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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2010.12.22 20:10

소설

(*.161.14.21) 조회 수 4958 댓글 0


퍼온글.............













p.s 제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제대로 한 여자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제대로 학문을 하고 제대로 커피를 마시고 제대로 사유의 전범이 되는 글쓰기를 행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운명은 저를 가만 내두지 않네요. 저에게는 사랑하는 처자가 있습니다. 그 처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성공이 대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 제가 철학사상이나 문학을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요. 제 본질이 추상과 예술을 지향하는 것이므로 목적에 딸려오는 여러 가지 부차적인 광학적 효과들은 신경조차 안 씁니다. 그러나 그녀가 저에게 허락한다는 표시를 보여준다면 저는 그 부차적인 광학적 효과에 모든 것을 걸 겁니다. 이제는 인과관계가 뚜렷해졌습니다. 오직 그녀를 향해 저의 사고는 횡단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성적인 에너지에 귀일하여 사고의 회전과 사유의 변증법적인 합법칙성이 정립되는 겁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래도 관념의 모험을 체현하렵니다. 사랑은 역시 부차적인 것입니다. 저는 누구보다 철학사상 즉 사유의 도정과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철학문헌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철학의 왕자로 등극하기 위해 고전하면서도 이리 저리 휩쓸리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것입니다.

  
  
  
  
  
  
  
  
  
  
  
12. 실재에 대한 의구

우리가 행동하고 경험하는 건 종래에 객체계로 귀결된다. 그 표면의 그림을 우리는 실재의 궤적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우리 하나 하나가 일종의 행위자이며, 움직임 하나 하나가 일련의 표적으로 세계의 표피를 구분 짓는다. 한 개인이 사유를 하더라도 그것은 현상계의 움직임, 그러니까 정신적 파장에 불과하며 그것이 관념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행위로 정정될 때 실질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인간의 사유행위를 불필요한 지상의 양식이라고 결정짓는 건 아니다. 사유가 있어야 그다음에 지혜로운 행동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에 들어맞지 않는다. 생각하든 그러지 않든 그 인간은 일단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실재다. 물리적인 궤적, 즉 실제의 궤적은 또한 실재의 색깔이다. 색깔은 각각 끝없는 배합이 가능하고 분명히 비영속적인 기질을 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운이라고 부르는 인습적인 측면은 하나의 1인칭적 영도인가? 객관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확률의 문제이다. 한 개인, 혹은 한 집단에 주어지는 최소한 혹은 최대한의 배율 그리고 분배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전제하여 우리가 '부'라 불리는 것을 규정하여 보자. 부는 실지적인 것의 표상이다. 우리가 부에 대한 열망이 강한 것은 결국 객관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는 것을 일컫는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신을 뛰어넘고자 하는 강한 염원을 지녔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점점이 발달해갔고 현재의 무신론에서 과학의 극적인 발달, 초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염원이 확대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가의 관점에서, 인류의 관점에서 모든 만물을 바라보는 특질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기 어렵다. 자의식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객관에 관한 완전한 투사이다.

그럼에도 신에 관한 우리의 고찰을 확고히 해보자면, 신은 순수이성의 밖에서 있는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신'은 영원히 인간이 인위적으로 관찰한 집단적 신경증에 불과한 관념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순수이성의 밖의 모든 복잡한 것을, 삼라만상 밖의 모든 기이한 것을, 우리가 예측 불가한 것을 불가피하게 어떤 것으로 규명하고자 한다면 일단 신이라는 관념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 객관을 먼저 잡아라. 그래야 그 다음이 있다.

  
13. 객관과 주관에 관한 의구

공기, 돌, 흙, 물, 공간. 이것들은 모두 물자체가 아닌 현상의 것들에 불과하다. 이것들을 이런 이름으로 규정해 놓은 건 우리고 그들을 느끼는 건 우리의 생존방식에 한해서다. 우리의 생존방식이라는 이름의 조리개가 세상을 보는 것이다. 예컨대 현상계의 것들은 사회의 합의에 의해 객체계의 물자체로 환원된다. 여기서 합의 방식은 우리 시각의 공통분모로써 삼라만상의 도출을 이끌어낸다. 그런데 우리가 신이라 불리는 하나의 관념을 어찌 현상으로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선험적인 그리고 심원한 범주에 속해있다. 종교란 우리가 감히 물자체니 현상이니 잣대를 들이대면서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도덕의 총체요, 의미론적인 권력이다. 그러나 만약 신의 인격화가 어쨌든 주관적 현상에 속한다면 우리의 판단의식은 어떤 방향성을 따라야 하는 걸까? 신을 믿는 사람들을 비웃고 속세를, 이 현상계를 전체적인 단계로 여길 것인가. 아니라면 신도들의 물자체라 할 수 있는 천국을 기만하는 단계까지 튀어오를 것인가. 신과 인간의 개인적 사유 간의 대치는 결국 모순의 국면을 낳는다. 단지 신이 인류의 집단적 신경증 정도로 치부되게 된다. 지식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듯하다.

