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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THE CYNICS2009.03.16 07:28
Vorstellun님의 글에 대한 답글.

예술에서 재현의 기능이 가장 탁월한 것은 영화와 연극 분야라고 생각해요. 문학과 미술이 그 다음일게고.....음악은 어쩔 수 없는 한계(그러나 그로 인해 '순수한')로 재현성은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님께서 이미 잘 알고 계신 바이겠지요.
표상성의 개념에 대해 단순히 이미지나 사실 묘사에 한정하는 것은 협의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 하셨는데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본성에 대한 이론들 중 '재현론'과 '표현론'을 언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님께서 지적하신 바로 그 내용이, 재현론과 표현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실례를 들어가며 언급해 봅니다.

'재현 representation'은 말 그대로 현실,사물을 '다시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재현론'은 '모방론' 또는 '표상론'으로 불리우기도 한답니다.
플라톤은 이 현실 세계를 '이데아'의 모방으로 파악했습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쉽게 얘기해서 사후에나 가볼 수 있는 '천국'이 진짜 세계이고 지구상의 현실세계는 천국의 모사품에 불과하다는 것. 일부 광신도들이 가족 몰래 전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는, 내세를 위해 현실을 방기하는 행태와 유사하다고 하면 다소 과장이 될까요.....어쨌거나, 플라톤에게 현실세계란 이데아의 모사품에 불과한 짝퉁이었을 뿐이었으니, 이 짝퉁을 또다시 베낀(모방한) 미술 같은 예술 작품이 얼마나 하찮았겠습니까. 짝퉁을 베낀 짝짝퉁이랄까. 이런 얘기가 있지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품을 만든 예술가의 이름은?" 이라는 시험문제가 출제 됩니다. 맨 첫째줄에 앉은 아이는 답안지에 '로댕'이라고 씁니다. 바로 그 뒤에 앉은 아이는 앞의 아이의 답안을 커닝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보지 못한 탓에 답안지에 '오뎅'이라고 적습니다. 또 그 뒤에 앉은 아이가 '오뎅'이라고 적은 아이의 답안지를 커닝합니다. 그런데 너무 똑 같이 적으면 커닝한게 티날까봐 답안에 변형을 가합니다......'뎀뿌라' 라고.
그러니까 플라톤에게 있어 '그림'이란 뎀뿌라 같은 존재에 불과한 거죠. 제 아무리 제욱시우스나 솔거가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그러나 중세에 '그림-미술'의 지위는 상승합니다. 성경을 재현하는 역할로 말이죠. 재현의 역할이 강조됨에 따라 당연히 그림은 사진과도 같은 리얼한 현실재현이 요구됩니다. 고로 클레나 미로나 피카소 따위(?)의 그림은 필요 없었겠죠....이후에 19세기 들어 사진의 발달로 리얼한 재현으로서의 그림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표현'이 '재현(모방)'을 압도하게 되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고로, 화가가 세계를 재현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그게 뭔지는 몰라도)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재현론'과 '표현론'의 경계가 모호해 집니다.
왜냐하면 '재현'이라는 게 반드시 현실세계만을 모사하는 것으로 한정 지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되거든요. "꼭 현실에 있는 사물이나 자연만을 모방해야 '재현'이라 할 수 있나? 그건 너무 '재현'을 한정 지으려는 것 아닌가? 요컨대 창작자의 심경이나 내면을 재현하는 것도 '재현론'의 범주에 포함 시킬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는 님께서 말씀 하신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건 너무 지나칠정도로 표상의 개념을 협의의 감옥에 가두어버리는게 될테구요"
여기서 '재현'과 '표현'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고로, 단순히 현실의 사물이나 자연만이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비장함과 슬픔,고뇌 회한, 죽음, 애상, 환희 "같은 심리적, 관념적인 대상 또한 재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의로 진행될 겁니다(논의의 편의성을 위해 이러한 '표현적'인 것을 그냥 '재현적'인 것으로 언급하도록 하지요).

음악에서, '슬픔'이라는 정서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경험하는 것일까요? '슬픔'이라는 정서는 음악이나 미술등에 속해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음악 자체에는 슬픔이라는 정서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음악'이나 '미술'은 살아 숨쉬는 인격체가 아닌, 그저 하나의 일반명사, 또는 관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사'나 '관념' 자체는 슬픔을 인지할 수 없지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니까. 슬픔은 어디까지나 슬픔을 느끼는 주체인 인간에게 속해 있는 정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음악을 듣고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슬픔'에의 정서와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교적 유사한 특질들이 음악 속에서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인용합니다. < >안의 글은 인용문, ( )안의 글은 필자의 잡설입니다.

