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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 무쟈게 긴 글이오니 아주 심심한 분들만 읽으소서... --;;;;
** 오래 전에 써놨던 글로 제 홈피에 있던 건데, 위에 어느 분께서 남녀문제(?) 상담(?)을 하시길래 옛날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 올라서 한 번 올려봅니다. 이젠 그냥 추억 거리입니다만...


네번의 바람맞기, 한번의 바람 맞히기  2003.08.23-18:29:15


약속을 해 놓고 바람을 맞는다는 것은 살다보면 그다지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번번히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다. 가장 나은 경우가 상대방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드는 것이고, 대개는 그보다 훨씬 불쾌한 경험이어서, 멍청한 놈이 약속을 까먹어서 나를 골탕을 먹이는구나, -- 또는 -- 이 자가 날 뭘로 보고 이렇게 약속을 잊어먹나, -- 조금 더 심하게는 -- 혹시 나를 우습게 생각하고 일부러 바람을 맞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면서, 불쾌한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급기야 기분이 뱅뱅 돌면서 바닥까지 떨어지고야 말게 되는 것이다.


그 바람 맞는다는 것이, 이성에 대한 호기심에 서투른 기웃거림을 계속하며 조바심을 태우던 젊은(어린?) 한 때, 기대감에 찬 한 남자가 여자들(한두명이 아니라 좀 더 많은)로부터 당한 것이라면 어떨가? 조금은 상처가 되지 않을까? 헌데, 필자는 한 때 '바람의 사나이'였다. 별로 자랑스러운 얘기는 아니지만, 필자는 대학교 1학년 때, 한달 사이에 세명의 여자로부터 연달아 바람을 맞은 경험이 있다. 그런 몇 달 뒤에 최후의 일격으로 또 한번의 바람을 맞았는데, 이로 인해 완전한 KO 상태가 되고야 말았던 야사(野史)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놈이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살던 철없는 시절에 찌그러진 자존심을 부여안고 엉엉 울게 만들었던, 그저 씁쓸한 추억이었다고만 여기고 있었는데, 요즘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이 이 일련의 사건이 그것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고, 어쩐지 비교적 최근의, 보다 중요한 만남과 묘한 연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로 쓰고 싶은 충동이 문득 들게 된 것이, 이 요상한 제목의 글을 쓰게 된 이유같지 않은 이유이다.


온갖 자질구레하고 시답지 않은 일들을 줏어 모아서, 있는 수다 없는 수다 잔뜩 사설을 늘어놓기를 즐기는 필자로서, 이런 희한한 소재를 여태껏 글로 쓰지 않고 있었던 것에는 또 하나 이유가 있는데, 이 일들은 필자의 첫사랑(? 그것을 첫사랑이라고 꼭 부르겠다면 말이다)이 등장하는 상당히 민감한 사안(?)인데다가, 그 주인공이 이런 인연 저런 인연으로 묘하게 연결되어 여전히 필자에게서 그다지 멀지도 않은 곳에 있는 탓에 나도 모르게 글로 쓰기가 조금은 주저되었던 듯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도 이제는 어느새 10년을 넘겨도 한참 넘긴, 까마득한 옛날 얘기가 되버렸고, 공소시효(?)가 지났어도 벌써 지났을 건수인지라,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쓰기로 하였다.


