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의 옻칠장이다 - 전용복

by 고정석 posted Mar 2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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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내기 점쟁이의 한 마디에 소년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드라마로 변해버렸다. 부모에 버림받고 공부도 하지 못한 부산 소년 전용복. 세계 최고 최대의 옻 작품인 일본 도쿄의 문화재 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하고서 그는 세계 최고의 칠예가가 된다. 일본 최대의 옻칠 미술관을 설립하고,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계를 옻예술로 완성한 사람이다. “목숨을 걸면 못할 일은 없다”는 신념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며 살아온 칠예가 전용복(57)의 파란만장한 인생. 그를 일본에서 만났다.

나는 조선의 옻칠장이다 - 전용복

 

큰 형의 죽음

 

고향에 들렀다가 할머니와 함께 집에 돌아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시골역 대합실이었다. 전용복이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64년 경상북도 울주군에 있는 동해남부선 덕하역 역사였다.

 

너덜너덜한 갓을 쓰고 누더기 두루막에 등에는 돗자리를 멘 늙은이가 전용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빤히 바라보던 노인은 소년의 턱을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큰 일 낼 놈일세….” 그러더니 한마디 묻는다. “니 장남이제?” “큰 형님 있는데요.” “…느그 형은 죽는다, 니가 맏이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바로 멱살을 잡았고, 대합실은 난장판이 됐다. “이 영감탱이가 미칬나, 어데 우리 장남 죽일라꼬!” “보소, 장남 안 죽을라면 야가 죽소. 싫으면 야를 딴 데 보내소!” 훗날 전용복은 “노인이 화를 내면서 기찻길로 걸어가다가 철길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기억한다. 두 주일 뒤 큰 형이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었다.

 

 

당시 명문인 동래고등학교 2학년. 부산 동래구 복천동 판자촌에 살던 집안의 기둥이요, 미래였던 엘리트였다. 관이 나가던 날, 정신줄 놓은 할머니가 아들 부부 앞에서 손주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쟈가 우리 손주 지깄다!” 공상만 하고 엉뚱한 짓만 하며 어른 말 안 듣는다고 ‘팔푼이’라 불렸던 전용복에게 그 날로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인간 이새기’. 이새기는 벼를 베고 남은 밑동을 이르는 경상도 사투리다. 인간은 인간이되 형을 죽인 살인범에, 쓸모없는 이새기. 가난 탓에 8남매 가운데 두 명이 이미 죽은 마당에, 장남까지 죽었다. 입에 풀칠은 할 정도로 작은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알콜 중독이 되어버렸고, 어머니는 신경증에 걸려 아들을 험하게 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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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했던 어린 시절

부모는 전용복을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대신 전용복은 미국 선교사가 세운 대안학교를 다니며 동생들을 기르고, 병들고 술 퍼마시는 부모를 수발했다. 40km 떨어진 국제시장에 가서 풀빵 기계를 사서 새끼줄 메고 걸어와 풀빵 장사를 했다. 야학에 다니면서 산동네로 연탄을 날라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어머니 심장약을 사서 먹이고, 쌀을 사고 공책을 사서 공부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전용복의 외삼촌은 불꽃을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불의 화가’ 김종근이다. “다섯살 때부터 외삼촌 어깨 너머 그림을 배웠다. 그런데 권투선수 출신인 삼촌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전용복은 독학으로 예술을 배웠다. 중학교도 가지 못했고, 부모 사랑도 못 받았지만, 그 모든 걸 틈틈이 그림으로 잊었고 동생들 먹여 살리는 고달픔도 그림으로 달랬다.

그리고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 동성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했다. 낮에는 공부, 밤에는 연탄 배달 대신에 영어, 수학 과외를 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친구들과 손으로 카드를 그려 팔았다. 솜씨가 좋아서 제지회사에서 카드 사이즈로 종이를 대량으로 받아와 카드를 만들었다고 했다. 정식으로 배운 적 한번 없지만, 피 속에 흐르는 예기(藝氣)는 그렇게 조금씩 농축되고 있었다.