<'느림'은 분명 그러한 특질 중의 하나이다. 똑같은 선율이라도 빠르게 연주되면 슬프다고 말해지지 않을 것이다(영화 '러브스토리'에서 올리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애인을 잃고 난 후 텅빈 운동장의 스탠드에 죽은 듯이 앉아 있습니다.....물론 '달려라 하니'처럼 뛰면서 우는 이상한 사람들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급격한 음정 차이들의 결핍도 그 중 하나이다. 소위 음들이 귀에 거슬리기 보다는 속삭이는 듯한 경향을 띈다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의 '오열','통곡'은 이러한 견해와는 거리가 멀 겁니다. 그냥 여기서는 '올리버'의 정적인, 침잠되어 있는 슬픔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음악적 진행방향이 상승적이라기 보다는 하강적이라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이를테면, 바흐의 '마태수난곡'등에서 보여지는 멜로디의 하강-하늘에서 지상으로 하강하는 듯한-이나, 소르의 op.34 l`encouregement(위안)의 세번째 변주의 후반부에서 하강하는 선율의 애절함-줄리안 브림의 비브라토가 곁들어진-처럼).>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닐겁니다. 화음이 전해주는 정서도 언급해야지요. 일반적으로 마이너 계열의 화음이나 디미니쉬 계열(하프 디미니쉬-m7(b5)-포함)의 화음은 슬픔의 정서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그 화음들은 왜 그런가?"라고 물으면 참으로 일이 복잡해집니다. 청취가능한 자연배음의 존재로 이루어진 장3화음에 비해 단화음이나 감화음은 그렇지 못하다,는 답변을 내놓아봤자 이는 다시 "왜 청취가능한 자연배음으로 이루어진 화음은 슬프지 않은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디미니쉬드 코드의 경우는 다소 설명이 쉬울 수도 있습니다. 디미니쉬드 코드란 음정이 모두 단3도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코드이고, 이 단3도 음정은 장3도 음정보다 '비교적' 불협에 가깝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불협'이란, 음들 간 관계가 '협' 일 경우보다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은유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례로 완전 5도(예컨대 '도'와 '솔'의 관계)의 경우, 도와 솔의 동시적 울림은 두개의 음이 아닌 마치 찰떡같이 들러붙은 하나의 소리로 느껴져서 유니즌의 경우처럼 아주 강력하게 들림으로 인해 이들 찰떡궁합성 음의 조합은 말 그대로 '완전'한 음정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음정관계를 '록음악'쪽에서는 '파워코드'라 불리우고 강력한 리프의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반면에 현악4중주 같은 경우엔 이 5도 병진행이 다른 성부를 심하게 죽이느라 대위법에서는 금지하는 사항이고요.
어쨌든, 장3도의 음정관계는 완전5도에 비하면 '비교적' 불협입니다. 단3도는 더하고요. 음간 관계의 찰떡의 점도가 점점 엷어진다고나 할까. 불협, 그러니까 '비교했을 경우' 찰떡궁합의 정도가 약해지고 불화가 더한 단3도로만 이루어진 디미니쉬드 코드의 경우엔 완전히 콩가루 집안인 셈이지요. 그리고.......콩가루 집안엔 항시 불행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디미니쉬드 코드가 '슬픔'이나 '비극성'을 강하게 표상하는 이유입니다(말러가 생각나지 않나요?).

그러나 위의 얘기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왜 단3도는 장3도에 비해서 불협에 가깝나?"라고요. 이는 음의 파형을 음향학적으로 조사해보면 해결될 일일 겁니다(잘 기억이 나지않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군요). 그리고 "장화음이든 단화음이든 3화음일 경우엔 하나의 장3도 음정과 하나의 단3도 음정을 지니게 되는 것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왜 단3도가 아래로 깔려 있는 단화음이 유독 슬픔을 표상하는가?"라는 질문도 가능할 것이고요.......
실제로 인도네시아의 어느 부족민은 단화음에서 슬픔의 정서를 읽어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양음악의 화음이 표상하는 강제성에 이미 길들여진 것일까요?
'가'라는 글자를 보십시오. 정말 우리의 음성에서 발음되는 '가'와 똑같이 닮지 않았나요? "정말 '가'라는 글자는 '가'라는 발음을 닮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글을 모르는 일본인은 '가'라는 글씨가, 발음되는 '가'처럼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 단화음에 대한 우리의 표상도 그러한 편견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잖습니까?

