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GuitarMania



  

어제 새벽까지 교회에서 성극에 쓰일 배경을 그렸다. 작년엔 동화적 느낌이 물씬나는 마굿간 성벽길 같은 것이라서 오히려 마음대로 슥슥 그렸는데, 이번 배경은 집안 거실, 길거리였다. 이런 사실적인 그림들이 그림공부를 하지 않은 내겐 역시나 더 힘들었다.

게다가 지금도 정말 작고 귀여운 교회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다소 커져서 무대를 중앙으로 옮긴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란 걸 생각하니 이번에는 배경도 와이드 화면으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지 3장을 연이어 붙이니 진짜로 제대로 시네마스코프!!  

사실 너무 지치고 피곤하고 마음도 힘든 요즘이었기에, 뭘해도 어깨에 힘이 실리지 않는 나날들이라서 그랬는지 붓끝에 기운이 작년만 못했다. 그래도 몇시간 작업 끝에 다 된 그림을 보니까 기분이 좋았다. 특히나 그나마 여러가지로 신경썼던 집안 풍경에 비해 너무 썰렁하던 거리가 아주 재미있는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는거다. 왜 그런지는 우리 교회 사람들만 보면 안다^-^;;

흰 종이 위에서 무릎을 꿇은 이상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다보면 단 십분이 못되어 허리를 일으키거나 무릎이 아파 자세를 바꾸게 된다. 완성된 그림을 붙이러 강단으로 갔다가 아버지의 방석을 보았다.  

무릎부분이 움푹 파인 아버지의 낡은 방석.  

그 앞에는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써낸 기도 제목들이 있다. 아버지는 군에 간 누군가의 아들을 위해, 입시를 앞둔 또 어떤 딸을 위해, 병환을 앓고 있는 어떤 이의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을 위해 새벽마다 이 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최근 나는 근 한달 간을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아버지와의 사소한 의견차에서 그만 내 불같은 성격이 나온 것이다. 아주 어릴 때,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볼기짝이라도 때려주어 나를 혼내던 아버지는 그저 입을 꾹 다무는 걸로 당신의 의견을 표시하셨고, 그 때 이후 계속 이 모양이다.  

아버지, 나의 아빠. 왜 그렇게 남주기를 그리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대던 나도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뭔가 갖고 가서 줄게 없나 두리번거리게 되고, 아버지의 그 꼬장꼬장한 취향과 이상한 자기만의 원칙들이 세상살기를 불편하게 만든다면서 불만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내 취향이며 내 원칙들도 그리 만만치는 않은 것 같다.

아버지, 여기저기에 참 재주가 많은 사람이어서 사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지금 내가 그린 것보다 백배는 더 멋진 배경을 늘 직접 그리곤 했다. 나처럼 이렇게 종이 몇장에 덜렁덜렁 그려 붙이는 게 아니라 베니어판을 뒤에 대고, 문은 문대로 파서 열리게 만들고, 그런 무대세트를 전부 다 혼자서 하루 이틀만에 뚝딱 만들어내곤 했다. 아버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원래부터 갖고 있다가 나에게 준 사람,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무서우리만치 입맛까지도 똑같이 내가 닮아가고 있는 그 사람.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항상 이렇게 기도를 하며, 우리 딸 셋에 대한 기도를 끊이지 않았을 사람.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지내온 이 한 달 동안에도 아버지는 나를 위해 기도했겠지. 그 한달동안 나는 뭘했는지,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고, 내가 이렇게 힘든데 왜 아버지는 날 알아주지 않냐고 불만이나 갖고 있었던 건 아닌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르르한 기운이 올라와 잠시동안 배경을 붙든 팔을 치켜올린 그대로 난 움직일 수 없었다. 급기야는 얼어붙은 아버지와 나와의 다리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면서 어머니에게도 투덜댔던, 아버지가 좋아하는 통닭을 사들고 들어온 날도 있었지만 또 그걸 갖고 가서 같이 드시자고 이야기하는게 쑥쓰럽고 또 자존심 상해서 동생에게 미루어버렸던, 그걸 뻔히 알것이 뻔한 아버지가 그걸 그대로 물리자 분통을 터뜨렸던, 그런 내 모습들이 떠올랐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 이 날의 주인공은 연인들도 산타클로스도 서울시청 앞의 불밝은 트리도 아니고, 우리에게 사랑을 알려주시려 오신 예수님. 이런 날 내가 아버지랑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아주 그만 벌이라도 받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어쩌면 배경을 그럴싸하게 그려붙이거나 여러가지 소품을 만들어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면서 난 가장 중요한 걸 잊고 맘 한켠에 치워두고 있었나, 아버지, 아니, 아빠. 죄송해요.

아빠. 그 날 그렇게 말한건 다 진심이 아니었어요. 제가 얼마나 아빠를 좋아하는지 아빠는 모르실거예요. 아빠가 저를 지금껏 사랑해준 것만 못하겠지만 그래도 좋아한다구요!! 아빠, 우리 다시 둘도 없이 친한 아빠랑 딸로 돌아가요. 다시는 아빠 맘 아프게 하지 않을게요. 아빠 사랑해요, 메리 크리스마스.

    
Comment '4'
  • 콩쥐 2007.12.24 13:35 (*.155.159.137)
    사랑은 내리사랑이라서,
    위로 올라가기 쉽지 않은것 같은데....

