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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THE CYNICS2009.03.18 20:29
제가 예전에 잃은 책을 중심으로 말씀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아, 그렇다고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제 얘기는 어느 유명한 학자가 한 얘기이므로 이 얘기가 반드시 옳다,라는 '권위에 의존한'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며, 단지 '이러한 견해도 있다'라는 선에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로 아래의 얘기들은 님의 글에 대한 반론도 아니고 가르치려 들려는(?) 목적도 없으며
단지 위의 제 글에 대한 정확한 지침을 다른 분들에게 제공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주십시오.^^

먼저, 주지해야 할 점은, 표상론이니 표현론이니 하는 논의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논의의 목적은 바로 '예술'이라는 것의 속성소를 규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술이라는 것과 기타 다른 분야(예컨대 과학이나 종교같은)와의 차이를 규정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고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곧 '예술이 다른 분야와 구분되는 결정적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며 이러한 물음들은 곧 예술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는 것.
그러니까, '모방론'은 '예술이란 바로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며,
'표현론'은 '아니다. 그럼 이명박 사진도 예술이냐? 예술은 그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대충 이 정도 하고 넘어 갑니다.

1.엄밀하게 따지자면, 현실-외부 대상에의 카피에 그치는 것을 '모방론'으로,
2.단순한 카피가 아닌, 예술작품을 통해 작품의 '내재적 성질'의 것을 드러내는 것을 '표상론'이라고 규정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플라톤이 그림을 우습게 여긴 건 바로 '모방 따위는 해서 뭐하는데? 고작 덴뿌라인 주제에.....'라는 회의의 결과일테고요.

그러나 제가 본 저서는 '표상론'의 범주 안에 '모방론'을 포함 시킵니다. 인용합니다.
<표상이란 무엇인가? 표상은 어떤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그 대상을 대치해 보임을 의미한다. 표상 R(representation)은 그것의 대상(Object)의 실재적 존재를 전제하며, 표상된 사실, 혹은 사건은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대상의 대치를 의미한다.>
이는 모방론에의 정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다른 견해도 제시합니다.
<(그러나) 비록 모든 예술 작품의 기능을 표상성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모방이나 모사라는 뜻에서의 표상성일 수 없음은 자명한 것 같다.......표상은 반드시 모방이나 모사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물 현상은 그것이 딴 것과 실재적인 유사성, 즉 복사적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해서 표상적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R이라는 사물 현상이 O라는 사물 현상을 표상하기 위해 그들 간에 복사적 관계가 있을 필요는 없다. 한 사물 현상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표상할 수 있으며 그 방법들 간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표상은 그 대상의 복사(카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 가시적인 약정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표상론을 단순히 모방론의 틀 안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라는 얘기를 한 것이지요. 이를 설득하기 위해 소쉬르의 언어 철학을 예로 듭니다. 바로 (스피노자가 한 말입니다만)'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논점으로 말이죠.

<'달'이라는 말이 구체적인 실재의 달을 표상한다고 해도 그 낱말과 구체적인 달의 관계는 결코 복사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月이란 상형문자가 원래 복사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다고해도 그 문자가 우리에게 달을 표상하는 것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은 '月'이란 문자와 실제로 존재하는 달의 유사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재와 언어가 따로 논다는 얘기 같습니다. '똥'이라는 낱말은 실제의 똥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제의 '똥'을 표상한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론'은 다음과 같은 반론에 부딪힙니다. "그럼, 대체 과학과 예술의 차이는 뭐냐? E=MC(2)이라는 공식도 예술이냐?"라는. 좀 유식하게 얘기해서 예술을 정의하는 속성소로 '표상에 따른 인식적 역할'로 규정하면 과학이나 일반 언어까지도 예술의 범주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는 것.
이 지점에서 표상론에 반기를 들기 위해 '표현론'이 제시됩니다. 표현론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저서를 인용합니다.

