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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아래는 글밭 동인지 2003년호에 실린 임두고 시인의 글입니다.
임두고 시인은 글밭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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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호론 - 일탈과 초월의 시학 (임두고)


"인간이 자기 자신 너머로 가고자 하는 초월이라면, 시는 그 계속적인 초월하기의, 그 끊임없는 상상하기의 가장 순수한 기호이다." - 옥타비오 파스


1.

‘글밭’ 동인지는 안타깝게도 임병호1) 동인의 시 원고를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세속적 가치로부터 일탈(逸脫)된 무명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자부하면서 살다가 지난 오월 홀연히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며칠 전, 그가 하마선인2)을 꿈꾸며 마지막 삶의 보금자리를 틀었던 금소리 ‘시서원’ 고택을 찾아 보았는데, 그의 눈빛이 묻은 골목 어귀의 오동나무와 와송 낀 지붕이 허허한 그의 생전처럼 나를 맞아 주었다. 빈 고택 마루턱에 잠시 걸터앉아 있는 사이 지난 봄 그가 손수 마당가에 묻었음직한 씨앗들이 가을을 맞아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은 채 그의 부재를 더욱 하소연하는 듯했다. 혹여, 그가 이 세상에 뿌리고 간 시들도 저 꽃이나 열매처럼 쓸쓸하게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평생 시를 쓰듯이 삶을 살면서 그러한 삶을 진솔하게 시로 형상화 해 온 시인이었다. 그에게는 시가 곧 삶이었으며, 삶이 곧 시였다. 시와 삶이 분리되지 않는, 그의 진정한 시인으로서의 한평생을 새삼 껴안으면서 그가 남기고 간 두 권의 시집을 펼쳐 들고 다시 꼼꼼히 읽어 보기로 한다.


2.

그의 시에는 기교가 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충격적인 표현 구절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평이한 시어로 그가 겪는 삶을 투박하고 진솔하게 표현할 뿐이다. 그는 투박진 것들의 가치를 모르는 이 시대를 ‘녹슬고 삐뚤어진 시대’로 받아들이며 안타까워한다.

언제부터인가
금기시된 것은 노동의 실체이다
힘들고 투박지게 빚은 것일수록
이렇듯 거칠게 버려져야 한다. <못 펴기>

기계로 인해 소외되어 가는 노동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 시이지만, 시인의 노동이 곧 시를 쓰는 일이라면 기교의 틀에 끼워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소위 인기 시인들의 시에 밀려 “투박지게 빚은” 시들의 가치가 “거칠게” 버려지고 있다는 함의로 읽힌다. 그는 평소 옷차림새나 격식을 갖추는 것을 꺼려했다. 궁핍한 삶이 그 한 요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그의 가치관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겉치레나 격식은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부리는 기교에 불과한 것이다. ‘격식(기교)= 허위’라는 등식을 그는 끝까지 고집스럽게 지니고 살았다. 격식을 요구하는 제도권 문학에 대한 그의 거부감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 그는 “시는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써야 한다”고 누누이 역설한 바 있으며, <입자놀이>라는 다음 시에서도 “시는 진검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말들이 무풍의 도심을 휩쓸어
조금씩 들뜬 사람들
북으로 남으로 몰려다니는
저물녘 저자거리에
환영같은 나를 앉혀 두고
시는 진검처럼 다루어야 한다. <입자놀이>

이 시대는 말(언어)의 고삐가 풀린 시대다. 시공을 가리지 않고 욕망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그 언어들 속에 사람들은 환영처럼 존재한다. 바람처럼 떠도는 타인의 말로 자신을 드러내는 현대인들은 분명 자아를 상실한 환영같은 존재다. 육화된 시인의 목소리를 갖고 싶어하는 그는 지금 선술집에서 “환영같은 나를 앉혀 두고” 술을 마시면서 시는 “진검처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 ‘진검’은 나아가 시의 형식(기교)보다는 시의 내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와 ‘진검’ 승부를 펼치겠다는 그의 시적 방법론은 이미 미적 충격을 줄 뇌관을 제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시의 조류를 근원적으로 일탈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그의 시관은 기교로써 시의 질을 저울질하는 이 시대 경박한 시정신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가 평생을 시와 더불어 살았음에도 과작(寡作)에 그친 까닭은 시도(詩道)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진지한 시작(詩作) 태도 때문일 것이다.


