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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Mania

한국어
(*.161.86.167) 조회 수 10509 댓글 29
  몇 일전에 쓴 제 글을 다시 정리해서 적어 봅니다. 내용 중 일부(윌리엄 제임스의 가설)를 추가 했고요. 제임스의 가설은 중요한 얘기이므로 꼭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A4지 20여장의 꽤나 긴 장문인데 바쁘신 분들은 애당초 읽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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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주의를 생각할 때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아요. 우리는 다음과 같이 육식주의를 옹호하곤 합니다.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해 봅시다.

의견 : 자연계는 원래 약육강식의 세계다. 고로 포식자뿐만 아니라 피 식자의 삶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답변 :
좀 생뚱맞은 답변일지 모르겠는데.....예전에 홉스라는 철학자가 뭐라고 했던가요. '국가'라는 리바이어던 같은 존재가 없으면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 즉 '자연 상태'로 돌아갈 뿐이라고 했던가요?
여기서 '자연 상태'란 뭡니까.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법칙이 통용되는 '자연'그대로인 상태죠(그래서 홉스는 다수의 지역 깡패들이 힘없는 다수를 괴롭히게 두느니 차라리 괴물 같은 군주일지라도 그의 지배를 받게 하는 것, 즉 '여럿'의 폭력보다는 '하나'의 폭력을 견디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군주제를 옹호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는 원래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건 존재하지 않죠?

인간이 원래 잡식동물이었고, 양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니까 인간이 그에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면 윤리란 왜 존재할까요? 내가 배부르게 먹기 위해 타인에게 강도짓 하거나 권력을 이용해 땅 투기를 하거나 가난한 사람들 내쫓기 위해 용역깡패들 고용하는 게 왜 정당화 되지 못하는 거죠?

이에 대한 어떤 이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원래 윤리라는 건 없고, 단지 불필요한 살육을 피해 인간들 상호간 '사회계약'한 것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이 말인즉슨, '자연 상태'에서는 힘없는 다중이 힘 있는 깡패들로부터 손실을 입을 확률이 '문명 상태'에서 보다는 훨씬 높으므로 피차 해를 입히는 행동을 법과 권력으로 제한하자고 '사회계약'했다고.

이 논리에 의하자면 원래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가치들은 그냥 배부른 사람들이 만든 거죠?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이 단순히 사회계약의 부산물일 뿐인 거죠?
그렇게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라면 우리가'자연 상태'에서처럼 행동-예컨대 성욕에 끌리는 대로 강간을 한다든지, 식욕에 끌리는 대로 약탈을 하든지-하는 건 도덕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 단순히 '사회계약'을 파기한 것에 불과한 거죠?

인간이 육식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바로 '멍청한(이성이 없고 본능만 있는) 동물에 비해 이성적인 인간이 월등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 봐요.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합니다. 유에프오를 몰고 가공할 과학기술로 지구를 정복합니다. 이들이 보기에 인간은 자기들 별의 애완동물 정도의 지능밖에 되지 않아요. 이들은 자신들의 '초-이성'을 근거로 '이성적'인 것에 그치고 마는 인간을 포식하며 또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왜? '자연적'으로 우월한 포식자인 내가 월등한 피 식자인 인간을 잡아먹는 게 뭐 어때서?" (이런 비슷한 얘기를 언급한 작품이 있어요. <기생수>라는 일본만화죠.)

이 때 인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외계인이 인간을 사육해서 잡아먹는 행위는 훌륭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키워져서 잡아먹히는  그 생명체들의 삶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잡혀 먹힘으로서 외계인을 이롭게 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이렇게 반박할 거예요.
"당연히 우리 인간 입장에서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미국 남북전쟁시의 남군대표 : "저는 백인이 흑인을 잡아서 노예로 부려먹는 행위는 훌륭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잡혀서 노예로 부려지는 그 생명체들의 삶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노예로 부려짐으로서 백인을 이롭게 하고 있으니까요."

이 글의 '백인'대신 '일본인'을, '흑인' 대신 '조선인'을 넣어도 말 되죠?
'착취자'의 논리는 한결 같아요. 바로 "착취당하는 타 존재는 착취자의 이득을 위해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

물론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할 겁니다.
"흑인이나 조선인은 '같은' 사람 아니냐? 어떻게 짐승들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왜 위의 경우는 '자연의 논리'가 아닌 '(정치)도덕의 논리'를 따르면서, 인간의 육식주의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짐승의 논리' 혹은 '자연의 논리'를 따르는 거죠? 이런 것을 도덕적 상대주의라고 하지 않을까요?
"육식동물이 없다면 초식동물들은 살판 날 것 같지 않지만 초식동물들이 개체수가 자연이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 결국은 초원은 황무지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의 육식도 정당화 된다는 얘기인데, 아시다시피 짐승들은 도덕/윤리의 주체가 아니죠? 오직 인간만이 도덕/윤리의 주체죠? 도덕/윤리의 주체인 인간이 짐승의 법칙으로 정당화하려는 건 뭔가 비이성적으로 보여요.
이런 견해를 저는 '인간중심주의'라고 부릅니다(피터 싱어라는 철학자는 '종차별주의'라는 말을 쓰기도 해요). 물론 '인간중심주의'라는 말은 르네상스 시대의 그것을 말하는 건 아니고요.

마크 롤렌즈 저의 <동물의 역습>에서 편집자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음미해 보아요..

"...통증의 정도가 같다면 사람보다는 어쨌든 동물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해부학적 차이는 통증의 도덕적 무게를 덜어주거나 통증을 무시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당신이 어떤 종(種)에 속하는 지 알 수 없는 낮선 상황에 처해 있다고 가정해보자. 다시 말해 기묘한 '종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발이 몹시 아프다.
'음....내가 인간이라면 지금 이 통증은 아주 불쾌한 상황이며, 누군가 내 고통을 덜어 줄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내가 원숭이라면 이 통증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며, 다른 이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할 것인가? 터무니없는 일이다. 잡아먹히거나, 산 채로 해부당하거나, 사냥에 쫓기는 경우는 어떨까? 역시 모순된 상황이라는 점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어떤 인종에 속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고 노예제의 윤리에 대해 판단해보라.
'내가 백인이라면 누군가에게 예속당하는 상태를 엄청난 치욕으로 느끼겠지만, 내가 흑인이라면 노예로 사는 것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아닐 것이다. 나면서 결정되는 노예 신분의 불행은 당신이 어떤 인종에 속한다한들 뼛속 깊이 느끼는 고통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통한 추론이야말로 진정으로 역지사지라는 오래된 도덕률을 지키는 방편이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을 어떻게 남에게는 당연한 듯할 수 있단 말인가? "

이런 비유는 아마도 <정의론>의 존 롤스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가설에서 빌려온 듯해요. 예컨대, 성차별을 옹호하는 남성인 당신이라면, 여성이 사회적으로 차별 당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입장을 가지겠지만, 만약 당신이 아직 태어나기 전-그러니까 아직 성별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가정한다면(그러나 판단의 의식은 있는) 당신은 성차별주의를 옹호할 수 있겠느냐는 거죠. 다시 말해 당신이 '무지의 장막' 뒤에 있어서 당신이 앞으로 어떤 성(또는 종)이 될지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편재되었으면 좋겠느냐는 거예요.

인간에겐 버려야 할 태도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무슨 무슨 중심주의'적 태도죠. 중심주의적 태도는 항상 우월주의 또는 배타성을 전제합니다. 예컨대 "클래식음악이 음악의 중심이고 나머지 대중음악이나 제3세계 음악은 쓰레기다"라는 것.

서양의 백인 중심주의가 한 일은 흑인 착취였죠?
예컨대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으로 간주하라"고 말한 도덕주의자 칸트조차도 흑인에겐 예술적 감성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백인들 다수가 얼마나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안했는지(물론 안 그런 이들도 있었겠지만)는 안 봐도 뻔했어요. 흑인을 인간으로 봤다면 거래시장에서 흑인의 발목에 쇠고랑을 채우고 돈으로 거래하거나 또는 도망갔다는 이유로 발가락을 도끼로 내려치지는(알렉스 헤일리 <뿌리>) 않았겠죠?

서양의 기독교 중심주의가 한 일은 십자군 전쟁 같은 부도덕한 타 종교(인) 박해였죠? 십자군 전쟁을 옹호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을 보고 뭐라 했어요? "십계명의 신 이외의 잡신을 섬기는 이단자, 혹은 사탄의 후계자들"이라는 논리로 그들의 약탈을 정당화했죠?

서구 기독교의 서양인들 관점에서 흑인은 사람이 아니었고 이단 신봉자는 사탄의 아들이었어요.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이라는 정당화로 유대인을 절멸하고자 했고요. 역사의 비극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안 봐도 자명합니다.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아니냐는 소리가 들리는 군요.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타 존재-살육되는 동물들-의 고통에 눈 감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거겠죠. 실제로 피 식자인 동물들에 대해 우리는 철저한 '타자 화' 혹은 '대상화(거리두기)'를 취하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맛있는 스테이크를 보며 피 흘리는 소를 상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그리고 해마다 안락사 당하는 유기 견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인식하며 사는 분들은 별로 없죠?)

초식동물의 개체 수 급증을 저지하기 위해 육식동물이 존재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이 얘기가 인간의 육식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면 거기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어요.
외려 인간의 지나친 육식 때문에 초식동물인 소의 개체수가 급증 한 것이 팩트 이니까요. 제레미 리프킨이 <육식의 종말>에서 이런 얘길 했죠?

"1984년 날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 가던 에티오피아의 사례를 보자. 그 당시 에티오피아는 일부 경작지를 아마인 깻묵, 목화씨 깻묵, 평지씨 깻묵을 생산하는 데 할애했다는 사실을 대중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 작물들은 가축 사료로 영국을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에 수출할 목적이었다. (만일 그 토지에 인간을 위한 곡류가 심어졌다면 에티오피아인은 굶주리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제 3세계 토지가 오로지 유럽의 가축 사용에 필요한 사료를 재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중략........농업 분야에서 대풍작을 기록했던 1950년에서 1985년 사이에 미국과 유럽에서 2/3나 증가한 곡물 생산은 사료 곡물 재배에서 이루어졌고, 그 중 대부분은 소 사육에 사용되었다. 곡물 재배에 사용되는 1에이커의 토지는 육류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의 토지보다 5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다. 콩류(대두, 완두콩, 렌즈콩)을 심으면 10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하며, 잎이 많은 야채를 심으면 쇠고기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의 토지에 비해 무려 26배나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공장형 농장'의 존재 이유는 다 아시겠죠. '지나친' 육류의 생산이 목적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단백질 이상의 것을 불필요하게 생산하는 이유는 새삼스레 말 할 필요도 없이 돈 벌이 때문입니다(부시 전 대통령이 얼마나 팔아치우려고 애쓰는지 보세요). 그 돈벌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사람들의 지나친 육식이고요. 그래서 동물학대가 자행되는 '공장'에서 과잉생산을 합니다. 그 결과가 환경파괴고, 남반구의 기아입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백인들 돈 벌이 때문에 동물들이 불필요하게 도축되고 아프리카 인간의 개체수를 걱정해야 할 만큼의 인간이 죽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철학자 피터싱어는 '동물학대의 진짜 주범은 맛있는 고기를 탐하는 우리 모두'라고 주장했고요. 이런 견해에 의하면, 우리의 '육식'과 동물학대가 반드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겁니다.

채식만으로는 건강을 지키기 어렵다는 얘기도 이미 과학자들에 의해 깨진 걸로 알고 있어요.
심리학자 멜라니 조이의 말을 들어봅시다.

"190년대 초에 미국인들은 하루에 100g이상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고 들었다. 더 가깝게 1950년대에만 해도 건강을 생각한다면 단백질 섭취를 늘려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오늘날....많은 미국인들은 필요량의 두 배나 되는 단백질을 섭취한다....과다한 단백질 섭취는 골다공증, 신장질환, 요로결석, 그리고 일부 암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사람들의 근육과 기타 체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지고, 아미노산은 그들이 먹는 단백질에서 나온다. 콩, 렌즈콩(편두), 곡류 및 채소를 골고루 먹으면 필수 아미노산을 모두 얻을 수 있다. 한때 단백질의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여러 종의 식물성 음식을 함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최신 연구 결과를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단백질을 충분하되 과다하지는 않게 섭취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동물성 식품을 끊고 곡류, 채소, 콩류와 과일을 먹으면 된다. 다양한 식물성 음식을 체중 유지에 필요한 만큼 먹는 한 단백질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동물은 오로지 본능대로만 행동하니까, 즉 이성이 없으니까 종의 우위를 차지하는 인간이 포식자가 되는 건 당연하다는 주장도 어떤 면에서는 옳지 않아요.
설령 본능대로 행동할 뿐이라고 해서 살육에의 정당성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예컨대 정신이상이 심화된 어떤 인간이 본능대로만 산다고 해서 우리들 소위 '정상인'들이 그들을 살해할 정당성을 얻는 건 아니죠?(이는 피터 싱어의 견해입니다.)

