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임병호 시인의 허수아비

by 1000식 posted Apr 0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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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Qmuse Club 홈페이지에서 옮긴 저의 글입니다.

편곡 : F. Mompou
곡명 : El cant dels ocells(새의 노래 - 까딸루냐 지방의 크리스마스 캐럴)
연주 : Grondona


















                      허수아비

                                                    임병호

나의 視界 안에서
天上天下唯我獨存이다

호시절 가을볕 뿐일까
광풍에 억수로 비 뿌리는 날 있다

남루한 의복을 준비하는
세간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

선 채로 돌이 되는 수고로움이
오곡을 다스리는 실체이다

바람 한 올 거느리고
영근 이삭의 경배를 받는다

팔을 벌려 더덩실 춤을 추는
욕망 한 끝은 비상에 있었다

참새떼 제 푼수로 때 없이 놀아도
큰 눈 속에 들일 뿐이다

먼 들 끝을 지켜보는 나의 심성은
초동의 하늘처럼 맑다

떨어진 씨앗을 봄들에 싹 틔우는
대지는 나의 영지이다

빈 들에 초연히 숙고하는
冬眠의 하마선인으로 있다.


* 하마선인 : 세상을 등지고 두꺼비와 개구리를 길들이며 함께 놀았다는 옛 중국의 선인.


임병호 시인은 저와 무척 가까이 지내던 분이셨는데 지난 5월에 지병으로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지요. 안동에는 '글밭'이라는 오래된 시동인지가 있는데 34년이나 되는 역사를 자랑한답니다. 매 년 '글밭' 동인지를 내고 있는데 올해에는 '임병호 시인 추모 특집'으로 나왔군요. 그는 평소 무척 가난하게 사셨지만 누구에게 돈을 빌리는 법이 없으셨지요. 너무도 당당하게 "돈 만원 다오."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여윳 돈이 있어 좀 더 드릴라 치면 한사코 받지 않으셨지요.

그의 젊은 시절에는 시인으로서의 기개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小說家, 隨筆家는 詩人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詩人만이 사람 인(人)자를 쓰거든." 그에게 있어 소설이나 수필은 잡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을 늘어서 있으면 그는 새치기 해서 물건을 사곤 했는데 사람들이 시비조로 바라보면 대뜸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난 시인이야 임마~"라고.

제가 운영하는 '시간여행'이란 까페는 글밭 동인들의 아지트인데 임병호 시인이 특히 자주 오셨지요.
"형님~ 무슨 차를 드릴까요?"
"어이, 정선생. 차 말고 술이나 한 잔 줘~"
건강이 염려되어 술을 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막무가내.
안주 없이 마시는 속칭 깡술 스타일인데다 술이 몇 잔 돌고 나면 어눌한 말로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까페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급기야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어 집으로 모실라 치면 한사코 걸어가신다고 우깁니다.
"어휴~ 속 터져~ 이 애물단지를 누가 안 데려가나~"

안동에는 국보급 명물이 두 분이 계시는데 둘 다 가난하게 살며 오래된(?) 총각이라는 것, 그리고 둘 다 병약하다는 것이 공통점이죠.
임병호 시인과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이 바로 그들입니다.
두어 달 전에 권정생 선생님(현재 67세) 댁에 다녀 왔는데 다 쓰러져 가는 초라한 집의 단칸 방에 기거하시는데 방안은 온통 책들로 쌓여 한 몸을 겨우 누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지라 가을볕이 따사로운 마당에 거적을 깔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맑고 깊은 눈 빛이었지만 병색이 완연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더군요. 어릴 때 결핵을 앓아 병약하신 선생님을 임병호 시인이 늘 걱정했는데 정작 먼저 떠나고 말았다고 허허롭게 이야기를 건네자 선생님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흘렀습니다. 시인이 생전에 소주 한 병 사가지고 선생님을 찾아 와서는 밤이 새도록 '눈물'인지 '술물'인지를 흘리며 애를 많이 먹였거든요.

『 가진 것은 "바람 한 올"뿐이지만 "비상"을 꿈꾸며 "天上天下唯我獨存"의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세간의 허물"을 "큰 눈 속에 들"이는 초연한 "하마선인"이야말로 그가 완성한 삶의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을 그리는 순간 그의 삶도 시도 종착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 임두고 시인의 평 중에서

'허수아비'는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시입니다. 가난하게 사셨지만 항상 기개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사셨던 이 시대의 마지막 기인 - 임병호 시인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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