꿈많던 대학 1학년생 시절, 순진무구하게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와서 별천지에 온 듯한 기분을 만끽(물론 시절이 좀 어지러운 때이기는 했지만)하는 한 방편이 '미팅'이었다. 물론 요사이야 초등학생도 하는 게 미팅이고, 중고등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생들은 시시해서 하는지 안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 때는 보통 고등학교는 졸업하고 나서야 하는 것이 미팅이었다. 필자의 고등학교에서도 졸업을 앞두고 한 반 전체가 어느 여고의 한 반과 연결하여 '반팅'을 하는 일이 유행이었다.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미팅에 관한 한 필자는 거의 파이오니어 수준이어서, 처음 미팅을 한 것이 고 1 때였다. 지금 듣기에는 그게 뭐가 어쨌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당시(그러니까 81년)에 고등학교 1학년이 미팅을 한다고 하면, 불량학생 내지는 '노는 애들' 축에 속할 지경이었다. 즉,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는 얘긴데, 필자는 좋은(?) 친구들을 만난 덕에 그리 되었다. 중국집에서 군만두를 앞에 놓고 주르르 앉아서 미팅을 했던 생각을 하니, 이건 영락없는 '추억의 책가방' 수준이어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고등학교 시절의 유일한 미팅이었고, 그 다음은 대학에 들어와서였다. 무슨 생각에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의 필자는 미팅에 관한 한 좀처럼 사양을 안 하는 편이어서, 적지 않게 한 편이다. 혹자는 '미팅을 많이 했다, 적게 했다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냐?'라고 물을지 모르겠는데, 필자는 정답을 알고 있다. 그 정답은 '몇 번인지 셀 수 있으면 적게 한 것이고, 셀 수 없으면 많이 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뭐, 이것도 자랑은 아니지만, 많이 했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언제까지인가는 고지식하게 횟수를 세고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신경을 꺼버렸던 것이다.


좀 한심스러운 얘기지만 미팅이란 것을 하다 보면 인간이 참으로 말초적이고 단순무식하게 되는 법이어서, 상대방을 평가하는 기준이란 단 한가지밖에 없게 된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형태학적 미학적 분류법(?)에 있어서 사람마다 기준과 적용법이 다를 것이나, 하여간에 비록 순간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예쁘게 생긴 것 외의 다른 기준이란 참으로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이다.


'여성을 물건 취급하다니!'라고 분개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남자도 겉 포장으로 평가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인간 시장에서 잘 생기고 예쁜 게 일단 장땡이지, 성격이고 나발이고는 별로 소용이 없다. 언놈은 나보다 하나 잘난 것 없어도 운이 좋아 '킹카'를 붙잡고 희희낙낙하고 있는데, 내 앞에 앉은 파트너가 제아무리 똑똑하고 인간성 '캡'이라고 한들, '세숫대야'가 엉망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말이 난 김에, 친구가 어떤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하면서 사용하는 '완곡 어법'에 대해서 한마디해야 할 것 같다. 소개시켜주는 처지에 엉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좋은 말을 쓰게 되는 것이 당연한데, 이때 새겨들어야만 할 말이 몇 가지 있다. 즉, 성격이 좋다 = 못 생겼다, 착하다 = 맹하다, 귀엽다 = 키가 작다, 차분하다 = 재미없다, 건강하다 = 뚱뚱하다, 똑똑하다 = 싸가지 없다, 뭐 이런 것들이다. 필자를 욕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그저 남들이 하는 얘기다.


그러던 어느 날,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별 생각 없이' 미팅에 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실은 남자 쪽 숫자가 모자라 '땜빵'을 위해서 갑자기 불려나가는 처지였는데, 이런 때 꼭 사건이 터지기 마련인 모양이다. 미팅을 나가서는 항상 머피의 법칙이 작용을 하게 되는지, '쟤하고라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마음에 있는 상대와 파트너가 되는 법이란 결코(?) 없는 법, 그래서 실은 여럿 중 괜찮다 싶게 눈에 뜨이는 여학생이 있었지만 언감생심 기대를 안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녀와 짝이 되었다! 환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물론 사실은 착각이었지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며 얘기를 했는지 잘 모르겠다.


