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번개가 치면 무서워, 안 무서워?

by 으니 posted Apr 1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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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번개가 치면 무서워, 안 무서워?

천둥번개가 뭐가 무서워?

안 무서워?

안 무서워.

혼자서 밤에 길가는데 막 천둥치고 하면 무섭잖아.

아니, 안 무서워.

실망인데.

뭐가?

천둥번개가 치는 것이 안 무섭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거고, 배신할 확률이 큰거야.

어떻게 그리 단정지어? 나는 배신당하면 당했지 하진 않아.

당연히 사람은 천둥번개에 공포감을 느끼게 되어있어. 그런데 안 무섭다고 하면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야.

무섭다, 안무섭다 하는 것도 자기가 느끼는 감정인데, 그럼 안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야?

솔직히 말해봐, 정말로 천둥번개가 치는 곳에 혼자 있어본 적 없지?

내가 왜 몰라, 나도 알아. 번개 먼저 번쩍 하고나서 소리 들리잖아. 소리가 좀 늦으니까.

집에서 들은 것 말고, 바깥에서.

그건 없지. 난 도시에서만 컸는걸.

도시에서 커서 그런 적 없다는 건 변명이구, 심리테스트에 나와있어.

심리테스트? 나는 그딴 것 안 믿어.

그런 오다가다 하는 게 아니라, 군대에서 특수부대 뽑을 때나 사관학교 같은데서 하는 성격테스트야. 무섭다고 하는 사람은 배신활 확률이 커.

그래서 내가 배신한다는거야?

그건..






흔해빠진 그렇고그런 질문과 답이 아니라, 입사 시헙볼 때 자주 쓰인다는 "심리검사"지를 우연히 발견한 나는 천둥번개가 치면 무섭냐는 질문에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표기하고, 결과에 놀랐다.

이상하게, 나는 어릴 때완 달리 언젠가부터 어둠도 익숙했다, 무섭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불이 다 꺼진 시커먼 건물 복도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책상 속의 씨디피를 깜빡해서 친구들을 교문에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4층 교실을 마구 뛰어올라가면 내 그림자가 벽에 기다랗게 비치곤했다. 검은 그림자는 교실 창문 하나만큼 뛸 때마다 키가 커졌다 줄었다했다. 비가 오는 날엔 가끔 우산을 놓고 1층 현관까지 내려오곤 해서 컴컴한 계단을 두세개씩 뛰어올라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무섭지가 않았다.

그렇게 무슨 일이든 저질러도 무섭지가 않았다. 생각해보면 무섭지가 않았던 것 정말 맞나? 어쩌면 그 모든 것 무섭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뿐이었나. 나는 그렇게 줄곧 나를 속여온걸까. 나는 무섭지 않아,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것 다, 내가 만든 허상이었나.





있잖아, 이러면 어때?



무섭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거라며.



그러면 죽을 때까지 무섭지 않으면 어때? 정말 무섭지 않다고 느끼면.

계속 속이는거네, 그러면.

응, 그런거긴 한데, 정말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속일수, 아니 생각할수만 있다면 그게 진짜일수도 있는거 아니야?

아, 모르겠어. 머리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는데.

그렇잖아, 뭐든지 변하잖아. 변한다구. 하지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진짜로 그렇게 행동한다면.

행동이 그러려면 정말 끝까지 그래야겠지, 배신할 확률이 높다는거지, 배신한다는 것이 아니니까.

응, 그렇게 행동하다보면, 상황 역시도 그렇게 만들어져서 그게 사실이 될 수도 있잖아.

그건 글쎄. 상황과 의지가 정당하지 않은 일들을 바르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의 핵심은 믿음이야. 믿음. 정말로 믿는다면?

똘아이겠지.





만약에 내가 친구들에게 난 무섭지 않아, 라고 말하면서 교실에 혼자서는 못가겠어. 라고 집으로 바로 걸어갔다면 정말 나는 모두를 속이고 있는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분명히 교실에 남아있는 씨디피를 반드시 갖고 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자국 소리도 크게 울리는 밤의 학교로 뛰어들어갔다. 정확히는 그 밤에 누가 내 씨디피를 집어갈거라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소중한 아가같은 씨디때문에, 그리고 집에 걸어가는 길에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놓치기 싫었기 때문에, 그렇게 후닥닥 달려올라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저지르고, 또 저지르고 줄곧 저지르면서 살았는데, 나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가고, 이것저것 모든 것 다 잘할 수 없고, 어떤 때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질이 나쁜 인간이란 걸 남보다 훨씬 더 늦게 깨우치기도 하고, 바위에 부서지는 계란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 산산히 부서지는 모든 것들이 문득 남같지가 않은데, 그래도 그래도 믿는다면, 사람은 더이상 믿을 수가 없어.. 라든가 혹은 뭘 믿는지도 이젠 희미하고 힘도 서서히 딸린다는 걸 느끼지만 저 모퉁이를 돌면 뭔가 더욱 사랑스러운 것들이, 이름모를 꽃도 돌틈마다 피어있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비 오기 전의 촉촉한 날씨로 세팅된 거리가 나올 수 있다면, 곧 비가 올거라고, 마른 가슴 진정할 비가 시원하게 내릴거라고, 또 그 다음엔 맑게 개일수도 있을거라고. 계속 그렇게, 억지라도 나 죽을 때까지.






페르난데즈 연주회와 마스터클라스에 다녀왔다.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것만큼 음악은 나를 견뎌준다. 나의 집착과 도를 넘은 억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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