    에고, 엄마한테 이번주엔 한번 인사드리러 가야겟다,...
    엄마가 해준밥보다 더 맛있는 밥상은 없다고 봐야죠.....
  • 민.. 2007.12.25 09:23 (*.184.129.132)
    ^^ 아빠랑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전 아빠에 대한 것은 아주 오래전 기억 밖에 없어서요... 느낌이 좀 다르네요.
  • 옛친구 2007.12.31 13:06 (*.106.199.224)
    음... 으니씨 뭔가 힘들구나... 마지막으로 만난지 오래 되서 뭐라 할 말은 없지만
    항상 힘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래요... 화이팅~!
    새해 무조건 복 많이 받기. ^^
  • 튜닝만20년 2008.01.01 00:19 (*.81.25.215)
    아버지~ 저도 사랑합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655 쌈질방? 10 2008.02.21 4131
2654 갇혀 사는 나를 방치된 손으로 인해 발견 합니다 bradpitt 2008.02.17 3922
2653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1947-) 2 고정석 2008.02.15 5659
2652 발렌타인데이 초코렛 받았어요.... 11 file 콩쥐 2008.02.14 5745
2651 [속보] 숭례문 방화, 또 다른 용의자 CCTV에 포착 47 거마워 2008.02.13 6482
2650 러닝타겟 폐인되다 3 file 드림 2008.02.12 4925
2649 주사땜에 긴장하는 아이들 6 file 드림 2008.02.12 4270
2648 빈민가로 이사와 보니.... 7 file 콩쥐 2008.02.11 4729
2647 우생순...후기.(퍼온글) 4 file 콩쥐 2008.02.08 6185
2646 설 잘 보내세요~~~ 7 file 콩쥐 2008.02.04 5013
2645 쬐게 늦었지만.... Martin 2008.01.27 4072
2644 아토피가 한국만 떠나면 나아요? 16 file 콩쥐 2008.01.23 5335
2643 외국초딩 vs 한국초딩 ^^ 음.. 2008.01.22 4675
2642 차와 국력. 6 file 콩쥐 2008.01.17 4855
2641 자카르타에서 온 편지... file 콩쥐 2008.01.17 5683
2640 어려운 기술보다 상상의 나래 펴는 즐거운 스케이팅부터 1 오서방 2008.01.17 5198
2639 [가요]하나의 사랑 - 박상민 file 채소칸 2008.01.13 5614
2638 영화배우 ....아오이 유우 9 file 콩쥐 2008.01.13 8860
2637 노가다판 론도.aguado rondo..ㅋㅋㅋ 14 file Jason 2008.01.12 9615
2636 마눌님의 손톱 갈아드리기 3 jazzman 2008.01.10 4959
2635 부러진 내 손톱... 22 file Jason 2008.01.10 7293
2634 "빌게이츠의 은퇴하는 날" 마이크로소프트 제작, 욱겨 죽어요 ㅋㅋㅋ (보이게 고쳤어요 죄송) 2 으니 2008.01.10 4804
2633 오른손은 휴가중... 6 file 봉봉 2008.01.09 5679
2632 오쇼의 짜라투스트라 6 file 콩쥐 2008.01.09 6275
2631 헤미 쥬쎌뫼 2 file 콩쥐 2008.01.09 6354
2630 마린 몬테로 2 차차 2008.01.08 4699
2629 6살아이가 연주를... 2 콩쥐 2008.01.07 5885
2628 음악영화....말할수없는 비밀. 5 file 콩쥐 2008.01.05 5639
2627 닭 고만 드세요. 21 file 콩쥐 2008.01.05 5506
2626 입으로 기타 소리를... 신기 신기 2 barrios 2008.01.04 5919
2625 눈 너무 왔어요.. =-= 3 토토 2008.01.03 4584
2624 달팽이뿔 np 2007.12.31 4778
2623 2008 1 file cho kuk ko 2007.12.31 6028
2622 2008 2 file cho kuk ko 2007.12.31 5493
2621 [영화] 수면의 과학 file 콩쥐 2007.12.30 4755
2620 헤드머신 어디서 사죠? 3 전어구이 2007.12.29 5764
2619 북조선의 Guitar Class 5 고정석 2007.12.27 6178
2618 역기드는 할머니... 1 file 채소칸 2007.12.25 4829
2617 [re] 역기드는 할머니... file 채소칸 2007.12.25 4694
» 아빠에게 메리크리스마스 4 file 으니 2007.12.24 5255
2615 태안 유감 np 2007.12.22 4412
2614 가야금 캐논 2 =-= 2007.12.22 5963
2613 새내기의 나름대로의 독학.... 유의선 2007.12.22 4270
2612 파바로티와 스팅의 파니스안젤리쿠스 7 으니 2007.12.22 9251
2611 피겨스케이팅의 점프시 에지사용규칙 - 자랑스런 한국인 '김연아' 3 부초 2007.12.21 6141
2610 대통령선거 하고 왔어요. 23 콩쥐 2007.12.19 6345
2609 코니 탤벗.. 6세라네요. 4 =-= 2007.12.18 6513
2608 일본드라마.....밤비노. 11 file 콩쥐 2007.12.16 6636
2607 일본드라마 ......호타루의빛 5 file 콩쥐 2007.12.12 6975
2606 [스크랩]간만에 맘껏 웃었다. 1 복숭아boy 2007.12.12 5159
Board Pagination ‹ Prev 1 ...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 152 Next ›
/ 152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hikaru100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