3.

그는 유년기부터 혹독한 통과 의례를 치러야 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교직자인 엄한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떠돌며 “바르게 살라 바르게 살라/ 알몸 마루 끝에 내세워져/ 매를 맞던 시절”(<못펴기>)을 보낸다. 다음 시를 통해 드려다 본 그의 유년은 “소태맛”과 “회색”으로 표상되는 고통과 암울함 뿐이다.

유년의 꿈 속 하늘엔 빛이 없다
무명 반바지를 입은 목이 가느다란 나는
혼자이고 어린 의식엔
쓴 소태맛과 회색 뿐이다. <유년의 꿈>

기술자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그는 대구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였으며, 그곳 문예반에서 ‘한하운’의 시를 애송하며 시에 눈뜨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성의 결핍과 엄한 부성에 대한 반감 등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는 와중에, 인척이 사상범으로 단죄 받게 되면서 가정이 풍비박산되자 대학도 중도 포기한 채 심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탈출구였던 해병대 제대 직후 고향의 문우들과 ‘글밭’ 동인을 결성해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사회에 뿌리를 내려보려고 서울로 올라가 음식점을 개업했으나 실패하고, 한동안 부산, 대구, 안동 등지의 주물 공장을 떠돌며 유랑 생활을 하게 된다.

삶이 있는 곳 어디든 따라 나서겠다던
주민등록도 이력도
커다란 불신의 입이었던
신원증명도 재산보증도
그 흔한 수고로움의 표시도
이들은 요구하지 않았다. <취업>

이 시는, 일자리를 찾아 전전긍긍하던 당시 삶의 정황을 짐작케 해준다. 이즈음 그는 말소된 주민등록증을 새로 만들지 않아 주민등록증도 없이 떠돌아 다녀야 했는데(이후로도 그는오랫동안 주민등록증 없이 지냈는데, 인척의 사상범 단죄에 따른 연좌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한 방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침 그가 흘러든 사상 공단에서는 “신원 증명”이나 “재산 보증” 없이 취업을 허락하니 얼마나 반가웠으랴! 이 곳에서의 다양한 체험과 습작은 그가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나중에 이곳에서의 삶이 시집 한 권에 오롯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그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느꼈는가?

산다는 것은 고난이라 치부해 버리고
제 나름의 부지런을 떨며 일을 맡아
때로 힘겹고 피곤해도 젊음으로 삭인다.
가끔씩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는 것은
사상으로 흘러 온 뼈아픈 내력과
일의 분량만큼 넉넉하지 못한 현실과
확인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이 얽혀서지만
하룻밤 지나면 다들 잊고
쌓아 놓은 도시락 하나씩을 들고 방을 나선다. <사상 808번지>

안전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직 “도시락”(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뼈아픈 내력”도, “넉넉하지 못한” 노임도, “내일에 대한 불안”도 잊은 채 밤낮 없이 잔업을 하며 지내는 공단 사람들을 그가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회식>이라는 시에서는 이들을 “쇳가루를 먹어/ 쇳덩이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이들의 처절한 삶을 연민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외경스러워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또 다른 시적 대상인 <최해수>, < 유군>, <농아 김군>, <최반장>, <하중사> 등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이런 사실을 감지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의 삶을 투사시키면서 나르시즘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상 공단에 펼쳐지는 삶이 “훗날 전설로 남겨져 얘기”해야 할 경이로운 것으로, 그 자신은 그리 오래 견디지 못하리라는 인식은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 곳에서 “노동의 댓가에는/땀과 피의 내음이 배어있다”(<기적>)고 할 정도로 뼈저린 노동의 고통을 맛보기도 하는 한편, 단순하게도 그 노동의 고통만 지우면 세상이 낙원으로 변한다는 신비로운 체험도 한다.