전화 번호 좀 가르쳐 달라는 필자의 부탁을 외면하고 총총 가버리는 그녀….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필자의 몰골이란 것이 참으로 가관이어서, 부시시한 머리에, 듬성듬성 철판(?)을 뚫고 솟아난 수염에, 후줄근한 교련복 차림에(맙소사!), 삐쩍 마른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안경(필자의 당시 사진을 보고 '사마귀'같이 생겼다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실상 좀 비슷한 느낌이다), 등등 한마디로 으악!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니, 그까짓 전화번호 하나 알아내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그녀에게 전화를 거니 예상 밖으로 순순히 만나겠다고 한다. 나중에 다시 돌이켜 생각을 하니, 그때 축제 시즌에 임박해서였으니, 그녀는 필자를 '일회용'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아, 불쌍한 땜빵 인생아!


그래서 축제 파트너로도 이용(?)되고, 몇 번 만났는데, 필자가 너무 순진했던 탓인지, 모든 일이 순조로운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혀를 빼물고 헉헉거릴 정도로 더웠던 여름날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녀에게 사정없이 차였다. 그것도 전화로. 필자는 어안이 벙벙해서 잠시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갔는데, 한 10분 정도 사태를 분석한 끝에 겨우 '아… 내가 차인 거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오, 신이시여, 내가 왜?


그후 얼마 동안 필자가 그녀를 쫓아다닌 한심스런 얘기는 필자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생략하기로 하겠다. 옛 성현(?)들의 말씀에 틀린 말 없다지만,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만은 최소한 거짓말인 듯 하다. 넘어갈 때까지 찍으면 다 넘어갈지는 모르겠는데, 그 사이에 도끼 자루 부러지는 건 생각 안 하는가? 이쑤시개로 코끼리 죽이는 방법과 뭐가 다른가. '죽을 때까지 찌른다', '찌르고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기다리고 있다가 죽기 직전에 찌른다'. 나 참, 말해 뭐하나, 내 입만 아프지.


하여간에 애꿎은 도끼 자루만 실컷 부러뜨린 필자는 한동안 우울한 나날을 보내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여복(女福)'이 터지는데, 여복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여자 사태' 정도여서, 왜 그리 미팅시켜주겠다, 소개팅시켜 주겠다는 사람이 넘쳐나는지, 거짓말 좀 보태면 스케쥴 조정에 무리가 생길 정도였는데, 이게 실은 본전도 못 건지는 끔찍스런 수렁이었다. 일련의 여인들이 돌아가면서 필자를 난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첫 번째 타자(?)는 '과팅'에서 만났다. 한 극성파 친구가 기십명의 같은 과 친구들을 모집하여 모 여대 모 과 여학생들과 '과팅'을 주선하였는데, 이런 참으로 희박한 확률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필자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소위 킹카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도 실은 나가기 귀찮아서 안 나가려고 기를 쓰다가 억지로 한시간 늦게 도착한 것인데, 그때 필자의 파트너는 막 나가려고 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이 비정한 세상에서 그 사이에 딴 놈이 안 달려들고 필자를 위해 고이 남겨 놓은(?)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약간 들창코에 소란스럽게 까부는, '치어리더' 스타일의 글래머(!) 아가씨였는데,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을' 그런 인상이었지만, 필자는 세상에 눈에 차는 것 없이 시쿤둥했던 시절이라 그저 그녀의 요란스런 수다가 시끄러울 뿐이었다.


세상에 별 웃기는 일이 다 있어서, 본인은 별 생각이 없어도 옆에서 마구 바람을 집어넣어 서로 만나게 만드는 일도 있는데, 이 경우가 그런 경우였다. '그런 킹카를 가만 놔두다니! 말도 안돼!' 필자의 친구들이 필자를 가만 놔두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몇 번 만났는데, 그러던 어느 날, 모 여대 앞 어느 카페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필자는 바람을 맞았다. (물론 예고가 없지. 예고가 있으면 그게 어디 바람맞는 건가?)


친구들이 그 '킹카'와는 잘 되가냐고 하루가 멀다하고 물어보니, 참으로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집에 있는 적이 없어 전화 통화가 거의 불가능했던 이 킹카께서는 불행히도 필자와 놀아주기에는 너무도 바쁘신 몸이었던 모양이다.