옻을 만난 것도 그 즈음이다. “동네 가구상에서 옻칠 한 장롱을 팔았는데, 할아버지들한테 술 사주면서 꼬치꼬치 묻곤 했다. 옻에 대한 호오는 전혀 없었다. 그저 예술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집안 형편이 나아지면서 형의 그림자는 희미해졌고, 부모의 학대도 점차 사라졌다. 인간 이새기라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전용복이 말했다. “억울해서라도 비뚤어지게 살지 말자고 다짐했다. 덕택에 그 혹독한 시절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가장 큰 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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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복 작 장롱 '혼불' 

옻과의 만남, 그리고 집안의 부활

20세가 되던 1972년, 부산의 한 목재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옻을 만났다. 1970년대. 웬만한 부자집은 열자짜리 자개농을 부의 상징으로 들여놓던 시절이다. 전용복은 목재회사에 나무만 팔지 말고 장롱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디자인에 재주가 좀 있으니, 내가 디자인하고 옻칠을 하면 된다고 했다.” 회사는 부산 옆에 있는 양산에 공장을 설립했다. 전용복은 장롱 디자이너가 되었다. 회사는 첫 장롱이 출고되면서 떼돈을 벌어갔다. 전용복의 예기(藝氣)와 옻가구에 대한 수요가 척척 맞았다. 승승장구했다. 고졸 평사원으로 입사했다가 몇 달 사이에 기획실장으로 승진했다. 전용복은 “어릴 적 혹독한 경험에 해병대 생활 3년이 더해지니 정말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망가졌던 집안은 완벽하게 부활했고, 인간 이새기, 팔푼이는 집안의 기둥이 되었다. “잘 나갔다. 회사에서는 나한테 재무까지 맡기고 무한책임을 줬다. 장롱은 만드는 대로 팔려나갔고, 나는 정말 내가 장인(匠人)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 사주가 바른말 하는 전용복에게 “대학교도 안 나온 놈 키워줬더니 어디다 대고 말을 함부로!”하며 뒤통수에 한방을 갈겨버린 것이다. 자신을 키워준 은인. 하지만 전용복은 그날로 회사를 때려치우고 부산에 예린칠연구소(鱗漆研究所)를 설립했다. 나이 스물여덟, 198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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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과의 만남

당시 국내 수요를 감당하기에 ‘진짜 옻’은 물량이 너무 적고 비쌌다. 그래서 당시(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쉽게 마르고 싸게 만들 수 있는 인공 옻 ‘카슈’를 썼다. 전용복도 마찬가지였다. “카슈가 뭔지, 아니, 카슈가 진짜 옻인 줄 알고 사용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진짜 옻으로 짬짬이 내 작품을 만들곤 했다.” 그 진짜 옻을 만든 가구와 작품으로 1985년 첫 전시회를 가졌다. 전용복은 한국에서 꽤 잘 나가는 옻쟁이, 아니 칠예가(漆藝家)로 입지를 다져갔다. 전시회를 한창 준비 중이던 1984년, 일본인 한 사람이 그에게 작은 네모난 밥상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도쿄에서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이라는 연회장을 운영하는 호소카와(細川) 가문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고색창연한 낡은 밥상이었다. 일본에서 ‘오젱’이라 부르는 네모난. 이걸 수리해달라는 것이다. 작가로서, 남의 것 고쳐주는 거는 탐탁치 않았지만 일본 칠예를 알 기회라는 생각에 고쳐줬다. 낡은 그 분위기 그대로 고쳐줬다가 한번 ‘빠꾸 맞고’ 두 번째에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주자고 작심하고 제대로 만들어줬다.” 그리고 이듬해 메구로가조엔에서 재주문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똑같은 오젱 1000개 보수. 

전용복은 “식당 하나 굉장히 큰가 보다 했다”고 했다. 메구로가조엔의 ‘가조엔’은 한자로 ‘雅敍園’, 그러니까 한국에서 중화요리집 이름으로 흔히 쓰는 이름이 아닌가. 전용복은 “큰 주문 하나 맡았다”는 기분으로 도쿄로 날아갔다. 1986년 8월 어느날, 전용복은 숨이 막히는 경험을 한다.

일본의 자존심,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 

메구로가조엔은 1930년대 호소카와 가문이 만든 대형 연회장이다. 2.6헥타르에 이르는 초대형 부지에 벽, 천장, 바닥에 이르기까지 5000점이 넘는 옻 작품으로 뒤덮인 공간이다. 일본 정부에 의해 역사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일본 칠예의 보고(寶庫)다. 전용복이 말했다. “현관에 들어선 순간, 숨이 막혔다. 눈길 가는 곳마다 빛나고 있는 자개 하며 눈빛을 흡수할 듯한 검은 옻색 하며…. 이게 그냥 요리점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때 메구로가조엔은 세월 겹친 지진과 홍수로 붕괴 일보직전이었다. 호소카와가에서는 이를 놓고 부서버릴지 복원을 할지 고민 중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작품들 여기저기를 만지는데, 연회장 입구 위에 있는 천마도(天馬圖)를 보고 피가 끓어올랐다.”