거푸 나눈 술잔에 취해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우리는 불콰해진 얼굴로 일어섰다.
비누공장 높다란 굴뚝에 매인 바람이
쇳가루 쌓인 가슴을
조금씩 에덴으로 날렸다.
내리막길 하단을 걸어 내려
길을 메운 사람들만으로도 조금은 들뜬
통술집 즐비한 에덴공원 입구쯤에서
우리는 머뭇거리며 소주를 사들고
-----------------------------
누가 에덴으로 가자 했는가
산다는 것은 신비롭구나. <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그러나 이 시를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보면 문제는 ‘술’에 있다. 현실의 고통을 꿈(희망)으로 지워야 하거늘, 술로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술이라는 진통제에 기대어 껴안은 “에덴”(낙원)은 신기루 같은 환영에 불과하다. 이 진통제의 과다복용은 때로 꿈이 빠져나간 “몸을 부셔”대는 자학이 되기도 하는데, 끝내 그는 “막소주나 마시고 막걸리나 퍼 넣어 가며/ 철망이나 잡고 머뭇거려도 되는가”(<사상 오후>)라고 회의하며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문전옥답에 살찐 냉이처럼 뿌리 내려야지 <사상공단>

꿈이 없는 삶에는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며, 뿌리가 없는 삶에서는 꿈이 꽃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뿌리를 내리리라 꿈꾸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살찐” 삶이 기다리리라고.객지 생활 끝에 다시 돌아온 고향은 그가 꿈꾸던 고향이 아니었다. “골골마다 흉흉한 소문”으로 들끓어 하나 둘 떠나버린 “수수끌데기 소름으로 돋는” 고향에는 “산이고 강굽이고 예같지 않은 사람들”이 “귀먹은 동수나무 곁을 서성이고”있거나, “반백의 연륜”들만 남아 “속 다 털려 빈손으로” 쭈그려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향에서 “울면 되는가 거듭나라”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희망의 ‘봄’을 확신해 보기도 한다.

풀이 울면 되는가
먼 길 헤매다 피곤한 몸
내 절며 돌아온 날
잊은 모태의 강
빈 들과 마주한다.
-----------------------
풀이 우는가
지축에 뿌리박아 요동 않던 산자락으로
신선한 해빙의 아침 강으로 봄은 오리라
언 땅 황량한 들판에서 웅크리며 숨죽이던
내 유년이 부르던 이름 정겨운
풀이 울면 되는가 거듭나라. <풀이 울면 되는가>

그러나 그는 농부의 아들이 아니었으며, 씨앗을 뿌릴 자기 몫의 한 뼘 땅도 남아 있지 못했다. 부득이 그는 남의 농원 일을 거들며 시를 쓰는 한편, 농자재 특허 개발에 뜻을 둔 채 “내 몇 점 농자재를 만들어 떠돌길 몇 해”(<근황>)의 방황을 하기도 하지만, 이미 심정적으로 고향의 농부가 된 그는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 언저리를 맴돌며 잃어버린 고향의 파편들을 쓸쓸히 더듬어 보기도 하고, 피폐한 고향 현실에 울분을 토하기도 한다.

고향 강변에 무심히 던져진 한 개 돌에도
생솔 내음 가득했던 초가 오두막과
펄펄 눈 내리던 겨울 저녁과
아, 이제는 잃어버린 사람들과 시절을 기억한다. <눈 내리는 마을>

천수답 무논 까짓 얼마랴
몽뚱그려 탈탈거리며 수매 바치고는
---------------------------------
경운기 시름시름 끌고 왔다.
빛이 좋아 개살구다
빛이 좋아 개살구다
울퉁불퉁 바퀴가 그렇게 굴렀다. <뒤풀이>

또 한편으로는 “상식의 허술함이 켜켜로 내려 누르는/시대의 질펀함”(<95 Summer>)과 “잘난 이념”을 “밥 사먹듯 하는 오늘”을 비판하거나 “돌덩이 시멘덩이 녹슨 철망 빻고 짓이겨/가루 되어 날려가 버려라"(<사물놀이>)며 분단의 한을 풀어내기도 한다. “내 삶의 굽이마다 맺혀있는 피멍”든 개인사(個人史)에 덧씌어지는 이러한 모순되고 부조리한 시대사(時代史)는 그로 하여금 급기야 “오욕의 땅”을 벗어나 만사를 훌훌 털어 버리고 싶은 일탈과 초월의 충동을 일으키게 된다.