누군가 고양이나 개를 잡아다가 몽둥이로 두들겨 팬다고 합시다(실제로는 이 보다 더 잔혹한 일이 많아요. 영화 '쏘우'를 고양이에게 흉내 낸 반사회적 인격 장애인도 있었죠?). 이를 본 여러분들은 도덕적인 불편함을 당연히 느낄 거예요.
그런데, 개나 고양이나 소나 돼지 입장에서는 도축되는 것보다 차라리 맞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물론 '쏘우'에서의 꼴을 당하느니 그냥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소는 언어가 없기에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다고 반박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개체를 유지하려는 생존본능은 실로 매우 막강하죠?  
'살육'은 '어쩔 수 없이' 정당화되고 '(살육이 아닌) 폭력'은 동물 보호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논리가 좀 이상한 건 아닐까요?

이상, '논리적인'얘기였고요,
실제로 저는 베건이 아닙니다. 단지 '소의 사체'는 안 먹고요, 나머지 동물들에 대해서도 엄청 자제하는 중이예요. 단지 저는 논리를 말하고 싶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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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글엔 위의 내용과 중복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하여 읽어 주시길.


1)들어가며

이 글은 다음의 글에 대한 답변으로 인해 쓰인 것이라는 점을 전제합니다.

홍길동님 : "조물주의 악취미인지 모르겠으나 포식 자체가 자연의 섭리요 생태계가 균형을 이루는 원리이죠. 포식 대상이 동물일 수도 식물일 수도 있고 이 양자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동기로만 본다면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게 죄라면 자연의 섭리와는 하등 상관없이 오직 즐기기 위해 오랜 수령의 생나무를 잘라 악기를 만드는 게 더 큰 죄이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과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는 거나, 소나 돼지를 만들어 놓고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니 악취미도 이런 악 취미가 없어 보입니다.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돼지는 먹어서는 안 된다. 이런 짐승들은 다 부정하므로 먹지도 말고 그 사체를 만지지도 말아라. "-레위기 11장 7~8절

"그리고 물속에 사는 고기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너희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레위기 11장 9~10절

아, 물고기 이외의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느님이라는 최고 권위를 내세워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에요. 외려 전 '부정한 짐승'을 언급하는 것에 위화감을 갖고 있어요(감히 야훼께!)

물론, 홍길동님께서 말씀하시는 '조물주'란 기독교의 야훼의 의미라기보다는 '자연 법칙'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긴 합니다.
어쨌든 홍길동님의 의견에 답하기 위해 저는 이런 질문을 드렸어요.

"1.태어난 지 한 달여 밖에 되지 않는 강아지를 상습적으로 잡아먹은 사람이 있다.
2.또 상습적으로 올무나 덫을 설치해 야생동물을 상습적으로 포획하는 사람이 있다(야생동물 중에는 멸종위기랑 전혀 관련 없는 동물이 태반이라고 가정하자).
이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물을 수 있다면 '논리적으로' 왜 그런지 설명해 주십시오('원래' 인간은 그렇다는 설명은 논리가 안 되죠? 인종 차별주의자나 성 차별주의자들도 흑인은 '원래'노예 습성이 있고 여자는 '원래' 열등하다고 말하니까요)."

이 질문에 홍길동님은 예상대로 이렇게 답변하셨어요.

홍길동님 :
견해 1 : "시장에 고기가 넘치는 세상에 그 인간 참 별종이네 할 수는 있겠지만 도덕적으로 비난할 이유는 없네요."
견해 2 : "질문의 전제가 성립이 안 될 것 같네요. 여전히 고기는 육해공 전부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세상에 야생에서 올무로 동물을 잡는 것은 고기를 섭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약재나 다른 상품가치 때문에 잡는 것이고요, 저걸 허용하면 기존의 개체수가 많은 동물들도 금방 씨가 마를 테니까 미리 금지해야지요. 그러나 호주의 오지에 사는 원주민이 고기를 먹기 위해 매일 올무를 놓건 부메랑으로 때려잡건 도덕적 책임이 관련되지는 않겠지요?"



2) 자연의 섭리는 도덕적인가?

먼저 견해 1에 대해서 논합니다. 왜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 종을 잡아먹는 것이 허용되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 답변을 하셔야 합니다. 위에서 홍길동님은 "포식 자체가 자연의 섭리요 생태계가 균형을 이루는 원리"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자연의 섭리를 따르면 현재 우리가 안 된다고 규정하는 모든 비도덕적 행동도 정당화 됩니다. 예컨대, 문화인류학적으로 봤을 때 남자의 '다수의 여성을 성적으로 취하려는 성향'은, 의학이 뒷받침되지 않아 항시 자연사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는 원시사회의, 가능하면 후손을 많이 남기려는 유전자의 특성에 기인한다고 해요. 그렇다면 소위 문명사회는 왜 정부나 첩을 두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할까요? 의학이 발달했으니까? 물론 이런 대답을 얻으려고 질문을 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질문을 던져 봅시다. 원시시대에 남성이 자신의 욕구가 이끌리는 대로 자신보다 힘이 없는 여성을 강간(물론 당시에는 강간이라는 개념도 없었겠지만)하는 건 자신의 본성('자연 상태'의 법칙)에 이끌리는 정당한 행동이 아닐까요? 고로, 여학생을 윤간한 고려대학교 의대생들은 단지 '자연 법칙'에 순순히 따른 것뿐이라고 항변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래요. '자연 상태'와 인간의 '도덕'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컨대, 남성의 공격성은 수렵생활로 인해 유전적(자연)으로 각인되어 있다죠? 그래서 원시시대는 말 그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였어요. 그런데 그 폭력성을 현시대에 마음껏 누리는 건 부도덕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도덕'은 그러한 '자연 상태, 혹 자연법칙'을 거슬러 존재합니다. 유전자에 각인된 '이기심'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해서, 우리는 타 존재를 '목적' 이 아닌 (내 이익을 취하기 위한)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정녕 정당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 그게 '도덕'은 아님은, 구태여 칸트를 읽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육식주의'의 정당성 여부를 묻는 논지에 대해서는 '자연 법칙'이라는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 인간의 육식의 정당성에 대해 '자연법칙'에 반하는 '이성의 법칙'으로 논증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법칙이 원래 그렇다'는 답변 이외에는 하지 못해요. 이미 언급했다시피, 성차별주의자들도 그런 논리(?)를 펴죠? 여자는 '원래'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철학자이자 동물보호 운동가인 피터 싱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18세기에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인 조나단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빈곤 여성이 키우는 아이들의 ‘과잉 현상’을 다룰 ‘온당한 제안’을 했다. ‘나는 한 살 배기의 건강하고 잘 양육된 아기야말로 가장 맛있고, 영양 많고, 건강에 좋은 음식임을 확신한다. 끓이거나, 굽거나, 찌거나, 삶거나 다 좋다.’ 이 제안은 물론 영국의 아일랜드 정책을 풍자하기 위한 농담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에서 우리가 충격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실은 어떤 감각 있는 존재를 고깃덩이로 만드는 일에 그 존재의 높은 이성 능력 같은 점은 문제시 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아가 그런 능력을 갖추게 될 잠재력도 중요한 도덕적 지위를 주장할 수 없다. 심각하고 치유 불가능한 지능 장애를 타고난 사람을 죽여서 요리한다면, 우리는 똑 같이 충격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 종 가운데서 지능, 이성적 능력, 자기 인식 능력 등을 두고 그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쪽을 앞서는 쪽이 마음대로 착취할 수 없다고 하면, 어째서 다른 종을 착취하는 일을 같은 이유로 정당화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닌 동물을 착취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견실한 도덕적 기반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그 다음, '올무'를 사용한 동물의 포획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포획된 동물을 음식으로 사용하느냐, 약재로 사용하는지는 중요한 얘기가 아니에요. 어쨌든 두 경우 다 '먹는' 것 아니겠어요?
홍길동님은 올무나 덫 사용 금지에 대해 개체수가 감소할 수 있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어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홍길동님의 의견엔 누락된 게 있어요. 바로 '연민'이라는 감정입니다. 뉴스에서 흔하게 덫이나 올무에 걸려 고통 받는 동물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경악합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그 경악의 이유가 단순히 "개체 수"가 걱정되어서 그런 걸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물론 이런 분들 대부분은 육식을 하시는 분일 텐데, 논리적 모순 또는 위선이 아니냐하는 문제는 잠시 접어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길동님은 생 후 한 달의 강아지를 잡아먹는 것이나 올무나 덫으로 동물을 잡는 것에 대해 개체 수 급감만 아니라면 상관없지 않느냐하는 답변을 주셨습니다(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드리는 말씀이지만, 육식을 하는 입장에서 이런 답변을 하는 것이 오히려 가식적이지 않고 진솔하다고 말할 근거도 있습니다). 즉, 인간이 어차피 동물을 먹는 한, 살육은 불가피하고, 따라서 고통을 주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라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고전적인(?) 개 도살은 도덕적으로 정당할까요? 나무에 개를 매달아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는 것 말입니다. 지속적인 고통이라는 점에서는 올무나 덫이나 몽둥이나 다름없죠?
뉴스에서 이런 보도가 난 적이 있어요. 살아 있는 곰의 쓸개 부위에 빨대를 꽂아서 틈나는 대로 쓸개즙을 채취 한다는. 이 보도는 '세상엔 이렇게 희한한 일도 다 있다'라는 취지에서 보도한 건 아니죠? 올무나 덫이 정당화된다면 이 행위도 정당화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도덕적 관점에서 우위에 있을 수도 있어요. 쓸개즙 뽑아 먹는다고 해서 곰이 당장 죽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홍길동님께서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에서 위와 같은 행위가 정당하다고 말씀 하신 것은 아니라는 건 잘 압니다. 올무나 덫 같은 건 (서구식으로)문명화된 나라 같은 경제활동이 보장되지 못한 오지의 원주민들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거지요. 부족을 먹여 살릴만한 양의 수렵 양을 확보해야만 하는데, 그들의 지리적 특성을 감안할 때 함정 구덩이나 활보다는 용이한 올무나 덫이 유리하다는 거죠. 다시 말해 그들에겐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한국의 고전적인(?) 주장(朱杖)질은 다른 죽이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육질이 부드러워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잔혹 행위를 하는 것이므로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실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에 대한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길동님은 올무와 덫 사용이 옳은 것만은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관철하기 위해 원주민을 예로 들었어요. 그들이 먹고 살려는 방법이 이것 이외에는 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겠지요. 그런데, 올무 사용의 정당화를 위해 오지의 원주민을 예로 든 것에 대해 저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낍니다. 왜 그런지 봅시다.
‘오지의 원주민’이라는 말엔, 소위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음을 내포합니다. 아, 압니다. 지금 제가 이른바 ‘서구 문명 우월론’이라는 오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요.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문명’의 정의에 대해 ‘서구적으로 계몽된 상태’라고 했다죠? 그러나 이런 의견은 무수한 반박을 불러일으켰어요. 예컨대 레비스트로스 같은 인류학자들은 제3세계의 그들에겐 그들만의 문명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요컨대 문명의 다원화를 긍정하는 게 현 학계의 보편적인(또는 정의로운)태도로 보입니다.

제가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말한 건 그런 ‘서구 중심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고요, 서구의 경제적 삶과 달리 원시적인 수렵, 채취 생활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오지의 원주민들에게 원시적인 수렵, 채취가 그대로 존속했다는 데에는 이견은 없겠지요.

자, 저는 이 글 전반부에서 도덕은 자연 상태(자연법칙)와 반(反)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어요(이타적 유전자니 어쩌니 해도 이기적 유전자가 월등해 보입니다). 즉, 살육은 타 존재의 삶을 말살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적이지 않다고 말했고요. 전 덫으로 고통을 주는 행위의 '도덕적 근거'를 물은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물었어요. 상습적으로 올무나 덫을 설치해 야생동물을 상습적으로 포획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고요. 그 물음에 대해 다시 오지의 원주민 같은 '자연 상태'를 근거로 내세운 건 순환논증에 불과합니다(술주정뱅이에게 "술을 왜 먹느냐"고 물었더니 "잊으려고 먹는다"고 대답합니다. "무얼 잊고픈 것이냐"고 물었더니 "술 먹는다는 사실을 잊고픈 거다"라고 말한 <어린 왕자>에서의 이야기처럼).

이에 대해서는 피터싱어라는 철학자의 이야기로 대신할 수 있겠네요.