'김태희는 여자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합시다. 이 명제는 유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실'을 알려주니까요. 이 문장은 '인식적 의미'를 갖습니다. 김태희가 남자는 아니라는. 고로 고추가 없다는.
반면에 '김태희는 예쁘다'라는 말에는 인식적 의미가 없습니다. '예쁘다'는 말은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만일, 김태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외국인에게 이 말을 했다고 합시다. 이 외국인은 '예쁘다'는 말을 듣고 김태희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표상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할 겁니다. 이는 위에서 제가 힐러리 한에 대한 연주평에서 '단단하다'느니, '유려하다'라는 따위의 말들에는 의미가 비어 있다,고 말한 것과 일치합니다. 힐러리 한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 수사의 의미는 비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단하다'라는 의미를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견고한 연주'로 받아들일 수도 있거든요. 말한 이의 본래 의도가 이와는 다른 것이라면, 이는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 것입니다. 고로 이런 얘기는 의미가 비어 있는 것이지요. 고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논리철학-논고'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여야 한다'-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고 해요. 신(神)? '신'이라는 낱말이 있다 해도 그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거나, 증명할 수 없잖은가? '미(美)? 김태희가 예쁘고 송혜교가 이쁘고 이효리가 예쁘니까 '미'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것 같지? 그런 거 없거든? 그러니까 얘기 꺼내지 말고 닥치고 있어라, 라는 정도로 받아들였다고.
(그런 거 있다......성형외과에 가면 의사의 컴퓨터에 '미인의 기준'이 저장되어 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어쩌면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로 명제가 될 수 없는'김태희는 예쁘다'라는 말은 '인식적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예술의 속성소는 인식적 기능에 있다'는 '표상론의 폐기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똥'이라는 글자도 예술이냐?"라는 의미랄까요.

'김태희는 예쁘다'라는 말은 (저자에 의하면), '인식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단지 '환감(歡感)적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고로 '인식적 기능'이 '표상론'의 영역이라면, '환감적 기능'은 '표현론'에의 영역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표현론은 어떤 객관적 상황이나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어떤 대상에 대한 화자(예술가)의 심리상태를 노출하는 데 있다, 라는 얘기라고. 고로 표상론 따위는 집어 치우라고, '표현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말합니다.

예술 작품의 속성소로서 '표현'이란 개념에 대해
위에서 언급하신 콜링우드라는 학자는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해요. 예술과 제작(Craft)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크래프트가 <언제나 이미 결정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활동>임에 반해 예술은 <진술에 비유될 수 있는 '언어적 활동'>이며, 그가 구태여 표상과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표현이라고 한 것은 <그 표현의 대상이 인간 밖의 객관적 대상이나 인간의 사고가 아니라 인간의 감동>이라는 데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러나 저자는 콜링우드의 견해에 대해 '표상'과 '표현'의 개념 차이가 모호하다고 비판합니다.
<예술표현론이 뜻하는 표현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한 것 같은 환감적인 기능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표상의 형태로 사용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표현론은 표상론과 구분되고 대립되는 이론이 아니라 표상론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하며.....논리실증주의적 의미로서의 표현이란 말이 표상이란 말과 대립되어 예술 작품에 적용될 수 없다.>

왜 모호하다고 말할까요? 저자는 '김태희는 예쁘다' , 또는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말은 환감적 의미만 지닌다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의견을 반박하여 논증합니다.

<....'장미꽃은 아름답다'는 문장에 있어서 '아름답다'라는 술어가 '장미꽃은 빨갛다'라는 문장에 있어서 '빨갛다'라는 술어와는 달리 주어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가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나타낼 뿐이라는 이유에서, 그것은 느낌을 표출하는 의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름답다'라는 말 자체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감정의 표출은 아니다. 그 말은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로서, 감탄사, 황홀해서 하는 몸짓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다.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대할 때 독자는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것도 아니며, 화자가 체험한 경험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다. 독자는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문장을 이해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다시 말해 독자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생각과는 독립해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장미꽃은 아름답다'라는 문장도 넓은 의미에서 표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김태희는 예쁘다'는 것은 단순히 의미가 비어있는 환감적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니라 '예쁘다'는 말 자체가 충분히 인식적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인식에 '예쁘다'라는 선험적 감성형식이 존재하거나 말거나 '예쁘다'는 말은 '못생기지 않고 보기에 좋다'라는 인식적 기능을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저자는 표상과 표현의 경계를 허뭅니다.
좀 어렵네요....말장난 하는 것 같기도.ㅡㅡ;

제가 위에서 '선험적 감성형식'에 대해 얘기 했는데요.
사실 전 칸트의 저서는 그 어떤 것도 읽은 바가 없습니다......오래전에 친구가 가지고 있던 '순수이성비판'을 1시간 정도 들여다 본 적은 있는데....그 당시 이런 결심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내 살아생전 칸트의 책은 절대 겉표지조차 들여다보지 않으리.......'
칸트는 제게 많이 어렵습니다......(그래서 개론서에 의존할 뿐).

