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Who, " violinist / 뮌헨음대 교수 " < 발췌문 >

by jons posted Mar 0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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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

읽어 본 기억 없습니다, 이 걸 보기 전까지 말이죠 ..

대단한 글 아닐가요,

 

어느 악기이든 공통점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

 

뮌헨 음대 한국인 교수,

유럽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이 미 경"


 

 “현을 제대로 켜면 바이올린에서 내 심장 소리 들린다.”


● 한국서 잘한다는 소리 들었던 나 ‘메뉴인’에서 첫 고비는 ‘도레미’였다 ..

바이올리니스트 이미경(53). 그는 독일 뮌헨대의 음대 교수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선뜻 감이 오질 않는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판소리를 가르치는 금발의 서양인 교수”라고 비유하면 감이 팍 온다.

  클래식의 고향은 유럽이다.

그중 독일은 바흐와 베토벤, 바그너와 브람스의 나라다. 독일 국민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국립 뮌헨대에서, 더구나 동양인 여성이 음대 교수가 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그의 무엇이 이 자리까지 오게 했을까. 한국을 찾은 그에게 바이올린과 음악, 그리고 인생을 물었다.

● 만 15세, 메뉴인 유일한 미성년 학생

 1975년이었다. 그는 서울예고 2학년이었다.

어머니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메뉴인 아카데미가 한국에서 오디션을 한다. 지원자가 모자란다. 재미 삼아 참석해 달라.” 깜짝 놀랐다. 예후디 메뉴인(1916~99)은 ‘전설’의 반열에 오른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다. 스위스의 메뉴인 아카데미는 전 세계를 훑으며 20명의 학생을 뽑아 전액 장학금으로 최고의 연주자를 키운다. 합격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이유도 엉뚱했다.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 오디션이 열린다. 그런데 지원자가 태부족이다. 창피할 정도다. 어차피 떨어질 테니 와서 자리만 채워 달라.” 사실 그는 응시자격도 없었다. 나이 제한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오디션장에 갔더니 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었다. 나는 만 15세였다. 그래도 오디션을 봤다.”

●무슨 곡을 연주했나.

 “메뉴인 아카데미의 원장이 직접 왔더라.

나는 멘델스존의 콘체르토를 연주했다. 듣더니 ‘음정이 다 틀렸다’고 하더라. 그리고 자신이 직접 바이올린을 들고 시범을 보여줬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현을 짚고 있던 원장의 왼손가락 하나를 살짝 옮겼다. 내가 듣기에는 그의 음이 틀렸기 때문이었다.”

●원장의 반응은 어땠나.

 “깜짝 놀라더라. ‘이 아이가 듣는 귀가 있구나’라고 생각한 거다.”

그게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결국 그는 오디션에 합격했다. 이듬해 초 사춘기 소녀였던 그는 부모의 반대를 뚫고서 홀로 스위스로 떠났다.

 메뉴인 아카데미에서 미성년자는 그 혼자였다.

아카데미는 스파르타식이었다. 엄격하고 냉혹했다. 가자마자 절망했다. 의외의 이유였다. “한국에선 꽤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멘델스존 콘체르토, 베토벤 콘체르토 등 화려한 연주를 준비해 갔다.” 그런데 그를 고꾸라뜨린 건 뜻밖의 대목이었다.

 

 

● 바이올린의 기본인 ‘도레미파솔라시도’였다.

첫 레슨 날이었다.

알베르토 리시 원장이 ‘도레미’를 켜보라고 했다.

“첫 음을 켜고 둘째 음을 켰다. 그랬더니 ‘집에 가라’고 하더라...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고 그냥 돌아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랬다. ‘도레’ 하니까 집에 가라고 했다. ‘도레미’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해오라고 했다.”

●괜한 군기 잡기였나.

 “그건 아니었다. 나는 고민했다.

 

너무 당연한 얘기 같지만, 소리를 듣기 시작하니까 모든 게 달라졌다 . .

그렇타면 모든 연주자가 듣지 않는다는 것 인가 .. 너무 중요한 얘기다,

그리고 집중해서 듣기 시작 했다. 그랬더니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전에는 악기 연주만 했을 뿐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더라. 소리에 집중하면서 연습을 시작했더니, 정말 내 음이 다 틀렸더라.”

●절망했나.

 “틀린 걸 알고선 투지가 생기더라.

그날부터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를 연습하는데 하루가 모자랐다... 날마다 일곱 시간씩 ‘도레미파솔라시도’만 했다.

그 전에는 연습을 해도 뭘 연습해야 할지 몰랐다 ... 갑자기 들리기 시작하니까 모든 게 달라졌다...

석 달 동안 이를 악물고 ‘도레미파’를 연습했다.”

●그걸 통해 뭘 배웠나.

 “하루에 ‘도레미파솔라시도’ 올라가기도 너무 힘들었다. ‘도시라솔파미레도’ 내려오는 건 엄두도 못 냈다.

그때 깨달았다. <삶에서 기본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다. <자세도 중요>했다. 바이올린 켜는 자세가 틀리면 음이 안 나오더라. 자세를 제대로 잡아야 맞는 음이 나왔다.