“어떤 사람들은 세상사람 모두가 반드시 베건(순수 채식주의자)이 될 필요는 없다면 우리도 베건이 되어야 할 윤리적 의무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른 각도에서는 꽤 쓸 만한 그의 책 <우리는 비약해야만 하는가>에서, 콜린 터지는 세상사람 모두가 베건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 이상, 어느 누구도 그럴 도덕적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산지대나 반(半) 사막지대 같은 혹독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에게 채식주의는 살아남기에 적절한 선택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18세기의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를 들며,'어떠한 윤리 원칙도 그것이 전 세계 사람에게 합당한 원칙이 아닌 이상 진정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그의 명제를  내세운다. 그는 채식주의와 베건주의는 그런 점에서 윤리적 원칙이 될 자격미달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터지는 소위 ‘정언명령’, 또는 최고도덕원칙으로 불리는 칸트의 제 1공식을 언급하고 있다. 이 문장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나의 행동의 원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지 않은 한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터지처럼 칸트를 이해하다가는 칸트의 도덕법칙이란 난센스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 식이라면, 예를 들어 교사가 되는 일은 비윤리적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교사가 된다면, 식량을 생산할 농부가 없어질 테니까. 도덕원칙의 적용을 특수한 맥락에 한정하는 것은 아주 가능하며,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살리려면 자신의 딸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학예회에 절대 늦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겨야만 할 때, 누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베건이 되어라. 자신이 처한 생활환경이 오직 식물성 음식만으로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 환경이 아닌 이상.’
우리는 칸트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거기에 베건이 되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규정할 어떤 단서도 없다고 본다.....”

즉, '자신이 처한 환경이 오직 식물성 음식만으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강아지를 먹는 행위나 올무를 쓰는 행위나 다 부덕한 게 되죠? 그런데 '(자연 상태의)오지의 원주민'을 거론한 건 언급했다시피 순환논증일 뿐 아니라 칸트의 도덕법칙을 난센스로 만드는 일이 될 겁니다.

제가 두 가지 질문을 제시한 건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함 이예요.

1. 어린 동물을 잡아먹는 행위는 정당한가?
2.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잡아먹는 행위는 타당한가?

이 두 가지를 합한 행위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서울 어딘가에서 노부부가 어린 강아지를 상습적으로 잡아먹은 거죠. 게다가 정상적인(?) 방식으로 도축한 게 아니라 그냥 삶은 물에 살아 있는 채로 넣어버린 겁니다. 어린 동물을 잔인하게 잡아먹은 거죠.

그렇다면 올무로 고통을 주는 것과 끓는 물로 고통을 주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런 반론이 가능합니다. 오지의 원주민들에겐 그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이 노부부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고로 노부부의 행동은 비도적적인 것이다, 라고요.
그러나 조금 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자연 상태의 원주민의 처지에는 괄호를 쳐야 합니다. 도덕을 말하고자 하는데 도덕에 반하는 자연 상태를 언급해서는 안 되니까요. 제 질문은 피터 싱어의 얘기처럼 자연 상태를 벗어난 소위 (서구적)문명인들의 태도에 대해 물은 겁니다.
(어쩌면 홍길동님의 "질문의 전제가 성립이 안 될 것 같네요"라는 말씀의 취지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강아지를 먹는 것과 올무를 사용하는 것이 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울까요? 강아지에겐 더 살 수 있는 생명 연장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하고 있는 게 아닌 한, 얼마든지 다른 선택지가 가능합니다. 꼭, 강아지를 먹고 싶다고 하더라도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끓는 물에 산 채로 넣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잔학 행위도 정당화 된다면 우리는 모피를 얻기 위해 편의적이라는 명분으로 너구리의 피부를 산채로 벗기는 행위도 용납해야 합니다.

“올무를 사용해서 동물을 잡아야 약재로 쓰던, 식용으로 쓰던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사냥꾼은 항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변명까지 옹호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계를 위해 용역 깡패 짓을 하는 분의 처지를 걱정해 그들의 행위를 합리화할 수는 없는 것처럼.

혹자에겐 그렇지 아니 한가 봅니다만, 여러 사람들은 강아지를 먹는 것이나 올무를 사용하는 것에 보통 ‘선험적’ 혐오를 느낍니다. 이렇게 말하자니, 왠지 “홍길동님은 보통의 다른 사람과는 달리 연민이 없는 냉혈한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니고요. 저는 이 분이 냉혈한이라서 그런 결론을 내린 게 아니라, 어차피 우리가 소든 돼지든 닭이든 (살육하여) 잡아먹는 입장에서 강아지(올무)만 예외 상황으로 두는 건 어차피 위선 아닌가, 라는 나름 논리적인 판단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보여요(실제로는 아마 강아지를 보면 귀여워하실 겁니다).


3) 도덕적 딜레마

강아지를 먹다니! 혹자에겐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겁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저는 과연 매사에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며 살았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20 여 년 전에 제가 아는 분께서 양계장 운영을 하신 일이 있어요. 우연히 거기에 갈 일이 생겼는데 마침 사육한 닭들을 도살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닭 우리를 가득 실은 봉고차 한 대가 와 있더군요. 그런데 의아한 건 다 자란 닭이 아닌, 소위 중(中)닭, 그러니까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 청소년밖에 되지 않은 닭들을 실어 가는 겁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거야, 다 큰 닭보다 중닭들이 육질이 훨씬 부드러워서 그런 것 아니겠냐."

아니, 어떻게 덜 자란 아이 같은 닭들을....이라고 대번에 몰아 붙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그 분이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닭들에 대한 '공감(철학자 흄에 의하면, 타 존재의 고통을 마치 나의 것인 양 받아들이는 태도를 '공감'이라고 한답니다)'이 전혀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물론 당시의 저는 동물에 대해 어느 정도 '타자 화-거리두기'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겠지요. 버나드 쇼의 말처럼, "아무리 잔혹한 일도 그게 관습이라면 사람들은 용인하게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우리가 차가운 이성적-논리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중닭을 잡아먹는 거나 강아지를 잡아먹는 거나 오십보백보로 보입니다. 비슷한 다른 예를 든다면, 무대에서 비둘기(혹은 박쥐)를 산 채로 물어뜯었다는 록커 오지 오스본의 행동이 산 낙지를 통째로 씹어 삼킨 오 대수(올드 보이)의 행위보다 악랄하다고 말 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차가운 이성적-논리적 판단으로는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 편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왜 그럴까요?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최대한 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생겨먹은 동물일수록 애정을 느끼기 때문일 겁니다. 개는 사람처럼 생겼지만 지네나 거미는 전혀 아니죠? 따라서 지네나 벼룩에겐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낍니다. 중닭을 잡아먹는 행위보다 강아지를 잡아먹는 행위, 또는 낙지를 물어 죽이는 행위보다 비둘기를 물어 죽이는 행위가 더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건 이런 이유일 겁니다.
그렇지만 이는 감정의 문제지, 이성-논리적으로는 이 판단이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인간의 형상과 유사한 동물일수록 동질감을 느낀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인간 중심주의적'사고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지네나 벼룩을 죽이는 것과 강아지를 죽이는 건 도덕적 무게가 동등한 행위가 될 겁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아요. 저 윗글에서 "동물들이 인간보다 이성적 능력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정당화 된다면, 같은 논리로 치료 가능성이 없는 정신지체 장애아를 살해하는 것도 정당화되지 않겠는가?"라는 논리를 기억하죠? 그렇다면, 같은 이야기를 벼룩에게도 적용해야 할 겁니다. "벼룩이 강아지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쉽게 죽일 수 있을까?"라고요. 따라서 애견가가 자신의 개에 들러붙은 벼룩이나 빈대를 잡기위해 프런트라인(외부기생충 박멸용 약)을 치는 행위는 비도덕적인 것이 될 겁니다.
이제 슬슬 딜레마로 인한 정신적 경련이 밀려오는 듯합니다...

여기서 잠시 판단 중지를 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머리를 비운 후에, '따뜻한' 감정으로 현상을 바라봅시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애초에 이곳 게시판에서 누구도 육식의 부당함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애당초 채식 옹호 얘기는 전혀 없었다고 말이지요. 여느 때처럼 약간의 농담과 음악 얘기만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누군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해봅시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분들이 아마 분노감을 느끼실 겁니다.

<제 친구가요, 아니 글쎄 성견도 아닌 강아지를...그것도 덫을 놓아 잡아서 먹었는데요, 제가 그 친구한테 잔인하다고 막 말했거든요...그랬더니 이 친구가 이렇게 답변하는 거예요.
“그러는 너는? 고기는 그렇다고 쳐도 계란은 먹고 살잖아? 나한테 뭐라 할 자격 있나?”
여러분,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이상한 건가요?>

‘그 친구’는 왜 계란을 예로 들었을까요? 속내는 이럴 겁니다. 강아지나 계란이나 모두 성체에서 비롯된 어린 생명체라는 것이죠. 그리고 덫을 놓아 잡아먹든, 펄펄 끓는 기름에 튀겨먹든 다 똑 같은 행위로 파악한 거죠.
어때요? ‘그 친구’라는 분,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위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 다 위화감을 느낍니다. 계란은 강아지와는 처지가 다를뿐더러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단순한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논리를 이렇게 밀고 나갈 수도 있어요.

“계란이 강아지와 같은 생명체가 아니라, 생명체 이전의 단계에 불과하다면, ‘낙태’는 왜 반대하는 건데?”
"낙태는...강간에 의한 임신과 태아가 기형아일 경우로 한정되지 않니?"
"바로 그 점이야. 그 태아가 왜 자기 아버지의 죄 값을  치뤄야 하는 거지? 그리고 기형아니까 낙태를 허용한다는 생각 자체가 장애인 차별 아닐까?"

논리적으로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화감이 살짝 듭니다(어쩌면 계란과 뱃속 태아의 생물학적, 도덕적 처지의 다름에 대해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생후 복지의 수준의 차원에서 기형아 출산 저지가 정당화 된다고 답변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논의를 위해 일단 괄호를 치기로 합시다).
이 위화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요? 바로 논리 자체에 있습니다. 일견 상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일지라도 논리의 일관성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대개의 경우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제시한 딜레마입니다. 테러범이 도시 어딘가에 살상효과가 높은 폭탄을 설치했습니다. 당국은 이 테러범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지만, 폭탄의 위치에 대한 자백은 받아 내지 못합니다. 폭발 시간은 천천히 다가오고...당국은 어쩔 수 없이 이 테러범을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내려 합니다. 샌델은 여기서 도덕적 판단을 해보라고 하지요. 고문을 하자니 인권을 침해하는 게 되고, 다수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고문이 불가피합니다.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이 경우 공리주의의 원칙(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따라 판단 할 경우, 우리는 고문이 불가피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물론 인권침해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는 의견도 가능할 것이고요. 그러나 소수에 불과하겠지요).
공리주의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그러나 인권 침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에 도덕적 면죄부를 다소나마 부여할 수 있는 근거가 어쩌면 우리에겐 있을 수도 있다고 샌델은 말합니다. 바로 그 테러범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악당'이라는 점이지요. 우리도 연쇄 살인범 같은 이들 보면 사형제가 타당하다는 생각이 마구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샌델은 여기서 더 난해한 딜레마를 제시합니다. 아무리 고문을 해도 테러범이 실토를 하지 않는 경우를 상상해 봅시다. 그래서 당국은 그 테러범의 눈앞에서 그의 어린 딸을 고문하는 방식을 선택하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아무래도 공리주의적 원칙을 적용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딸은 그 사건과 무관하기 때문이지요(샌델은 아마도 공리주의가 절대적으로 정의롭지 만은 않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이 딜레마를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른 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딸을 고문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특히 인터넷의 익명성이라면 더욱 명료하게 드러나겠죠. 이들의 논점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한 명이 다치는 게 여럿이 죽는 거 보다 낫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 심한 저항감을 느낍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도 결국 그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타자-화(거리두기)'에 불과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전 샌델이 제시한 딜레마에 다음과 같이 조금 더 추가해 봤어요.

이 테러범에겐 자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당국은 어린 자식을 대신할 그의 측근을 찾아냅니다. 조사해보니 그 테러범이 최측근인 친구의 딸과 평소에 부녀와도 같은 정을 쌓아왔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그 테러범에겐 친구의 딸이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죠. 당국은 이 소녀를 고문하려고 합니다. 문제는....그 딸의 아버지(혹은 어머니)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이죠(그렇게 가정해 봅시다). 앞서 공리주의를 주장했던 당신은 이 고문에 결코 찬성 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딸에게는 이 '타자-화(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얘기죠?

이제 당신은 한 명의 딸을 구하기 위해 다수의 선량한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네요. <스파이더맨>의 마지막 장면이 그랬죠? 교량의 한 쪽 끝에는 여자 친구인 메리 제인이, 다른 한 쪽에는 어린이들 수십 명이 타고 있는 케이블카가 매달려 있습니다. 악당인 고블린은 동시에 떨어뜨리죠. 스파이더맨의 선택은 과연?



