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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밤늦도록 술이 내리고(유고) /  임병호


겨울 기차에 올라
못 쓰도록 그대 안고 싶어
내가 떠난다.
펑펑 오는 눈 맞아가며
이 산 저 산 허허벌판으로
하늘도 땅도 다 팽개치고
소리 소문 없이 떠난다.

떠나버린 자리에 그리움은 남는가
그 곳에도 사랑은 자라고 있는가
눈은 먼 산으로부터 쌓이고
가물한 불빛 흐르는 산마을로
밤늦도록 술이 내리고
슬픈 사람의 사랑이  
그대 불러 안고 싶다 한다.

기차는 떠나고
不二不二로 찍힌
내 홀로 걷는 발자국뿐인
저 허허로운 벌판으로
내일도 개망초 꽃판 같은
눈이 온다는데
오늘은 슬픈 그대 꿈을 안고 잔다.



  작년이었을 거다. 설날이 지나고 이월이 다 지나도록 변변한 눈 하나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올해는 눈이 되게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3월에 엄청난 양의 눈이 내렸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은 눈을 배경으로 한 시 한 편을 읽는다. 이 시를 쓴 임병호 시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분이다. 평생 혼자 살면서 맑은 소주를 벗하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행을 일삼았다.

  그렇지만 그는 시를 사랑했고 술을 사랑했고 사람을 사랑했던 누구보다 더 순수한 시인이었다.

  그는 연시를 잘 쓰지 않았다. 유고를 정리하다가 이 시를 찾았다. 비교적 시인의 감정이 다른 시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나 있는 것 같아 지난 해 내렸던 눈을 생각하며 이 시를 함께 읽기로 한다.




  겨울 기차에 올라 / 못쓰도록 그대 안고 싶어 / 내가 떠난다. / 펑펑 오는 눈 맞아가며 / 이 산 저 산 허허벌판으로 / 하늘도 땅도 다 팽개치고 / 소리 소문 없이 떠난다.
     - 1연


  시인은 떠나버린 사랑을 못 잊어 어느 날 무작정 겨울기차를 탄다. 누구나 그런 경험은 있을 것이다. 기분이 황황한 날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눈이 오는 날은 감정도 날씨처럼 더 낮게 드리운다. 시인은 떠난 사람을 ‘못 쓰도록’ 안고 싶을 정도로 그리움이 간절하다. 떠나는 데에는 목적지가 없다. ‘이 산 저 산 허허벌판’ 어디든 ‘하늘도 땅도 다 팽개치고’ '소리 소문 없이‘ 무작정 떠난다.

  눈이 펑펑 오는 날 시인은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눈 속을 헤집고 달리는 열차를 타고 그렇게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떠나버린 자리에 그리움은 남는가 / 그 곳에도 사랑은 자라고 있는가 / 눈은 먼 산으로부터 쌓이고 / 가물한 불빛 흐르는 산마을로 / 밤늦도록 술이 내리고 / 슬픈 사람의 사랑이 / 그대 불러 안고 싶다 한다.
     - 2연


  그리움은 ‘떠나버린 자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적어도 보통의 상식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랑은 상대와 함께 자라나는 것이지만 시인이 떠나보낸 사랑은 워낙 간절하기 때문에 상대가 떠난 뒤에도 사랑은 계속해서 ‘자라고’ 있었다. 그 만큼 사무침이 절실했다는 이야기다.

  그리운 마음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창밖에 내리는 눈발 사이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은 ‘눈은 먼 산으로부터 쌓인다’고 말한다. 시인의 심정과 먼 산 위로부터 창밖까지 원근의 심상이 입체적으로 잘 나타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간은 점점 흘러 어느덧 어둠이 내린다. 눈발 사이로 ‘가물한 불빛 흐르는 산마을’이 보인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게다가 이 그림에는 떠난 연인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그림 위에 입체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시인은 그리움을 술잔에 담아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술은 주변의 풍경과 일체가 된다. 바깥에 펑펑 내리는 눈은 절절한 그리움과 일체 내지는 혼동이 되어 펑펑 내리는 눈은 눈이기도 하지만 이제 ‘술’이 되어 ‘내리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추억을 회상하며 이미 떠난 사람이지만 ‘그대 불러 안고 싶다’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기차는 떠나고 / 不二不二로 찍힌 / 내 홀로 걷는 발자국뿐인 / 저 허허로운 벌판으로 / 내일도 개망초 꽃판 같은 / 눈이 온다는데 / 오늘은 그대 꿈을 안고 잔다.
     - 마지막 연