굵직굵직한 자개로 말과 천사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오른쪽 구석에 원화를 그린 일본 화가 이름과 옻그림을 완성한 작업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光信’. 거침없고 씨알 굵은 나전 솜씨가 틀림없는 조선시대 나전기법이었고, 거기에 식민시대 조선의 장인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을 겨우 차리고 보니 칠예작품들은 태반이 조선과 고려 기법이었다. 

넋을 잃고 있는 전용복에게 메구로가조엔의 고위층이 사연을 말해줬다. “부숴버릴지 복원할지 고민 중이다. 복원하게 되면 입찰할 생각 있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났지만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내가 복원한다.” “70년 전 내 선배가 만든 작품들이 쇠락하고 있었다. 이거를 내가 다시 만들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다. 오젱 1000개로 돈은 벌겠지만, 이건 돈 문제가 아니었다.”

메구로가조엔 복원 감독이 되다 

“복원 작업의 100분의 1만 맡아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 옛날 선배들이 왔을 때는 해봤자 박상, 김상 정도 대접받았겠지. 하지만 내가 복원을 하면 선생이란 소리를 들을 거 아닌가. 그런데 일을 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준비해야 할 거 아닌가. 아는 게 없으면 공부하면 되지.” 복원 여부도 결정되지 않았지만 전용복은 바로 부산에 있는 2년제 성심외국어대 일어과에 등록했다. 34세 만학도. 그리고 부산에 있는 회사는 대충 관리하고, 두세달에 한번씩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때 생활을 전용복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옻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 전국에 있는 옻쟁이란 옻쟁이는 다 만나고 다녔다. 가슴 속에 녹음기 하나 품고, 그들에게 술을 사주며 지식을 훔쳤다. 아니, 나는 조선의 나전 기법을 가르쳐줬으니까 훔친 건 아니다. 쟁이들이야 다들 술 좋아하니까, 나는 취하면 안 되고. 하루에 100엔짜리 낫또(일본식 된장) 한끼 먹고 다니며 공부를 했다. 도교 역 앞에 있는 삼성당 서점에서 옻 전문서적을 베끼고…수시로 메구로가조엔에 들러서 샘플 조각을 떼서 연구했다…잠은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노숙했다. 텃세 부리는 노숙자들 손봐주고 오야붕 대접 받으며 잤다.”

그러길 2년. 1988년 1월, 마침내 메구로가조엔에서 연락이 왔다. “관심이 있으시니, 와서 한번 상의하자”고. 연구노트와 기획안을 들고 날아갔다. 첫 방일 이후 처음으로 ‘호텔’에서 일주일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사다리를 타고서 작품 하나하나를 짚으며 ‘복원 가능’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건물 신축을 맡은 건설회사에서 ‘불가능’이라고 판단한 작품들이었다. “내가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말 하게 하지 말라. 싫으면 나는 그냥 간다.” 전용복은 배짱을 부리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전용복의 허무맹랑한 꿈 때문에 이미 부산 집은 전기도 끊기고 쌀 뒤주도 바닥이 드러난 뒤였다. “그래도 전화세만은 놓치지 않았다. 가부 전화를 받아야 하니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갔다. 전용복은 소주와 김치로 타는 하루를 보냈다. 전화라곤 쌀값 내라, 전기세 며칠까지 안내면 완전히 끊긴다, 이런 내용뿐. “잘 때 빼고는 술에 취해서 전화통만 멍하니 바라보고 살았다. 내 키가 182cm인데, 80kg이 넘던 몸이 62kg까지 빠졌다. 벚꽃도 다 저버린 4월 어느날 전화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모시모시’였다.” 서론이 너무 길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용복은 길고긴 서론 끝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말을 지금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전 선생님, 어제 우리 간부회의에서 복원 및 창작작업에 따른 모든 작업을 전부를 전용복 선생에게 맡기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습니다.” 그를 만났던 2008년 10월 18일, 도쿄 메구로가조엔 찻집에서 전용복은 이 말을 나에게 읊어주고 한참을 울었다. 