Vor...님께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칸트의 얘기는 보통 '예술 형식론'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언급한 모방론, 표상론, 표현론 과는 좀 다른 애기겠지요. 언급하신 칸트는 인간이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먼저 감성이 인식 대상을 받아들인 다음 오성이 그 대상에 개념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감각 기관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개념 파악이 배재된 단순한 감각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칸트는 미적 대상에서는 오성의 역할이 배제된다고 했답니다. 미 자체는 오성이라는 형식에 내재된 ‘선험적 범주’의 영역 밖에서도 오로지 감각적으로 온전하게 인식될 수 있다고. 이를 ‘개념 없는 판단’이라고 했답니다.

<인식이 가능한 것, 다시 말해서 지각의 대상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보장되는 것은 그 판단이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편성을 띈 선험적인 범주, 즉 오성의 형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선험적 범주에 의존하는 인식 판단과는 달리 심미 판단은 오로지 감각적인 것에만 의존한다. 그래서 칸트는 심미적 판단을 '개념 없는 판단'이라 한다.....>

예술론으로서의 형식론은 표상과 표현 모두 거부합니다. 대신 예술 작품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형식’을 예술에의 속성소롤 규정한다고. 저자는 모든 인식의 대상이 선험적 범주에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심미적 태도만 그것을 벗어나 있다고 말한 칸트의 견해를 비판합니다. 선험적 범주야말로 객관성을 보장해 주는 장치일 터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심미적 판단이 객관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 외에 이러 저러한 근거를 중심으로 형식론을 비판합니다. 이로서 예술을 규정짓는 속성소로서의 표상, 표현, 형식론은 모두 기각됩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예술론이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다음은 본문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얘기입니다.

"정신이란 결국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적 대상의 정신적 이미지(표상)만을 인식할 뿐 대상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오래전에 들은 얘기라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칸트가 '물자체(Ding an sigh)'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의 오성이나 이성은 이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네오를 매트릭스(가상세계)에서 벗어나게 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가상세계를 보여주며 매트릭스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모피어스 : 지금 자네의 모습은 잉여 자기 이미지란 거야.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을 디지털화 한 거지.
네오 : 진짜가 아닌가요?
모피어스 : 진짜가 뭔데? 정의를 어떻게 내려? 촉각이나 후각, 미각, 시각을 뜻하는 거라면 '진짜'란 두뇌가 해석하는 전기 신호에 불과해.>

우리는 눈앞에 있는 '김태희'의 얼굴이 우리의 감각(시각)이 받아들이는 그대로의 모습일 거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파리나 사마귀나 진드기의 눈에는 김태희가 과연 우리가 보는 그 모습 그대로 보일까요? 저는 저 색깔을 빨간색이라고 생각하는데 '상근이(개)'는 회색으로 봅니다. 내가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일 것이라고 (논리적으로)주장할 수 있습니까?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여기에서 물자체의 개념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그러니까 지구에서 10 억 광년 떨어져 있는 우르탕카 별(?)의 외계인에 비친 김태희의 모습은 어쩌면 '킹콩'의 모습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김태희의 '진짜' 모습은 알 수 없습니다. 칸트는 이 '진짜'를 '물자체'라는 말로 정의했고요......덧붙여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이 물자체를 인지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


사족.
전 글을 쓸 때, 이 글이 제 생각인지, 아니면 다른데서 보거나 들은 바가 있는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인지를 구분하는 편입니다. 이를테면 '제 생각엔.....' 등으로.
위의 예술론에 대한 글들은 그저 단순한 소개 글 정도로만 받아 들여 주십시오. 제가 어떠한 '예술론'을 주장하기에는 분에 넘치는 일이므로. 그리고 실제로 위의 저자의 내용은 위에서 제가 소개한 것보다는 훨씬 다채롭습니다.

그리고 '간디'님께서 제게 질문을 주셨는데요, 오전에 그에 대한 답글을 쓰다가 말았습니다. 역시나 말이 많아져서요. 짬 날 때 제 주관을 피력해 보겠습니다. 물론, 제 얘기가 틀릴 수도 있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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