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막염

by 1000식 posted Apr 1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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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소개드린 제 친구 김윤한 시인의 글입니다. 빠쁜 생활 중이시더라도 차 한잔 하시면서 여유를...
이 글은 안동문화지킴이의 기관지 <사람과 문화> 2005년 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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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늑 막 염 >

                               권 석 창


그가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소실점을 향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눈물막 너머로
보고 있었다.
잠시 그의 모습이 흔들리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의 사랑도 끝이 났다.
다만 그의 이름만이
오래된 늑막염으로
내 안에 남아
흐린 날이면 이따금
결리게 한다.

‘이별’이라는 노래가 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로 시작되는...
그 노래가 처음 나올 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노래도 물론 좋았지만 ‘이별’이라는 제목이 주는 공감대가 넓고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들으며 저마다 자신만의 추억에 잠기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별’이라는 노래가사처럼 구상적인 언어로 시를 쓰면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기가 어렵다. 시는 구상과 추상이 적절히 조화되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듯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의 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이 시도 이별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시 어디에도 이별이란 말 하나 없다. 그렇지만 오래된 이별과 그리움에 대한 심상을 늑막염이라는 병명과 연결시켜 차분하고 나직하게 노래하고 있다.
시를 읽기에 앞서 제목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별이면 이별이고 추억이면 추억이지 하필이면 늑막염인가 의아해질 것이다. 그러자면 늑막염이 무언가 미리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앓아본 사람들이야 다 알겠지만 늑막염은 가슴 부근의 횡경막에 염증이 생기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호흡이 힘들어지는데 숨을 쉴 때마다 가슴부근이 결리고 심하면 호흡이 툭툭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가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소실점을 향해
점점 작아지는 것을
- 1~3행

화자는 어느 날의 이별을 추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별의 모습은 매우 차분하고 수동적이다. 떠나는 사람을 잡지도 않고 다만 물끄러미 ‘가는 것을 보고’있다. 화자는 가만히 있고 ‘그’만이 움직이며 사라지고 있는 형태다. 그러기에 시인의 기억 속에 더욱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지 모른다.
상대가 떠나는 모습을 ‘소실점을 향해 / 점점 작아지는’ 것으로 표현한다. 미술시간에 원근법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는데 시인은 이별의 모습을 이처럼 ‘소실점’을 향해 사라지는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눈물막 너머로
보고 있었다.
- 4~5행

상대가 떠날 때에도 결코 펑펑 울지 않는다. 슬픔을 결코 과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눈물막’이 무언가 생각해보자.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슬픔에 겨워 눈물이 솟게 되면 눈자위 위에 눈물이 고여서 보이는 모든 사물이 눈물에 젖어 있는 것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떠남에 대해 담담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시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시인은 눈물막을 통해 떠나는 사람을 보고 있다. 눈물은 곧 흘러내릴 것 같지만 눈 안에만 고여 있고 넘치게 흘러내리지 않는 깊은 슬픔이요 절제된 아름다움이다.
시에서는 이처럼 눈물이 나더라도 정신없이 펑펑 우는 것 보다는 시인이 적절하게 표현을 조절함으로써 더욱 극적인 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눈물막 너머로 / 보고 있었다.’는 표현은‘펑펑 흘러내리는 눈물’보다는 얼마나 근사한 표현인가.

잠시 그의 모습이 흔들리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의 사랑도 끝이 났다.
- 6~8행

이제 ‘그’는 떠났다. 이별한 어느 순간 초기에는 ‘그’의 심상이 시인의 마음속에서 ‘흔들리’기는 했지만 시간이 가면 대부분의 일들은 잊혀지는 법, ‘그’는 시인의 마음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랑도 끝이 났다’.

다만 그의 이름만이
오래된 늑막염으로
내 안에 남아.
흐린 날이면 이따금
결리게 한다.
- 9~마지막행

사랑은 완전히 끝이 났다. 그러나 사랑은 끝이 났지만 어렴풋이 옛사랑이 그리워질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나 그리움이라 이름 부른다.
이 시인도 물론 그랬다. 사랑은 오래 전에 끝이 났다. 얼굴조차 어렴풋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뇌리 속에 기억되어 있다.
‘다만 그의 이름만이 / 오래된 늑막염으로’남았다고 표현한다. 독특한 발상이다. ‘그’는 이미 떠나버린 과거형이지만 어쨌든 그 과거는 늑막염과 같이 가끔씩 다가오는‘아픔’이다. 지독한 아픔은 아니지만 ‘흐린 날이면 이따금’ 가슴 한 구석을 ‘결리게’하는 가슴 아린 그리움이다.
이별에 대한 그리움을 ‘늑막염’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해낸 작품이다. 문학에서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개인기’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장기자랑이 인기이듯 시에 있어서도 누구나 발상해내고 누구나 쓸 수 있는 그런 류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어렵고 자신만의 독특한 발상을 시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 시인도 ‘이별 또는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보편적인 심상을 전혀 이질적인 이미지인 ‘늑막염’으로 낯설고 독특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독자들의 눈길을 끌어냄은 물론 시 읽기의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권석창 시인은 경북 영주 순흥 출생, 호는 鼠角 혹은 쥐뿔,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벌판에서>당선, 1989년 시집 <눈물반응>, 2002년 <한국근대시의 현실대응 양상연구>(박사학위 논문), 영주고등학교 교사, 대구대 겸임교수, 민족문학작가회의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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