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GuitarMania


두손을 머리 뒤로 올린채 참호속에서 나와야만 했다.

막 전투를 치룬듯, 그들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몹시 흥분되어 보였다.

닭벼슬 처럼 머리의 가운데 부분만 남기고 모조리 삭발한 병사는,
얼룩덜룩 위장된 얼굴에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듯한 태세였다.

방금전 엄청난 폭발에 온몸을 두드려 맞은듯 서있는것 조차도 힘들었지만,
이대로 주저 앉아 있다간 그들이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걸었다.


"살려면 움직여야 해..."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어서 조금 걷고 나니 곧 견딜만했다.


30분 정도를 걸어 미군의 집결지에 다다르자,
같은 처지가 되버린 한 무리의 아군-독일군들이 보였다.

소속부대를 확인하기 위한 줄에 끼어 반대편 쪽을 바라 보니,
이미 확인이 끝난 병사들이 대오를 이루고 서있었다.






포로가 된것이 못내 분하다는 표정의 장교.
아무 표정이 없는 어린 병사.
전투에 지쳐버린 주름 잡힌 얼굴의 노병.


...들이 보였지만...

대부분은 이제 전쟁은 다 끝났다는듯,
밝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벌써 차례가 되었다.


장교가 수북히 쌓인 서류에 무언가를 기입하며 물어보았다.
독일어인 것은 알았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아는 말이라곤...
예, 아니오, 그리고 몇몇 무기 이름들뿐이었다.

분대별로 독일어를 잘 하는 동료가 있어 굳이 배울 필요는 없었고,
정말 급한 경우라면 손짓, 발짓으로도 의사는 전달 되었다.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다 궁여지책으로 군번표를 풀어서 보여주니,

장교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의 그는 다소 놀란듯, 다시 말을 걸어 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고 멍한 표정으로 군번표만 들이댔다.

마구 다그치는 듯한 장교의 행동에 순간 몹시 긴장했다.

그는 주위의 다른 장교를 불러 심각한듯 한동안 이야기를 하더니,
다시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혹시 잘못된건 아닐까 내심 불안해 하며 애처로운 얼굴을 했지만...
손가락으로 트럭이 있는쪽을 가리키며 이동하라는 장교의 얼굴을 보니,

이내 안심이 되었다.



 


일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하자마자 전투를 치뤘다.
최고라던 황군은 소련군 전차와 장갑차에 고깃덩이처럼 도륙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얼마 후 소련군이 되어야 했고,
강철 같은 독일군의 기관총에 다시 가랑잎 처럼 쓰러져 갔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을때, 우리들은 강제로 독일군에 배속되어
이곳 이름 모를 해안 지방에 지원 부대로 보내졌다. 

소련군 포로 중에는 중앙 아시아인과 몽고인들이 섞여 있었는데,
키작고 광대뼈가 튀어 나온 나같은 아시아인들은 혐오 대상이었다.

아까 죽어버린 "귄트" 하사관은 특히 심한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


고된 훈련과 거의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지만,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역과 굶주림에 비참하게 죽는것에 비하면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먹을수 있는것만으로도 천국과 같았다.

.
.





트럭에 올라 털썩 주저 앉았다.


"아... 정말 살았구나..."

오늘 아침에 그렇게 비오듯 쏟아지는 포탄세례는 난생 처음이었다.
게다가 어젯밤엔 연합군들이 하늘에서 새까맣게 떨어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젠 더이상 살아 남을것 같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운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만하면 고향에도 갈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황해도 연백의 드넓은 땅이 펼쳐진 내 고향을...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때가 꼬질꼬질 끼어있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등을 기대니, 


동소리와 함께 덜컹 거리며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털털 거리며 달리는 트럭 뒤에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 사이로,
길가에 깊게 패인 포탄 구덩이에서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가...

잿빛하늘을...

더욱 흐리게 했다.

.
.



"Winters on subway" from "Band of  Broders" - Michael Kamen



  
Comment '2'
  • 차차 2004.12.20 12:03 (*.105.113.125)
    군더더기 없는 글이 좋아요... 필력이 나날이 느시네요...

    조선인 병사가 무사히 귀환하길........
  • 이브남 2004.12.23 17:41 (*.72.62.166)
    차차님 감사 드려요... (__)

    근데... 왠지...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


    벌써 크리스마스가 임박했네요.