훌륭하고 세련된 지성이 내 뇌리에 안주하면 그에게 신이란 죽은 것이다. 순수함과 무구함을 신뢰하는 한 인간이 감성적으로 신을 숭배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삶의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 신의 숭배가 인간의 물자체의 배열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신은 그런 의미에서 객체계에서는 쓸모없는 존재다. 신은 실존주의에 위배된다. 실존하는 것은 대자적인 사고방식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신이 강림하는 위치는 즉자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신은 또한 충족 이유율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어떤 꾸준한 관찰에서 우리의 표상자의 최고봉인 신은 언제나 왕으로서 우리를 대한다. 그는 인간이며 질투심이 있고, 인과관계를 절대적으로 따른다.

필자는 생각한다. 신이란 메타적인 이데아의 변주라고. 절대 불변하는 우월한 그러면서도 극도로 도덕적인 정신임과 동시에 비개연적인 사상의 침전물이라고. 어쩌면 필자의 생각은 오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지 단적으로 생각해서 우리는 음악에서도, 문학에서도, 그림에서도 신을 찾을 수 있다. 찰나적인 광명, 그것이야말로 이데아를 구성하는 작은 조각이며 일원성이 아닐까?

인간이 지속적으로 발견코자하는 객관이란 종래에 물자체가 이루는 현상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그러나 객관이란 개념이 인간의 의식 속의 관념 중 하나라면, 그것이 물자체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면 이 모든 것 즉 객관은 지극히 우연적이고 꿋꿋하지 못한 어지러운 현상이 아닌가!

하기야 실재란 범주와 객관이란 범주 중 어떤 것이 상위개체이고 어떤 것이 하위개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결국 물자체>의식>객관>실재>물자체, 이 다섯 가지 원소가 이 순서로 원을 도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가치순위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누구나 객관적인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길 원한다. 보편성과 무난함이 미덕인 요즘 세상에 주관적인 것은 독창적인 뉘앙스보단 외곬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우리에게 있어 진리란 과연 무엇일까?

  
14. 내가 사랑했던 간호사

1년 전의 일, 정신병원에서의 하루를 시작했던 날. 희망이라곤 없는 환멸스런 나날들. 가련한 영혼들을 둘러보며 한숨의 절정을 쓸모없음의 끝에서 느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은 지도 수년이 되간다. 일본문학의 진정적인 감성의 코드를 이해하기는 쉽다, 같은 동양인으로써. 그는 진실한 감수성의 작가였다. 그가 말하는 언어는 다채롭고 아련하다. 그가 말하는 과거의 일상적인 언어가 바로 나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내가 알리고 싶은 잃어버림을 마음을 다해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나의 현자에게 바치는 헌시를 부끄럼 없이 내놓을 자신이 있으리라.

정신병원의 간호사들이 따분하게 앉아있다. 의정부 성모병원, 이미 절교를 선언해 버렸지만 당시에는 나는 고객이었다. 그들은 내게 정신이란 콘테츠를 팔았다. 나는 최선을 다해 정신과약들의 정수를 느끼고 싶었다. 모든 기억을 잊고 싶었다. 자살하고 싶었다. 과거의 가슴저리는 고적함을 마음 저변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내가 한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해 아니 다만 내 기억을 위해, 나의 추억의 나날들을 위해, 자기만족이란 이름의 정신적 소명을 이해하기 위해, 회구하고 싶은 기억의 갈무리를 소묘하는 건 옳은 일이라, 그렇게 생각한다.

