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남자가 아닌데 고백해서 미안;;

by 으니 posted Jan 15, 200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그녀를 만났다. 아주 오랫만이었다. 하긴 매번 만날 때마다 아주 오랫만이다.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는 또 따로 있지만, 그녀 또한 나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아니 어쩌면 알고 있는 것은 얼마 없을지 몰라도, 낯선거리에서 곤란에 처한 나를 안다고 자신있게 나설 그런 사람이다.

고등학교 입학 때 알게된 친구들이 어느덧 십년 친구가 되었으니, 그녀를 알게된지도 십년이 훨씬 더 넘어버린 셈이다. 한동안 연이 닿지 않다가 만났을 때, 나는 변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놀랐다. 갸날픈 선의 몸과 아직도 아기같은 눈동자가 그대로였다. 언니는 어떻게 나 중학교 때랑 이렇게 똑같아요, 나는 중학교 때보다 살이 십킬로는 더 쪘어. 다리 날씬한것 봐!! 라고 호들갑을 떨다가 수줍은 듯 웃는 입을 가린 손에 눈길이 꽂혔다. 아직도 고운 선이 대략 남아있지만, 확실히 기억과는 다소 다른 손톱끝이 단단해진 느낌. 변한 것도 있구나 싶었지만, 가린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는 웃음소리를 듣자니 오히려 더욱 변한 것이 없음을 말해주는 손가락이었다.

그녀는 강했고, 여렸고, 그녀는 독했고, 약했고, 그녀는 반듯했고, 또한 엉뚱했다.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우하며 예의가 깍듯했고, 쓴 충고나 꼭 필요한 말들도 아끼지 않았다. 전철 버스를 갈아타고 물어물어서라도 아픈 친구는 꼭 병문안을 가야하는 사람이었으면서도 정작 자기가 아프면 입을 꾹 다무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을 해낸다. 언니 운전면허는 있어 라고 하자 대리운전 알바도 했었다는데, 웬만한 일엔 눈도 꿈쩍 안하는 나도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었다.

세상 모든게 흥미진진하던 나는 교무실에서 전화받는 일 자체가 재미있었고, 결코 어떤 불만을 갖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었다. 일주일에 이틀을 방과후 두세시간정도 그녀의 작은 책상에 마주앉아서 전화를 받거나 잔심부름하는 일 자체가 그저 내 일과 중 하나로 여겼고 선생님들께 귀염을 받는 것도 내심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하루는 점심시간에 매점에서 빵을 파는 아이를 보았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아이들이 저마다 제각각 빵이며 커피우유 아시나요 따위를 사는데, 그 아이는 내가 입학초에 어찌 저리 계산이 빠를수가 하고 놀랐던 매점언니의 수준으로 돈을 받고 물건과 거스름돈을 내어주는데, 헉헉거리면서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순간, 좀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불쌍하다고 느낀 사람을 보면 오히려 다시는 눈길을 주지 않는 원칙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점을 나왔다.

그 날부터 방과후 교무실에 가기가 꺼려졌다. 생각해보니 그 아이는 아마도 근로장학생이었을 것이다. 말은 뭔가 대단해보이는 것이지만, 대략 그렇게 학교 일을 좀 돕는 정도에서 등록금면제의 혜택을 받는 것이다. 갑자기 내가 하는 일도 결국 그 일이지 싶은 생각도 들고, 남들도 나를 의아하게 여길까 싶기도 했고, 같은 일을 하는데 왜 나는 매점판매나 도서실 청소를 하지 않고 여기서 편히 전화나 받는 일을 하는건가 하고 뭔지모를 부끄러움도 생겨났고, 하여간 나는 청소시간이 끝날 때까지 빙빙 돌다 교무실에 아무도 없을 때가 되어서야 전화기 앞 자리에 앉곤 했다.

그 때 언니가 무슨 말을 어떻게 이야기해주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언니가 분명한 어조로 뭐라뭐라 이야기를 해주었고,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뭔가 모를 답답함을 벗고 그 전처럼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좋은 기억들을 가득 안고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해선 너무 재미있어 눈물날 것 같은 그런 일들을 마음껏 벌리며 신나게 학교 생활을 했다.

졸업할 무렵 언니가 펴낸 시집을 선물받았다. 책 뒤에 해제도 붙어있는 제대로 된 시집이었다. "둥지없는 새는 멀리 날지 못한다."는 제목이 붙은 푸른색의 시집. 좋아하던 언니의 첫번째 시집이었으므로 굉장히 열심히 읽었지만, 그 땐 어렴풋하던 모든 일들이 다시금 기억하니 선명히 떠오른다. 언니의 시들은 지어낸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종이컵에 담긴 쓴 커피 한 잔만큼의 진실들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언니, 나는 언니가 두번째 시집을 내지 않더라도 언니는 이미 멋진 시인이라 생각해. 언니는 모르겠지만 나는 언니의 시 몇몇 구절이 하도 인상깊어 나도 모르게 외워버렸어. 시인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과 누구나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고백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고, 나와 세상에 대한 그런 고백들이 감동을 줄 때 정말 그런게 멋진 시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때 내게 이야기해주었던 것이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지칠 때마다 언니가 그 때 이야기해주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가만히 기억에 귀를 기울여볼거야. 언니도, 내가 좋지? 언니가 그렇게나 알뜰살뜰 언니 물건 하나 안 사는 것 뻔히 알면서 투덜대며 나타나서 피곤하다 밥사내라 차끓이라 졸라대는 나 좋은거지? 늘상 같이 있진 못해도 언니도 힘들 때면 나를 생각해. 언니의 그런 멋진 모습을 보면서 또 기운을 얻는 내가 있으니까.

- 2006년 1월 10일 일기



















Articles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