통화가 끝나고 전용복은 밖으로 튀어나가 지나가는 개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로수에게 절을 했다. “신이라는 게 있구나, 열심히 하는 사람은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구나….” 당시 입찰을 했던 장인이 일본에서만 3000명이 넘었다고 했다. “100분의 1만이라도 고마워했을 일을 전부를 맡았다. 지금 생각해도 이건 꿈이다. 정말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의지만으로도 되겠지만, 결국은 노력이었다. 노력 않는 자에겐 운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전쟁 같은 복원작업

영어로 ‘옻’을 ‘japan'이라고 한다. 그 만큼 세계에서 옻 하면 일본이다. 그런데 일본의 자존심을 조센징이? 메구로가조엔 복원도 뉴스였지만 그 작업의 총책임자가 무명의 전용복이라는 게 더 큰 뉴스였다. 기자들에게 전용복이 이리 말했다. “다른 분들은 가문과 학벌을 내세운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목숨밖에 내세울 게 없다. 그래서 내가 선정된 걸로 생각한다. 조선에서 왔던 장인들과 그들의 작품을 부끄럽지 않게 복원하고 싶다.”

1988년 9월 전용복은 제자 7명을 데리고 이와테(岩手)현 첩첩산중 가와이무라(川井村)에 있는 폐교에 작업실을 열고 복원작업에 착수했다. 이와테현은 일본 옻의 대표 산지였고 가와이무라에는 옻칠의 천적인 먼지가 없었다. 하지만 길거리에 뱀이 기어다니고 겨울이면 눈이 몇미터씩 쌓이는 첩첩산중이었다. 송이(30), 혜진(27) 두 딸과 아내 정하영, 그리고 가와이무라에서 태어난 막내아들 현민(21)은 “왜 우리가 여기 살아야 하냐”며 남편과 아빠를 비난했다.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세 시간이 걸리는 첩첩오지. 나중에 100명으로 불어난 전용복 사단은 그 오지를 오가며 작업을 했다.

“공사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 우리는 정말 목숨을 걸고 일했다. 제자들을 보니 그들은 고용된 직원이 아니라 광기에 휩싸인 예술가들이었다. 고개를 완전히 젖히고 옻을 칠하고 금박을 붙이다 보니 얼굴에 옻방울이 수시로 떨어졌다. 우리 모두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고 벗겨진 살에서는 진물이 흘렀다.”

그렇게 3년. 드디어 1991년 11월 13일 메구로가조엔이 다시 문을 열었다. 문을 열던 날, 새까맣게 옻물이 든 손톱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전용복의 눈 앞에 일장기와 함께 태극기가 펄럭였다. 나이 서른 여섯. 전용복은 태극기를 보며 기절했다. 이후 전용복은 ‘세계 최고의 칠예가 한국인 전용복’이라고 불린다. 

세계 최대의 칠예미술관, 이와야마칠예미술관 

젊은 날 혼을 바쳤던 이와테현에서는 그에게 미술관 운영을 의뢰했다. 이와테 출신의 서양화가가 만들었다가 그의 사후 주차장으로 바뀌게 된 미술관이다. 전용복은 3년 준비 끝에 2004년 미술관을 칠예미술관으로 변신시켰다. “귀화를 여러차례 권유받았지만 하지 않았다. 귀화했으면 문화기금 받아서 편하게 했을 것. 하지만 나는 조선의, 다름 아닌 조선의 옻칠쟁이가 아닌가. 그걸로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세계 최대의 칠예작품인 ‘이와테의 혼’(18m x 2.42m)을 비롯해 그와 그 제자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와테현의 문화예술심의위원을 맡고 있다. 그가 말했다. “이 미술관, 내 것이 아니다. 내년 말쯤이면 들어간 빚도 다 갚게 된다. 그러면 미술관은 이와테에게 돌려줄 거다. 한 예술가가 최선을 다해 바로 세웠다는 거 보여주고, 작가로 인정받았다면 그걸로 된 거다. 나는 옻 칠할 붓 하나 넣고 봇짐 싸면 된다.” 한 점에 몇천만 원 나가는 작품을 팔아 미술관을 꾸린다. 그 작품, 도저히 재료가 옻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다. 한해 수입 5억원 가운데 생활비 빼곤 전부 미술관에 들어간다고 했다.

‘돌려준다는 것’, 또 있다. 전용복은 아들 현민의 친구, 니시다 코헤이(西田浩平·20)라는 젊은이를 그의 뒤를 이을 제자로 낙점했다. “예술에 국경이 어디 있는가. 언젠가 현민이도 예술을 할 것이다. 니시다와 함께 옻을 계승 발전하겠지.”