얼마 안 가서 또 한번 '소개팅'을 하였는데, 참, 메뉴(?)도 가지가지여서, 이 2번 타자는, 쌍가풀 진 커다란 눈에 속눈썹 길고, 긴 생머리를 한, 순정 만화 여주인공 스타일의 여학생이었다. 연기력은 안 받쳐주는데 청순가련한 외모로 버티는 탈렌트 타입이라고나 할까? 별로 취미에 없는 타입이긴 한데, 소개해준 사람의 체면도 있고 해서 (나, 원, 잘난 체 하긴…) 점잖게 '애프터'를 신청해서 약속을 했다. 그리곤, 또다시 보기 좋게 바람을 맞았다. 공교롭게도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서 한시간 여를 종로 길바닥을 서성거렸으니 이 어찌 짜증이 아니 날쏘냐.


전화를 했더니만, 적반하장이라고 자기가 먼저 짜증을 낸다. 바쁘시대나 어쩠대나. 예라이 X, 잘먹고 잘살아라.


이런 한심한 지경에 한 주일도 못 가서 또 소개팅을 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무슨 '성 아무개 돕기 범국민운동'이라도 벌어진 듯 한 형국이었다. 이번에는, 현모양처(?) 스타일의 조신하고 예절바른 아가씨였다. 꼭 마음에 들어서 애프터를 하자고 그랬다기보다는, '그래, 이번에는 어떻게 되나'하는, 오기 비슷한 심정으로 다시 만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어떻게 됐을까? 국민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보기 좋게 바람을 맞았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한달 사이에 세 여자한테서 바람을 맞은 것이었다. 이제 귀찮아서 전화하고 뭐하고 할 기운도 없었다.


이때의 기분이란 그냥 슬프다든가, 화난다든가 하는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곤란한 것이었다. 어디 광야에서 고독한 늑대, 이리, 승냥이, 들개, 아니, 대충 다 비슷한 건가? 아니면 뭐, 족제비, 오소리, 들고양이, 해삼, 멍게, 말미잘, 뭐든지 간에 그런 비슷한 게 되어 마구 울부짖고 싶은 생각이었다. '야~~! 이 x들아~~~! 다 덤벼~~! 한 판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이거? 아~우~~~!' (썰렁한 얘긴데, 늑대 형이 늑대 동생 보고, 뭐라고 불렀는지 아세요? 답: 아~우~~~!)


이 기막힌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세상 여자들이 모두 작당을 하고 나를 괴롭히기로 한 것일까? 하여간에, 필자는 사교계에서 은퇴(?)하기로 하였다. 대신에, 홀로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며 시름을 달랬다. 정말로 시름이 달래지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이 헤비메탈 말고 뭐가 또 있겠는가. 그저 다 마음에 안 들고, 괜히 뭐라도 걸리면 때려부수고 싶고, 사람들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고 그럴 때 말이다. 머리를 안 깎은 탓에 반곱슬의 머리가 부시시하니 일어나면서 필자의 머리 사이즈가 거의 두 배가 되었다. 왜 그랬냐고? 나도 모른다. 그냥 깎기가 싫었다.


그렇게 한심스럽게도 처량한 날들을 보내며 '월동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어느덧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앞에서 필자를 보기 좋게 차버렸던 필자의 '첫사랑(?)'의 여인이 실은 다니던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 때려치우고 재수를 해서 학력 고사(이 시절에는 학력 고사가 있었고 선시험 후지원이었다. 대입제도란게 하도 정신 없이 바뀌니…)를 다시 보았고, 필자와 같은 학교에 들어오려고 한다는 정보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합격자 명단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가느다란 인연의 끈이 아직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저함 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찰칵하면서 전화를 받은 것은 귀에 익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합격 축하해…"