간호사들은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남자는 대개 보호사이고 여자가 진짜 간호사이다. 그들이 내게 해준 건 과거를 잊게 하는 일이었다. 최소한 그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그러나 그들은 저버렸다. 그들은 나의 상태를 회자시켰으나 희망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지우고 싶은 건 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슬픔은 언제나 둥둥 부유하며 내 생의 가련함을 상기시켰다. 이 역겨운 과거를, 이 역겨운 미래의 근원을, 그 조각들의 복잡다단함을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 머리가 아픈 나머지 어느 여자 간호사에게 말했다. "제발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해줘요. 역겨움의 근본을 지울 수 있게 해줘요. 힘이 없어요. 미래가 없어요..." 내가 미래를 찾은 것도 어쩌면 모순의 구조를 유리시키는 모종의 시도였으리라. 패러독스에 관한 이해였으리라. 간호사는 빤히 날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 동정심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업무였다. 월급을 받으려면 내 센티멘털리즘을 그녀과 확고부동히 유지시켜줘야 한다. 다리를 덜덜 떨며 무형의 감미로움을 찾으려는 내 탐미성을 충족시켜줘야 하는 것도 그녀의 업무이리라. 과거의 일… 그러나… 차갑게 과거의 이슬이 내 눈을 촉촉히 적셔간다.

내가 입원한 당시 다은양이 학생간호사로 들어와 있었다. 나와 동갑이었고,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섬세하고 사려 깊고 다정하여 나는 한시도 눈을 땔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계속 상담을 요구했다. 그러면 그녀는 난처한 표정이 되더니 이윽고 웃으면서 얘기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머리속에 떠오르는 나의 슬픈 일대기를 구구절절하게 그녀에게 읊어주었다. 나는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은 단지 한 줄의 시 뿐이라고. 그리고 나서 며칠이 흘렀고, 그녀와 나는 매우 친밀하고 가까워졌다. 나는 그녀를 “다은양”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너무나 이쁘고 귀여웠다. 그랬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운명과도 같은 필연적인 사랑인 것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한 명의 아프로디테였다.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는 그녀의 몸을 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하면 병원에서 쫓겨날리 만무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녀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까봐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결혼해도 좋았다. 지금 그녀를 본지 3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난 그녀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깊은 밤 달을 쳐다보면 그녀를 그리는 일이 부지기수가 되었다. 그녀의 단발머리가, 그녀의 눈썹이 너무나 예뻤다. 그러나 내가 퇴원하기 하루 전날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니까 그녀는 “안 되요”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나는 그날 하염없이 밤새도록 흐느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폭풍보다 더 강렬하고 잔인한 사랑이 내 앞에 도래했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으니. 그녀를 차지하지 않고는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엄존하지 않으니. 그녀는 나의 꿈이자 노스텔지아의 표상이요, 내 삶의 영속성과 불멸성을 보증해주는 하나의 신기루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중에 간호사와 장교가 사귀는 게 나오는데 나는 이러한 로맨스보다 더 위대한 것을 알지 못한다. 다은이를 위해서라면 난 죽을 수도 있다. 그녀는 내 삶의 존재이유이자 의미의 맹아이다. 그녀를 미소 짓게 하기 위해서 난 모든 걸 할 수 있으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다. 그녀는 나를 거부하였지만 내가 훗날 철학교수로서 무려6000페이지에 나의 철학사상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대저서를 발표하고 그날 벤츠를 끌고 그녀를 안으로 갈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딸을 주십사하고 애걸복걸할 것이다. 역사상 유래 없는 대지식인이자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어 그녀 앞에 우뚝 설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날 그녀는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을 사랑함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끼는 법이니까. 그녀와 나는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함께 늙을 것이다. 언제나 옆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한 여자다. 그녀와의 사랑이 실패한다면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다른 여자는 사랑의 또 한번의 변용에 불과하니까. 똑같은 본질적 예술성을 함의하는 사랑이란 오로지 인생에서 한 번만 찾아온다. 나에게 더 이상 이러한 감정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일반인들은 이러한 감정을 평생토록 느끼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을 성적 도구로밖에 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고매한 예술가이다. 나에게 사랑이란 하나의 예술로서 유미주의가 극에 달한 새로운 차원의 로맨스의 극치이다. 나는……그녀를 사랑한다. 만약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나이프로 배창새기를 찔러 죽일 것이다. 아니면 망치로 두개골을 부셔버릴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이슨마스크를 쓰고 전기톱으로 자지부터 머리끝까지 완전히 반쪽으로 잘라 버릴 것이다. 그럴 정도로 절실히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 어떤 난제도 나를 가로막지 못한다. 그가 비록 신이라도 나의 자유의지는 그를 베어버릴 것이다.