4)인식의 트리오

타자-화/거리두기에 두해 잠시 언급해 봅시다.
심리학자 멜라니 조이는 인간이 동물의 살육을 일종의 '정신적 무감'상태로 바라볼 수 있는 것에 대해 '인식의 트리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인식의 트리오란 바로 '대상화', '몰개성화', '이분화'를 말합니다.

먼저 대상화란, "살아있는 존재를 생명이 없는 물체, 하나의 사물로 보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아마도 조이는 '언어가 현실을 축조 한다'는 (롤랑 바르트 같은)구조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이의 말을 직접 들어봅시다.

"도축장 작업자들이 자기가 죽이려는 동물을 소나 돼지니 하는 산 동물의 이름으로 지칭하지 않고 그들을 가지고 만든 제품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생각해보라. 닭은 '브로일러'로, 돼지는 '래셔' 즉 얇게 저민 베이컨으로, 소는 '비프'로 부른다....중략...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생물' 즉 'living thing'도 따지고 보면 '살아있는 물건'이라는 얘기이니 형용모순이라는 점, 게다가 그걸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도 생각해보라. 육식주의를 위해서는 우리가 이처럼 대상화하는 언어를 쓰는 게 필요하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조화로운 삶>의 저자인 스코트 니어링과 헬린 니어링 부부는 '고기'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구태여 '동물 사체'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아요. "인간이 동물 사체를 먹음으로써..."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두 번째로, '몰개성화'에 대해 얘기해 봅니다. 몰개성화란 "개체를 집단 정체성의 차원에서만 보면서 그 집단의 다른 모든 개체와 똑같은 특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조이가 든 예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히틀러에게 세상의 중심은 게르만 민족이었을 겁니다. 유대인은...아마도 세상의 찌꺼기로 생각했겠죠. 그에게는 아인슈타인, 비트겐슈타인, 아도르노, 레비나스, 카프카 같은 유대인들의 '개체적' 특성은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깡그리 말살됩니다. 오로지 '유대인'이라는 집단적 통합체만 존재할 뿐이죠.

어찌 보면 이게 꼭 히틀러만의 오류는 아닙니다. 전쟁 시에 적군을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정 아무개' 하는 식으로 개체화하여 각각이 어느 부모들에게는 나름대로 소중한 존재고 다 처자식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들을 향한 폭력은 불가능해집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요.

"집단을 보면 절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개체 하나 하나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않고 그냥 집단으로 뭉뚱그려버리면 우리는 그들을 위한 선행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숫자와 감각마비-그러니까 피해 대상의 숫자가 커져서 하나의 집단으로 뭉뚱그려지면 우리의 연민의 감정은 무디어 진다는 것'이 일어난다는 거죠. 어쩌면 그래서 유대인 청년들에게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 폭격을 코카콜라를 마시며 감상(?)하는 일이 가능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소설 <페스트>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페스트로 인한) 1억 명의 사망자란 무엇일까? 전쟁을 겪을 때, 하나의 사망자가 지닌 의미를 아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란 죽는 것을 누가 보았을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긴 역사를 통하여 내려오면서 뿌려진 1억의 시체라는 것은 상상 속의 한줄기 연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반려견의 죽음에는 민감해 하지만 수십억 단위로 도살되는 돼지의 죽음에 무감한 것이죠(저 역시 그렇습니다).
애기가 잠시 샜습니다. '몰개성화'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었죠?

혹시 30여 년 전의 <똘이 장군>이라는 국산 애니메이션 기억하시나요? 거기서 북한군을 어떻게 그렸던가요? 수령은 돼지 얼굴에 나머지 부하들은 죄다 늑대 얼굴이죠? 이 점을 눈여겨 두고 볼 필요가 있어요. 소위 기호의 의미화가 3차에 걸쳐 일어나도록 유도하니까요. 1차로 북한군은 전부 같은 얼굴로 '몰개성화'합니다. 2차로 인간이 보통 동물에게 가지고 있는 '(심리적)거리두기'를 이용합니다. '저들은 우리 같은 인간이 아닌 짐승일 뿐이다'라는 거죠. 마지막으로 동물들 중에서 늑대와 돼지를 선택해서 의도적으로 탐욕스럽고 포악한 짐승이라는 편견을 활용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애들은 이런 식으로 현실을 축조해 가는 겁니다(다행히 이런 세뇌의 영향에서 벗어난 이들이 많지만).

<똘이 장군>의 2차 의미화에는 조이가 말한 마지만 단계, 즉 '이분화'가 드러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두 개의 종종 대립되는 범주로 나누는 것"이죠.
'이분화'의 오류는 여기서도 종종 보죠? 예컨대 '클래식음악과 대중음악'이라는 이분화 같은 것 말입니다.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런 식의 이분화에는 속내가 있어요. 바로 존재론적 우월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권력의지와 타자의 것을 배척하려는 배타성이죠. 헤비메탈, 힙합, 발라드, 테크노, 트로트...등으로 얼마든지 세분 가능한 음악들을 '대중음악'이라는 범주로 뭉뚱그려 개개의 개성을 몰살해 버립니다.

재미있는 건, 이런 '뭉뚱그림-집단화'를 자신의 것(예컨대 클래식음악)에는 존재론적 당위를 부과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이용 한다는 것이죠. 예컨대, 19세기 독일에서는 '절대음악'이라는 신화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였는데요,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클래식 음악을 가볍고 대중적인 가벼운 음악으로 취급했다는 겁니다. 같은 '클래식음악'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자기들끼리의 '몰개성화-집단화'가 일어난 것이죠. 20세기 이후의 사람들은 프랑스든 영국이든 독일이든, 모두 '클래식음악'이라는 범주로 뭉뚱그려버린 후, 한꺼번에 그 지위를 격상시킵니다. 그리고 외부의 적을 찾습니다. 물론 '대중음악'이죠.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매커니즘이죠? 중세에, 기사들의 약탈과 폭력을 외부(이슬람교도)로 돌리기 위해 획책한 십자군 전쟁이라든지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설정하는 정치인들의 술책이라든지....

애기가 잠시 샛길로 샜네요.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우리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었어요. 논리를 극한까지 몰아가면 선택지가 모호해지는 '안개지대'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얘기 말입니다.



5)도덕적 선긋기

앞서 언급한 피터 싱어라는 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윤리적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모두 동등한 발판에 서 있다. 두 발로 서 있든 네 발로 기어 다니든 다리가 전혀 없든 모두 마찬가지다."

또 다른 철학자인 톰 리건의 사상은 '인간과 일부 동물은 생명의 주체(Subjects of a life)로서 타고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이들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어떤 생명체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인지 논할 때는 이런 차이가 무관하다'고 본 겁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반려견의 벼룩을 잡기 위해 약을 치는 행위는 어떻게 정당화될까요?
이에 대해서 심리학자 할 에르조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윤리에서도 불가피한 경계 긋기가 필요하다. 싱어가 본래 '작은 새우와 굴 사이에' 경계를 그은 반면, 리건은 적어도 1년 된 포유류 및 조류에 선을 그었다. 싱어와 리건 둘 다 인간이 사는 곳은 현실세계이지 지식인들이 모여 사는 가상의 도덕적 창공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래서 이들은 때로 상식을 수용하기 위해 타협도 했다. 이를테면 두 사람 모두 다른 종보다 관심을 더 받는 특정 종이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싱어는 쥐덫 제거보다 영장류의 법적 지위 개선을 위한 캠페인 활성화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그리고 리건은 만약 네 명의 일반인과 골드 리트리버가 넷만 태울 수 있는 구명보트에 초과 승선 했다면, 개가 배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개의 죽음은 그 어떤 인명 피해와도 견줄 수 없다.'
만약 도덕적 허용선을 긋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어리석은 일관성은 미숙한 영혼에게 나타나는 도깨비'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그 구명보트에서 개가 배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편 동물권익운동가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앤 듀네이어라는 분인데, 피터싱어가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3,000명의 인명피해가, 같은 날 미국 도축장에서 죽은 3,800만 마리의 닭의 죽음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라고 말하자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고 해요.

"닭을 경시하는 싱어의 견해는, 유순한 개체가 전반적으로 해를 끼치는 개체보다 더 가치 있다는 그의 신봉되는 철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 기준에 따르면, 닭은 대다수 인간들보다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데, 인간은 불필요한 고통과 죽음을 많이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할 에르조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논리를 극단까지 몰고 가는 사람들을 일컬어 철학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이론의 도랑에 빠졌다Caught in the grip of a theory'는 표현이다....중략....조앤 듀네이어는 골수 동물보호주의자들도 몸서리칠 도덕 세상에 살고 있다. 불타는 건물에서 강아지와 아이 중 누구를 구해야 할지 동전던지기로 결정해야 한다거나, 오리 사냥꾼을 평생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는 주장에 진심으로 동조할 이성적 인간이 과연 있을까?
동물해방주의자들이 처한 난관은 그들에게 듀네이어의 말이 옳다는 점에 있다. 만약 종차별주의를 말 그대로 채택한다면, 종 사이에 도덕적 경계 긋기를 거부한다면, 그리고 두뇌 크기나 다리 개수에 따라 생물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당신은 아마 듀네이어가 제시한, 흰개미가 내 집을 갉아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할 에르조그는 일방적으로 육식을 정당화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러한 잡식동물인 인간의 딜레마에 대해서 끝없이 고민합니다.

“나는 이 책('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에서 우리가 다른 종들과 맺는 관계의 특징인 역설이 우리의 이성과 내면의 Yahoo('짐승 같은 인간'이라는 뜻) 사이에 영원히 지속되는 줄다리기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도덕성이 비틀린 세상에서 살아가는 의미는 뭘까? 도덕적 비일관성에 승복하고 사는 편이 나은 걸까? 도덕적 복잡성이 곧 도덕적 마비를 뜻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내가 만난 동물 애호가들은 대개 자기 내면의 육식동물인 야후와 타협하며 지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크건 작건 동물을 위해 일했다. 대부분 동물을 돕고 이들이 좀 더 만족스럽게 지낼 수 있도록 작은 실천부터 했다. 이 중에는 육류소비를 줄이거나 유기견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페타나 세계야생생물 기금에 기부하고, 고속도로 한가운데 놓인 상자거북이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한쪽으로 차를 모는 사람들도 있다....중략....
처음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뻔히 보이는 도덕적 비일관성 때문에 심란했다.....고기를 먹는다고 부끄러워하며 자백한 채식주의자들, 싸움닭을 사랑한다고 항변한 닭 싸움꾼들.....중략......나는 이런 식의 모순이 비정상적 모습이라거나 위선적 행동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이런 성향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소 타협의 혐의가 보이는 이런 결론은 어디서 본 듯합니다. 바로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라는 만화책의 결론이었죠(개인적으로 강력 추천할 만한 명작 만화라고 생각해요).

http://blog.naver.com/quisemuj?Redirect=Log&logNo=100120703543

이 만화의 시작은 다음과 같은 지문으로 시작합니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지구에 사는 누군가 생각했다. 인간의 수도 1/100으로 준다면 쏟아내는 독도 그만큼 줄어들까."

어느 날 밤, 외계 생명체가 인간의 신체를 강탈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데, 뇌를 장악할 경우 인간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거죠(영화 '신체강탈자의 침입'과 비슷한 설정이죠?). 주인공의 몸에 기생한 외계생명체는 뇌의 강탈에 실패해 주인공의 오른팔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뇌를 강탈한 외계생명체는 인간을 사냥해서 생명을 유지합니다. 주인공의 오른팔에 머문 '오른쪽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무슨 소리야? 신이치(주인공) 논리는 이해가 안 돼. 내 '동족'들은 그저...먹고 있을 뿐이야. 생물이니 당연하지. 신이치는 자기 동족이 잡아먹히는 게 싫은가?(이에 신이치는 "당연하지, 인간의 생명은 존엄한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모를 소리군...존엄한 건 자기 목숨뿐이야. 나는 남의 목숨이 소중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어."

그러자 신이치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당연하지! 넌 짐승이니까."

오른쪽이의 대답, "그건 나를 비하하는 소리인가? 신이치.....'악마'라는 것을 책에서 찾아봤는데...그것에 가장 가까운 생물은 역시 인간으로 판단된다....인간은 거의 모든 종류의 생물을 잡아먹지만 내 동족들이 잡아먹는 건 고작 한두 가지야...."