"응…"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필자는 그녀에게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하였는데, 승낙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하나마 반가움이 어려 있는 것을 느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필자의 학교 앞에는 그 때만해도 변변한 카페라는 것이 꽤 드물었는데, 봉천동의 '타임'이라는 곳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그녀는 장소를 잘 모르는데, 언니(세상이란 참 좁은 것이어서, 그녀의 언니는 필자의 과 선배였다)에게 물어보겠다고 하였다. 실은 이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필자는 덤불 숲 내지는 까치 둥지 같은 머리를 깨끗이 자르고, 목욕재계, 의관정제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가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다렸다. 헌데, 이럴 수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되가는데 그녀는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애써 침착한 척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설마, 또 바람을 맞기야 하려구…. 그런데, 결국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 전화를 받으니, 그녀의 언니, 아니, 선배님께서 전화를 받으시더니만, 당황한 목소리로 필자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걸 어쩌나? 어딘지 잘 몰라서 신림동 어디에 있을 거라고 가르쳐 줬는데…"


이날 필자는 중요한 걸 깨우쳤는데, 인생의 교훈이라면 교훈이고, 개똥 철학이라면 개똥 철학이라고 할 것이다. 세상에는 아무래도 인연이란 게 있나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보다… 하는 것이다. 그까짓 걸 가지고 포기하다니? 하고 필자를 비웃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말 뭔가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아니, 너무 거창한가? 하여튼 그 비스무레한 것이 '이건 네 갈 길이 아니니라'라고 장엄한 목소리로 타이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체념(諦念)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단순히 포기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없는 길을 만들겠다고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한 목표를 찾아 발걸음을 돌릴 줄 아는 용기이다. 도전하는 투지도 물론 훌륭한 것이지만, 때론 체념하는 관조와 달관이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 때도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필자의 마음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래, 이건 갈 길이 아니었나보다…'라고 생각하고 나니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소위 '마음을 비운다'는 것인데, 정치가들이 하도 써먹어서 좀 격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정신이 맑아지고, 키가 한 뼘쯤 커지는 듯,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한 상쾌한 경험이다. (꼭 이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하면 된다'이다. 안 되는 일은 안되게 내버려두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곤, 세월이 흘렀다. 필자는 그녀를 다시 찾지 않았다. 묘한 감정의 앙금이 완전히 사라지기에는 좀 시간이 걸렸지만, 하여간에 그냥 그렇게 옛날 얘기가 되어갔다. 내내 같은 캠퍼스 안에서 지내면서도 그녀와 다시 마주친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딱 한번, 도서관 앞에서 우연히 만난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저, 어색한 눈인사를 나누고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나서, 필자는 또 다른 운명의 만남을 하게 되었다. 약간의 패밀리 코넥션(?)이나, 뭐 그런 비슷한 연고로 소개를 받게 된 그녀는 '글래머'도 아니고, '순정만화 여주인공'도 아니었다. 그녀는 동그스름한 해사한 얼굴에, 짧은 머리, 씩 웃을 때의 미소가 천진스런 소년처럼 맑은 여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엄청난 장난기와 못 말리는 호기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필자가 그걸 진작에 파악하지 못한 것은 필자의 무딘 감각 때문일까, 그녀의 '내숭'때문일까? 처음 볼 적에 눈화장이 좀 어색해 보였는데, 그 뒤로는 좀처럼 화장한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치마 입는 것을 볼 기회도 흔치 않았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처음 만나는 거라 '예의상' 화장을 했었단다.