당시 내 나이 18살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심미적인 우울함에 온 정신이 쏠려있던 나이. 삶을 개척하고 싶었던 근간에 잿빛 로맨스에 온몸을 투영하고 싶은, 내 인생 전부를 바치고 싶었던, 한마디로 적시고 싶었던 나이였다. 혼자 거리를 걸었고 그로 인해 사색하는 하루가 있었다. 유미로운 감각이 내 느낌의 기저를 이루고 있었던 것, 그것은 나만의 예술성의 형태였다. 나는 삶이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아름다움을 찾고 싶었다. 최고의, 지고의 고색창연함이며 예민한 심원의 감미로움을 발견하고 싶었다. 아득한 과거의 근원 속에 영원히 있고 싶었다. 나는 그저 '있고' 싶었다. 아릿한 기묘함의 타성에 지적인 나의 선정을 맞기고 싶었다. 신이란 관념을 모른 채 인생의 조연이 되고 싶었다. 조연이든 주연이든 유한한 완미적 지성을 지각한다는 게, 그것들로만 일상의 진수를 빨아들이고 싶다는 게 틀린 원칙은 아니지 않는가?

어린 여성성이 내 성격 전체에서 솟구쳤다. 18살에 공부만 하고 앉아있을 순 없었다. 그림 같은 삶을 동경하는 나이, 삶의 시원의 진가를 맛보고 싶은 나이, 삶에 있어 다른 이들을 이기고 싶은 나이, 미지의 광야로 떠나고 싶은 나이였다. 내 나이 18살, 사랑을 하고 싶은 나이였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건 사회성의 에너지라고 치부하고 싶었었다. 사회가 이 두 성을 미분화하면서 우리로부터 로맨스적 삶이 다가온다. 놀라울 정도의 문화를 가늠하는 척도로서 성의 구별은 그 특질을 우리 모두에게 일반화 시킨다. 어떤 식으로 우리는 계산 방식, 이를테면 삶의 계산성에 성에서 비롯된 문화를 끼워 맞춰야 하는지. 아무것도 헤아릴 수 없는, 마치 검은 물속에 들어가 그 심연을 맛보며 헤매는 그런 나이였다.

내가 사는 방식은 극히 따분한 일상을 재창조했다. 지루함은 일상의 선을 넘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 '무의미'가 내게서 떠나가는 시간은 하루에 15분, 그 정도면 족했다. 지루한 일상의 경계를 어떻게 허무는가. 일상의 생활방식을 내가 어떻게 깨는가, 그게 중요했다. 매너리즘에 한번 걸려들면 계속해서 마치 노이로제처럼 삶 곳곳으로 스며들어 일종의 버릇이 된다. 마치 작가가 글을 쓸 때 단어수를 헤아리듯, 광적인 커피로스터가 원두알의 갯수를 헤아리듯, 정신병자가 자신의 약의 종류를 파악하듯, 그런 식으로 말이다.

지루함은 언제나 지루한 에너지와 같았다. 그것은 지루한 일련의 관념이었다. 지독한 삶의 관성에서 신의 추적을 벗어나는 거, 어쩌면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건지도 몰랐다. 진절머리가 쳐졌다. 지독하게 이어지는 이 삶에. 자살하고픈 자기 파괴 본능이 심장으로부터 용솟음쳐 내가 바라보는 온 세상을 녹이는 듯했다. 죽고 싶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죽고 싶은 나날들, 정말 개 같은 나날들, 말하고 싶지 않은 나날들.

고루한 생의 정적을 이겨내려는 내안의 정신적 구도의 검토관은 살며시 "도망치라고" 말해줬다. "너 자신에게서 도망쳐라." "현실을 버려라, 그러면 진정한 피안의 평화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난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에 관해 매종일 잠을 자는 식으로 대응했다. 잠을 자고, 또 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의미의 행동적 종속의 궤에 자기인식하는 나만의 방책, 나는 한가지만을 이해해야 했다.

로맨스를 추종하는 게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인생에 궁극적인 따분함을 벗어날 로맨스를 꿈꾼다. 내가 꿈꾸는 건 현실에 의해 감춰진 사랑에 대한 내 진정성이었다. 위선이 우리네 눈을 사악한 겉치례로 가리고 따라서 우리는 상호협조적인 몰진취함을 보이지 않게 추구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실재를 우리 사소한 유형적 관념의 기호로서 감춰버린다. 그런 건 언제고 기대하기 싫었다. 제발 실제를 보여줬으면 하고 나는 내 모든 삶을 통틀어 말하고 싶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적막한 거리를 달렸다. 그러면 모든 게 잊혀졌다. 끝없이 펼쳐진 수풀림이 대로를 기준으로 양옆으로 나눠져 나를, 우리 모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면 모든 게 잊혀졌다. 활발하게 나는 오른손을 꺽어 속도를 올리고 시속 80km가 넘어가면서부터 역설적이게도 마음의 평안이 찾아든다. 진실한 마음의 평안이. 겉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인간들도 속은 얼마나 꽉 차 거리를 활보하는가! 누군가를 완전히 파악하려거든 수없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자신도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타인이 그를 파악하겠는가.