 

"바른 자세" "기본기", 그건 바이올린에서도, 내 인생에서도 가장 중요한 첫 단추가 됐다.”

 메뉴인 아카데미는 냉정했다. 연주회 연습을 할 때는 매일 6시간씩 선 채로 연주했다. 쉬는 시간도 없었다. “한번은 친구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그런데 원장님이 ‘왜 화장실을 가느냐? 정신을 안 차리니까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이라고 눈물이 핑 돌게 야단을 쳤다. 결국 친구는 화장실에 못 갔다. 또 어떤 학생이 ‘오늘 아파서 연습하러 못 가겠다’고 전화를 했다. 원장님은 ‘그럼 진로를 바꾸라’고 쏘아붙였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스파르타식 훈련이 음악에 도움이 됐나.

 “사실 도움이 됐다. 내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음악을 위한 엄격함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혹독한 훈련이 내겐 음악을 하는 근육을 키워줬다.

요즘도 나는 매일 두세 시간씩 연습을 한다.

열이 40도씩 올라가는 날에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택시 사고로 갈비뼈 6개가 부러졌을 때도 무대에 올라 연주를 했다.

연주회 직전, 손가락에 유리가 박힌 적도 있다. 미처 빼질 못했다 ... 그래도 무대에 올랐다. 현을 짚을 때마다 너무 아팠다. 그래도 연주회를 끝냈다.

 

수천 시간, 수만 시간 연습을 하면 2시간짜리 연주회를 서바이벌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당시 그는 메뉴인과 둘이서, 혹은 셋이서 무대에서 협주곡도 연주했다. EMI에서 LP레코드판도 나왔다. 메뉴인과 협주를 한 사람은 국내에서 그가 유일하지 싶다. “메뉴인은 세계적인 대가다. 당시 그는 손이 떨렸다. 손이 떨리면 활이 떨린다. 그는 연주회 직전까지 연습을 했다.”

 

●어떤 연습이었나.

  “‘끽, 끽’ 소리를 내는 개방선 긋기였다. 현을 전혀 짚지 않고 활만 긋는 일종의 스트레칭이자 몸풀기였다. 그걸 연주 직전에 2시간씩 하더라.

 

전설적인 대가도 무서울 정도로 바이올린의 기본기에 충실하더라.”

 이후 그는 쾰른대 음대로 갔다. 메뉴인 아카데미에서 2년간 배웠으니 오디션 통과는 어렵지 않았다. 메뉴인 아카데미에는 스무 명 남짓한 학생이 있다. 쾰른대에는 수천 명의 학생이 있었다. “메뉴인 아카데미에서는 섬세하고 정교한 작은 그림을 배웠다. 쾰른대에선 큰 그림을 배웠다. 작은 그림과 큰 그림, 바이올린을 켤 때는 둘 다 필요하다.” 그는 26개 독일 음대의 바이올린 최고 연주자들이 겨루는 전(全) 독일 음대 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세계 최고로 꼽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도 5위에 올랐다. 뮌헨 국제 콩쿠르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궁금하다. 콩쿠르 무대에 설 때의 공포감, 어떻게 극복하나.

 “공포감이 없는 사람은 손 들어 보라. 아무도 없다. 나는 ‘떨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떨리는 건 당연하다. 떨릴 때 그걸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중요하다. 그건 연습에서 나온다.”

 

●한국에서 음대생들은 ‘콩쿠르’에 목을 맨다. 어떻게 보나.

 “문제가 있다. 콩쿠르 참가자들은 항상 똑같은 곡만 연습한다. 한 곡으로 이 콩쿠르, 저 콩쿠르에 도전한다. 콩쿠르에 입상하면 자신의 연주회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입상 후 정작 연주할 레퍼토리가 없는 거다. 억지로 연주회를 한다고 해도 실력이 들통나고 만다. 결국 연주자는 슬럼프를 맞게 된다.”

 ●그래도 콩쿠르 입상이란 경력이 필요하지 않나.

 “그건 맞다. 경력을 위해선 콩쿠르 입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굉장히 많은 준비를 한 뒤에 콩쿠르를 하는 것이 좋다. 너무 일찍 콩쿠르에 입상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맥 없이 핀란드·독일서 홀로서기

 독일에선 학연이나 인맥으로 음대 교수로 채용되는 건 불가능하다. 절차도 까다롭다. 바이올린 교수 채용 오디션을 할 때는 전공 학생들이 직접 와서 투표를 한다. 학생들의 평가비중이 30%다. “인맥을 통한 교수 채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실력이 없으면 교수가 되기 불가능하다.” 당시 뮌헨대 음대 학장은 그의 오디션 연주를 듣고 “무언가 세상과 다른 소리가 있다. 그의 연주에는 영혼의 소리가 있다”고 평했다.

 

●독일에는 동양인 여성 교수가 많나.