필자와 그녀는 애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애매모호한 관계를 한동안 유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필자는 당시 전공의로서 병원 응급실에 근무하고 있었고, 응급실이란 곳이 일이 힘든 대신에 퇴근 시간만큼은 정확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필자는 퇴근 후에 그녀를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퇴근 시간 30분 전, 한 환자가 들어왔는데, 상태가 좀 심상치 않았다. 완전 방실 차단이라는 부정맥으로 인하여 심장 박동이 매우 느려져 환자의 의식이 흐려져가고 있는 위급한 상태였다. 필자는 순환기 내과의 선배 전공의의 도움을 받아 이 환자에게 인공 심박동기를 삽입하여 일단 이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응급실 가까이에 있는 심도자실로 환자를 끌고 가서 막 심박동기 삽입을 마쳤을 때, 갑자기 옆에 있던 누군가 억!하는 소리를 질렀고, (그 유명한 '탁 치니 억 했다'가 생각이 나는데, '탁' 친 사람은 없었다. 뭐가 잘못되었던 것인지, 환자 상태가 워낙에 나빴던 것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심전도에 모였다.


맙소사! 환자의 심전도는 느닷없이 고요한 수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필자는 침상에 올라타고 환자의 가슴을 누질르기 시작하였다. 한바탕 전투를 치룬 끝에 필자는 결국 환자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우째 이런 허탈한 일이 벌어진단 말이냐. 땀에 절어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시래기 모양으로 널브러져 있던 필자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이런, 젠장! 약속!


필자는 허겁지겁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이미 약속 시간에서 한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이런 낭패가…. 필자는 씁쓸한 기분으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Y씨, 정말 미안합니다. 아까 말이죠…"


"네, 괜찮아요. 그냥 무슨 일이 있겠거니 했죠, 뭐."


"아… 저기, 환자 때문에요… 정말 죄송…"


"아니에요, 정말 화 안났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를 하였다. 그 때 필자는 그저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 뿐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필자와 그녀와의 인연이란 것이 그런 정도의 일로 끊어지기에는 조금 더 강한 것이었든지, 아니면, 그녀의 대범함이 간단히 끊어질 수도 있었을 그런 인연을 온전히 지켜내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대범함을 보여주는 다른 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필자가 그녀에게 '피아노'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안을 해서 같이 구경을 갔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그 영화를 이미 본 상태였다. 분명 전에 그 영화 얘기를 하면서 보았다는 얘기를 했다는데, 필자의 휘발성 RAM이 이 기억을 완전히 날려 버렸고, 무신경하게도 같이 보자고 했던 것이다. 그녀는 별 말 없이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봐주었다. 그녀는 나중에야 그 사실을 필자에게 말해주었는데, 그녀는 '좀 황당하긴 했는데, 영화 두 번 보는게 꼭 못할 짓은 아니라서, 그냥 같이 봐줬다'고 한다.


세인들이 보기에는 '여자가 좋아서 쫓아다닌 것 아녀?'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그것은 분명 그녀의 대범함 덕분이다. (콩깍지 신드롬? 맘대로 생각하시라.)


네 여자에게서 바람을 맞은 끝에 드디어 한 여자를 바람 맞혔는데, 이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인과 응보란 것이 정말 있다면, 필자도 네 여자를 바람 맞혀야만 했었던 것이 아닐까? 헌데, 첫 번째로 필자에게서 바람을 맞은 여인은 그 복수(?)의 고리를 끊었고, 그래서 필자가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 본다.


이 사건 후에 그녀와 필자의 관계가 극적으로 발전했던 것은 아니다. 도대체 뭣들 하는 거냐는 주위에 성화에도 불구하고, 그저 변함없이, 친구인지, 애인인지, 뭔지 모를 애매한 관계를 한참 더 유지하였고, 그렇게 아까운 세월이 또 흘렀다. 있으면 있나보다, 없으면 없다보다, 오면 오나보다, 가면 가나보다 하던 것이, 없으면 보고 싶고, 가면 섭섭한 사이로 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그렇게 어렵게 지켜온 인연이기에 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필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람을 맞혔던 그 여인이 지금은 필자의 아내가 된 Y이고, 필자는 왜 진작에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 했는가 하고 필자의 어리석음을 개탄하고 있는 중이다. 결혼한 후에 Y에게 그때 바람 맞혔던 얘기를 다시 하니, '지가 뭐 감히 나를 일부러 바람 맞히기야 했겠냐, 그랬지 뭐.' 그러면서 생긋 웃는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란 것, 참으로 묘하고도 신기한 것이다.