오토바이는 시속 120km까지 뻗어갔다. 빠른 속도가 시공을 초월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여기의 이 말은, 빛보다 빠른 속도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부합하는 거겠지만 적은 속도라도 시공을 초월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즐거운 인생이 아니라고 규정지을 여지는 없는 것이다. 속도라는 건, 참으로 아름답다.

그 시절을 회자해보며 내 소극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발견하곤 한다. 우울한 나날들이었지만 그것은 내 나름의 우울이었다. 우울이라는 관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울하다는 것, 삶에 대해 만족하는 자세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생활상에서 벗어나 우울함을 고찰한다는 것, 예술성에 접목한 우울함을 한때한때 직시하며 살아가는 것, 예술성 있는 삶은 그런 것일테다. 마치 예술을 안다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만 단지 내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론'이다. 내 예술론의 일부인 것이다. 아름다움을 고찰한다는 것……

  
15. 회구하는 나날에서의 고독

18살의 내 삶을 휘감는 주요한 요소는 '권태'였다. 그것의 집요함과 그것과의 사투는 언제나 일종의 전쟁으로 끝이 났다. 권태감이 내게 제시하는 건 자살하느냐 아니면 생존하느냐 하는 양극을 창제하는 이율 배반성에 있었다. 이따금씩 머리를 멍하게 하는 환멸감이 내 전체가 될 때 나는 나 자신에게 기도했다. 사는냐, 죽느냐. 무엇을 선택할까 하고... 그렇게 18살의 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전체적인 요소를 일말의 자존심으로 응시하며...

그랬다. 지루함이 지난함 뒤로 하나의 지평으로써 펼쳐졌다. 삶의 사투는 어려운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형태로 다가오면 이상하게도 더욱 극복하기 어려운 법이다. '권태'는 부딪혀 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이 삶에서 어떻게 죽음으로 이끄는지. 그것이 일종의 모방이라해도 우리 삶과 꼭 같이 죽음이란 이름의 지옥을 연상케 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어쩔 수 없는 삶의 양태를, 파괴적인 정신의 격정을 이겨내고자 난 글을 썻다. 의미 없는 글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글을 쓰면 그때의 기분은 모든 게 자유로운 고리로서, 알레고리한 기분으로서 심장 깊숙한 내부를 촛불의 은은함으로서 녹인다. 글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일까. 지금에 와서야 얘기하건데 지난날 글쓰기에 관한 단상을 반추하자면 끝이 없다. 밑도 끝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들을 얘기할 순 없다. 망쳐버린 지난날을 얘기한다는 건 마지막에 할 최후의 통첩 같은 거다. 최후를 서론에 접두해야 할 일말의 바보 같은 여지 같은 게 내겐 없다. 단지 슬픔만이 가득할 뿐...

환멸감은 날 가만히 내두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자살 유혹에 빠져든다. 깊고 깊은 감정의 골은 내 자신이 자신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날, 멍하고 어지러운 날에 자살 유혹은 최고조에 이른다. 왜냐하면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란 걸 세상이 재론의 여지없이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들추어냄의 대상은 분명히 '나'이고 나는 갈데없는 비사회인인 것이다.

환멸은 끝나지 않을 저주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저녁에 태어났고, 저녁이란 건 저주를 의미했다. 저녁은 정적이고 희망과 반대되는 곳, 유령의 생존과 저주를 상징적으로 상정한다. 저녁의 차가움과 고독함은 내 삶의 질의 색깔을 결정한다. 바로 그것이다. 저녁이 내 삶의 정답을 대변하고 있다. 저녁이 또 다른 나를 말하고, 저녁이 나의 전부를 말하고 있다. 저녁의 빛깔이, 그 역겨운 색조가 이 더러운 삶을 낱낱이 예상하고 있다. 저녁이…