한 닷새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기차에 올라 휘 한 바퀴 돌아 올 수 있는 땅을
한번 찾아가 보았으면 좋겠다.
엉긴 피같은 노역의 홑옷 벗어던지고
생채기 뿐인 양단의 사슬 풀어버리고
외딴집 찌든 처마며 삽짝이며 토담쯤 잠시 잊고
서말쯤 막걸리라도 들여 놓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여앉아
구름 걸린 높다란 하늘쯤 얘기하며
술잔이나 건네다가
三日長醉의 酩酊에나 들었으면 좋겠다. <酩酊>

그는 중년기 이후 “무너져 내리는 시대의 변방에서” 아직도 “그대 꿈을 꾸는가”라며 가슴 속에 잔존하는 세속적 꿈(욕망)을 모두 지워낸다. 그는 이 시처럼 “노역의 홑옷”인 결혼도 직장도 벗어 던지고, “양단의 사슬”인 시대적 아픔도 접어 둔 채 “한 닷새쯤” 훌쩍 떠돌아다니며 “三日長醉의 酩酊”에나 드는 일탈된 삶을 살았는데, 때로는 “화적패나 되었으면 좋겠다/총 맞아 죽는/화적패나 되었으면 좋겠다”(<수구형님>),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 아니라/ 어수룩한 도적놈이나 되자”(<도적놈이나 되자>)는 등 과격한 일탈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의 일탈된 삶을 바라보는 세상은 그를 부랑자나 기인으로 더욱 소외시켜 갔다. 5공화국 시절 한 때, 그는 부랑자로 몰려 삼청교육대로 끌려갈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리 위에서 투신, 자해(自害)를 가하는 고육지책을 꺼내야 했고, 그 후유증으로 신장염이란 지병도 얻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저 숲의 나무들이
울기 시작했다
헤지고 기운 입성의 사람들 가까이서
눈물과 피와 땀을 먹고 자란
이 땅의 나무들이
조용히 울음 울기 시작했다
-----------------------
전란보다 무섭다는 시절을 맞닥들여
그 여름 무섭도록 퍼붓던 폭우에 휩쓸리고 꺾여져
흉측한 몰골로 패인 뿌리로 얽혀
눈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을 떠받치며
살아남은 나무들끼리 어깨걸이 하고
저 숲이 조용히 울고 있다. <저 숲의 나무들이 울고 있다>

“숲의 나무”에서 한스런 삶의 내력을 읽어낼 정도로 세상은 온통 한(恨)으로 뒤덮여 있다. 더욱이 “전란보다 무섭다는 시절”을 넘어온 터라 “살아남은” 자체가 한(恨) 덩어리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울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한이 농익어 있다는 뜻이다. 삶의 한이 곰삭아 내리고 있다는 것은 삶의 초월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되짚어 보면, 그의 일탈은 삶에 대한 자포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결결에 “엉긴 피”를 정화시키며 거듭나기 위한 한풀이굿과 같은 성스러운 제의였다. 따라서 그의 “三日長醉의 酩酊”도 부정적인 소멸의 시간이기보다 긍정적인 생성의 시간으로 해석된다. “三日長醉의 酩酊”으로 표상되는 그의 일탈된 삶은 마침내 그를 참 시인(詩人)으로 우화(羽化)시킨다. 그는 시의 외길로, <소>의 ‘지순’과 <바위>의 ‘평형’을 넘어 초탈의 세계로 우화등선(羽化登仙)한다.

나의 視界 안에서
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호시절 가을볕 뿐일까
광풍에 억수로 비뿌리는 날 있다.

남루한 의복을 준비하는
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

선 채로 돌이 되는 수고로움이
오곡을 다스리는 실체이다

바람 한 올 거느리고
영근 이삭의 경배를 받는다

팔을 벌려 더덩실 춤을 추는
욕망 한 끝은 비상에 있었다.

