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새해 복을 받아버린 것 같은 날

by 으니 posted Feb 18, 200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잘생긴 이레가 왔다. 킹크랩을 커다란걸 한마리 제대로 쪄왔다. 참 저도 어려울텐데, 도대체 뭘해서 먹고사는지를 알 수가 없는데, 설이라고 이것저것 챙겨서 한보따리를 싸들고 왔다. 금요기도회 예배를 끝낸 아버지가 사람들을 집에 맛있는 게 있다면서 오자고 했다. 집 거실이 꽉 차게 앉아서 저마다 이렇게 큰 건 처음본다는 둥 살이 꽉 차서 정말 쫀득하다는 등 맛있게들 먹고 역시 이레가 사온 한라봉까지 잘 먹어치웠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 이레가 볼멘 소리를 했다. 목사님 드시라고 큰 맘먹고 사온건데, 뭐 얼마 드시지도 못하고 뭐냐고, 그랬다. 내친김에 하는 소리가, 저 아버지 어머니도 그렇게 큰맘먹고 뭐 해드리면 양로원 사람들 다 주고 우리는 필요없다면서 그렇게 속상하게 하더란다.

그래, 어릴 때부터 하도 내가 뭔가를 집에 사가거나 아버지를 드리면 남과 나누고 아니 아예 남을 줘버려서 속이 상할 때가 많았다. 나도 안먹고 안사고 아끼고 아껴서 정말이지 큰 맘먹고 산건데 남을 주다니,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준다는데, 사실, 돈벌고 학교다니라 나만큼 어려운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그런 시절이라 원망스럽기도 참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살다보니 참 나도 어딜가면 빈손으로 안가고 누가 와서 뭘 달라면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가르치는 애들도 뭐가 그리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늘 뭔가 사주고 싶고, 내가 아버지고 아버지가 나 같아져버렸다. 뭐 물론 시대가 다른 시대라 다른 점이 당연히 있겠지만, 내가 속으로 웃었다. 이레 너도 별 수 있냐 아무리 너이 아버지 제일 친한 친구 목사님이라도 너 우리집 오면서 이렇게 사가지고 오는데 너는 뭐 별 수 있냐, 세월 좀 흐르면 아버지를 더 잘 알게 되고, 부모가 자식같아 질텐데, 하고 웃었다. 게다가 보면, 돈이 돌고돌듯이 어쩌면 내가 받은 이 많은 사랑들은 사실 아버지가 남들에게 주었던 사랑이 멀리 돌고 돌아 온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단 말이다.

내가 어릴 때는 지하철에 앵벌이 하는 애들 꼭 얼마씩 줘야하는 줄로 알고 컸는데, 어느정도 나이 들어서는 알고보니 그 아이들, 죄다 무슨 조직들과 관련되어서 그 돈 다 엉뚱한 사람들에게 들어가고, 구걸이 아니라 장사라는 소리를 듣고는 내 정말 그런거라면 한푼도 주지 않을테다 생각했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고, 아버지는 다리를 다쳐 운운하는 쪽지가 무릎에 놓이면, 지갑을 더욱 꼭 틀어쥐고 일부러 애 얼굴은 쳐다보지 않으려했던게 또 몇년이다.

그런데 또 세월이 흐르고 흐르다보니 참 이제는 그렇다면 그런게 참말이라면 그래서 더욱더 줘야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아이들에게 그 돈이 들어가고 안들어가고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한번에 많은 돈을 주는게 아니라 만날 때마다 보통 남들 주듯 주는게 가장 좋은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가 알겠나, 내가 한푼이라도 더 손을 내밀어서 그 아이가 그 날 저녁에 맞을 회초리 한대라도 덜을지,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소신있게 지조있게 사는 것도 당연히 해야할 일이고 좋은 일이지마는, 때로는 소신있게 지조있게 하려는 내 생각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가 하는 생각도 해봐야하는 것이었는데, 참 그 간단한 걸 알기까지 몇년이 걸렸다. 무조건 주고 또 나누는 아버지를 답답다 생각했던 내가, 고아원이 힘들다는 쪽지를 돌리는 아이의 손을 외면했던 내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로 뭘해도 내 선택이 옳았다고 합리화했던 내가 조금은 더 여유로워지고, 조금은 더 어쩌면 바보같아진 게 깔깔대기보단 미소가 늘어가고 이런게 철드는 건가 싶으니, 그러고보면 긴긴 내 사춘기가 이제 끝나가려나보다.

학원에서 뭘 좀 보내왔다. 객지 생활 끝에 어찌보면 자존심 다 상하고, 더러운 꼴도 다 보고, 때로는 수치심도 느꼈던 내 일년, 그 일년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태어나서 백그람에 만원이 넘는 고기는 처음보는데, 그럴싸한 바구니에 담겨서 한우랍시고 이것 몇 덩이가 몇십만원이 넘는단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내가 두고두고 앉아서 잘근잘근 씹어도 못내 속상할 것을, 내일 설이니까 교회사람들과 다 구워먹자고 말을 하고보니, 힘들었던 일년이 입안에 등심 기름녹듯 그냥 스르르 없어지는 것 같다.

난 세상과, 아니, 이제 나 자신과 완벽하게 화해를 한 것 같다. 애태웠던 사랑 원망하고, 공부 열심히 못한 나 원망하고, 늘 기쁘고 즐거운 것 만큼 슬프고 힘든 그것도 그만치나 깊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정말로 평안하고, 무엇을 해도 걱정이 덜하고, 한번더 생각하고 화낼일을 웃어버릴 수 있고, 열정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금 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랑을 조금 알 것 같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걸 일컬어, "새해 복 많이 받는" 다는 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죄다 붙들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큰 절이라도 하고싶은 밤이다.










  




Articles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