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배장흠님 Recuerdos 연주회 후기

by 으니 posted Jan 1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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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배장흠의 연주는 매우 서정적이다. 그는 길고 두툼하며 힘있는 왼손가락(왼손이 오른손보다 훨씬 길다, 처음 그 손가락을 봤을 때 얼마나 감동했는지)과 여자손만큼이나 예쁜 오른손을 지녔지만 그것으로 기타를 난타하지 않는다.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다 드러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의 연주를 들었던 것은 작년 "로드리고 페스티벌" 이었다. 그 때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은 절제를 바탕으로 한 서정성을 잘 보여준 좋은 연주였다고 기억한다.

어제의 연주회는 조금은 색다른 시도였다. 항상 다른 악기와의 만남을 통하여 더 넓은 영역을 개척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색다르다고 하기가 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첼로와의 만남은 기타리스트로서는 매우 용기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첼로가 양장현을 사용하고 바로크 주법으로 연주를 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첼로가 갖는 음의 무게와 기타 음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기는 매우 힘들 것이었다.

물론, 모든 음악회가 어떠했냐하는 질문은 그 연주의 본질만이 답할 수 있다. 첼로와 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속에 파묻혀 연주를 했다하더라도 기타가 가진 영혼을 울려준다면 그것은 음량의 문제를 이미 떠나 음악의 문제로 들어간 것일터이다. 하지만 한 악기가 가진 영혼을 최대한 울려주기란 쉽지 않다. 연주자의 상태, 악기 상태, 무대의 상태, 협연자, 레파토리, 그리고 귀를 쫑긋 세우고 마음을 연 관객들까지.. 모든 것이 다 완벽한 상황을 이루어 주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이런 공연은 협연하는 이와의 음악적 지향점이 맞아떨어지는가가 중요한 문제인데, 그것도 꼭 같이 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의 공연은 첼리스트 성소현씨가 더욱 빛나도록 꾸며진 무대였다. 그녀의 자작곡(주제의 반복을 좀 더 변주해주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 같았다) 곁들여진 시낭송, 스크린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레파토리가 그랬다. 만일 연극을 하는데, 주연배우와 조연배우가 있다고 하자. 조연이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도 조연 때문에 주연이 가려진다면 그것은 썩 보기에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밴드가 공연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대학 때 베이시스트 선배에게 공연 후 오빠가 가장 멋있어요 라고 하자 반기는 대신에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보컬이 멋있었다는 것은 성공한 공연, 기타가 멋있다고 하면 70% 성공한 공연.. 드럼이 멋있다고 해도 한 50%. 그런데 가장 주목받지 못해야만하는 베이스가 가장 멋있었다고 하면 그 공연은 실패야.

또한 무대에 데뷔한 고운악기의 소리도 매우 아름다웠는데, 과감히 사견을 말하자면, (나의 귀가 트이지 않은 탓으로 다른 이들의 의견보다는 훨씬 개인적이다) 고운악기는 힘이 넘치는 악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운악기는 상승하는 기운을 갖고 있다. 음색은 더할수록 밝아지는 빛의 색에 가깝고, 투명하다. 그리고 섬세하다. 어떤가 하면, 베이스 소리마저 둔탁하지 않다. 기타 전체가 마치 곱게 물들인 한지로 만들어져 울리는 것 같다. 예전의 전축이 종이로 울렸던 것처럼. 음악을 만들어주어 전달하는 것이 악기이지만, 정말 음악적인 악기는 흔치 않다. 고운악기는 음악을 듣는 악기였다. 아름답다. 기타의 음량도 무시할 수 없는 기초적인 요소인데, 고운악기의 음량은 의외로 크다. 배장흠님의 터치를 보니 일년새에 변화가 있었다. 힘을 전달하지 않고 톡톡 건드리는 터치이다. 저정도의 힘에, 저정도의 터치에 그만한 전달력이라면 놀랍다. 모든 것은 한가지만 봐서는 가늠할 수 없다.

바하 소나타에서의 실수 이후 역시 기타톤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수에서 쉽게 떨쳐나오기란 원래 어렵다. 또랑또랑함이 줄어들고 조금은 성긴 듯한 연주에 2부에서는 첼로의 음량이 더 커졌고, 사바레스 알리앙스는 점점 더 쳐지기 시작했다. 알리앙스 현은 예쁜 소리를 내주지만 공연 때에는 아무래도 힘이 약하다고 한다. 때문에 기타를 기대하고 가신 분들은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 공연은 기타 컨서트가 아니라 프로젝트 공연 Recuerdos였음을 기억한다면 그것이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는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시간을 만들어쓰지 못하고 쫓기며 사는 탓에 연주회장에도 헐레벌떡 도착했다. 그래서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늦은 시간에도 연주회 후의 작은 모임 자리에 따라갔는데, 배장흠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이 참 많다고 느꼈다. 아마 여러가지 사정으로 자리하지 못한 친구분들이 더 많을 것이다. 배장흠님은 특유의 애교섞인 표정으로 "다음엔 잘할게요"라고 하셨다. 그는 좋은 연주자임에 틀림없다.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모두가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할 용기를 갖고 있다.

음악은 긴 여정이다. 인류의 여정이기도 하며, 한 개인의 여정이기도 하다. 어제의 연주회도 그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그 곡에 숨겨진 최대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길이며, 기타와 조금 더 아름다운 음악을 빚어내어줄 수 있는 짝꿍을 찾아가는 길이다. 또한, 쉬운 길도 있고 어려운 길도 있는 것처럼 연주자에게도 기복이 있을 수 있다. 배장흠님은 그 길을 맨 앞에서 치고 나가고 있다. 그 새로운 시도들과 부지런함에 박수를 보낸다. 천재는 그 자체로 이미 멋지지만, 그 길을 가는 우리들 또한 멋진 것 아닌가.



덧붙임, 후기는 개인적인 글이며, 일기같이 쓴 것이예요. 그냥 저의 느낌이구요. 고운악기에 대한 느낌도, 고운악기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연주자, 현, 어제 레파토리에서의 고운악기 브라만 모델 한 대에 대한 이야기예요. 연주자에 대한 것도 그 연주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제 공연에서의 연주자에 대한 것이거든요.. 그 점에 대해 제가 본의아니게 실수하는 점이 없기를 바랍니다.. 제가 막귀라서 좀 음악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해서 공연 궁금하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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