1997. 8. 17.
Comment '11'
  • ㅎㅎ 2004.11.02 15:33 (*.43.227.18)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아주 재밌게 잘 쓰시네요. 해피엔딩이라 더욱 좋구요.^^
  • orpheus15 2004.11.02 15:57 (*.125.250.1)
    ★★★★★ <- 그냥 나름대로 앞으로는 별로 comment를 대신할까 합니다. ㅋㅋ
    한편의 essay 군요. jazzman님은 음악이면 음악, 문학이면 문학, 녹음이면 녹음.. 못하시는게 뭘까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 2004.11.02 16:32 (*.227.72.217)
    허걱..읽길 잘했군요...
    너무 길어서 이거 다 읽다가는 일 못하겠다 했는데,
    어지간하면 단편수필집낼때 꼭 넣어서 내셔요.
    이정도면 읽는사람들도 디게 행복해질겁니다.
  • 고정석 2004.11.02 17:16 (*.92.51.232)
    jazzman님은 음악뿐만 다방면에 다재 다능하십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아이모레스 2004.11.02 18:55 (*.158.96.248)
    지금은 아침인데요... 이 글을 읽은 오늘 하루 시작이 굿입니다!!!!
    시작이 반이고... 4사5입하면??
    ㅋㅋㅋ 오늘은 하루는 째즈맨님 덕준에 완존히 굿일듯...^^
  • ZiO 2004.11.03 00:10 (*.237.119.83)
    전 한명의 여자에게 10번 바람 맞은 적도 있어요...ㅜ..ㅡ
    기다림의 희생이 된 숱한 담배들..우쒸...

    "홀로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며 시름을 달랬다..."
    저도 그랬어요...
    시름을 달래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염장만 지른 노래들.

    Alcatrazz<Suffer me>,
    Black Sabbath<She`s gone>
    SteelHeart<She`s gone>
    ㅜ..ㅡ

  • jazzman 2004.11.03 00:27 (*.207.79.31)
    오... 한명의 여자에게 열 번 바람....
    이건 또 새로운 경지다... 흠...
    근데, 그렇게 삶의 의욕을 잃고 비실비실할 때 헤비메탈을 듣고 있으면 사실 점점 더 폐인이 되죠. 헐...
    빨리 거기서 헤어 나려면 좀 다른 종류의 음악이 나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외로워도~ 슬퍼도~~ 나아~는 안울어~~~ 아니면... 거치~~른 들판으로, 헑헑, 다~~알려가자~ (아... 이 선전 맘에 안들어요... 김희애 버젼보단 최민식 버젼이 좀 나은 듯...)
  • jazzman 2004.11.03 00:28 (*.207.79.31)
    아구, 참... 이런 무지막지하게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 니슈가 2004.11.03 01:17 (*.180.231.118)
    끝까지 읽고 나니 참 기분이 좋아지네요. 요즘 인터넷세상에 이렇게 긴글 끝가지 제대로 읽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zIO 2004.11.03 02:46 (*.237.119.83)
    역쉬...재즈맨님의 생각은 저랑 비슷한 부분이 있군여..
    저도 김희애의 그 버전 거시기해요....그거 볼 때 마다 왜 제가 민망해지는 건지....--..--;;;
  • 차차 2004.11.03 18:18 (*.105.113.50)
    체념(諦念)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단순히 포기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없는 길을 만들겠다고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한 목표를 찾아 발걸음을 돌릴 줄 아는 용기이다. 도전하는 투지도 물론 훌륭한 것이지만, 때론 체념하는 관조와 달관이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 때도 있는 것이다. - Jazz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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