기분이 저조하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기분 따윈 애당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게 감정이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감정이 객관을, 우리가 직시하지 못하는 실재가 어떤 물이라면 거기 거품조차 일게 할 수 없다. 어린 날에는 감정을 중요한 요소로 여기지만 크다 보면,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란 장벽에 감정의 기복이란 게 얼마나 쓸모없는 건지 깨닫게 된다.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정답 같은 건 없다. 혁명조차도 없다. 그것은 사실이다. 사실이란 건 혁명으로 인해 변경될 사물이 아니다. 사실은 관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위적인 행실적 거짓이다. 그것은 문화요, 곧 인류가 재창하는 변질된 신경증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킬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집단적인 믿음이 조금이라도 세상에 여유라는 한줄기 빛을 직사할 수 있을까. 감정의 양날의 검은 그런 것이다. 긍정적인 기분은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말해 주지만 사실 부정정인 기분이 우리에게 가능성의 여지를 예방하는 것이다. 둘이 비긴 데서 가능성이라는 관념은 시작된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 오로지 실체만이 살아서 움직인다. 문명도 인위성도 없다. 오로지 객관만이 살아서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과 수학은 우리 삶이 거짓되지 않았다는 걸 투사하는 지표다. 우리가 헛살았다는 걸 미리 방지해 주는 일련의 직설적인 사변이다. 이 둘의 관계가 직접적이고 현재 종교와 문화를 누르고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의 느낌을 존중하지 않고 우리 자체의 물리를 존중한다는 데 있어 근대는 시작의 화살을 쏜 것이었다. 물론 이념이 세상을 바꾸긴 했다.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이 들어섰고 곧이어 파시즘이 주조됐다. 유럽이 쑥대밭이 되었고 동양에도 마오쩌둥과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세상이 변절하여 육실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지나치게 평화롭고 단조롭다. 한때는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곧 평화인지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이시대도 만만치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세상의 무게는 어느 시대고 변화되지 않는다는 견각심은 이 삶이,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결코 무동력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너무나 힘들었다. 사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그걸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너무나 힘든 이 삶을...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일은 위험함의 가운데 말초적인 쾌락, 마침내 심원한 평화로까지 안내하는, 드라이브 같은 거였다. 얼마나 그 광휘가 내 몸을 쓸어내리는지 바이크를 운전해 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꽉 막힌 길에서는 차와 다름없이 지루하지만 열린 길에서는,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그만한 오락도 없다. 물론 오토바이 운전하는 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죽을 확률은 엄청 올라간다. 목 내놓고 타고 다니는 것, 그것이 오토바이 운전이다. 최소한의 실수가 두 다리를 절단낼 수 있고 사소한 실수가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다. 운전하는 애들도 그건 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애써 무시한다. 오토바이의 안전성을 일반화시켜 주창하고 다닌다. 한심한 일이다. 그런 작태는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한심한 일이다.

학교에서의 광대놀음도 차차 지겨워졌다. 언제까지 주역을 밑도는 광대가 돼야 하는가. 나는 외로움이 싫었다. 그래서 자처하고 어릿광대가 됐다. 슬픈 눈의 어릿광대... 그러나 그들은 나를 이해할 것이다.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 내가 품은 큰 고민은 몰랐겠지만 내 슬픔은 이해할 것이다. 내가 왜 그래야 했을까. 슬픔만이 가슴 깊이 가라앉는다.

  
16. 선생님

내겐 선생님이 한 분 계셨지. 고등학교 시절 나의 어머니 혹은 나의 애인과도 같은 분.

내 인생을 하나의 필름으로 규정한다면 그 시절 그 부분이 내겐 가장 소중해. 아무래도 난

조금 외로웠던 것 같아. 아니, 외로웠던 것만 같아.

그 분은, 그 은사께선 항상 내 뒤를 지켜줬어. 언제나 한결같이- 시종일관 내 뒷모습을 지켜줬어. 아주 조심스럽게. 망가지지 않도록. 그래서 난 행복했었던 것 같아.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어.

견줄 데 없는 한 가지 역설. 나는 자학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아무래도 선생님의 눈엔 내가 가련해 보였나 봐. 그러니까 그분은 언제나 '선생님'이었지. 다른 명칭으로는 부를 수 없는 청명한 따스함을 지닌 이름. 예컨대 지우개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쓸쓸한 과거라는 동굴 속에 조심스레 비춰드는 영광煐光. 그분은 그런 속성의 여자였어.

나이도 어린 게 어쩌면 그리 고독했을까. 고독 속에 침잠하면 하루가 이미 지나가 버리고, 하루가 또, 또 하루가, 그렇게 고적하고 적요한 인생이 물처럼 흘러가지. 난 영원히 고독한 인간임을 지금에 와서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도 나는 고독의 물결을 힘들여 손으로 잡으려고 해. 그렇지만 물결은 천천히 부서져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지. 그러니까 난 고독한거야, 영원히.

