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뜨, "영감의 근원은 화장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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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크게 당하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때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지니고 있는 불안이다. 돈 한 푼 없이 불란서 식당에서 해산물요리를 시켜먹고 기막힌 맛을 음미하는 중 혹시 어금니에서 진주가 씹히지 않을까 하는 생활태도로 지금껏 살아온 내게 무슨 불안이 있겠냐마는, 저 한 문장은 분명히 이따금 내 머리속에 출몰하며 나를 괴롭힌다.
왜냐하면.. 말했듯 마른하늘에 복벼락 떨어지기 기대하는 나의 방만한 생활태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 인생이 꽤나 잘 풀려왔기 때문이다. 하기야, "인생"이 꽤나 "잘 풀려왔다"고 하기엔 좀 덜 산 인생이다. 인생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 공부해오면서 방만하고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짤리지 않고 학생신분을 유지한다는 것 정도.. 하지만 또 공부를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 "이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막판 벼락치기에 능하여 2-3%의 뇌세포 가동률을 20-30%로 끌어올리며 마감 전야를 불태우는 나는(은근히 이것을 자랑삼아 방만한 학교생활을 정당화하곤 했더랬다. 이봐, 그래도 내가 언제 할 것을 안하는 것 봤어? 하긴 다 하잖아?) 나의 이러한 습관이 아빠를 닮은 것이라 늘 변명해왔다.
아빠? 내일 쓸 원고 준비 다 했어?
아니..
어떻게 해? 일곱시간밖에 안남았잖아.
다해.. 걱정마.. 다해.. 드르렁 쿨..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아이에게는 절대 이런 습관을 물려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위험유전자를 중화시킬 수 있는 매우 성실한 사람을 만나야하지 않겠는가 늘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그는.. 놀라운 학점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집에 웬 졸업가운을 입고 뭔가를 높은 사람에게 건네받는 사진이 있길래, 와.. 오빠네 학교 좋다. 저렇게 졸업장을 일일이 주는거야? 왜 우리학교는 사무실에서 찾아가라구 할까 재미없게~! 하고 종알대는 나에게 그는 최대한 빼면서.. 그러나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응. 나 우등졸업했잖아.. 라고 해서 내게 충격을 주었다. 그래.. 드디어 만난거야! 성실한 학습태도와, 그에 따른 풍요로운 결실! 나의 악성 유전자를 중화시킬 수 있는! 막판 땜질로 간신히 졸업한 나의 우스운 학점과는 앞자리가 다른 그의 우수한 학점! 그것은 단순히 숫자의 문제를 넘어서서 인생의 기본 자세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빠.. 어디야, 왜 전화가 안돼?
어.. 내가 오랫만에 선생님과 식사 좀 하고 술 좀 했다. 일찌익~ 들어갈~게~
전화를 끊으면서 난 생각한다. 핸드폰에 시간 안나오냐. 열두시가 일찍이게.
오빠.. 오늘은 일찍 온다며.
하.. 요즘 계속 저녁에 일이 많네.. 오늘은 @%*?!#^$..
그래.. 알았는데.. 이번 주말이 오빠 논문 마감 전 마지막 주말인거 알지?
그럼.. 무슨 일 있더라도 주말에는 다 완성해야지.
그래.. 토요일날 나도 공부할 거 가지고 학교로 갈게.
오빠.. 이것봐.. 오늘 하루종일 공부하려고 이렇게 바리바리 싸왔어. 전자사전도 갖구 왔지.. 오빠?
... 거 참.. 이상하게 피곤하네, 참.. 몸이 예전같지가 않아. 오늘 도저히 공부가 안된다. 영화나 한 편 볼까..
오빠!!
결국 그는 토요일날 한다는 공부는 하지 아니허고 영화 한 편 보고 집에 드러누워 깎아다주는 과일을 먹고 때아닌 딸기 타령을 하고 최근 열심히 듣지 아니허던 음악까지 한 두세장 전곡감상해준 후 배를 두드리며 잠들었다.
일요일날.. 나는 그를 버려두었다.
멋있지 않냐? 오빠가 드디어 논문에서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 아니냐.
쓰긴 다 썼어?
그럼.. 결론까지 다 썼지.
뭐야? 다 썼어? 어제까지만해도 서론만 있었잖아!
다 썼지.. 그러니까 말이야.. @(#^$!@*^$! *($&%@(!*^&
그래.. 논지는 이해가 잘 간다.. 정말 대단하군.. 하루만에.
그러게.. 감사할뿐이지.. 막판에 이렇게 늘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이.. 크핫핫.
나는 그의 "구조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브리핑을 들으면서..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본 유키 구라모토의 인터뷰 기사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Q : 가장 큰 영감을 얻는 것은 언제입니까?
A : 음반제작사로부터 독촉을 받을 때죠.
언젠가는 크게 당하지 않을까.. 라는 불안을 이제 "두 배로" 느끼고 있던 나.. 생각을 고쳐먹는다. 역시 영감의 근원은, 화장실이 아니라 촉/박/한/ 마/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감에 당하면서.. 우린.. 크게 당하는 것을 피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너무 죄책감 갖지 말자.. 공부가 어디 연구실에서만 되는 것인가!
... 10년 후
그들 가족은 처음 가족동반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여행 떠나기 전날 밤에서야 그녀는 자기 짐을 꾸린다.
당신 여권은 챙겼어요?
몰라.. 늘 두던 데 있겠지.
얘들아, 너희들은 짐 다 쌌니?
형.. 엄마가 짐 다 쌌냐는데?
엄마.. 어차피 내일 오후 비행기 아닌가요?
엄마! 공항까지 몇시간 걸려요?
왜?
그래야 짐싸기 시작할 시간을 알죠.
...
언젠가는.. 크게.. 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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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을 만들 때는 대개 아이들이 국민학교 3학년쯤 이라는군요... 왜냐하면... 그 때쯤 선생님이 숙제로 가훈을 적어오라 한다나 어쨋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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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샌님도 항상 발등에 불떨어져야 작업에 들어가신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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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은 영감의 원천이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게을러서...
평소에 잠재되어 있던 생각이나 기억이 원고 마감에 임박해서 잘 떠오르거든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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