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올렸던 '6.25를 돌아보며' 중에서 장문의 댓글은 모두 삭제하고
본문만 다시 올립니다.
본문은 소생이 2006년에 어느 계간지에 기고 하였던 글입니다.
2008년 12월 15일 이곳에 올렸다가 피치 못할 사유로 삭제하였으나,
재 게제하기를 바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다시 올립니다.
혹시 이전에 토론한 댓글들에 관심 있으신분께서 연락주시면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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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띠를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치는 시위광경을 바라보면 가슴이
섬뜩해지곤 한다.
그것이 어떤 성격의 시위이던간에 나는 붉은 머리띠는 딱 질색이다.
붉은 띠로 인해 급기야 과격한 투쟁으로 이어져 폭력시위로 치닫기 십상이다.
하필이면 붉은 머리띠에 붉은 깃발인가?
붉은 색조의 시위가 나에게는 공산주의를 연상시키는 선언적 행위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좌,우 이념의 극한 대립시대를 살아 온 나에게 붉은색은 단순한 색의 명칭이 아니다.
6. 25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남침하자 거리마다 건물마다 펄럭이던 붉은 깃발, 인공기(人共旗)가
어른거리는 탓이다.
밤낮 없이 들이닥쳐 집안구석구석을 뒤져대는가 하면 어르신들을 반동으로 몰아 처형하거나
납북하기를 일삼았다.
마구잡이로 젊은이를 붙잡아 의용군이란 미명아래 전쟁터로 내보낼 뿐 아니라 생계가 막연한
시민들을 끌고 가 부역 시키던 나날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조여든다.
공산치하에서의 굶주림은 말할 나위도 없다.
붉은 깃발, 다시 말해 빨갱이는 내게 공포의 대상일수밖에 없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16강을 겨루는 경기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시청 광장, 세종로 네거리와 종합운동장에 이르기까지 태극기와 어우러진 붉은 셔츠의 물결로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환호하는 응원인파를 바라보며 감동어린 전율을 느낀 사람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화려함을 넘어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과연 충격적인 변화였다.
돌이켜 보면 붉은색이 하도 싫어 초등학교 운동회의 홍백전도 청백전으로 바꿔야 마음이 놓이던
우리세대였다.
‘붉은 악마’라는 명칭의 응원단과 더불어 국가대표선수팀의 유니폼이 붉은색으로 공식화 된 것도
내게는 충격적이라는 사실을 젊은이들이 이해 할 수 있으랴?
2002년 한국 월드컵 당시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던 붉은 셔츠가 드디어 이 땅에서 붉은 문화로
정착하게된 것이다.
세계 각국의 붉은 색에 대한 개념은 다양하다.
이는 그 나라의 국기에 들어있는 붉은 색의 의미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당시 농민들이 처음에는 희망에 부풀어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고 한다.
그네들이 좋아하는‘마뜨료시까’(인형 속에 작은 인형이 줄줄이 들어있는 목제인형)의 뺨이
그렇듯이 처녀들의 붉은 뺨이 희망을 상징하는 까닭이다.
레닌이 계산된 속임수로 토지 재분배의 약속을 어기고 무제한의 폭력과 권력으로 공산주의정권을
세우자 붉은 깃발은 마치 공산주의의 전용물처럼 되어버렸다.
1912년 쑨원(孫文)이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하여 중화민국(中華民國)을 탄생시킬 때 삼민주의
(三民主義)의 민생을 상징한 붉은 바탕의 오성홍기(五星紅旗)를 제정하였다.
옛적부터 붉은색을 복(福)의 색조로 섬겨오던 중국 사람들은 복을 비는 마음으로 붉은 기를
바라보았다.
국기의 붉은색은 박애, 신앙, 희생, 형제애, 자유, 용기, 활력, 환희와 승리 등 감성을 상징하는 한편
연방주의 개수, 태양, 불, 혼혈인, 조국, 동물, 경작지대, 강, 해안지방이나 바다 등 물리적인
상징성도 있다.
사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보혈, 우호와 평등, 불교의 가르침과 민생주의 등도 나타낸다.
그 외에 공산주의, 사회주의나 혁명의 피와 투쟁, 등을 표방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한 여러 갈래의 사회주의국가에서도 덩달아 붉은 기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피로 쟁취한 나라는 아니다.
얄타회담 덕분에 그 지역에서 피한방울 안흘리고 어물쩍 넘어온 구소련이 세워준 나라일 뿐이다.
우리나라 국기의 태극은 우주 자연의 궁극적인 생성원리를 상징하여, 적색은 존귀(尊貴)와 양(陽)을
의미하고 청색은 희망과 음(陰)을 나타낸다.
이조시대의 전통 의복도 붉은색이 주종을 이룬다.
예를 들면 임금이 시무할 때 걸치는 곤룡포가 붉은색이나 노란색이었고 문무백관도 붉은 조복을
입고 하례에 나아갔다.
여염집 규수들도 경사스러운 날에는 붉은 치마에 노란저고리를 입었으니, 이를테면 붉은 셔츠가
전통의 맥을 이은 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념논쟁이 한물 건너갔는지 그 두렵던 ‘빨갱이’의 의미마저 퇴색되어가는 이즈음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색깔은 단연 붉은색이라고 봐야겠다.
교회의 십자가며 건물마다 간판들이 어두운 밤에도 현란한 붉은 빛으로 시선을 끌고 있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우리선수가 뛰던 날, 거리에 모여든 관중들, 거기에 이념의 벽은커녕 남녀의
벽도 나이의 벽조차 없었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셔츠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었다,
드디어 붉은 색이 공포의 색이 아닌 정열과 환희의 색으로 돌아온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러시아도 중국도 변화되고 있다.
아직까지도 피의 투쟁을 주창하는 나라는 북한밖에 안 남았지 싶다.
그러나…, 붉은 머리띠에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시위에 가담하는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또 그걸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박애정신, 환희, 아니면 적개심 가득한 투쟁일까?
우리의 시위문화도 바뀔 때가 되었다.
원론적으로 말해서 시위대야말로 태극의 의미를 본받아 희망의 청색 머리띠에 청색 기를 휘날리며
상생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