5억3000만원짜리 시계 

2008년 5월이었다. 메구로가조엔에서 일본 최고의 시계회사 세이코의 신제품 발표회가 열렸다. 이름하여 ‘Credor 典雅’ 시리즈. 전용복이 옻으로 디자인한 최고급시계 24점 발표회다. 지름 3cm짜리 시계 하나 가격이 5250만엔. 환율을 1000원으로 쳐도 자그마치 5억2500만원이다. 옻을 씌우지 않았다면 400만엔이었을 시계가 전용복의 붓칠 하나로 열배 넘게 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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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존심 세이코가 칠예 시계를 전용복과 만든다는 뉴스에 전 일본 공예가들이 광분했다. 메구로가조엔에 이어, 이와야마칠예미술관에 이어, 세이코까지? 결국 그 해  9월 세이코에서는 본사에서 회의를 열고 전용복에게 “재계약 불가” 통보를 했다. 통보를 받는 순간 어딘가에서 전화가 오고, 전화를 받은 임원 얼굴이 새파래졌다. “24개가 전부 팔렸다!” 며칠 뒤 고위층이 이와테로 사람을 보내 사과를 했고, 새로운 시리즈 계약이 맺어졌다. 

2008년 10월 전용복의 꿈 혹은 恨

2008년 10월 18일, 밤 늦은 시각이었지만 도쿄 메구로가조엔은 그 찬란한 광휘 속에 사람들로 붐볐다. 밤새들이 정원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데, 실내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다. 전용복을 따라 투어에 나섰다. 엘리베이터부터 전용복의 나전칠 작품이다. 문부터 내부까지 공작과 해태가 반짝인다. 벽면에는 ‘전용복 작’이라는 금빛 명패가 선명하다. 스쳐가는 직원들은 걸음을 멈추고 전용복에게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예를 취한다. 조선 장인 광신이 만든 작품, 그리고 전용복의 작품들에서 메구로가조엔과 첫 인연을 맺은 작은 소반까지 다 봤다. 전용복이 말했다. “만일 지금 저승사자가 온다면 기꺼이 이리 말할 것이다. ‘이제껏 나를 있게 해줘서 고맙다. 내 기꺼이 그대를 따라가겠다’라고. 그리고 장례식은 치르지 말라고 할 거다. 내 작품들이 살아 있고, 내 아들과 내 제자들이 살아 있는 한 나는 죽는 게 아니라고.”

전용복_용[1].jpg

 전용복 작, 용

흐뭇함 한켠에 물기가 묻어 있다. “내 부모, 내 형이 묻혀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 뿌리가 한국이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이만큼 컸다. 이제 나를 있게 해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20대부터 치열하게 싸워온 장인이 “내 뿌리 한국으로 돌아가, 하늘로 간 예인(藝人) 백남준 버금가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 가면 옻칠쟁이라고 천대하고, 게다가 왜식(倭式) 옻쟁이라고 비난한다”고 했다. 정작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건너온 옻문화를 부활시킨 세계 최고의 한국인’이라 평가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하고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고려청자를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치자. 500년 뒤 누군가가 내 작품을 발굴하고서 뭐라고 할 것인가. ‘정말 보존 상태가 좋은 고려청자’라고 할 것이다. 전통이란 그런 것이다. 옛것을 흉내낸다고 전통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전용복은 단호했다. “전통이란 계승함과 동시에 발전시켜야 하는 가치”라고. 그걸 본인이 하고 있고, 일본 땅에서 그러하기에 한국인임을 내세우며 살고 있다고.

전용복_장롱2[1].jpg 

그 '계승과 발전'의 한 줄기로 전용복은 음악을 골랐다. 작년 10월 17일 이와야마칠예미술관에서는 일본 그룹 '센세이션'의 공연이 있었다. 전용복이 옻을 칠하고 자개를 붙여 제작한 전자기타와 베이스, 드럼 연주회다. 30년 기타를 쳐온 사람으로서, 그 소리는 무척 맑고 공명이 좋았다. 전용복과 센세이션은 이 악기로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행위예술'을 계획중이다. "무대 설치를 옻 작품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옻으로 제작한 악기를 이들이 연주한다. 그 화려한 무대예술과 음악이 공명할 때 또 다른 장르의 전통이 이어지고 발전하는 거이 아니겠는가." 한국에서도 그 극적인 무대를 가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짧은 시간 그의 작품들을 일별하고, 그가 목숨을 걸고 이뤄놓은 대업의 향기를 맡아본 결과, 기자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옻 붓 하나 봇짐에 넣고 한국인 전용복을 알아주는 세계로 나가거나.

이후로도 전용복과 많은 만남을 가졌는데, 이 글을 다시 정리하며 곱씹어보니 참으로 위대한 영혼을 만났다는 생각이 물씬하다.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는 사람'을 적으라는 난은 백지로 내곤 했지만, 지금 나이 마흔 넘어 그 란을 채울 이름 하나를 얻게 되었다.

전용복_메구로[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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