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Chandos] The Guitar Music of Ferranti & Ferrer 정보

by 으니 posted May 3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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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음반의 속지를 부분부분 옮긴 내용입니다.


Ferranti는 라디오에서 전투정보시스템까지 생산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전기통신업체이다. 이 회사의 설립자인 Marco Aurelio Zani de Farranti(1801-1878)는 사실 당대에는 기타 음악가로 더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로시니, 파가니니, 베를리오즈와 같은 음악가들이 그를 찬양했고, 그는 유럽의 “문화적 엘리트”들과 교류하였기에 공연을 하면 성악가 헨리에타 존탁, 바이올리니스트 카밀리오 사이버리와 같은 이들이 축하하러 와 주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시인이자, 번역가였고 라틴어에도 능했다.
그는 볼로냐에서 1801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의 페런티는 어학, 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음악 공부는 비교적 늦은 12살이 시작했고, 4년간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리구나서 기타로 바꾸었는데 실력이 엄청나게 빨리 늘었다. 기타로 바꾼 이유는 정확치 않지만, 아마 파가니니의 영향 탓이 아닐까 한다. 파가니니는 패런티가 공부하던 도시의 루카 공주의 궁정음악사였다. 1820년까지 패런티는 파리에 있다가 잠시 상트 페테르 부르크로 이주한다. 여기서 그는 사서 일을 맡았다가, 나중엔 황족의 비서로 일한다. 그의 정치적 행보가 다양했던 탓으로 러시아, 함부르크, 그리고 파리(두번)을 거친 후에 브뤼셀에 정착하게 된다. 몇 년간의 노력을 통해 유럽의 최고수준의 거장 수준에 이르게 된 그는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한다. 그의 단테 연구, 시, 그리고 번역작품들은 생전에 출판이 되었고, 두 번 결혼했다가 두 번 다 사별했는데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이 있다. 그 아들 케사르의 아들 즉 손자 세바스티안은 패런티 필름을 세운 가장 혁신적이고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그의 말년에는 기타의 인기가 시들해졌기 때문에 1878년 피사에서 죽을 때까지 금전적인 압박으로 고생이 심했다.

페러는 타레가의 동료로 페러의 기량이 타레가에 비해 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였다. 패러의 작품들은 우아하고 매력적인데, 스페인에 뿌리를 둔 파리인의 감수성을 지녔다. 그는 제로나 근처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생애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리의 음악학교에서 가르쳤고 가끔 콘서트를 했다. 몇몇의 대곡들도 있으나 그의 작품은 대부분 소품들이고 다양한 젊은 여인들에게 바쳐졌다. 후에는 1916년 죽을 때까지 바르셀로나의 리께오 음악원의 기타과 교수로 있었다.



현재 샨도스 레이블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절판된것이 아닌가 싶지만, 제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시내 유명 클래식 매장에서 이 음반의 재고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음반 듣다 생각나서 이 말 저 말 좋다고 써놓고 나니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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