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에게

by 으니 posted Aug 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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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시인이었는데. 잊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시간이 너무나 오래 흘러버렸다. 손을 뻗어 시집을 꺼내어 언제나처럼 책의 윗 등에 살짝 앉은 먼지를 불어내고, 먼지를 먹지 않으려 훅 불자마자 얼굴을 돌리고, 시집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그 모든 시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 놀라움, 오싹함, 끄떡임이 한꺼번에 내게 몰려와서 나는 잠시 흥분했지만 이내 피곤해져버렸다. 하지만 시집을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었다. 눈이 저릿저릿한 것이 풀리면 좋겠단 생각을 하며 시집을 이리저리 보았다. 먼지! 아까 다 불어낸 것이 아니었다. 몇안남은 제끼리끼리 엉켜 책 등에 다닥다닥한 먼지를 보니 눈에서 저리던 것이 온 몸으로 말릴 새 없이 번져나갔다.

어느 날은 그 어깨에 앉은 먼지가 되고 싶다.
사랑은 하찮은 것을.. 그리고 그 다음이 뭐였더라.

우린 곧잘 인생이 무상함을 이야기할 때 먼지에 비유한다. 먼지는 그렇게 아무데나 떠다니고, 아무곳에나 앉았다가, 불면 날아가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앉은 먼지, 하필이면 왜 여기에 눌러 앉았는지. 왜 훅 부는 입김에 날아가지도 않고 붙어있는지. 아니 그 보다 더 먼저, 그 가벼운 먼지가 어찌 이리 오래도록 한 곳에 앉아있을만큼 무게를 획득했는지.. 결코 먼지는 가볍지 않다. 하찮은 것을.. 견디게 한다였던가, 하찮은 것도 기쁘게 한다였던가, 그 뒤는 기억나지 않지만.. 쉽게 날아갈 수 있는 먼지가 어딘가에 내려앉을 때는 충분히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다시금 작은 것에 애착이 생겨난다.
마른 시선이 다시 한 점 한 점에 머무르기 시작한다.
가벼운 몸을 있는 힘을 다해 내리누르고 버티는 먼지처럼
지금 이렇게 사력을 다해 나 견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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