리아니의 끊임없는 연구와 풍부한 열정으로 말미암아 그 특성을 충분히 나타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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