 “아니다. 내 연배에는 독일인 여성 교수도 드물다. 동양인 여성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 유학생들이 요즘도 불평한다. ‘동양인 여성은 오케스트라 오디션의 서류심사도 통과하기 어렵다’고 말이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 배를 잘해야 한다. 그게 억울한 것 같지만, 그게 또 우리를 뛰게 한다’고 말이다.”

 뮌헨대 교수가 되기 전인 99년, 그는 핀란드의 유일한 음대인 헬싱키대(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교수 채용 오디션을 봤다. 그는 1차 심사에서 1등, 2차 심사에서 2등을 했다. 최종 발표만 남았다. 채용 과정에 참여한 음대 학생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미경 리’를 1위로 지지했다. 그들은 총장과 학장, 언론사에 편지를 보냈고, 이 문제는 사회적 관심사가 됐다. 최종 선발에서 결국 그는 교수가 됐다. 헬싱키대에서 5년간 교수로 일했다. 한국보다 유럽에서 ‘미경 리’는 더 유명하다.

 독일로 간 지 꼬박 37년. 지금도 그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독일의 대학은 모두 국립이다. 공무원은 독일인에게도 선망의 직장이다. 혜택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그도 국적만 바꾸면 얼마든지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국적은 바꾸지 않았다. “국적을 바꾸려니까 뭔가 불편했다.” 최근 독일 정부는 매우 예외적으로 한국 국적을 가진 그에게 공무원 신분을 부여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도 과학적인 이치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바이올린과 활, 손가락과 소리의 관계를 꿰뚫어야 한다. 하나씩 꿰뚫을 때마다 ‘아하!’ 하는 느낌이 온다. 그런 깨달음 이 연습하면서 끝없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진화할 수 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지는 게 ‘연습’이라고 했다. “연습은 끝없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 없다. 음악이 살아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움직이는 거니까. 음악은 인생을 똑 닮았다. 자신의 소리를 사랑할 때 연습은 지루하지 않다. 자신의 소리를 사랑할 때 인생도 지루하지 않다.” 그는 고국에서 활동폭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4월 12일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시리즈의 마지막 연주회를 연다.


 

“아무리 비싼 바이올린도 그저 나무통 … 그걸 울려 주는 건 사람입니다"

 

 
메뉴인과 하이페츠는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힌다. 하이페츠가 연주회를 마쳤을 때 청중이 그에게 몰려와 물었다. “너무 소리가 좋다. 악기가 어떤 거냐?” 그러자 하이페츠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번쩍 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이페츠가 물었다. “무슨 소리를 말하는 거죠?”

 
 이미경 교수는 이 유명한 일화를 꺼냈다. “연주자의 소리가 80%, 악기의 소리가 20%다. 아무리 비싼 바이올린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결국 바이올린을 울려주는 건 인간이다. 저건 나무통일 뿐이다.”

 이 교수의 바이올린은 1785년 만든 ‘스토리오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다니니, 과르네리델제수처럼 ‘세계 3대 바이올린’에 끼는 최정상급은 아니다. 그래서 ‘푸어 맨(poor man) 스트라디바리우스(가난한 사람의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불린다. 가격은 못 미치지만 소리는 그들에 못지않다고 한다.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하던 이 교수는 스토리오니를 켰다. 폐부를 가르는 선율이 순식간에 스튜디오에 울렸다. “소리가 정말 좋다”고 했더니 이 교수는 손에 쥔 바이올린을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를 말하는 거죠?” 그리고 바이올린 몸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나무는 지금도 살아 있다. 그래서 잘 울려주면 악기는 더 좋은 악기가 된다. 그걸 울려주는 건 사람이다.”

* 발췌자 첨  " 나쁜 연주자만 있을 뿐이다..오직 "
 
** 윤이상 선생이 건네준 악보

 
이미경 교수는 독일 베를린에서 작곡가 고(故) 윤이상(1917~95·사진)씨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연주가는 대부분 돌아가신 분의 악보를 연주하죠. 악보의 해석은 연주자의 몫입니다. 생존 작곡가를 만나는 기회는 매우 값진 겁니다. 이 악보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직접 물어볼 수 있으니까요.” 그는 윤이상씨 앞에서 그의 곡을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윤씨는 “아주 좋다”고 말했다. 이튿날 전화가 왔다. 윤씨가 자신의 손녀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고교생이었던 손녀는 주 1회 비행기를 타고 쾰른 음대에 가서 레슨을 받고 있었다. 이 교수는 3년간 윤씨의 손녀를 가르쳤다. “윤이상 선생님이 제게 콘체르토 1번과 2번 악보를 주신 적도 있어요. 웬만해선 악보를 주지 않는 분이거든요. 그때는 멋모르고 받기만 했어요. 나중에 주위에 그 얘길 했더니 ‘그건 자신의 곡을 연주해 달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그때는 몰랐어요.”
 
이 교수의 부모는 한국전쟁 때 월남했다.

“윤이상 선생님의 손녀를 가르친다고 했더니 ‘당장 그만두라’고 하셨죠. 북한 관계도 있으니까 나도 겁은 났어요. 그래도 윤 선생님은 서양 음악계에 등재된 작곡가입니다. 그 이후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나는 오직 그 분의 음악만을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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