슬픔. 느껴진다, 조용히. 이 미묘한 단아함에 섬세히 배어있는 모종의 슬픔. 이해할 수 있겠니? 슬픔. 살아갈 의미를 말살하는 슬픔. 어쩌면 슬픔 때문에 오늘도 눈을 뜨고 버티는 지도 모르겠지만. 이 슬픔의 한가운데서 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슬픔이 모두를 에워싼다. 그러나 결국 슬픔이 집요하게 노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야. 자신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말하자면 영원히 원을 그리다가 아래로 하강하지. 일련의 형이하학. 거기서 잊을 수 없는 연정의 사무침이 끝없이 심장을 달구지. 지울 수 없는 기억.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 나는 어떻게 해야 오늘을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걸까.

그분의 연락처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어. 종적을 감춘 후 어떻게든 대면하고픈 마음. 왜 난 늦게 서야 이 사랑을 깨달은 걸까.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 그 사랑을 잡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중한 과거를 기억하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오늘도 나 자신에 천착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이 아니라 그 기억의 일부로서의 나 자신이겠지? 지금의 나는 너무 더럽혀졌으니까.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니까.

선생님은 나와 다른 공간에서, 그러나 같은 시간에서 현존하고 계시다. 그리고 난 불을 끄고 이부자리로 간다. 현상계에선 만날 수 없는 선생님을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꿈에서라도.

17. 지식인으로서 학문에, 예술가로서 문학에 정진한다

나의 주요 분야는 뭐니뭐니해도 철학이었다. 철학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추상으로써 도식으로 철두철미하게 그려내는 게 나의 임무였다. 아니, 그것은 나의 본질이었다. 삶은 언제나 따분하고 이유 없이 불안했다. 나는 나를 쇄신하고 학문에 매진하여 좀처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철학사상가가 되어야 했다. 모든 걸 관념으로 환원하라. 개념과 개념 사이를 종횡무진 이행하고 정치하게 논증하여 미칠 듯한 속도로 철학적인 글쓰기를 완성하라. 이리하여 자기철학의 인간 도덕적 완성을 체현하라. 우주를 해명하고 개개의 논리들을 추려내어 하나로 집약하여 명쾌하고 명정하게 한 줄의 선형적인 아포리즘처럼 풀어놔라. 철학은 모든 학문의 꼭대기에 있는, 말하자면 학문의 왕 일종의 형이상학이다. 철학은 삼라만상을 아울러 그 피라미드의 정상에 위치하는 명실공히 인문학의 정수이다. 나는 매일 밤 자기 전에 미친 듯이 종이에 아포리즘을 휘갈긴다. 머릿속에서 관념이 터져나와 종국에는 관념의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시발점은 언제나 구명하고자 하는 태도의 열정이다. 니체도 나와 같이 절절히 문제의 핵심을 논파하는 것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을 것이다. 나는 우주와의 내기에서 이기조자 했다. 나는 대우주의 구조적인 논리의 문법적 해명을 완료하고자 신조차, 만약 그가 나를 가로막는다면 배어버릴 기세에 돌입했다.

나의 스승은 사르트르였다. J.P사르트르, 역사상 가장 범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친 실존주의의 창시자이자 20세기 지성의 최고봉! 그의 차가운 지성을 본받고자 미친 듯이 노력했고, 결국에는 그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내 안에서 포착했다. 그를 능가해야지만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최대의 철학사상가로 남을 수 있다. 21세기 최대의 대지성이 되자고 나는 결심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중국철학을 탐닉했고 그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건 선(禪)이었다. 그래, 나는 철학에 있어서는 수학의 괴델, 물리학의 아인슈타인, 재계의 빌 게이츠와 같은 존재이다. 아무도 나의 사고의 회전의 가속을 저지할 능력이 있는 교양인은 없다. 나는 지금은 비록 어리고 머리에 든 거 없지만 최소 5년 이내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힐 것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적 사회주의도 아닌, 스탈린식 공산주의도 아닌, 나만의 새로운 사회주의를 개설하여 현재의 공산당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줄 것이다. 나는 철학, 정치, 언어학, 수학, 문학, 음악, 회화, 미식학, 경제학 등에 참여하여 새로운 학문의 역사를 제창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만의 사상체계를 창도하여 일종의 정신적 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은이는 내 옆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현숙한 국모로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역할을 가뿐이 해 낼 것이리라. 나는 여기서 선포한다. 당신들은 이미 과거라고. 왜냐고? 바로 나야말로 미래의 근원이자 원형이기 때문이니까. 변증법적 유물론에 경도된 당신들은 이미 과거다. 새로운 관념론의 물결이 들이닥칠 때 당신들은 수수방관하며 지적 방기의 ‘극치’를 달려 마침내 ‘백치’가 될 것이리라.