뇌 강탈 기생수와의 최후의 결전을 마친 후, 신이치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기생생물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태어났을까? 넘치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 지구를 더럽히는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물론 인간이 만든 독이 생물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사실이다....생물 전체로 보면 인간이 독이고 기생생물이 약일까? 누가 정하지? 인간과....그 밖의 생명의 기준은 누가 정해주는데?
'오른쪽이'와 내가 협력해 온 싸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를 위한 싸움 같은 건 아니었다. 인간을 위한....아니, 나라는 개인을 위한 싸움이었다. '오른쪽이'는 둘째 치고 나는 끝내 기생생물의 입장에 설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생물들은 때론 서로를 이용하고 때론 죽인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은 무리이다....아니 상대를 자신이라는 '종'의 잣대로 재면서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다른 생물의 마음을 아는 체 하는 건 인간의 자만이다. 다른 생물들은 무엇도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설령 전혀 이해할 수 없어도 존중해야 할 동거인임에는 틀림없다.
다른 생물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외롭기 때문이다. 환경을 보호하고 싶은 것은 인간 스스로 멸망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인간 개인의 만족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좋다. 그게 전부니까. 인간의 잣대로 인간 자신을 비하해 봤자 의미는 없다.
그런 거다...그러니까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지구를 사랑한다는 건 모순이다.....그놈들(기생수)도 좁은 의미로는 적이었지만 넓은 의미로는 '동족'일지도 모른다. 모두들 지구에서 태어났잖은가? 그리고 뭔가에 기대어 살았고...."



6) 법정스님의 딜레마

육식의 비도덕성을 논하면 항상 따라붙는 반론이 있어요. “동물은 ‘생명’이니까 죽이면 안 된다는 논리대로라면, 식물은 ‘생명’아닌가? 그렇다면 도덕적 삶을 위해서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라는 제법 논리적인 얘기입니다(제가 홍길동님의 의견을 글의 소재로 삼은 건 홍길동님께 개인적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일종의 화두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 나름대로 완전해 보이는 ‘논리’에 스스로 ‘자폭’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작년에 타계하신 법정 스님이죠. 법정 스님께서는 <텅 빈 충만>이란 에세이집에서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육식문화는 동적이고 이기적이고 때로는 포악하다. 짐승의 고기를 삭이려면 노상 흔들거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자연 활동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농경과는 달리 사냥이나 도살 자체가 잔인하고 포악한 행위이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5번 고속도로 중간 지점에 콜링가라는 마을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갑자기 역겨운 냄새가 달리는 차 안에까지 스며든다. 웬일인가 싶어 창밖을 내다보면 수십만 마리의 소떼들이 도살장에서 자기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 눈에 띈다. 쇠고기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무고한 목숨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도살을 당하고 있는 현장이다.
이런 데서 도살한 쇠고기들이 남아돌아 우리나라에까지 들여다 먹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압력을 가하는 육식문화......중략....도살장에 끌려간 소의 눈을 한번 상상해 볼 일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말 못하는 짐승들의 그 슬픈 눈을....”(1988)

1988년의 법정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논리를 극단까지 몰고 가고자 하는 분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겁니다. “그럼 스님께서는 설마 식물은 안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래서인지 법정 스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1986년에 이미 남기셨습니다.

“벚나무는 그런 빛깔의 꽃을 피우기 위해 한겨울에도 안으로 물감을 마련하면서 산 것이다. 봄철에 꽃을 피울 때까지 나무는 1년 동안 전 생명력을 기울여 꽃의 혼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엄숙한 사실을 알 때 어떻게 함부로 꽃까지를 꺾을 수 있겠는가. 말은 없지만 나무가 얼마나 아파하고 한스러워하겠는가.”(1986)

동물이 생명이기 때문에 살육이 부당하다면 식물 역시 생명이기 때문에 꺾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의 일관성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이렇게 말씀하신 법정 스님께서 그 이후에 도덕적(?) 실수를 저지르시게 됩니다.

“한 보름 전 큰 절 도성당에 들렀다가 빨갛게 열매가 매달려있는 산수유 한 가지를 꺾어왔다. 조그만 항아리에 물을 담고 꽂아 창 곁에 놓아두었더니....”(1989)

아...산수유는 얼마나 아파하고 한스러워 했을까요.

농담이고요, 저는 감히 존경하는 대 스님을 이런 식으로 꼬투리 잡아 평가절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저는 <법구경>보다 <어린 왕자>를 더 좋아한다는 스님의 진솔한 고백이 들어있는 <무소유>라는 책을 읽은 뒤로 이 분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분명 스님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덕이 높으신 스님일지라도 인간인 이상, 그리고 보일러를 떼는 도시인이 아닌 이상(구태여 산수유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나무를 떼서 겨울을 나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논리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면 어떤 말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스님께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스님. 소 보다는 화형에 처해지는 나무들이 더 불쌍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타당할까요? 아무리 법정스님께서 논리적 오류를 범하셨다고 할지 라도요. 남의 티끌 잡아내는데 눈이 벌겋지 아닌 한은, 스님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말씀을 헛되이 여기지는 않습니다. 식물을 장작으로 사용하실지라도 이 분의 소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진솔하게 생각되어지지, 결코 (에머슨의 말처럼)'어리석은 일관성을 끝까지 고수한 미련한 영혼'의 앞 뒤 안 맞는 헛소리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논리를 극단으로 몰아가면 우리는 소위 베건들에 대해서도 비판 할 수 있습니다. 설령, “식물은 생명 아니냐?”는 논리를 제외시킨다고 해도 말이죠.
베건들은 오로지 식물만 먹습니다. 그래서 (식물을 제외한) 동물의 살육에 전혀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먹는 식물들을 봅시다. 그것을 키우기 위해 밭을 갈고 뒤엎고, 때론 농약도 치고.....그 과정에 곤충이나 참새가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겁니다.

만의 하나, 한 베건이 직접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서(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정말로 한 마리의 곤충도 헤치지 않고 곡물과 채소를 얻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면죄부(?)가 주어질까요? 아닙니다. 그의 자동차의 시트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프로 야구를 즐겨 본다면, 소가죽을 쓰는 글러브와 야구공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박지성이 골인 넣었을 때 환호할 수 있을까요?

한 환경운동가가 있다고 칩시다. 그는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환경의 소중함’을 주제로 열심히 강연을 다닙니다. 그런데 걸어 다닐 수는 없죠? 당연히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사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논리의 일관성'을 들이대며 반박할 수 있을까요?

이쯤이면 동물을 살해하는 행위와 생나무를 잘라 악기를 만드는 행위 간에 도덕적 선긋기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대충 다 말씀 드린 것 같습니다.




7)나가면서

다른 글에서 이미 명시했지만, 저는 베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덜 먹으려고 노력은 합니다. 그러나 가끔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고기로 대접합니다. 손님에게 “육식은 부도덕하니까 우리 쌈밥이나 먹으로 가십시다”라고 말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고기 앞에서 멍하니 바라보며 김치나 씹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예의가 아니죠.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의를 따지자니 살육에 대한 도덕심을 생각하게 되고 동물을 생각하자니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는 거죠.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동물의 생명권을 주장하는 인간이 겨우 순간의 예의 때문에 동물의 생명권을 저버린단 말인가"라고요. 맞습니다. 치졸하게도 그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옛 철인의 말로 변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의도적으로 ‘논리적’이려고 애써 보았습니다. 물론 여전히 육식에 도덕성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동시에 도덕적 한계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다분히 회색주의적인 결론 밖에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생명권에 대해 강경하게 발언 한 것은,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정도를 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우연히 찾아 간 유기동물 보호소에서 저는 80여 마리의 유기견들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처음으로 알았죠. 개 짖는 소리 중에 '통곡'이 있다는 사실을. 좁은 철망 우리(소위 '뜬장'이라고 불리는)에서 몇몇 녀석이 짖는 소리는 그야말로 "나 좀 내보내줘"라는 울부짖음이었어요. 이것은 결코 인간의 의인화 성향에 기인한 판단이 아닙니다.

그리고 몇 주 후 다시 찾아 갔을 때는 30여 마리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안락사 당한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담배 한 대 태우며 마음속으로 '잘 가라, 다시 태어난다면 더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고, 지금 있는 저 세상도 나쁘지 않으면, 절대로 이 지구라는 곳에 태어나지 말거라'라고 빌어주는 일밖에는 없었어요(오해하실까봐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우연히 지인 따라 그 곳을 찾았을 뿐, 소위 동물보호운동가는 전혀 아닙니다). 그렇게 버려지는 개들은 80%이상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어가는 겁니다(재 입양 비율은 고작 20% 이내). 수 명을 죽인 연쇄 살인마에게도 인권이라는 명분하에 사형제 폐지가 거론되는 사회에서(저는 솔직히 '사형제'에 대해서는 '판단중지' 상태입니다), 단지 주인 잘못 만난 죄 하나로 사형이나 다를 바 없는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
(물론 저는 안락사의 필요악적 측면도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인간이 개보다 이성적 측면에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어찌 인간과 개의 존재론적 처우가 이렇게도 갭이 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있자 구제역이 발생 하더군요. 살 처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는 건 다 아실 겁니다. 전 이 살 처분 방식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생매장이라니. 저는 이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그동안 무신경했던 거지요). 어느 수의학 박사가 뉴스에 나와 말하더군요. 세계 어느 그 나라도 이런 식으로 살 처분하지는 않는다고.
단지 예산을 이유로 돼지들에겐 '안락사'라는 행운(?)을 누릴 자격도 얻지 못한 겁니다.

포크레인으로 판 구덩이에 돼지들이 밀려 넣어지는 장면을 본 순간, 저는 기묘한 감정의 전도 현상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아, 안락사에 처해진 개들은 저 돼지에 비하면 차라리 행복한 거구나...'
아....'사형'이나 다름없는 죽음을 두고 '행복'이라니요...예컨대 한 죄수에게 거열형(사지를 소나 말에 연결한 다음 찢어 죽이는 형벌)을 내렸다가 교수형으로 감형(?)시켜줄 때, 그 죄수가 맞는 기쁨(?)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예요.

저는 앞에서 도덕적 일관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도덕적 선긋기'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단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인간들 태반이 이 선긋기를 인간에게만 한정하려 든다는 점이었어요. 어차피 인간중심적 태도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존재론적 위계의 차이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대우하는 건 인간 이기심의 극치이자 '타자-화/거리두기'의 극단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삼겹살을 즐겼던 주체로서 이러한 감정은 위선이 아닐까 하는 끝없는 의구심과 함께.

순대 국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던 제가 이렇게 행동과 의식의 불일치라는 염치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이런 모순들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드-킬 당한 고양이의 죽음 앞에서 처연함을 느끼는 '윤리적 자아'와,
'아이다 유아'나 '아오이 소라'의 영화(?)를 보며 '자연 상태-자연 법칙'에 타율적으로 굴종하는 '말초적 자아' 사이에서 끝없이 배회하는.
'대뇌와 성기 사이'에서.










참고할 책들 :

1.육식주의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 논한 책 : 피터 싱어 저 <죽음의 밥상>, 멜라니 조이 저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2.잡식동물로서의 인간의 딜레마에 대해 논한 책 : 마이클 폴란 저 <잡식동물의 딜레마>, 할 에르조그 저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



























                  
Comment '29'
  • 2011.06.04 14:27 (*.208.207.217)
    역사를 알면 육식이 환경오염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될것입니다.

    현재의 지구 온난화도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 에스떼반 2011.06.04 21:57 (*.122.97.77)
    지나GO님 엄청나게 긴 글 올리시느라고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긴글에서 단 한가지의 메시지라도 심각하게 받아 들인다면
    변화의 계기가 될수 있기를 기대 해 봅니다.
  • 이러한 2011.06.05 07:27 (*.12.8.110)
    주제는 우리를 둘러 싼 생명들의 존재와 삶 자체가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러셀. 칸토르 등이 모순없는 논리체계를 만들려는 공상이 스스로들의 패러독스에 괴로워 했으며, 괴물, 괴델은 불완전성의정리로 인간의 한계를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치지 않는 호기심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낼지 궁금한 대목입니다. 참으로 답없는 문제로...근래에 보았던 '아바타'라는 영화속의 외계인들의 사냥의 모습에서, 답은 아니나 희생물을 대하는 태도는 눈여겨 볼만한 것이었습니다.
  • 오리베 2011.06.05 10:52 (*.60.248.147)
    홍길동이가 바로 저로군요.
    저는 타인의 글을 해부하는 일은 전혀 취향이 아닙니다만,
    본의아니게 인용되어 도마 위에 올랐으니 제 뜻과 다른 부분 등 몇 마디는 해야 할 것 같네요.

  • 오리베 2011.06.05 10:54 (*.60.248.147)
    1. 우선 너무 간단한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변 가지고 너무 많은 전제를 유추하시는게 아닌가 해요.

    제가 “폭력은 안 됩니다. 그건 불법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법만 알지 폭력당하는 이의 고통을 모른다는 뜻이 유추되는 것은 아니지요.

