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꼬 : 피맺힌 한의 노래, 눈물의 기타

by 고정석 posted Dec 1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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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루시아 지방의 오랜 음악적 전통에서 싹터 나온 플라멩꼬는 집시들의 슬픔과 위안, 괴로움과 추억을 담아, 어느 것과도 비길 바 없는 아름답고 독특한 음악이 되었다. 플라멩꼬의 노래, 기타 반주, 섬세하고도 감정 넘치는 박자를 듣노라면, 소외된 삶의 아픔과 자존심을 예술로 승화시킨 슬픔과 저항에 찬 목소리가 저 먼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듯하다.”

집시라면 누구나 낭만적인 환상을 생각하게 된다. 카르멘이나 에스메랄다처럼 격렬하며 극적으로 사는 여자들. 그러나 스페인의 시인, 작가이자 수필가 펠릭스 그란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플라멩꼬의 추억』에서 정열적이며 화려한 집시 대신에 언제나 이방인이거나 방랑자이거나 추방자라는 숙명을 짊어진 집시들의 슬픔과 괴로움에 동정 어린 눈길을 돌려 집시 공동체의 마음을 두드려온 플라멩꼬 속에서 시와 이야기의 어울림, 개인적 회상, 정신적 매력, 영감 등을 찾아내고 있다. 집시들의 슬픔과 고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그리 분명하지 않지만…

♠ ‘집시의 유랑과 풍기문란 단속 및 처벌법’
이 세상의 뭇 사회들은 언제나, 또 다른 곳들로부터 그들에게 온 이방인들을 종종 얕잡아 보고 경멸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들은 꼭 공감적으로 여겨지지만은 않은 남이었다. 가난과 오해 속에서 가느다란 희망을 안고 수백 년을 유랑한 끝에 첫번째 집시의 무리가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 스페인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5세기 초의 일이다. 1425년 1월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5세는 앞으로 3개월 동안 ‘소 이집트’에서 온 존과 그의 무리들이 가는 길을 막지 말라고 신하들에게 명을 내리면서 친히 서명한 안전통행증을 발급했다. 이 안전통행증은 집시의 스페인 도착을 증명해 주는 가장 오래된 현존 문서로서, 현재 바르셀로나에 있는 아라곤 왕립기록보관소에서 소장하고 있다.
알폰소 왕은 다시 넉 달 후인 1425년 5월, ‘이집트’에서 온 토마스와 그의 무리들에게 왕국 내에서의 여행과 거주를 허가하는 안전통행증을 발급하고 있다. 얼마 안되어 다른 집시의 무리들도 뒤따라 들어왔고 안전통행증도 더 많이 발급되었다. 그렇게 해서 집시들은 당국의 보호 아래 수십 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 곳곳을 자유로이 떠돌아다닐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집시들이 이집트로부터 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뱃길로 안달루시아에 들어왔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스페인 집시의 언어엔 아라비아 어휘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안달루시아에 도착했을 때 교황과 프랑스 왕, 까스띠야 왕이 내린 안전통행증을 갖고 있다고 밝힌 점으로 보아 그들이 지나 온 길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집시들은 자기네가 로마나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스페인 북서부에 있는 야곱의 무덤으로 예루살렘, 로마와 더불어 기독교도들의 3대 성지 중의 하나)로 성지순례중이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처음엔 이런 말로 당국의 호의를 얻고 사람들의 환심을 샀으나, 이런 수법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집시들의 진짜 모습에 달갑지 않은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집시들은 스페인을 여행하던 도중에 종종 그들과 언어와 풍습이 다른 토착민들 가까이에 머물며 그들로부터 약간의 문화적 언어적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늘 완전히 집시의식과 자기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릴 정도로 동화되기 전에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또 그들은 한 지역에 머물 때에도, 그 지역 안에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토착민들은 어째서 집시들이 늘 떠돌아다니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쓰는 낯선 언어, 낯선 옷차림, 괴상한 행동은 종종 말썽을 일으켰다. 도시나 농촌 사람 모두 길들여진 곰의 묘기, 염소의 춤, 점치기 등을 보고 즐거워하면서도 집시들의 이런 재주를 볼 때마다 악마를 연상하곤 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시로서는 집시들의 마법이나 요술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비나 해, 우박 등의 횡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의 떠돌이 습성은 마침내 토착민들로 하여금 경계를 확립하고 구획선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을 그을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구조가 조직적이고 윤곽이 뚜렷한 사회에서는 그 외의 모든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인 이방인을 집어내기가 쉬운 법이다. 서로 어울리기 힘든 이들 두 문화 -토착문화와 유랑문화- 가 사이좋게 지내던 시절은 너무나 빨리 끝나고 말았다.
1499년 4월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이 집시들의 유랑생활을 금지하는 법령에 서명하고 추방, 매질, 귀 자르기, 종신 노예형 등을 포함하는 형벌법을 마련하였다. 유랑을 금지하는 것은 집시들의 얼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법령이야말로 그 후 삼백 년에 걸쳐 시행된 일련의 반(反)집시법 중 첫번째 법령이었던 것이다. 이 법령이 공포된 후 1783년 9월 19일 찰스 3세가 ‘집시의 유랑과 풍기문란 단속 및 처벌법’이라는 법령을 서명, 공포한 날까지 스페인의 집시들에게 끔찍한 벌을 주는 법령이 백 가지 이상 통과되었다.
집시가 폭행이나 좀도둑질을 했을 때만 이런 벌을 준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 그들이 단지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해서, 집시 고유의 언어를 쓰거나 옷을 입었다고 해서, 점을 친다고 해서, 또는 심술궂고 악의적인 사람들이 꾸며낸 모략 때문에도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뭐든지 잘못되면 집시 탓으로 돌렸다. 한 마디로 집시이기 때문에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자손이 많고 생명력 또한 끈질긴 긴 역사의 민족, 집시들은 인종폭력의 만만한 표적이 되어 죽음에 맞서 싸웠으나 원수의 잔인함과 힘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코 자기를 잃지 않았다.
이와 같이 끊임없는 집시에 대한 탄압은 18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바로 이때부터 남쪽 안달루시아에선 집시들의 슬픔에 찬 노래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악의 천재들은 보편적인 어리석음이 정신적 진실을 흐리게 하고 없애려 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플라멩꼬라는 피맺힌 한(恨)의 노래, 눈물의 기타로…



글·서남준(음악평론가)
--월간 피아노 뮤직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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