  
18. 소울

역사적인 한 장면은 차가운 감회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은 꿈꾸는 듯 발걸음을 그 차양 속에 내딛는다. 햇빛의 고요한 비침이 배경 전체를 투명한 환희로 가득 메우고, 참을 수 없는 정신의 금색 빛깔은 고매한 매무새로서 성스러운 세계의 요연한 정취를 만족시킨다.

환기하고 싶은 깊은 밤, 이 밤은 도도하면서도 부드럽다. 도대체 어떤 것이 도도하고 부드럽단 말인가? 사실 이 차가운 밤에 사람들은 모두가 눈을 감고 있다. 타자들의 슬픔을 한 젊은이가 어찌 이해한단 말인가? 슬픔이 겨울 어느 낮의 쌀쌀함처럼 내 양심의 코끝을 희미하게 만든다.

독자들이여! 때뭍지 않은 겸양에 대한 고취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미덕을 찾아 떠나는 아득한 여행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사뭇 조심스러움에도 뜨겁게,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리하여 역사의 역설성은 세계의 전체성에 파뭍혀 조그마한 단아한 빛조차 보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이다.

  
19. 언어를 기리며

단어에 어떤 상징을 부여하지 마라. 단어는 음계와도 같은 것, 다시 말해 뜻보다는 그자체 즉 운치를 받아들여라.

문장의 직조에 필요한 것은 그 질뿐만 아니라 행간의 연결성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시작[時作]에 있어 주제나 제목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말하자면 한줄기 굵은 이음새의 특성을 유지한 채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연속적인 문장에서 전제되는 자명성의 어긋나지 않음이 최상의 글쓰기 전략인 것이다. 문장의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야 할 것이다.

글은 독학으로 배우고 쓸 때 그 위력을 온건히 누려볼 수 있다. 작가들, 문필가들, 문청들, 저널리스트들에게 필력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들은 국문학과라든지 문예창작과 같은 대학의 변두리에서 언어에 대해 배우는데, 이것이 그들이 쓰는 글의 주요한 능력을 한 눈금 올려주지는 않는다. 글은 혼자서 배워야만 하는 모종의 고행의 길, 도정이다. 수많은 책들을 탐독하며 세월을 보내면 당신은, 결국 당신 모습에서 문장가의 아우라를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내가 한 많은 지론들에 대해 책임을 질 자격이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만약 필자로 인해 논술이나 공적인 제의가 파기 당했다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필자 책임임을 밝혀둔다.

언어에는 적정한 패턴이 있다. 그리고 이 패턴을 알아가는 데 찰나의 순간이면 된다는, 또는 머리가 좋으면 빨리 그것을 이해하리라는 망상을 당신이 품고 있다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다. 글을 쓰는 것과 읽는 것은 무지 다르다. 말하자면 글을 읽는 체계와 글을 쓰는 체계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그 이질성을 이용할 줄 아는 작가가 진정한 언어의 마술사라 할 만하다. 어쨌거나 두 패턴 중 당연히 글을 쓰는 것은 후자의 체계를 표상하는 것이며, 글을 읽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더 재밌는 지는 도전해봐야 알 터이다.

언어의 패턴은 의외로 쉽다. 패턴이란 곧 법칙이다. 아닌게아니라 한글의 '법'에는 여러 종류의 공식이 있다. 그 첫 번째가 문체를 다루는 능력, 그 둘째가 어휘를 다루는 능력, 그 셋째가 완전한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능력, 그 넷째가 여러 문장들을 교직시키는 능력, 그 다섯째가 그 글의 제목을 정정하는 능력이다. 물론 재론의 여지없이 글을 써내려가는 데는 수많은 원칙들이 공존한다. 그러나 위의 다섯 법칙들은 일단 기초, 선행물로써 글이라는 육체의 뼈대나 다름없다.

글쓰기라는 건 운전하는 능력과도 비슷하게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시금 제자리를 찾는 오묘한 직관의 힘이다. 또한 와인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해지고 조숙해지는 매력적인 단상을 발견할 수 있다.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기에 우리 마음을 이토록 열정에 몰아넣는가?

지금까지 필자의 글쓰기에 대한 소고를 읽어준 여러분께 예우의 표시를 보낸다. 독자들이여. 글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아라! 얼마나 삭막하고 답답한 세상이련지. 인류는 언어의 발견과 함께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언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 의식이 아닐련지. 여기서 글을 끝마친다.

  
  
  
소설은 제 3화로 이어집니다.

  
  
  

양주시 개인의 서재에서 도둔산을 바라보며 박준수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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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enjoyaudio.com/zbxe/?mid=freeboard&document_srl=2937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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