    애초에 고기의 식용이 주제가 되었지요. 그래서 저는 그에 맞게 육식에만 초점을 맞추고 육식 외의 소비, 즉 약재나 가죽 등 다른 용도에 의한 사용은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사용에는 대략 반대입니다. 그건 생태계의 원리와 거의 관련이 없거든요.)

    그리고 님이 멸종위기는 없다고 전제하겠다는데 그 전제도 성립이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곧 멸종할테니까요.

    따라서 주제에 맞지도 않고 전제도 성립이 안 되므로 더 이상 자세한 답변을 하지 않은 것이지 육식옹호론자라고 동물의 고통에 무감각할것이다라는 예단이 있으신 듯합니다.
  • 오리베 2011.06.05 10:55 (*.60.248.147)
    2. 호주 얘기는 자연 상태를 예를 든 것이라 순환논리라고요? 저는 도덕과 자연상태의 상반이라는 관점은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오히려 님이 그 사람들을 문명사회가 아니므로 열외로 하시겠다는 뜻으로 보이네요.

    도시는 규범이 있는 사회고 호주의 오지는 도덕이 없는 자연상태라서 다른 기준을 적용할 것이 아니라 도시는 식육이 유통되고 있지만 야생에서는 그런게 없다는 그 차이일 뿐이지 지금 호주의 원주민이라 해도 태고의 원시사회처럼 “도덕”이 없는 자연상태의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우리나라라 해도 전쟁이나 극심한 천재지변 등 극한 상황을 예를 들면 될까요? 우리가 무인도에 단체로 조난당한다면? 핵심은 정상적인 식육이 유통되는 상황, 그리고 야생동물이 멸종 가능한 곳에서는 포획을 허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으로 한 얘깁니다.
  • 오리베 2011.06.05 10:57 (*.60.248.147)
    3. 육식이 자연법칙이라면 고대생들 윤간은 어떠냐고요? 예가 좀 거시기합니다. 그리고 옳지 않습니다.

    타 생물을 섭취하는 것은 자연 법칙 중 생태계의 원리입니다. 그래야 종이 번식하는 거지요. 성행위 역시 생태계의 원리이지요. 그러나 강간은 성행위 중 하나의 사회적인 태양일 뿐이지 강간이 본질적인 종족보존의 방식도 아니지요. 따라서 성행위가 허용되는 사회에서 강간을 사회적으로 제약한다고 해서 인간의 생태계의 원리에 따른 행위를 제약하는 예로 항변할 수는 없지요.

    소유도 마찬가지. 자기 종을 번식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지요? 탈취는 고대적 소유의 한 방법이었을 뿐 본질은 아니지요. 탈취 아니라도 소유하고 살 수 있잖습니까.

    즉, 성행위나 소유를 전면 금지한 것도 아니고 그 중 현대 사회관념에 반하는 일부 행위만 금지하도록 사회가 진화한 것일 뿐인데 이를 인간의 생태계의 원리에 반하는 제약으로 보고, 육식에 대한 전면 금지나 육식에 대한 죄의식의 정당화로 인용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육식도 제한하자라고 한다면 그건 가능하겠지만.)

    다른 예도 다 마찬가지로서,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는 큰 틀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본성을 완전히 제한하는 분야, 그럼으로써 수백만년을 자연스레 고기를 먹어오며 살아온 인간에게 느닷없이 육식을 전면 금지하거나 죄의식을 덮어씌우는 유별난 이론들의 정당화로 인용될만한 예는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도무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 오리베 2011.06.05 10:58 (*.60.248.147)
    4. 제 입장에서 가장 벗어난 부분은 저는 육식과 다른 이용은 다르다는 입장을 견지하는데 님은 동물의 권리나 고통에만 초점을 두고 계신지 자꾸 그 차이가 없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올무로 포획하는 것은 일단 육식이 아니므로 논의대상이 아니라고 한 것이고요. )

    한마디로 육식은 정당하지만 다른 이유로는 죽이지 말고 고통주지 말자는게 보통의 고기먹는 사람들의 입장일 것입니다. 그러니 산 곰 쓸개빨아먹는 파렴치한 행위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제가 고기먹는게 죄면 차라리 생태계의 원리와는 관계도 없이 즐기기 위해 생나무잘라 악기만드는게 더 큰 죄가 아니겠냐고 반문한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악기야 생태계의 원리도 아니고 고기야 먹으면 똥으로 배출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을 키우게 되어 있지만 나무를 잘라 악기를 만들면 행여 흙으로 돌아갈까봐 얼마나 전전긍긍 애지중지합니까. 이게 더 반 자연적 행태라는 뜻이죠.

    악기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라는게 아니라 고기먹는게 죄라면 그게 더 논리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육식에 대해 죄의식을 가질 필요 없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꽤 호기심을 가지고 보았으나 이 부분에 대한 답변은 했다고 하시나 딱히 잡히는 내용이 없네요. 불가피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인가요?

  • 오리베 2011.06.05 11:01 (*.60.248.147)

    5. 그런데, 진정, 마지막 부분을 보면 대체 지금껏 무엇을 논리적으로 설파하신 것인지 이렇게 긴 글을 쓰신 님의 입장을 잘 모르겠네요. 결국 본인도 못 지킨다… 그러면 어쩌라는 건가요. 허탈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도 육식에 대해 동물에 대한 애정만 가지면 님과의 차이는 거의 없는 건가요? (그러면 저와는 차이가 별로 없겠습니다. 구차하게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만 님이 동물에 대해 느끼는 애정, 현실에서 제가 더 클지 누가 압니까.) 아니면 먹더라도 죄의식은 가지고 먹으라는 뜻입니까?

    만약 이게 어느 선까지 타 생명체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 옳으냐, 결국 이게 어디에 선을 긋느냐의 문제라면 최소한 본인이 긋는 선의 위치가 타인의 것보다 옳다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까지 타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깊이 해부하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오셨으면 그런 결론에 대해 논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본인의 것을 논증할 수 없다면, 아니 기껏 동물에 대한 정서적 교감일 뿐이라면, 그리고 본인이 어떤 결론을 내린들 본인 자신이 실천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타인이 긋는 선도, 혹은 다른 생명체에 대한 타인의 정서적 교감의 한계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 지나가다 2011.06.05 13:56 (*.161.86.167)
    질문에 답해봅니다.

    1. 오리베님 : 제가 “폭력은 안 됩니다. 그건 불법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법만 알지 폭력당하는 이의 고통을 모른다는 뜻이 유추되는 것은 아니지요. ...생략

    답변 : 저는 분명히 위 글에서 '식용'을 위해 도살되는 가축은 대개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폭력 없이 도살할 수는 없으니까요.
    자, 그런데 누가 "육식은 자연법칙이므로 도살은 어쩔 수 없다. 대신 약재 사용은 자연법칙이 아니므로 그건 폭력이고 불법이다"라고 말한다면 오류 아닐까요? 육식을 위한 도살 자체가 폭력이므로.

    2.오리베님 : "호주 얘기는 자연 상태를 예를 든 것이라 순환논리라고요? 저는 도덕과 자연상태의 상반이라는 관점은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오히려 님이 그 사람들을 문명사회가 아니므로 열외로 하시겠다는 뜻으로 보이네요. ...생략..."

    답변 : 이 반론은 충분히 예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도 인용한 것이고.
    자, 제가 위에서 인용한 피터싱어같은 동물 보호 운동가라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동물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자연상태'에서는 애당초 윤리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윤리적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라고요. 즉, 원주민들의 필요악적인 측면을 이해는 할 수는 있지만 도덕적 판단의 대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오리베님의 오류는,
    바로 '문명'이라는 개념을 '육식을 위해 사냥(활을 쓰든, 올무를 쓰든)을 하는 행위'로 한정하여 제가 한 말에 대해 "오히려 님이 그 사람들을 문명사회가 아니므로 열외로 하시겠다는 뜻으로 보이네요"라고 응했다는 겁니다.
    원주민들에게 문명이 오로지 먹는 일밖에 없나요? 종교 의식도 있을 것이고 성인식 같은 각종 제도도 있겠죠?
    종교 의식이 (영화 <아포칼립토>처럼 인간 제물로 삼지 않는 한 그들 나름의 문명은 인정할 뿐더러 도덕적 책임도 물을 이유 없죠?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문명에 대해서는 서구우월주의라는 관점에서 도덕적 재단을 하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현 관점', 그러니까 윤리적 판단이 가능한 현 문명상태에서는 동물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건 분명히 비윤리적인 것이고요. '원시소년 똘비'에게는 윤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의 호주 원주민들이 서구문명과 접속한 탓에 불필요하게 올무를 쓸 이유가 없다면 그들의 행위는 용납되지 않겠죠.)

    3. 오리베님 : "육식이 자연법칙이라면 고대생들 윤간은 어떠냐고요? 예가 좀 거시기합니다. 그리고 옳지 않습니다. 타 생물을 섭취하는 것은 자연 법칙 중 생태계의 원리입니다. 그래야 종이 번식하는 거지요. 성행위 역시 생태계의 원리이지요. 그러나 강간은 성행위 중 하나의 사회적인 태양일 뿐이지 강간이 본질적인 종족보존의 방식도 아니지요. 따라서 성행위가 허용되는 사회에서 강간을 사회적으로 제약한다고 해서 인간의 생태계의 원리에 따른 행위를 제약하는 예로 항변할 수는 없지요."

    답변 : 저는 누차 '자연법칙'이 윤리에 합치하겠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누군가 욕구에 이끌려 강간을 했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의지대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 칸트는 우리가 자연의 욕구대로 이끌려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것을 '타율'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그러한 자연 상태의 욕구에 굴복하지 않았을 때 비로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란 철저하게 윤리적인 것이죠.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봅시다.

    "자유는 결코 자연에서 나오지 않는다....'자유로워지라'는 명령, 그리고 타자를 수단(자연)이 아닌 목적(자유)로 대하라'는 명령, 이것들은 '자연'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칸트는 그것이 당위(Sollen)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꼴리니 강간해야 겠다는 거나, 배가 고프니 잡아먹겠다는 거나, 모두 '자연'에 굴복하는 타율적인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 타율적인 것에 대해 우리는 윤리라는 이름을 부여하지도 않고요.
    제 말은 그런 뜻인 겁니다.

    오리베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타 생물을 섭취하는 것은 자연 법칙 중 생태계의 원리입니다. 그래야 종이 번식하는 거지요."
    윤리의 차원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할까요?(여기서는 논리의 한계를 거론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오리베님의 '원주민' 얘기의 취지는 다음과 같이 이해 될 수도 있어요.

    갑 : "타 생물을 덫으로 잡아 극심한 고통을 준 다음에(물론 우리 원주민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칼로 찔러 죽인 다음 잡아먹는 것은 자연 법칙일 뿐이야."
    을 : "음. 그래. 난 그게 자연법칙이 아니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갑 :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니까."
    을 : "그게 '범죄'차원에서의 면죄부는 될지언정, 과연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갑 : "우리는 (자연상태의)원주민들이라고!"
    을 : "내가 논한 건, '자연상태'에서는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라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윤리'를 얘기할 때는 철저하게 윤리적 가치 기준이 존재(그리고 그것을 칸트는 자연에 반하는 자유의지-정언명령이라고 했다)해야만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동물에 대한 도살의 주체인 현대인을 옹호하기 위해 자연상태의 원주민이나 원시인으로 반론을 할 수 없다는 얘기야."
    갑 :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을 : "같은 말을 서로 달리 하고 있는 건가?"

    4. 오리베님 : "제 입장에서 가장 벗어난 부분은 저는 육식과 다른 이용은 다르다는 입장을 견지하는데 님은 동물의 권리나 고통에만 초점을 두고 계신지 자꾸 그 차이가 없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올무로 포획하는 것은 일단 육식이 아니므로 논의대상이 아니라고 한 것이고요. ) "

    답변 : 제 입장에서는 '육식과 다른 이용(예컨대 동물의 가죽을 벗긴다든지, 약재로 쓴다든지 하는)'이나 '육식' 그 자체나, 동물 입장에서는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에서 공통적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동물 입장에서는)별로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오리베님 : "한마디로 육식은 정당하지만 다른 이유로는 죽이지 말고 고통주지 말자는게 보통의 고기먹는 사람들의 입장일 것입니다. 그러니 산 곰 쓸개빨아먹는 파렴치한 행위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

    답변 : '둘 다 고통을 준다는 의미에서' 지나친 비약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저는 위에서 제러미 러프킨과 피터싱어의 글을 인용한 겁니다. 재 인용합니다. 꼼꼼하게 읽어보시길 바래요.

    "제레미 리프킨이 <육식의 종말>에서 이런 얘길 했죠?