참새 떼 제 푼수로 때없이 놀아도
큰 눈 속에 들일 뿐이다

먼 들 끝을 지켜보는 나의 심성은
초동의 하늘처럼 맑다

떨어진 씨앗을 봄들에 싹 틔우는
대지는 나의 영지다

빈들에 초연히 숙고하는
동면의 하마선인으로 있다. <허수아비>

가진 것은 “바람 한 올”뿐이지만 “비상”을 꿈꾸며 “天上天下唯我獨尊”의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세간의 허물”을 “큰 눈 속에 들”이는 초연한 “하마선인”이야말로 그가 완성한 삶의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을 그리는 순간 그의 삶도 시도 종착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완전한 초월은 더 이상의 전망도 일탈도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종착지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규범과 현실의 질곡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정신의 반항적 태도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기인이라기보다는 진정한 낭만주의자요 자연인이었다. 비정한 현대성의 블랙홀에 맞서 일탈과 초월로 일관한 그의 삶과 시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왜곡되고 억압된 세계인지를 드러내 줌과 동시에, 우리들 가슴 속에 꺼멓게 죽어 있는 삶의 진정성(眞正性)에 대한 열망을 풀무질해 주기도 한다.3) 자신의 인생을 파기하면서까지 펼쳐 보인 그의 시와의 진검 승부는 이미 불가능한 도전이었기에 그 결과를 묻는 행위는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다만 그 승부의 치열성이 어떠했는지를 묻는 것으로 만족함이 옳다.4)


4.

“어떤 바램도 아닌 시만이 가득한 세상이면 좋겠다”고 하던 임병호 시인. “소태맛”의 유년과 “술과 쇳덩이”의 젊음을 거쳐, 시와의 진검 승부를 꿈꾸며 일상 생활로부터 결연히 일탈하여 시의 세계로 훌쩍 초월해 들어간 “삼일장취(三日長醉)의 명정(酩酊)”같은 그의 한평생은 감히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시의 외길 인생이었다. 시가 생계의 수단으로, 권위의 증서로, 장신구로, 삶 속에 교묘히 기생하는 이 시대에 그가 보여준 일탈과 초월의 삶으로 쓴 시학은 잃어버린 시의 아우라(Aura)와 삶의 진정성을 되찾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다. 아, 아직도 비루한 세속적 욕망의 진창구렁 속에서 시를 거머쥐려는 내 부끄러운 손아귀여, 가슴아귀여!


<각주>
1) 1947년 9월 안동 길안 출생. 1969년 ‘글밭’ 창간 동인. 1988년 계간『실천 문학』으로 등단. 1996년 ‘한겨레 시 읽기 운동 연합회’ 창립 후, 월간『시를 읽자 미래를 읽자』를 발행. 1999년 ‘안동 민족 문학회’ 초대 회장 역임. 2003년 5월 지병으로 타계하기까지『누가 에덴으로 가자 하는가, 사상 공단』(도서출판 글방, 1990)과, 『저 숲의 나무들이 울고 있다』(도서출판 맥향, 1999) 두 권의 시집을 남김.

2) 세상을 등지고 두꺼비와 개구리를 길들이며 함께 놀았다는 옛 중국의 선인.

3) 김현은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김현, 「전체에 대한 통찰」, 도서출판 나남, 1990

4) 조르쥬 바타이유는 “시인은 오직 자신의 파멸을 위해서만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며, 오물이 삶에서 배척받듯이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는 운명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저속하고 피상적인 욕구들에 만족하는 평범한 삶을 선택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며, 진정한 시정신은 자기 파멸로부터 빚어진다고 본다. 조르쥬 바타이유, 조한경역, 「저주의 몫」, 문학동네, 2000

<이 글은 '글밭' 26집(2003년)에 발표한 것임.>

Comment '2'
  • 2005.04.01 07:28 (*.80.23.158)
    글 참~ 좋네예.
  • 1000식 2005.04.01 07:44 (*.228.154.151)
    한꺼번에 장문을 줄줄이 올려서 읽으시기 부담이 될 거예요.
    시간나실 때 찬찬히 함 읽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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