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브이자로 해주세요

by 으니 posted Sep 2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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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이외수가 그랬다. 막돼먹은 술집 여자라도 꼬셔서 소풍을 가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은, 그렇게 눈물나게 날씨가 좋은 날이라던가.

연휴 첫날이라 그런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벤치에는 아이에게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겨 데리고 나온 엄마, 귀에 MP3를 꽂고 잠시 쉬는 남자아이.. 또 아저씨 둘.. 또 혼자서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 뭔가 사러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듯한 언니.. 사람이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았다.

이런 공원엔 늘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게 마련이다. 국민학교 2학년정도로 되어보이는 남자애들 두 서넛이 정신없이 벤치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고, 나는 자전거를 뒤에 세워놓고 잠시 쉬고 있었다.

"괜찮을까?"
"그래도.."

"니가 해"
"그냥 같이 가자."

그늘 기둥에 두 아이가 기대어 서서 쭈볏쭈볏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 딴엔 내 쪽을 안 보고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너무 티가 난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숨기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그 아이들의 손에 들린 종이와 연필을 보고서 아 숙제하러 나왔구나 하고 곧바로 조금은 부드러워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 했다. 난 무표정하면 굉장히 "세상에 불만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들은 쭈볏쭈볏하더니 도로 저쪽으로 가버렸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그 남자애들과 일행이다. 저희들끼리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종이에 끄적끄적한다. 고개들을 종이에 콕 박구서 열심히 연필을 놀리는 것을 보니 그냥 웃음이 난다. 어릴 땐 뭔가 글자를 쓸 때는 꼭 저렇게 고개를 반쯤 옆으로 해서 푸욱 수그리고 어깨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간채로 연필을 꾹꾹 눌러썼다.

아까 그 두 여자아이가 다시 가까이 온다. 한참을 씩씩하게 걸어오더니 다시 그 기둥에 기대어 서서 또 멈칫멈칫 내 쪽을 쳐다보기만 한다.

"뭐 언니한테 물어볼 것 있어?"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물어본다. 아아.. 이래서 조선은 결국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던가 ㅠㅠ 아이들의 얼굴에 얼른 반가운 기색이 돈다.

"것봐 그냥 물어보자니까"

아이들은 씩씩하니 걸어와서 밑도 끝도 없이 묻는다.

"하시는 일이 뭐세요?"

뭐세요.. 라니 그런 말이 있었던가. 또 내가 하는 일이 뭐람. 대학원생인데 날나리 대학원생. 수료후 논문은 안쓰고 띵까띵까. 아니면 학원강사.. 과외선생.. 결혼이라도 했으면 "엄마" 혹은 "아내"인데 아.. 뭐라고 하면 좋을까.. 하다가 정작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얼마나 힘들고 많은 책임을 요하는지 알면서도, 아이들이 알아듣기 쉬운 답을 이야기해준다는 핑계로 나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선생님이야."

"아~ 정말요?"

아이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몇학년을 가르치세요?"

"고3"

"우와~ 우리보다 훨씬 더 크다."

아니 국민학교 2학년 정도 되는 애들이 한입으로 "우리보다 훨씬"이라고 하는데 내 귀여워 쓰러졌다. 당연히 훨씬 크지. 그걸 "보다"라고 비교해봐야 하는 것이 역시 아이들이다. 어릴 땐.. 모든 것의 기준이 나보다.. 내가 어른이 되면.. 나는.. 이런 것이었다. 어른들이나, 돈 잘버는 누구보다.. 공부잘하는 아무개보다.. 그렇게 말하는거다.

내가 생각에 빠져있는 틈에 아이들이 인사를 꾸벅 한다.

"고맙습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다.

"숙제가 뭔데 이렇게 빨리 끝나?"

내미는 종이엔 "우리 동네 잘 알기"라는 제목 아래에 "우리 동네에서 만난 사람 인터뷰"라는 칸이 커다랗게 비어있다. 더 물어볼 것이 없냐니까 되었다길래 그러면 잘 가라구 했더니 신나서 뛰어간다. 저만치 가서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또 이것저것 쓰다가 아까 그 둘 중 하나가 소리를 지른다. "아! 이름을 안 물어봤다!" 그러더니 다시 내 쪽으로 둘이서 헉헉 뛰어온다.

"성함이 뭐세요"

"이 강 은 이야."

뭐세요.. 라는 표현이 잘못되었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은 선생기질을 억누르며 짧게 대답했다.

"네 고맙습니다."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준비를 한다. 어릴 때 참 숙제 많았지. 그거 잘하려구 안 하면 세상 끝나는 줄 알고 정말 열심히 했지. 백과사전 다 베끼고 신문철 뒤져가면서 했지. 그리곤 다음 날 학교 가면 발표하고 싶어서 죽었지. 저요 하고 손들어도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땐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어. 방학숙제는 또 어떻구. 탐구생활은 받자마자 재미있는 것만 다 해뒀었던 것 같은데, 개학 전날, 밀린 라디오 방송 청취 기록장 정말 얼마나 괴롭던지.. 나는 걸으면서 내 어릴 때 생각을 떠올린다. 그저 학교 다니는 것, 선생님.. 친구들만으로도 꽤 정말 재미있었어. 모범생 아니었던 거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니 모범생이었나?

"저기요~"
"잠깐만요~"

"응?"

"사진을 찍어야해요."

아.. 사진.
그렇다, 증거물 제출. 숙제의 원칙이지..
아이가 들고 있는 카메라는 코닥 1회용이다.
내가 엄마라도 너한테 진짜 카메라를 주겠니..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해주세요."

녀석은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물결치듯 움직인다. 나는 최대한 내가 생각할 때 자연스러운 나다운 포즈를 취했다. 아이들이 서로 한번 시선을 교환하더니 한다는 이야기가.

"손가락을 브이자로 해주세요."

어. 어.

아이들은 신이났다.

"나만 혼자 찍은 사진 말고 너네 같이 한 장 찍을까?"

"좋아요~!"

아이들은 내 곁으로 모여든다. 모두들 손가락을 브이자로 하고 있다. 난 어릴 때 사진에 손가락 브이자 하는 것 굉장히 싫어했는데, 소풍 때 사진마다 보면 나 빼고는 모두들 손가락을 브이자로하고 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아이들은 또 다시 달려간다. 나도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걷는 법이 없구 복도나 운동장 영동랜드를 뛰어다니곤 했는데.. 아이들은 어딜가나 달려가고, 뛰어다닌다.

내 볼에 금새 홍조가 도는 것 같다.
아이들은 꽤 예쁘다.
시끄러워서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시끄러울 수 있다는 것도 아이들만이 가진 매력이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그 귀여운 아이들에게 묻고 싶은게 생겼다.

왜.. 나였니?
만만해보였다.. 라는 대답만은 피해주길..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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