    "1984년 날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 가던 에티오피아의 사례를 보자. 그 당시 에티오피아는 일부 경작지를 아마인 깻묵, 목화씨 깻묵, 평지씨 깻묵을 생산하는 데 할애했다는 사실을 대중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 작물들은 가축 사료로 영국을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에 수출할 목적이었다. (만일 그 토지에 인간을 위한 곡류가 심어졌다면 에티오피아인은 굶주리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제 3세계 토지가 오로지 유럽의 가축 사용에 필요한 사료를 재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중략........농업 분야에서 대풍작을 기록했던 1950년에서 1985년 사이에 미국과 유럽에서 2/3나 증가한 곡물 생산은 사료 곡물 재배에서 이루어졌고, 그 중 대부분은 소 사육에 사용되었다. 곡물 재배에 사용되는 1에이커의 토지는 육류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의 토지보다 5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다. 콩류(대두, 완두콩, 렌즈콩)을 심으면 10배 많은 단백질을 생산하며, 잎이 많은 야채를 심으면 쇠고기 생산에 사용되는 1에이커의 토지에 비해 무려 26배나 많은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공장형 농장'의 존재 이유는 다 아시겠죠. '지나친' 육류의 생산이 목적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단백질 이상의 것을 불필요하게 생산하는 이유는 새삼스레 말 할 필요도 없이 돈 벌이 때문입니다(부시 전 대통령이 얼마나 팔아치우려고 애쓰는지 보세요). 그 돈벌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사람들의 지나친 육식이고요. 그래서 동물학대가 자행되는 '공장'에서 과잉생산을 합니다. 그 결과가 환경파괴고, 남반구의 기아입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백인들 돈 벌이 때문에 동물들이 불필요하게 도축되고 아프리카 인간의 개체수를 걱정해야 할 만큼의 인간이 죽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철학자 피터싱어는 '동물학대의 진짜 주범은 맛있는 고기를 탐하는 우리 모두'라고 주장했고요. 이런 견해에 의하면, 우리의 '육식'과 동물학대가 반드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겁니다.

    오리베님 : "악기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라는게 아니라 고기먹는게 죄라면 그게 더 논리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육식에 대해 죄의식을 가질 필요 없다는 뜻이지요."

    답변 :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거죠? "악기(나무 살육)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라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봤을 때는 식물 살해나 동물 살해나 마찬가지이므로 고기 먹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라는.

    그래서 저는 윌리엄 제임스의 가설을 인용한 글을 소개한 겁니다. 재 인용합니다.

    마크 롤렌즈 저의 <동물의 역습>에서 편집자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음미해 보아요..

    "...자극의 정도가 같다면 사람보다는 어쨌든 동물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해부학적 차이는 통증의 도덕적 무게를 덜어주거나 통증을 무시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당신이 어떤 종(種)에 속하는 지 알 수 없는 낮선 상황에 처해 있다고 가정해보자. 다시 말해 기묘한 '종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발이 몹시 아프다.
    '음....내가 인간이라면 지금 이 통증은 아주 불쾌한 상황이며, 누군가 내 고통을 덜어 줄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내가 원숭이라면 이 통증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며, 다른 이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할 것인가? 터무니없는 일이다. 잡아먹히거나, 산 채로 해부당하거나, 사냥에 쫓기는 경우는 어떨까? 역시 모순된 상황이라는 점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어떤 인종에 속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고 노예제의 윤리에 대해 판단해보라.
    '내가 백인이라면 누군가에게 예속당하는 상태를 엄청난 치욕으로 느끼겠지만, 내가 흑인이라면 노예로 사는 것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아닐 것이다. 나면서 결정되는 노예 신분의 불행은 당신이 어떤 인종에 속한다한들 뼛속 깊이 느끼는 고통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통한 추론이야말로 진정으로 역지사지라는 오래된 도덕률을 지키는 방편이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을 어떻게 남에게는 당연한 듯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리고 육식의 정당화를 위해 나무를 끌어들인 오리베님의 주장("동기로만 본다면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게 죄라면 자연의 섭리와는 하등 상관없이 오직 즐기기 위해 오랜 수령의 생나무를 잘라 악기를 만드는 게 더 큰 죄이겠습니다")에 대해, 왜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 밝히기 위해 저는 위의 글을 쓴 겁니다. 윗 글의 주제이기도 하고요.
    즉, 오리베님의 의견처럼 '살육'에 대한 관점에 일관성을 유지하여 '논리'를 극단으로 몰고가면 바로 법정스님의 딜레마에 빠진다고 말한 겁니다. 그래서 논리적 일관성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할 에르조그의 말을 인용한 것이고요. 이른바 인간에건 어쩔 수 없는 '도덕적 선긋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애완견의 사망을 막기 위해 심장사상충 약을 쓰는 건 어쩔 수 없는 도덕적 선긋기의 결과(심장사상충의 생명보다는 애완견의 생명이 존재론적으로 더 우위에 있다는)라는 겁니다.

    5. 오리베님 : "그런데, 진정, 마지막 부분을 보면 대체 지금껏 무엇을 논리적으로 설파하신 것인지 이렇게 긴 글을 쓰신 님의 입장을 잘 모르겠네요. 결국 본인도 못 지킨다… 그러면 어쩌라는 건가요. 허탈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도 육식에 대해 동물에 대한 애정만 가지면 님과의 차이는 거의 없는 건가요? (그러면 저와는 차이가 별로 없겠습니다. 구차하게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만 님이 동물에 대해 느끼는 애정, 현실에서 제가 더 클지 누가 압니까.) 아니면 먹더라도 죄의식은 가지고 먹으라는 뜻입니까?"

    답변 : 바로 위의 글이 제가 설파하고자한 바입니다. 인간이 도덕적 논리를 극단으로 몰고가면 결국 딜레마에 빠진다. 예컨대 생명의 존재론적 위계가 없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되면 결국엔 인간은 흰개미들이 자신의 집을 갉아먹는 세상을 용인하게 될 거라고.

    그런 이유로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로 이동하여 강연을 다니는 환경운동가(예컨대 스코트 니어링 같은 분)에 대해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비난해서는 안 되며,
    동물의 생명권을 중시하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 이들에게 "농사 과정에서 벌레들은 안 죽는 줄 아느냐?"고 반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같은 이유로, 육식의 비윤리성에 대해, "나무를 베어다가 악기를 만드는 행위는 비윤리적인 것 아닌가?"라는 식으로 반박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고요. 그 자체는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에머슨의 말대로 "어리석은 일관성"일 뿐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저는 '도저히 못 지킨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오리베님의 유추해석일 뿐이지요.
    제 애긴 이래요. 노력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손님이 찾아오는 경우를 언급한 적 있죠?)엔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도덕적 일관성을 허물어뜨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역시 인간의 몫이 아니겠냐는 겁니다.
    이성적 비판을 거두고 그냥 "그거야 뭐...원래 자연법칙이 그러하니까..."라고 덮은 후에 아무런 의식 없이 육식을 하는 것과, 지속적인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반성하며 자제하는 것(그러나 종종은 실패 할 경우도 있는)이 동등하게 취급되어질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위에서 어떤 분께서 <아바타>를 언급하셨는데요, 맞습니다. 실제로 카메론 감독은 어느 인디언 부족에서 힌트를 얻은 듯 해요. 그들은 동물을 잡은 후에 진심 어린 참회를 합니다.
    혹자에게는 이를 두고 "위선 아닌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 생각으론 이렇다는 겁니다.
    "돈벌이를 위해, 과잉 육식을 일삼는 사람들의 수요를 발판 삼아, 복지라고는 눈 뜨고 찾아 볼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동물을 학대(할 뿐만 아니라 아주 잔인하게 도축)하는 소위 서구의 '공장형 농장'과 인디언(또는 아바타의 '나비 족')의 마음가짐은 동등한 것인가? 최소한 탐욕스럽지 않은 그 인디언 부족의 마음가짐이라면, 공장형 농장 같은 건 생각조차 안 할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먹더라도 죄의식을 자져라'고 말한 게 아니고요, 죄의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먹게 되는 것이 인간이기는 하지만, 타 존재의 고통에 대한 정신적 무감 상태에서 먹는 것 보다는 연민이라는 측면에서 훨씬 인간적(윤리적)인 것이며, 채식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끝없이 기율여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금연을 하려고 결심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훨씬 줄이기는 했지만 아직 완벽하게 끊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담배, 그거 끊어야 해. 나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피해야."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이 분에게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런 노력의 행위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과잉 흡연을 하시는 분의 행위와 동급일까요?

    그리고 그런 심리적 죄책감이 행복지수만 낮추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말씀 하신 바 있으시죠?
    그렇습니다. 행복지수가 낮아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어디 "선=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던가요?
    고대의 에피쿠로스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선이란 곧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근대의 칸트의 도덕철학 이후로 선과 행복은 결별합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선'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면 그것은 더 이상 선이 아니라는 겁니다. 선은 자체목적적인 것으로 존재한다는 거지요.

    어려운 얘기는 아닙니다.
    탤런트 김혜자가 자신의 저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서 이런 얘길 합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장입니다.
    "오랜 전쟁과 학살로 인구의 50%가 14세 미만이고, 평균수명 45세, 유아 천 명 당 사망률 세계 1위....중략 당신이 이 글을 주의 깊게 읽는 데는 한 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다. 그 한 시간 동안, 아프가니 스탄에서는 전쟁과 굶주림으로 적어도 열 네 명 정도가 죽어갈 것이다."

    김혜자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요? 만약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러한 사태가 일부 해결된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타자와의 거리두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행복지수는 낮아질 가능서이 많습니다. 그게 곧 '선'이라는 것의 실체입니다. 행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니야, 제롬, 아니야. 미래의 보상을(천국) 위해 우리가 덕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건 아니야...자기 고통에 대한 보수(행복)라는 생각은 고귀하게 태어난 영혼에겐 모욕적인 말이야. 덕이란....그런 영혼이 지니는 아름다운 형식인 거야." 앙드레 지드, <좁은 문> 중에서.

    이렇게 말하니 꽤 제가 선한 인간인양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네요.
    그런 오해를 줄이기 위해 '아이다 유아'나 '소라 아오이'를 거론한 건데 효과는 별로였나 봅니다. 하하...

    오리베님 : 만약 이게 어느 선까지 타 생명체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 옳으냐, 결국 이게 어디에 선을 긋느냐의 문제라면 최소한 본인이 긋는 선의 위치가 타인의 것보다 옳다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까지 타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깊이 해부하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오셨으면 그런 결론에 대해 논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답변 : 제가 긋는 선의 위치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이미 누차 논증한 바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제러미 러프킨과 윌리엄 제임스의 가설, 그리고 칸트를 제시 한 것이고요.
    더 이상 무슨 논증이 필요할까요?
















  • 오리베 2011.06.05 15:09 (*.60.248.147)
    담배의 예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그 흡연자가 개인적으로 흡연의 폐단을 생각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완전히 못 끊고 줄였으면 그건 그럴 수 있지요.

    허나 그 흡연자가 흡연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흡연이 왜 해악인지를 설파하고 흡연권자의 논리를 반박해가며 논증을 시도하지만 정작 본인은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노력 중이다, 이게 용납이 되시나요?

    아이의 체벌은 폭력이니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며 모든 이론과 근거를 인용해가며 체벌불가피론자들의 논리를 공개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던 분이 집에 가서 일정한 경우에는 아직 교육적 체벌을 하긴 한다, 허나 노력 중이다, 이거 용납 되십니까?

    용납이 되신다면 더 할 말 없는 것이고요, 저라면 제가 완전히 생활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기 전까지는 제 자신이 우스워서 남의 행동을 재단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뭐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니....

    그리고 다른 부분에 대해 반박하신 논리도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만, 뭐 어쩌겠습니까. 그걸 다시 주장하고 싶은 생각도 의지도 없군요.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에 의의를 두는 수밖에요. 그럼...
  • 지나가다 2011.06.05 15:34 (*.161.86.167)
    위에서 오리베님의 2번째 글에 대한 답변을 다소 보충합니다.
    담배와 체벌이라는 논점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답변해 보지요.

    2.오리베님 : "호주 얘기는 자연 상태를 예를 든 것이라 순환논리라고요? 저는 도덕과 자연상태의 상반이라는 관점은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오히려 님이 그 사람들을 문명사회가 아니므로 열외로 하시겠다는 뜻으로 보이네요. ...생략..."

