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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2004.08.31 03:41

기억의 편린

(*.244.125.167) 조회 수 4633 댓글 4
새벽 2시 반.
혼자다.
잠은 안오고 뱃속에선 어서 소주를 들이라고 아우성이다.
어제 마시다 남은 소주를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알딸딸~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의 편린들이 파문처럼 어른거린다.

나는 8남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랐다.
4남 4녀 중 여섯째.
내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다.
해방둥이 큰 누나와 나는 14살이나 차이가 나고
막내와 나는 11살이나 차이가 난다.
큰 누나와 막내와의 나이 차이는 무려 25살.
동생이라기보다 엄마와도 같은 존재다.
실제로 큰 조카와 막내가 동갑나기다.
엄마와 딸이 같이 배가 불렀다는...
둘째 누나는 남 부끄럽다고 투덜대고...

큰 누나는 장녀로서의 카리스마를 행사했는데
아침부터 잠이 덜 깬 동생들을 깨워서 진두지휘한다.
"1000식아! 니 퍼뜩 안 일날 끼가?"
큰 누나가 결혼할 무렵 나는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실제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서 했다.
아침식사 준비로 인해 차가워진 손을 속옷 사이로 쑤셔넣고 동생들을 깨운다.
"아이고 차바라! 엉가야 내 일나께!"
'엉가'는 '언니'의 사투린데 위의 두 누나가 큰 누나를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서 한 결과다.
큰 누나는 꼬집기의 명수였다.
차가운 손을 솟옷 사이로 집어 넣고 꼬집어대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다.
동생들을 도열시켜 놓고 해야 할 일을 배당한다.
너는 큰 방 쓸고, 너는 작은 방 닦고, 너는 마당 쓸고...
마당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건 항상 내 몫이었다.

내가 어릴 땐 어찌 그리 추웠던지....
새미물(우물물)엔 때가 잘 가지 않아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냇고랑(시내)으로 빨래를 갔다.
둘째 누나는 이 빨래하기가 고통스러웠던 모양으로 이렇게 투덜대곤 했다.
"우리 엄마 계모맞제?"
하긴 요즈음 그 흔한 비닐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으니깐.
하지만 딸들을 이렇게 혹독하게 부려먹는 일은 당시 흔하게 있던 일이었다.
빨래를 하러 갈 땐 항상 동생들을 대동하고 갔는데
물을 먹어서 무거워진 옷을 나눠서 들고 와야 하기 때문이다.
누나들이 빨래방망이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할 때
난 추수가 끝난 논에서 스께(썰매)를 탔다.

썰매타기 중 가장 스릴있는 것은 해빙기에 얼음이 녹기 시작할 무렵이다.
얼음 위로 썰매가 지나가면 녹기 시작한 얼음이 아래로 꺼진다.
우리는 이를 '구름다리'라고 불렀다.
이 구름다리를 통과하면 영웅이 되는 것이다.
아래로 꺼진 얼음 속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산처럼 높아지는 얼음을 헤치고 나와야 한다.
팔 힘이 딸리면 그대로 얼음 속으로 빠지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내 친구 중 썰매를 타다가 얼음에 빠져 죽은 경우도 있었다.
얼음에 빠지면 손으로 얼음을 잡아도 계속 얼음이 깨어지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기란 쉽지가 않다.
아동기의 이러한 무모함은 도처에 널려 있었던 일이었다.

나는 초등학교가 위치한 읍내에서 살았다.
읍내가 아닌 촌에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서 서둘러 아침을 먹어야 한다.
같은 동네에서 학교에 다니는 애들과 함께 등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늦어서 혼자서 학교에 갈라치면 그 날은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
읍내 학생들의 텃세를 혼자서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 너 임마. 일루 와 봐."
....
....
"퍼벅!"
....

김치국물이 흘러 냄새나는 책보따리를 허리에 감고는
눈물을 훔치며 부리나케 달려가는 모습은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이다.
도시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귀에 맴돈다.

이들은 학교를 일찍 마쳐도 먼저 집으로 갈 수가 없다.
형들이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등하교시에 대오를 지어 걸어가는 모습은 이젠 사라진 모습이 돼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 왜 이런 모습이 어른거리지?
나이를 먹었나벼.
술도 오르고...        
Comment '4'
  • 2004.08.31 06:44 (*.227.72.28)
    와...책에서나 만날수있는 좋은 체험을 하셨네여.
    1000식님을 이루고 있는 많은 그림같은일들...
    저는 아빠랑 8살때 산에서 나무해다가 돗단배에다 실고 다른섬으로 팔러다녔답니다.
    요즘 8살 아이들요? 하하하
  • 용접맨 2004.08.31 10:44 (*.167.7.85)
    "야! 너 임마. 일루 와 봐."........그게 나였는데
    "퍼벅!"님들에게 죄셩.......
  • 1000식 2004.08.31 20:55 (*.244.125.167)
    읍내에서 2Km정도의 거리에 차산이란 동네가 있었는데
    차산으로 넘어가는 산모퉁이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동네 꼬맹이들과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데 차산 촌놈들이 지나갔다.
    사소한 문제로 시비가 붙어 실전모드 돌입.
    당연 촌놈들은 개박살났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동네 꼬맹이들이 박살낸 사람이 바로 내가 중학교 때 마음을 두고 있던
    여행생의 친오빠였던 것이다.
    3~4년도 더 지난 일이었는데 내 얼굴을 알아보더군요.
    아으으으~ 운명의 장난이라니.....
  • 아이모레스 2004.08.31 21:14 (*.158.12.188)
    하하하 용접맨님은 그러구두 남을 것 같당!!^^
    천식님은 저랑 비슷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네요...
    내용들은 같을 수 없지만...
    정말로 책보다리끼고 뛰어갈 때 벤또(미안함당... 그래도 제 기억 속엔
    도시락이란 말은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전... 5남매의 막내... 위로 누나 둘에 형둘... 큰형과 작은 형 그리고 작은형과
    제 사이에 있던 형들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는군요...

    저도 가끔...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 때 생각이 납니다...
    부족한 거 투성이였지만... 지금보다 아름다웠던 게 참 많았던 거 같아요...
    봄이되면 복사꽃 살구꽃이 만발해서 벌들이 날라다니는 소리가
    거짓말 좀 보태면 비행기 소리보다 크게 들렸던 거 같아요...
    아마도... 그래서 아날로그가 디지탈보다 따뜻하게 들리는건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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