단3화음이 슬픔을 표상하는 이유는 어쩌면 음계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음계(도레미파솔라시도)의 경우 비교적 불협화 음정인 단2도 관계가 3번째 음(파)4번째 음(파)에 발생하는 것에 비해서, 단음계(라시도레미파솔라)의 경우는 2번째 음(시)과 3번째 음(도)에 발생하는데, 슬픔의 근원(?)인 불협음정-단2도 음정-이 장음계보다 비교적 먼저 발생하여 슬픔을 '서두른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논리의 빈약함을 느낍니다.

얘기가 장황해졌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먼저 '재현론'과 '표현론'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얘기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음악 자체에는 슬픔이 없다"고 했습니다. '음악'자체는 살아있는 인격체-슬픔을 느낄 수 있는 실체-가 아니므로. 단지 음악에는 슬픔의 주체인 인간의 '슬픔에의 정서'를 유사하게 유발하는 요소-특질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설령 그것들의 원인을 속 시원하게 규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인도네시아의 어느 원주민들은 배제하고서라도).
고로, 님께서 말씀하신 것-비장함과 고뇌, 회한, 죽음, 애상, 환희등을 음악보다 더 잘 표상할 수 있는 예술장르는 없다는 것-에 대해 공감합니다. 단지 말씀하신 실례들(비장함, 고뇌, 회한, 죽음. 애상. 환희)을 다소 범주화하여 구분할 필요는 있다고 봐요.
비장함, 고뇌, 회한, 죽음. 애상. 환희.....의 실례들 중, '감성'의 형식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비장함이나 고뇌, 회한 등은 당사자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냄에 비해 '죽음'은 실존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비장함,고뇌,회한,애상'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기류는 바로 '슬픔'이라는 정서입니다. 물론 "죽음도 슬픔의 정서가 흐르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지했다시피 '죽음'이라는 것은 '정서적 성향'이 아니라 '생의 끝'을 의미하는 실존적 성질의 것이므로 범주를 달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환희'는 말할 필요도 없이 기쁨에의 정서고요.

음악에서 '슬픔'과'기쁨'을 표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슬픔은 위에서 언급한 요소-특질로 얼마든지 표상 가능하고 기쁨은 도약하는 선율선으로, 동적인 리듬의 변화 같은 것으로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얘기가 다릅니다. 죽음에 따른 슬픔이야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지만, 죽음 그 자체를 표상할 수 있나요? '아멜리아의 유서'라는 기타 곡을 들으면 죽음이 떠올려집니까? 그것이 단순한 슬픔이 아닌, 죽음 자체를 묘사한 것이라고 온전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 음악의 제목이 '아멜리아의 실연'이었다면, 과연 우리는 이 음악에서 '죽음' 그 자체를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은 제목이 가져다준 선입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의 제목이 만일 '연인의 죽음'따위였다면 우리는 그 음악에서 죽음을 느낀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요?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지금 님의 의견에 '반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님의 의견을 예로 들어 "빛과 어둠, 숙명,인생의 우여곡절 " 등의 존재론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은 마치 '죽음'처럼, "고뇌,비장함,회한"등이 공통적으로 내포한'슬픔'이라는 정서와는 (음악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범주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음악의 완전한 표상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완전히 따로국밥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단지 그것들은 '분위기적 유사성(mood resemblance)'에 그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듣고 숙명이나 인생...등을 느끼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걸 주장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단지 그러한 표상은 자의적인 메타포(은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었지요.
(물론 위의 예에서 '빛과 어둠'은 '기쁨과 슬픔-장조와 단조'의 은유로서 '죽음'이나 '생의 우여곡절'이 드러내는 은유성보다는 더 명료합니다. 기호학적으로 애기해서 '동기화'가 높습니다. 즉 표상성이 "숙명, 생의 우여곡절" 보다는 비교적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음악을 듣고 무엇을 표상하는 지는 전적으로 청취자의 권리이고 따라서 청취자의 수만큼 표상성도 다양화될 것입니다......이러한 다양성이 부재하다면, 그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명제는 논리의 영역에서나 찬성할 일이겠지요. 실제 세상에서 음악을 감상하고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대응하는 언어를 찾을 수 없다하여 그냥 입 닥치고 있는다면 그 얼마나 심심할까요. 아마 이 곳에서 감상의 차이에 따른 의견충돌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잣거리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러한 충돌이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사족.
사라사테가 이 곡을 작곡했을 때 아마도 깊은 슬픔을 경험했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의 경험이 슬픈 곡을 창조해냐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닐 수도 있을겁니다.
'부활'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자인 김태원이 그런 얘길 하지 않았나요?
"내 음악은 슬픕니다. 그러나....내 인생은 슬프지 않습니다."
김태원은 이 멋진 얘기조차 웃기게 하더군요.




바흐2138S님의 의견에 대한 답글은 다음으로 미룹니다....피곤이 엄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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