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탄 이야기

by 최동수 posted Dec 2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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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크리스마스이브가 왔군요.
어린 시절 유년주일학교에서 성탄절 연극연습 하다가 연탄불에 고구마 구워먹던 생각이 나기에 몇 년 전에 써두었던 글을 올려봅니다.

구멍탄 이야기

구멍탄이라고 부르노라면 어렵던 시절 궁상스러운 정감이 물신 풍겨난다.
연탄에 공기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구공탄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지만 여러가지 생산규격 중 일반 가정용으로 흔히 쓰이는 2호탄의 구멍이 19개였는데
그 줄임말이 구공탄이 되어버렸고, 나중에는 구공탄 하면 연탄가게에서도 의례히 십구공탄으로 알아듣게끔 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래 동안 장작을 사용하는데 젖어있었으나, 625한국전쟁 이후 구멍탄의 사용이 점차 성행하여
1957년도에는 시민의 90% 이상이 가정용 연료로서 연탄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국가정책으로 산림녹화목표를 위한 임산연료 사용의 억제정책과도 맞물려 있다.


시대가 바뀌어 생활수준의 향상과 도시가스의 보급으로 연탄 소비량은 급격한 감소추세에 있다.
19공탄은 지난 74년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물론 시내 오래된 아파트와 외곽 산동네에는 아직도 연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22공탄이다.
지난해에 북한주민에게 연탄을 지원하였는데, 이미 우리나라는 22공탄과 31공탄밖에 생산하지 않아
대한적십자사에서 아예 22공탄용 난로 200개를 한꺼번에 보냈다고 한다.
북한은 작년에도 두 번에 걸쳐 ‘탄가스 주의보’를 발령했다.
이는 북녘 땅에 아직도 탄가스 중독사고가 빈발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우리에게 있어 연탄은 서양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눈물 젖은 빵’에 견줄만 하다.
어떤 시인은 ‘겨울밤에 연탄을 갈아본 사람이 존재의 밑바닥을 안다’고 노래했다.
60대의 우리들은 연탄의 애환시대를 살아왔다. 겨울철 골목 빙판길에는 누군가 연탄재를 가져다 뿌리곤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무라기는커녕 주춤하고 서 있다가 연탄재만 밟고 지나간다.
연탄이 타다 꺼져버리면, 신문지와 광솔 가지를 쑤셔 넣고 호호 불던 생각이 난다.
언제부터인가 번개탄이란 불쏘시개가 나왔지만 이것으로도 불이 잘 안 붙을 때는 참말로 곤혹스럽다.
마치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고도 한없이 길이 막히는 때와 같다.
그래 뵈도 이름이 고속도로이고, 번개탄인데...
연탄가스는 해마다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간 주역이기도 하지만, 빈대며 벼룩이며 머릿니의 박멸에 일조를 한 것도 사실이다.
뒷켠에 쌓아둔 연탄이 줄어들면 괜시리 마음이 안타까웠던 적도 있다.
연탄가스를 마셨을 때 동치미 국물을 들이키던 기억조차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내게도 구멍탄에 얽힌 일화가 좀 있다.
신혼 초 셋방살이 시절에는 불 때를 잘 못 맞추어 연탄불이 자주도 꺼졌다.
어느 날 밤새도록 웅크리고 자다가 아침에 보니 연탄불이 또 꺼져있었는데 연탄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부리나케 연탄가게로 달려가 두장씩 새끼줄에 매달은 연탄을 양손에 한 줄씩 들고 오다가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어떤 여인과 딱 마주쳤다.
전에 내가 좋아하여 따라다니던 그 녀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주머니에 질러 넣었던 예식용 하얀 장갑은, 그 후 내내 아궁이에 연탄 갈아 넣을 때마다 효자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도 맛 따라 멋 따라 찾아다니던 곳들이 꽤나 많다.
드럼통 속에 연탄화덕을 넣고 그 위에 동그랗게 구멍 뚫린 스테인리스 철판을 덮은 테이블이 있는 식당이다.
명동 뒷골목의 순두부집, 아니면 사보이 호텔 앞 곱창구이집 등이다.
곱창안주로 얼큰히 취한다음 당시 유력한 사람들이나 드나들던 호텔 커피숖에 들어가 술 냄새를 풍기며
술값보다 더 비싼 커피를 놓고 앉아 떠들어대던 멋이 있었다.

종로삼가 단성사 건너 뒷골목 감자찌게집은 인심도 좋았다.
김동진님, 금수현님 그리고 기타협회 회장이시던 이응주님을 따라서 나도 가끔 가곤하였다.
주인아줌마는 당시 경희대 음대학장이던 김동진님의 소녀시절 팬이라고 했다.
찌게 한 냄비만 시키고 나면 술상이 파할 때까지 데워준다는 핑계로 계속해서 찌게를 채워주곤 했다.
더러 내가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가도 주인아줌마는 어찌어찌 알아보고 찌개를 채워주신다.
단 그 아줌마의 문학소녀시절 얘기에 맞장구를 쳐주면 말이다.

마포 전차종점께의 시오야끼집도 찾아갔었다.
이집 마담은 옛날 나운규 시절에 이름을 날렸던 영화배우였다는데 사실 나는 잘 모르면서 괜히 들락거렸다.
하루는 홀에서 무심히 둘러보니 저쪽 방문 앞에 낮 익은 구두들이 놓여있었다.
어르신네들이 즐겨 신던 슬리퍼구두였다.
마담이 방에서 나올 때 얼핏 보니 아버님과 친구분들이 방안에 계신 것 아닌가.
어마 뜨거워라 하며 마시는둥 마는둥 줄행낭을 치고 말았다.


이즈음 복고조 연탄구이집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다.
옛날처럼 드럼통 테이블이 있는 곳이다.
어쩔 수 없이 구중중한 분위기를 풍기는 드럼통가에 둘러 앉아 톡 쏘는 연탄가스 냄새를 맡는 게 뭐가 그리 대견스러운지 모르겠다.
메뉴도 더 이상 순두부나 곱창구이나 감자찌게가 아니다.
삶의 질이 높아져서인지 요사이는 돼지나 쇠고기가 인기가 있다.
생고기를 구우며 곰삭은 김치를 얹어 먹는데 어디를 가도 오로지 한 가지 메뉴뿐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어렵던 시절을 잘 알리도 없건만 먹어대는 품은 마치 그 시절에 대해 한풀이 하는듯하다.
최근에는 잘 알려진 T/V 탤런트도 추억의 연탄구이집을 열었단다.

어디 우리도 한번 쳐들어가 볼까?

2004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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