    즐거운 성탄 보내세요~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138 아직은 따뜻한 세상? 7 nenne 2003.08.29 3500
6137 사랑이야기 올려주신 두분께 오늘뽑은 배추 보냈습니다. 3 2004.11.03 3500
6136 매트릭스 탁구 1 빌라로보트 2003.08.28 3501
6135 루즈벨트 " 영 부인의 글... 4 영부인 2003.07.22 3502
6134 안녕들 하시지요? 6 쏠레아 2009.07.23 3503
6133 이 새벽에 전 뭘하고 있는걸까요.... 10 消邦 2005.09.21 3504
6132 [re] 미치시고 파치셔여~ file 2004.04.21 3506
6131 이게 도대체 무슨체인가? 13 file .. 2007.05.20 3506
6130 원본이 없으면 file 사배숙 2008.03.29 3506
6129 50명에서 100명쯤 희생시켜도 된다는 관점 괴담 아니네! 2008.05.09 3508
6128 구조협회장님과 세월호 전 항해사 인터뷰 기사 2014.04.25 3508
6127 마녀사냥... 2 사냥된마녀 2005.07.04 3509
6126 마눌님의 손톱 갈아드리기 3 jazzman 2008.01.10 3509
6125 중고카페에 이런것도 ^^ 황당 2008.04.02 3509
6124 잡채랑 계란말이 좀 드세요~ 1 file 한민이 2007.03.03 3511
6123 깨달음 6 np 2006.07.20 3512
6122 귀국한 아이모레스님. 18 file 콩쥐 2007.02.10 3512
6121 제주 올레 (5) 4 file jazzman 2009.10.19 3512
6120 자꾸 눈물이 나려해서... 1 eveNam 2003.09.02 3513
6119 화창하네요. 1 nenne 2005.04.17 3513
6118 줄기세포(line) 원천기술(art?) 소유자명단. file 콩순이칭구 2005.12.21 3514
6117 깡상님 콩쥐 2008.11.10 3514
6116 내 삶의 지표. 14 차차 2005.04.27 3516
6115 우리집 골목길에 들어서면.. 10 file Jason 2007.02.15 3516
» 노르망디의 한국인... June 6, 1944 (후편) 2 이브남 2004.12.20 3517
6113 개미와 베짱이 4 file -_-; 2006.11.09 3517
6112 이것들이 8 대체로 2006.12.13 3517
6111 문화원 vs 문화의 집 콩쥐 2009.09.30 3517
6110 우리 집에 꽃이 피니 이제 봄이로구나. 꿍딱 ♬ 3 각시탈 2004.03.08 3518
6109 제주 올레 (2) file jazzman 2009.10.19 3518
6108 1929년 10월 13일 바리오스 연주회.. 11 file 2004.11.22 3519
6107 자연이 준 선물."아디오스 호모 사피엔스." 9 file 콩쥐 2009.04.27 3519
6106 친구 2010.06.05 3521
6105 충청도말이 정말 느릴까? (펌) 2 호빵맨 2003.06.20 3523
6104 항해사님... 1 file ozaki 2008.04.15 3523
6103 [re] 고맙네요~ 장대건님 사진~ 1 file 오모씨 2005.11.10 3524
6102 Wall E 보셨나요?? 5 휘모리 2008.09.30 3525
6101 음악의 즐거움 1 無明 2003.09.01 3526
6100 산토끼 6 file 콩쥐 2007.10.09 3526
6099 하산..3. file 콩쥐 2008.06.26 3526
6098 맹박도 전도 1 file Na moo 2009.03.05 3526
6097 볼링공과 깃털 추락 언니 2014.11.08 3526
6096 [re] 엘펜리트를 보고... 2 file 이름없슴 2006.11.29 3527
6095 원숭이를 잡는 방법 (펌글) 3 아이모레스 2007.03.16 3528
6094 월드컵패배의 이유가운데 하나. 3 무너진8강 2006.06.29 3529
6093 홍준표 검찰 출석! 노림수 2015.05.10 3529
6092 테니스는 어떠세요? 4 셰인 2001.04.19 3530
6091 7번째 사진........... file Jade 2006.07.07 3530
6090 님의 침묵 4 file 지초이 2008.08.28 3530
6089 제비집 file mugareat 2010.06.19 3530
Board Pagination ‹ Prev 1 ...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 151 Next ›
/ 151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hikaru100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