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만한 사람 - 10

by 으니 posted Apr 1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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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를 샀다. 무슨 날은 아니었지만 아빠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다. 깔끔하면서도 딱 맘에 드는 디자인이긴 한데 색깔이 밝은 게 영 맘에 걸렸다. 늘 보수적인 차림새의 아빠에겐 그저 색깔이 밝은 것 조차도 화려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냥 샀다. 정갈히 포장하여 받아왔지만 왜 그리 난 하는 것도 없이 바쁜지 한집살면서도 막상 건낼 시간이 없어서 며칠이 지난 오늘에야 내밀었다. 생각이 나자마자 이층에 뛰어 올라가 불쑥 아빠방문을 열고 쑥 내밀었다.

넥타이야.
고맙다.
해봐.
지금 원고쓰잖아, 바빠.
그래도 해봐, 괜찮으면 저녁 예배때 하고 가도 되잖아.


아빠는 정말로 바쁘다. 늘 마감시한에 임박하여 뭔가 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하지만 일어나더니 남방셔츠를 와이셔츠로 바꿔입고 양복 저고리를 걸친 후에 넥타이를 끌러 조심스럽게 목에 대본다. 말로는, 얘가 바쁜데 왜 올라와선 지금 이걸 해보라고 해. 라고 몇마디 하지만 행동은 혹시나 바꾸게 될까 하여 접힌 자국을 내지 않으려는 섬세함이다. 거울을 보면서 에이 안되겠다. 너무 밝아. 라고 한다. 정말 예쁘지 않아? 딱 예쁜데. 라고 말하자, 타이 자체는 세련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밝아서 싫다고 한다. 나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둬보라고 말하면서 희다못해 푸른기가 조금 도는 새셔츠에 하면 잘 어울릴거라고 한다.

과외를 마치고 집에 와 보니 내 책상위에 넥타이가 상자에 꼭 처음처럼 고스란히 넣어져 돌아와있다.

엄마, 아빠가 이거 싫대?
싫은게 아니라.
싫은게 아니라 뭐?
아빠가 양복이 저거, 남색밖에 없잖아.
아빠 양복 두벌 아닌가?
지금 맨날 입으시는 것 남색에 줄무늬고 바지만 입는 헌 것도 남색이잖아.
그런가? 내 말은 아빠 회색 양복 있었는데, 아닌가.
얘는,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너 어리고 보노 구리 막 태어날 때 입던거지.
그럼 이거 어쩌라구.
너 필요한거로 바꾸래.

나는 포장지도 고이 접혀 돌아온 넥타이를 보면서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이걸 바꾸어서 내껄 뭘 산다면 정말 천벌을 받아도 받을 것만 같았다.

됐어, 그럼 차라리 넥타이를 두고 내가 양복을 아예 맞춰드리면 되잖아. 잘 어울리게 회색으로.
어이구, 너 공부나 잘하셔. 뭐 누가 아파트 키부터 줍고선 이제 아파트만 주우면 된다! 했다더니.

나는 속이 갑자기 울렁울렁해졌다. 나는 철철이 정장이 몇벌인지 모른다. 넥타이를 들고, 아빠의 그 회색양복이 정말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인가 생각하는데, 아빠가 설교가방을 들고 이층에서 내려왔다. 정말 양복 저고리랑 바지가 같은 남색인데 저고리엔 줄무늬가 있고 바지엔 없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빠! 정말 왜 바지 딴거 입어, 저거 맞춘지 몇년 안된거 같은데 벌써 배 더나온거야?
아니야. 새바지라서 무릎꿇고 기도하면 무릎 나오고 불편해서 일부러 헌거입는거야.

눈에서 땀이났다. 그냥 방문을 닫고 들어왔다. 몇년된 남방을 입어도, 늘 같은 신발을 신어도 울 아빤 잘생기고 하도 반듯하게 갖춰입어서 나는 아빠가 옷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잘 입고" 다니신다 생각했다. 누가봐도 구질구질해보이는 차림새는 절대 아니지만, 단벌신사는 역시나 단벌신사인것이다.

이것도 아빠가 사준 원피스예요.
자상하다구요? 정말 자상하죠. 엄마 립스틱도 아빠가 늘 골라줘요.
원피스 사주구, 맞춰신을 구두 주문했다고 기다리래요.
아빠가 홈쇼핑을 좋아해요..


난 그냥 아빠가 홈쇼핑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이젠 이렇게 말해야할 것 같다.

아빠가 나를 사랑해요..
내가 아빠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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