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기타음악의 원류를 찾아서(1)

by 정천식 posted Mar 1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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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 루이스 밀란 Luys Milan(1500~1566)
곡명 : 거장 El Maestro 중 Triste estava muy quexosa(Romance)
연주 : M. Figueras(Sop.), Hopkinson Smith(Vihuela)
녹음 : Astree E 7777(CD), Astree E 7748(CD)




  유구한 기타의 역사에 있어 맨 먼저 나타나는 이름이 바로 루이스 밀란. 그의 《거장 El Maestro》 중 《파반느 Pavane》는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지요. 이 음반은 기타 연주가 아닌 기타의 전신인 비우엘라(Vihuela)로 연주하고 있습니다. 별첨 음악은 16세기에 스페인에서 유행했던 로만세(Romance 이야기식의 노래)입니다. 노래는 사발의 부인인 피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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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Guitar)는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지닌 악기이다. 기타는 그 속에 불꽃같은 정념(情念)을 갈무리하고 있는 카르멘(Carmen)과 같은 여인이며, 그 음색이 너무도 관능적이고도 매혹적이어서 카르멘과 사랑에 빠진 이후 주체할 수 없는 숙명의 굴레에서 허우적대던 돈 호세(Don Jose)처럼, 나로 하여금 10살 때 첫사랑을 시작한 이래 아직도 사랑에 목말라 애태우게 만드는 악기이다. 기타는 그 모양새부터가 여체를 닮아있다. 울림통의 가운데는 잘룩하게 들어가서 여인의 허리를 연상케 하며, 그 아래로 이어지는 부드럽고 풍만한 곡선은 영락없이 성숙한 여체를 연상케 한다.

  잘룩한 허리를 무릎 위에 누이고 풍만한 하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기타리스트의 모습은 무척이나 관능적이다. 마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처럼... 기다랗게 목을 빼고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던 여인이 그대로 굳어져 기타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전형적인 기타의 반주형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타는 사랑을 노래하는 가장 적합한 악기이기 때문이다.

  쇼팽의 "기타만큼 아름다운 음색을 내는 악기는 없다. 아마도 기타 2중주를 제외한다면..."이라는 말처럼 기타는 혼자서 연주해도 아름답지만 둘이서 연주하는 이중주의 매력은 각별하다. 같은 악기 2개가 어울려 기타보다 아름다운 매력을 발산하는 악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2대의 바이올린이 그런가? 아니면 2대의 피아노가? 기타는 때론 격렬하게, 때론 달콤하게, 때론 촉촉하게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적셔준다.

  기타는 선율악기이기도 하지만 화성적인 악기이며 리듬악기이기도 하다. 라스게아도(Rasgueado) - 손가락 전체를 사용해서 격렬하게 리듬을 표현하는 기타의 연주법 - 로 연주하는 기타의 섬세한 리듬감은 그 어떤 악기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기타는 그 자체로 완벽한 악기라서 그런지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홀로 고고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래서 악성 베토벤은 기타를 일러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기타는 바로크 음악에 잘 어울리는 악기이지만 고전파, 낭만파 음악에도 무척 잘 어울린다. 그리고 기타는 현대음악에서 기막힌 매력을 발산한다. 영국의 현대작곡가 왈톤(W. Walton:1902~1983)이 작곡한 《Five Bagatelles 5개의 잡동사니》를 들어 보면 기타가 얼마나 현대적인 정서에 잘 어울리는가를 알 수 있다. 자! 이제 스페인 기타음악의 원류를 찾아서 머나 먼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기타가 스페인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으며 스페인 사람들의 심성을 대변해주는 악기로 정착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은 이러하다.

  서기 632년,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Mahomet:570?~632)가 후계자(칼리프 Caliph)를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하자 정통 칼리프를 자처하며 최초의 이슬람 국가를 건설한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661~750)는 다마스커스에 수도를 두고 한 때 동으로는 중국의 당(唐)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서로는 북아프리카 전역과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아랍 최대의 제국이었다.

  우마이야 가(家)와 인척관계인 압바스 가(家)는 750년, 우마이야 가(家)의 왕족들을 연회에 초대해서 모조리 죽임으로써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는 압바스 왕조(Abbas dynasty:750~1258)를 세운다. 80여명의 왕족들이 살육을 당한 이 와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왕자 압둘 라흐만 1세는 압바스 가(家)의 추격을 뿌리치고 어머니의 고향인 북아프리카의 세우타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의 꼬르도바(Cordoba)에 있던 우마이야 왕조의 직할령을 접수함으로써 후기 우마이야 왕조(756~1031)를 연다.

  압둘 라흐만 1세(재위:756~788)는 압바스 왕조에 대한 적개심으로 꼬르도바를 바그다드에 뒤지지 않는 도시로 건설하는데 박차를 가하게 되며, 압둘 라흐만 2세(재위:822~852) 때에는 "바그다드를 따라잡고, 앞지르라"는 정책에 따라 스페인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문화정책에도 힘을 기울여 바그다드로부터 쫓겨난 대음악가 지르얍(본명은 아블 하산 789~857)을 꼬르도바로 초빙한다.

  지르얍은 바그다드의 궁정음악가 이스하크의 제자였는데 약관의 나이에 4현 우드(Al-Ud) - 탄현(彈絃)악기의 일종으로 류트의 선조가 된다 - 를 5현으로 개조하여 연주한 천재였으며, 나무 조각으로 줄을 퉁기던 것을 독수리의 발톱을 사용함으로써 연주법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스승을 능가하는 넘치는 재능 때문에 결국 쫓겨나게 된 것이었다. 꼬르도바에 온 지르얍은 스페인 각지에 유럽 최초의 음악학교를 세워서 음악가들을 양성하는 한편 스페인 전역에 남아있는 민요를 정리하였다.

  지르얍이 스페인 음악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여 스페인에는 유능한 음악가들로 넘쳤으며 스페인 사람들의 뛰어난 음악성은 이 때에 토대가 만들어졌다. 압둘 라흐만 3세(재위 929~961)때의 스페인은 유럽 최고의 문화국가였다. 당시의 꼬르도바는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700개, 병원이 50개, 학교가 17개, 공중 목욕탕이 900개에 달하는 인구 80만의 유럽 제일의 거대도시였으며,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었고 밤에는 가로등까지 켜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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