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것

by 으니 posted Jul 1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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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영화 "셰인"의 한 장면, 독립기념일 축제날, 준비가 다 된 마차에 두 남자가 올라타고 있다. 스타렛의 부인인 마리안을 기다리는 것이다. 한참끝에 마리안이 폭이 넓은 드레스를 살짝 걷어들고 활짝 웃으면서 걸어나와서는 오래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식의 인사를 센스있게 건낸다. 스타렛은 옆자리의 셰인을 돌아보면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내 말을 들으라구. 기다린 보람이 있는 여자랑 결혼하라구.

글쎄, 그 파티 드레스가 웨딩드레스를 한땀한땀 수선해서 다시 입은건지 아니면 마리안의 등장장면에 스타렛이 자랑스러운 만큼 셰인도 남몰래 가슴이 설레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는 여자랑 결혼하라구. 하는 대사만큼은 지금도 그 발음까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참으로 관대하다. 이삼십분 늦는것쯤이야 아예 감지 불능, 두시간 세시간정도 기다린 것은 그저 웃어버리고 하루종일도 기다려보기도 했다. 물론 기다리는 시간동안 혼자서도 할 놀이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만큼이나 내가 많은 친구들을,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게 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약속시간에 제대로 닿는 법이 없었고 다음번엔 늦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또 늦고 또 늦었다. 미안해 내가 밥 맛난것 살게, 라든가 이거 챙긴다구 늦었어 이러면서 생뚱맞은 선물을 건내는 것도 한두번. 그들은 어쩌겠어, 내가 기다려야지 하는 자포자기의 상태로 이르던가, 본인이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아예 말을 하지 않거나, 내 버릇을 고쳐보겠다고 성질을 피우다가 그보다 더한 내 성깔에 그저 입을 다물거나 했다.

그리고, 그런 일상적인 것 말고도.. 내가 기다리게 한 많은 것들..
신중함이 아니라 사실은 옹졸하고 용기없었던 것.. 사실은 두려웠던 것..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한 것.. 미루어두고 합리화했던 것.. 이 모든 것들에게 사람에 세상에 나에게 용서를 구한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것, 그 기다린 보람이란 결국 사랑이다.
그 친구에 대한 애정이 기다림의 시간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고 화를 낼 것도 거두어들이게 만들며 다시 손잡고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나가도록 만들어버린다.

어쨌든 기운내야만한다.
우리 인생,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어떤 순간에, "정말 당신을 기다린 보람이 있군" 이란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참고문헌 : 으니(2004,c) 누군가를 기다릴 때 혼자서 할 수 있는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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