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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클린턴은 재선에 성공한뒤 명연설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하고 싶어서 보좌진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온갖 화려한 말들과 수식어구를 넣어 만든 그의 연설문은.. 명연설로 남을 수 없었다. 소위, 울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음악에는 울림이 있다.. 울림.. 참 좋은 말 같다. 깊은 밤 그 누군가 생각에 머리맡 물그릇 그 수면위로 똑 떨어지는 눈물 한방울 처럼.. 살짝 지나가는 옅은 바람에도 바르르 떨리는 사랑하는 그녀의 긴 속눈썹 처럼.. 울림은 가만히 있는 무엇인가를 울린다. 그래서 가끔은 날 울린다. 가만히 있는 나를.. 울려버린다..

안스네스의 독주회를 가기까지 많은 기대를 했다. 그리그가 생전에 다루었던 스타인웨이피아노로 그리그의 거실에서 녹음했다는 그의 음반(EMI)의 연주는 명징하고, 신선했다. 페달을 많이 쓴다는 평이 있던데.. 피아노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내게는 정확히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고, 단지 "울림"이 심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페달과 관계없이 정말 "울림"이 심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 1층 중간 왼쪽의 자리에서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는데, 가볍게, 그러나 힘있는 그의 첫 타건을 들으면서 정말, 연주회를 자주 와서 들어야 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음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울림.. 불과 기십미터 앞 떨어져 있는 그와 나 사이의 수없이 많은 분자들이 간헐적 순차적으로 울려 나에게 소리를 몰고 오는 느낌 그 자체였다.

물론, 이전에도 간혹 피아노 연주를 들을 기회는 있었다. 일전에 음악이야기 게시판에 소개한 "왼손피아니스트 라울 소사"라든가.. 간간히 다른 연주와 사이사이에 볼 수 있었던 피아노 연주.. 하지만 라울 소사의 경우에는 스타일에 실망했고.. 다른 연주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안스네스의 힘인지, 음악을 듣고자 하는 내가 마음가짐이 보다 더 자란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그러한 강하고도 아름다운 느낌은 새로운 것이었다.

한 음 한 음 놓칠 수 없어 귀기울였던 슈베르트 소나타 850번.. 늘 그렇듯이 익숙한 슈베르트의 선율이 때로는 다이내믹하게 때로는 그지없이 여리게 들려왔고.. 스타인웨이는 터치에 따라 타악기도 되었다가 혹은 하프도 되었다가 슈베르트의 마음과 안스네스의 목소리처럼 다가왔다.

쇼팽 폴로네이즈와 그 아름다움과 구조적인 건강함으로 쇼팽의 최고 작품중 하나로 꼽히는 피아노 소나타 3번,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미리 들어보고 갔는데, 훨씬 더 생동하는 기운과 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루한 옷을 입고 다음 끼니를 걱정하던 쇼팽이 일약 스타가 되어 부잣집 따님들의 레슨을 맡고 하얀 실크 자켓을 입었을 때의 기분.. 쇼팽같은 사람에게 다른 이들에게 하듯,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거나 그렇게 사치허랑방탕하면 곧 예전같이 되돌아가게 된다거나.. 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그 섬세함.. 그 풍성함.. 괜시리 멋있어지는 느낌.. 일종의 도취상태.. 아주 부드럽고 결이 고운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고급 실크처럼.. 수놓아진 무늬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꽉짜인 아름다움 속에서 한 음 한 음 더욱 빛나는 피아노 소나타 3번..

아.. 사실은.. 쇼팽이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쓸 당시에 실제 전기적 사실이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어린 시절 인상깊게 읽었던 쇼팽의 이야기에 의거하여.. 피아노 소나타 3번을 들으면서는 그런 이미지가 연상될 뿐인 것이다. 진실을 호도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공부의 짧음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안스네스의 음색은 대단히 아름답다. 명징하면서도 그 풍부한 색감이 마치 여러번 덧발라 칠해도 늘 투명한 수채화처럼 깨끗하다. 열린 귀뿐만 아니라.. 눈, 어쩌면 드러난 팔의 땀구멍까지도 그의 연주를 들으려 집중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어쩌면, 내가 소위 대가라고 하는 연주자의 실연에 익숙치 못한 결과일 수도 있으나, 내게는 오늘의 이 느낌이 이것 자체로써 소중한 것이다. 다른 누구와 비교해서 어떻다든가.. 대가니까 잘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말. 그저 한 마디면 족하다. 그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합창석에까지 인사하고 만면에 아이같은 웃음을 띤 그는 두곡의 앵콜을 연주했다. 특히 한 곡은 그리그가 자신의 결혼을 위해 직접 만든 축가인데.. 아주 찬란한 곡이다. 아마도 그는 5월이나 6월에 결혼을 했을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햋빛 조각이 신부의 베일에 떨어지듯 황홀한 곡이었다. 서양인의 집.. 내 사랑하는 소설에서 오래전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집은 인생사의 굴곡과 함께 정화되고 완성된다지. 이 집에 죽음은 있었다. 오래전에 친척 아저씨가 이곳에서 돌아가셨지. 그런데 결혼이나 새로운 생명의 태어남은 없었는데.. 오늘 네가 이 집에서 결혼하는 것을 보니 그만..' 그의 결혼으로 정화된 것은 어디 집뿐이련가. 시공간을 떠나, 그 때 그 음악이 내게 이렇게 큰 울림을 주고, 마시 투석이라도 한 양, 나를 맑게 해주는데.

안스네스, 그도 분명히 울렸을 것이다. 악보를 앞에 놓고 다른이가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분명히 시공을 넘어서 무엇인가에 자극받고 울렸을 것이다. 그 울림이 전해온 연주회.. 미세한 공기입자들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는 착각, 그래서 그의 손가락이 닿은 그 건반과 내가 같은 곳에 있다는 느낌이 더욱 강렬했던 그 연주회..

싸인을 받으면서는 아름다운 밤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했더니 싱긋 웃으며 고맙다고 답했다. 아집도 세고.. 호오도 극명하고.. 의외로 둔감한 나를 움직인 이 연주자의 아이같은 표정을 보면서 연주회의 긴장이 풀리면서 기분은 한층 더욱 행복해졌다.

어제.. 내가 참으로 따르는 선생님의 글을 읽고 울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스네스처럼.. 우리 선생님처럼..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울림을 주는 일을, 내가 나의 직업에서 해낼 수 있을까, 내가 내 인생을 걸고 하는 이 일이 그렇게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처음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던 그 언젠가처럼.. 그렇게 맑게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내가..

-2002년 9월 19일,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피아노 독주회,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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