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낡은 공책...

by eveNam posted Oct 2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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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교 2학년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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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제사로 아버지와 나는 시골에 내려갔다.

원래는 맞이인 아버지가 제사를 지내야 하지만
서울생활을 어려워 하시는 할머니 때문에(사실 무서워 하신다 ^^;)
집안 제사는 시골에 계시는 작은 아버지께서 계속 모셔왔다.

제사를 마치고 아버지는 집안 어른들과 당숙부집에서 술을 하셨고...

나는 어김없이 작은 아버지의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작은 아버지는 이렇게 집안식구들이 모이거나 하면 늘상...
아버지와 형제들의 어렸을적,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와 사촌동생들에게 항상 열심히 살라고 당부 하시곤 했다.

피곤하셨는지 곧 들어가 주무셨고...

거실과 겸용인 넓은 안방엔...
할머니와 나, 그리고 사촌동생이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내얼굴을 잠시 보시더니 방 한구석에 있는 오래 되고 낡은...
이젠 색이 바래서 주색이 거의 황색으로 변해 버린 장으로 가셨다.

여기저기 뒤적이시더니 조그만 보따리를 가지고 오셨는데,
보따리를 풀자 아주 오래되 보이는 책 한권이 나왔다.



실로 단단하게 엮어져 있는 두툼한 것이었는데...

표지에는 펜과 연필로 그린 우리나라 지도가 있었고
강, 산, 도로, 철로, 지명 등이 세밀하게 표시되 있었다.

손으로 그렸음에도 지도는 너무 정밀했다.  

표지를 넘기자 붓으로 쓴 한자들이 하늘 天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페이지에 이끼 也까지 천자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누런 갱지가 거므스런 회색으로 변해 있었으니
꽤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가 있었다.

글자를 쓰고난 빈 여백엔 따로 글 연습을 했는지
조그만 글자들로 빈틈없이 까맣게 채워져있었다.



할머니는 이게 무엇인지 아냐고 물으시더니 이야기를 계속 하셨는데...
주름진 얼굴엔 약간 발그레한 기운에... 입술이 약간 떨리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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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어렸을 적엔...
하루 한끼도 못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학교갈 나이가 되어 면에 있는 소학교로 보냈는데...

월사금을 내지 않으면 계속 다닐 수 없으니
어린 아버지에게 월사금을 준비해 오라고 했다고 한다.

하루끼니도 제대로 연명을 못하는데, 돈이 있을리는 만무하고,

할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학교를 찾아가 나중에 갚을테니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월사금을 못내면 안되니 나중에 오라고 했고
아버지는 겨우 일주일 정도를 다녔다고 한다.



근데...

넘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 할수 없는 아버지를 보며...
할머니는 궁여지책으로 근처 서당의 훈장님께 부탁을 했고

그 후 아버지는 1년간 서당에서 한자 공부를 하셨는데,

할머니는 없는돈 있는돈 죄다 모아 붓과 먹물, 그리고 갱지를
아버지께 사주셨고 그걸로 글연습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 보는 공책이 그 때 공부를 했던것이라며...



"저걸 소학교만 마치게 했어도 이렇게 고생하지 않을텐데..."

... 하시며 눈시울이 금새 붉어지셨다.



공책을 찬찬히 살펴보니...

한자한자 정성스레 글연습을 하고 종이 한장이라도 아끼느라
빈곳에 다시 또 글을 써넣는 어린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할머니는 공책을 보따리에 잘 싸서 다시 장에 넣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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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떠나신지 어느덧 두해가 지났다.






얼마전에...
할머니의 생신을 모시러 작은 아버지댁을 다녀왔다.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지만 할머니는...
우울증이 심해지셔서 작은 어머니의 맘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날... 생신을 잘 보내 드리고,
방안에 조용히 앉아 계신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할머니께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신

아버지의 낡은 공책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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