  기차도 연인도 모두 다 떠났다. 시인은 술을 마시다가 눈길을 홀로 걷는다. 발자국은 이 지상에서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것뿐이다. 표현대로‘不二不二’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절대치의 외로움이다.

  ‘不二’라는 말은 ‘진리는 둘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쓰였지만 이 시에서는 반복을 통해 오로지 혼자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내일도 개망초 꽃판 같은’ 눈이 온다고 한다. 시인은 이 절절한 그리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내일은 또 ‘개망초 꽃판 같은’ 눈이 온다고 한다. 시인은 더 괴로울 것이다.

  개망초를 아시는지. 개망초는 1년생 잡초로 그 꽃은 흰 색이며 저녁 어스름에 보면 마치 꿈결처럼 희부옇게 보인다. 마치 환상 속의 풍경을 보는 듯한.

  지금 내리는 눈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내일도 또 눈이 올 것이다. 시인은 외롭고 쓸쓸한 가슴을 하고 홀로 ‘그대 꿈을 안고’ 잠을 청할 수밖에 없다. 내리는 눈을 통해 절절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잘 조화시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술에 취해 문화회관 앞 어디쯤을 휘적휘적 걸어오던 임병호 시인이 간절히 보고 싶다. 눈이 온다면 나도 내리는 눈을 안주삼아 시인을 생각하며 마음껏 취하고 싶다.




임병호 시인은 1947년에 안동에서 나서 2003년에 세상을 달리했다.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활동, 두 권의 시집이 있고 ‘시읽기 운동’ 책자를 통해 시의 대중화에 열성을 다했다. 안동민족문학회 회장을 했고 살아 있을 때는 거의 술을 마셨고 여러 가지 기행을 일삼기도 했다. 그는 지금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임하면 금소리 ‘구구름’골에 홀로 외롭게 누워 있다.




김윤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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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한 시인은 임병호 시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로 오래된 <글밭>이라는 시동인지를 통하여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나의 친구로서 생전의 임병호 시인과 함께 띠동갑 술친구였다. 며칠 전 이 친구와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퍼마시면서 생전의 임병호시인의 기행에 대해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어제 밤 내게 '밤늦도록 술이 내'려서 혼자 허허로이 자작을 하다가  비몽사몽간에 임병호 시인과 주거니 잫거니 술잔을 나누었다. 냉수를 찾아 오늘 아침 일찍 잠을 깼다.  위 글은 <안동문화지키미>의 기관지 <사람과 문화> 2005년 3월호에서 옮긴 것이다.      
Comment '3'
  • 2005.03.31 07:43 (*.80.23.162)
    와.....시의 해설도 기가막히다 했더니
    가까운 친구분의 해설이었군요...
  • 1000식 2005.03.31 09:14 (*.228.153.134)
    위의 시처럼 개망초 꽃이 피면 정말로 눈이 온 것처럼 보여요.
    작년 여름 강원도 원주의 야생화 펜션에 갔다가 개망초 꽃이 하도 예뻐서 사진을 찍어두었어요.

    사진은 요기로

    http://www.guitarmania.org/z40/zboard.php?id=gowoon31&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729
  • 1000식 2005.04.01 07:47 (*.228.154.151)
    유품을 정리하다가 부치지 않은 편지가 한 통 나왔다고 임병호 시인의 누님이 저를 찾아왔더군요.
    편지를 부쳐야 될지 말아야 될지 잘 모르겠다면서...
    그제서야 저는 이 시 속의 여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는데 저도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람.
    연시(戀詩)를 잘 쓰지 않는 사람인데 비밀처럼 붙들고서 홀로 그리워하다가 끝내...
    바보같은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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