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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THE CYNICS2009.03.14 15:03
현 세대에게 이 음악은 어떻게 받아 들여질까?
음악 청취에 다양한 호불호는 당연한 것이고
이 음악을 듣고 애절함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과잉된 애절함에 민망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 문제다.
필자는 후자에 속한다. 다음의 얘기 또한 사견일 뿐이다.

과잉된 애절함이 마지막으로 풍미하던 시대는 80년대다.
이러한 과잉 애절함은 아마도 시대를 반영한 결과일게다. 이러한 결과로 80년대에는 무수한 신파성 슬픔들이 양산되었다. 대중매체가 가장 그랬을 것이다.
애절함의 극치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아니겠는가. 온갖 창작 매체들은 이러한 죽음을 슬픔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적극 애용했다.

80년대의 강렬한 아이콘하면, 바로 '까치'로 대변되던 암울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작가 이현세는 그의 작품에서 까치를 몇번이나 죽였더라? 링에서 맞아 죽고, 총 맞아 죽고, 여하튼 숱하게 죽었다. 숭고하게.
'공포의 외인구단'을 기억하시는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전승을 달리던 외인구단, 안타를 못쳐서 미쳐가는(?) 마동탁을 차마 보기 힘들었던 옛 애인 '엄지'는 '까치'에게 일부러 져 줄 것을 부탁한다. '난 니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던' 까치는 약속대로 마동탁의 아웃성 공을 일부러 꽉 쥔 채 역전을 허용하게끔 한다. 그 결과 연승의 꿈은 날라가고 각각의 연봉 10억도 날라간다. 그 뿐이랴. 까치는 시각장애인이 되고 패배의 충격으로 감독은 심장마비사 하고 만다.......참으로 숭고한 죽음이다.

황당하기로는 고 박봉성의 '신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기업가이자 마라토너이며 체급의 제한을 두지 않는 영원불멸의 복서인 '강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품안에서 직접적 사인이 모호한 채로 그냥 죽는다. 가수 박정수의 '그대 품안에서 잠들었으면'이라는 노래가 떠올려지는 순간이다. 미국의 헤비급 복서들의 핵주먹에도 견디던 신의 아들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싱겁지 않은가.

이현세 원작인 영화 '죽음의 링'을 보자. 맷집 하나로 버텨온 까치는 결국 가랑비에 옷 젖듯이 누적된 충격으로 결국 링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들것에 실려가고...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략 5분간을 까치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 오열한다. 아,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은 장면이 아니던가? 엄지(전세영 분)의 오열을 5분이나 지켜보는 관객의 심정은 찢어질 듯이 마음이 아플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소재로 한 1970년도의 영화 ;러브스토리'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는가?
제니의 죽음을 뒤로하고 병원을 빠져나오는 올리버는 텅빈 운동장에 걸터 앉는다. 카메라는 이런 올리버의 뒷모습을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그리고 프란시스 레이의 아름다운 그 음악.

어떤 에세이에서 본 글인데, 슬픔에 빠진 최상의 모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조각가는 손을 머리로 감싼 채 얼굴을 아래로 파묻어서 슬픔이 표상된 얼굴이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반실신 상태에 이른 얼굴......물론 슬프다.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많은 이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나 가상일뿐인 작품의 세계에서는? 물론 개인의 사적인 슬픔은 존중되어야 하나, 초당 몇명 꼴로 굶어 죽거나 전쟁에 희생이 되는 현실 세계, 또는 사회적 부조리에 의한 비극을 반영한 작품이라면 넘치는 눈물이 있는 그대로 받아지겠지만 연애사 같은 사적인 슬픔의 과도한 표현은 유감스럽게도 과잉된 눈물의 밀도가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무언가 조절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술이자 핵심이다.

음악은 어떨까? 아시다시피 음악은 모든 예술계에서 현실에의 표상성이 제일 떨어지는 분야다. 제아무리 '해바라기'라는 꽃을 음악으로 묘사해봤자 고흐의 그림같은 명확한 표상성은 보장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이미지적 유사성만 얼추 상상력을 동원하여 뒷받침해 줄 뿐.

주성치의 '쿵푸허슬'이라는 영화를 보자. 주성치라는 이름에서 보다시피 이 영화는 황당무계함을 전면에 내세운 코믹 쿵푸물이다. 이 영화에서 바로 이 음악, '지고이네르바이젠'이 쓰였다. 어울리는가? 물론 후반부의 경쾌한 부분과는 잘 들어 맞기는 한다.
상황은 비극(?)이지만 극 자체를 희극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나 시트콤등의 장면에 이 음악은 정말 널리, 두루 쓰였다. 예를들어, 여자한테 바람맞고 비를 쫄딱 맞고 서 있는 주인공이 무심한 하늘을 바라보며 "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이 음악의 전반부가 애용된다. 분명 이 음악의 전반부는 비극적 요소로 가득차 있는데 오히려 비극인 체하는 희극적 장면에서 애용되는게다. 이 묘한 조합은 대체? 그러면서도 그러한 장면에서 일체의 거부감도 느끼지 못하는 건 어째서?
다음과 같은 요소 때문일게다.

1. 상투성
2. 과잉 비극성

누군가 여자에게 바람 맞았다. 술먹으며 눈물 콸콸 쏟으며 심지어는 자해까지 한다. 슬픈가?
내게 이 음악은 딱 이 정도 수준이다.
롹웰의 '나이프'라는 음악을 보자. 슬픈 곡이라 당연히 마이너 계열의 코드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냥 3화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7도 음을 추가하여 m7계열의 코드를 이용한다.
3화음만으로 충분히 슬픔이 전달되는데 왜 단7도 음을 추가하는 걸까?
아마도'슬픔의 농도를 희석'시키는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려운 얘기 아니다. '라도미'화음에 '솔'을 추가해보라. 슬픔의 농도가 제법 낮아짐을 느낄게다.
(오해하지는 마시라. 무조건 마이너의 3화음은 쓰면 안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절제의 효과를 가져다 주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 것일 뿐. 마이너의 3화음이 빈번하게 쓰이는 바흐의 샤콘느는 절대 상투적이지 않다. 왜 그럴까? 그건 12개의 음을 넘나드는 음 조합의 절묘함 있다.)
적어도 이 시대는, 이 시대는 그런 거다. 과잉된 슬픔에, 적나라한 슬픔에 반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절제된 것에 미적인 근거를 찾는.

(이런 얘기하면 간혹, "나는 이 음악이 엄청 좋은데 왜 악평을 하느냐?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수준이 낮아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인가?"라고 반응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필자가 "송혜교는 별로 안예쁘다"라고 말 할 때에도 같은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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