    답변 : 이 반론은 충분히 예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도 인용한 것이고.
    자, 제가 위에서 인용한 피터싱어같은 동물 보호 운동가라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동물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서는 애당초 윤리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윤리적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라고요. 즉, 원주민들의 필요악적인 측면을 '이해'는 할 수는 있지만 도덕적 판단의 대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오리베님의 오류는,
    바로 '문명'이라는 개념을 '육식을 위해 사냥(활을 쓰든, 올무를 쓰든)을 하는 행위'로 한정하여 제가 한 말에 대해 "오히려 님이 그 사람들을 문명사회가 아니므로 열외로 하시겠다는 뜻으로 보이네요"라고 응했다는 겁니다.
    원주민들에게 문명이 오로지 먹는 일밖에 없나요? 종교 의식도 있을 것이고 성인식 같은 각종 제도도 있겠죠?
    종교 의식이 (영화 <아포칼립토>처럼 인간 제물로 삼지 않는 한 그들 나름의 문명은 인정할 뿐더러 도덕적 책임도 물을 이유 없죠?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문명에 대해서는 서구우월주의라는 관점에서 도덕적 재단을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현 관점', 그러니까 윤리적 판단이 가능한 현 문명 상태에서는 동물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건 분명히 비윤리적인 것이고요. '원시소년 똘비'에게는 윤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의 호주 원주민들이 서구문명과 접속한 탓에 불필요하게 올무를 쓸 이유가 없다면 그들의 행위는 용납되지 않겠죠.)

    물론, 호주 원주민들이 육식에 관한 인식이 원시의 '자연 상태'의 법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윤리의식이 전무하다고 결론짓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최소한 그들 '인간' 사이에서는 나름대로의 윤리가 존재하겠죠. 그렇다면, 이 경우엔 육식을 당연시하는 서구문명인들과 구태여 구별을 할 필요가 없어요. 서구문명인들이나 그들이나 '태초부터 원래 그랬다'는 이유로 육식에 대해서는 합리화하거나, 아니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라고 생각해서 합리화할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있을 터이니까요.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윌리엄 제임스의 가설을 생각한다면, 따라서 '어쩔 수 없는 덫 사용'조차 윤리적 판단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윤리적 합리화의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예컨대, 유기견의 경우, 시 단위로 한 달 평균 100여 마리의 개가 '동물 보호소'로 잡혀옵니다. 물론 이들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안락사 되지요. 그렇다고 들어오는 개들을 무한정 수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럴 경우, 보호소는 수 천 마리의 유기견으로 가득할 테니까요. 유일한 방법이란, 반려동물 등록제를 실시하고 유기에 대해 높은 벌금을 부과하는 건데, 돈에 관한 한 국민들 눈치 보기 바쁜 국회의원들이 그런 걸 입법화할리는 아직 현실적으로 어렵죠?
    안락사를 회피하고 그냥 들어오는 대로 무리해서 수용한다고 해 봅시다. 예산과 인력이 제한되어 있는 탓에 유기견 개개의 복지의 질은 형편없이 낮아 질 겁니다. 굶어 죽거나, 보다 큰 개에게 깔려 죽는 일도 발생한다는 거죠.

    그런 이유로 안락사는 필요악이라고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안락사'라는 건 윤리적으로 정당합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다시 말해 '필요악'이라는 이유가 윤리적 정당성에의 근거가 될 수 있나요?

    매춘은 필요악이라고들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성적충동을 해소할 대상을 찾지 못한 남성들의 성범죄를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매춘이 필요악이라는 이유가 매춘의 윤리성을 담보해줄까요?

  • 오리베 2011.06.05 16:24 (*.60.248.147)
    음 이건 왜곡이네요. 제가 무슨 원주민 얘기를 서구우월주의에서 얘기합니까? 문명사회니 자연상태니 하는 말도 본인이 먼저 꺼내지 않았나요?

    님이 도덕을 물었는데 (도덕이 없는) 자연상태의 호주의 원주민의 예로 답한 것은 순환논리다라는 말에서 서구 우월주의가 느껴지면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문명'이라는 개념을 '육식을 위해 사냥(활을 쓰든, 올무를 쓰든)을 하는 행위'로 한정하여" 제 글 어디에서 그런 한정을 감지하셨나요? 신기할 따름이네요.

    제가 든 예의 핵심은 고기의 공급이 도시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는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입니다. 문명이니 자연상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건 님의 일방적 해석일 뿐이죠.

    제가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남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렇게 단정하면 안 되지요.
  • 우리 2011.06.05 16:33 (*.209.29.61)
    스스로를 좁고 한정된 곳에 몰아 넣어 놓고서는 그 안에서 서로 물어 뜯고 절규하고 있지 않은가.

    그 갇힌 곳에서 자기들 딴에는 진지하게 X, Y, Z 변수를 고려하면서 방정식을 풀어 보려고
    열심히다. 그 들이 항상 고려하는 변수는 X, Y, Z 로 한정되어 있고 추가해야 할 다른 변수는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벽의 갈라짐 틈 사이로 희미한 볕이 새어들어오고 무엇인가
    뭐라하는 듯 알듯 모를듯 귀에 들리기도 하지만 관심도 없고 때로는 짜증도 난다. 자기들 삶에는
    전혀 어떤 의미도 없고 조금의 영향도 없는 쓸데없는 것으로서 그 들이 고민하는 문제의 변수로
    고려할 생각을 하지 못 한다.

    둔한 자는 둔한 자대로 그냥 주입된 상식(?)이 전부인 것으로 믿으며 살다 죽어간다.
    나름 똑똑하다는 자는 한정된 변수를 가지고 순환논리에 빠지고 딜레마에 허우적거린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만물의 영장이며 과학적 지성으로 무장한 참 똑똑한 존재라고 자위하며
    하루 하루를 보낸다.

    이 우주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고 너무나 넓고 다른 차원들도 있다는데
    가보지 않아 모르겠다. 자신들이 누구이고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니, 아마 분명 우연성으로
    인해 존재하고 진화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안에 생명체나 의식있는 존재들은 가뭄에 콩나듯이
    저기 멀고 먼 곳에나 있을 것이다. 아니 전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연 UFO 는 사실 모두 착각일 것이

    다. 음... 만약 UFO가 있다면 그 녀석들은 유니콘을 사육하여 잡아먹고 그 뿔은 다려서 보약으로 먹지

    않을까... 어찌됐든 먹어야 사는 것은 우주의 필연적 법칙이니까.

    단서 조항과 한정된 변수로 무장된 우리의 지성은 여전히 희뿌연 안개속을 헤메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허허 이거 참, 이러다가 또 영원속으로 길을 잃는 것은 아니겠지?

    What?
    뒈지면 되어지리?
    아이고 이런, 죽음도 당신을 그 안개속에서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 우리 2011.06.05 16:35 (*.209.29.61)
    좀 더 높은 의식의 존재들이 보기에 현 인류가 구축한 세계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겠지만
    그 안에서 생멸하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크든 작든 부정적인 생각과 행위를 반복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축한 이 세계속에서 각자는 객체이면서 주체이므로 분명 이 우주엔 다른
    길이 있음에도 오던 길을 갑자기 바꾸기엔 어렵지요. 그 말은 우리의 진동 수준에서는 힘을 얻기위해서
    뭔가를 섭취한다는 말이지요.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나 살기 위해서라면 먹을 것이고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다른 생명체를 희생시키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반작용 내지는
    카르마는 쌓일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 고통으로 환경적 재앙으로 서서히 또는 갑자기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옛 풍속들 중에서 자신들을 위해 희생당한 생명들을 위로하는 위령제같은
    의식을 치른 후 그 희생물들을 먹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행위들은 어쩔 수 없이 생명을 빼앗은 것에
    대한 미안함과 위로 또 그 들을 하나의 의식체로 존중하는 마음 등 이었을 것입니다. 또 새 집을 짓고
    난 후 '고사'같은 의식을 치르기도 하는데 이 때는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휘젓고 파내서 그 안에 살던 여러

    생명들이 죽고 거주지를 빼앗김에 대한 일종의 위로와 같은 것이겠죠.

    우리는 우주의 모든 것들에 의식이 깃들어 있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를 깨우쳐 주고자 하는
    존재들은 이 지구도 하나의 의식체로 인식합니다. 즉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구는 스스로 어느 임계점에 다다르면 정화의 절차를 밟기 시작하며 결과적으로 지구상의 자기장의 변화,

    화산, 지진, 지각의 변화, 해일, 기후변화 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꼭 먹어야 만 한다면 먹고 불가피 하다면 죽이십시오 또 사는 게 심심해서 뭔가 고통을 주고 헤치고
    싶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오던 것처럼 하십시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작용과 카르마 등을 피할 생각은
    마십시오. 죽음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우주의 끝으로 달아나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에

    관하여 누군가 우리를 심판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심판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들 안의 진실한 '영혼'이 그 심판자이며 우리 영혼들은 어떠한 사실도 잊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행위에 부합한 결과를 스스로에게 가져 올 것입니다. 우주의 법칙은 이끌림의 법칙이라고 표현 할 수 있겠

    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그 수준에 맞는(발산하는 진동 또는 파장에 맞는) 현실을 끌어 온다는 것

    이죠. 현재의 삶을 자기 중심적으로 합리화 시킨다면 우리들은 이와 같이 권태로우며 고통과 분노가 끊이

    지 않는 세계속에서 계속 남게 될 것입니다.

    이 우주는 경쟁과 투쟁, 약육강식의 논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세요.
    우리 모두 먹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으며 항상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
    이 우주엔 죽음이란 없으며 우리는 영원한 존재임을 믿으세요.

    무조건 믿으라 하니 거부감이 드시나요? 사이비 교주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
    그러나 옛 부터 선각자들은 깨닫고 가르치기를 믿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우주는
    생각(의식)에 반응하고 생각(의식)에 의해 창조된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그럼 우리가 마치 신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하고 묻고 싶겠지요? 네 미안하게도 '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으나 답은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모든 문제의
    열쇠이지만 아직 우린 실제적인 체험을 할 수 없는 단계에 멈추어 있는 것입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UFO 타고 드나드는 외계인들이 자기들을 명확히 드러내기 원한다면 그 때 한 번 붙잡고
    물어 볼 수 있으면 하군요. 아마 우리들 중 누군가는 '그 거짓말이 참 말이야?' 하고 물을지도 모르겠군요.
    ^^
  • 지나가다 2011.06.05 18:33 (*.161.86.167)
    오리베님 : "담배의 예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그 흡연자가 개인적으로 흡연의 폐단을 생각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완전히 못 끊고 줄였으면 그건 그럴 수 있지요.

    허나 그 흡연자가 흡연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흡연이 왜 해악인지를 설파하고 흡연권자의 논리를 반박해가며 논증을 시도하지만 정작 본인은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노력 중이다, 이게 용납이 되시나요?

    아이의 체벌은 폭력이니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며 모든 이론과 근거를 인용해가며 체벌 불가피론자들의 논리를 공개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던 분이 집에 가서 일정한 경우에는 아직 교육적 체벌을 하긴 한다, 허나 노력 중이다, 이거 용납 되십니까?"

    답변 :
    암에 관한 한 권위자인 의사가 있어요. 암 병동을 방문해 폐암 환자들에게 담배의 폐해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줍니다. 아, 물론 그렇게 말하는 그 의사는 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예 금연한 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수술의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자, 이 경우 이 의사의 행동이 그렇게도 비윤리적일까요?
    담배의 폐해는 '팩트'입니다. 폐암 전문의는 이 '팩트'를 알려주려고 노력한 겁니다. 본인이 담배를 피우든 피우지 않든, 그 폐해는 고정불변의 진리입니다. 고정불변의 진리를 환자에게 일깨워주는 데 왜 윤리적으로 지탄받아야 하는 거죠? 설령 완전한 언행일치를 실천하지 못한다고 가볍게 웃어줄 수는 있지만.

    철학자들이 이런 얘길 합니다. 문법이 비슷하면 종종 철학적(논리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다음 두 가지를 비교해봅시다.

    1. 금연을 노력중인 한 의사가 암 병동에서 폐암 환자들에게 흡연의 폐해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는 상황.

    2. 편법으로 증여세를 탈세한 모 대기업회장이 검찰 조사 후 "국민 여러분께서 정직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상황.

    1의 상황과 2의 상황이 비슷합니까? 그 의사는 모 대기업 회장하고 '동등하게' 비윤리적'입니까?

    '체벌'의 논리로 지적을 하셨어요. 아주 예리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아주 고기를 끊지는 못하고 노력하는 분-줄여서 '육식(을) 주저(하는)자'라고 표현하기로 하죠-이 육식주의의 비윤리적임을 논리적으로 얘기하는 것과, 폭력 선생이 아이들에게 폭력의 비윤리성에 대해 강조하는 건 차원이 묘하게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체벌은 곧 '폭력'이고 이 '폭력'에는 '스키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육식주의'에는 '뿌리 깊은' 스키마가 존재해요.
    이 '스키마(Schema)'란, "우리의 신념과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그리고 그것을 역으로 그것들에 의해 형성되는-심리적 틀"을 말합니다. 멜라니의 말을 들어봅시다.

    "스키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자동적으로 정리하고 해석한다. 예컨대, '간호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아마도 흰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을 떠올릴 것이다. 간호사 중에는 남자도 있고 흰 가운을 안 입는 사람도 있으며 병원 밖에서 일하는 사람도 적잖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환경에서 여러 유형의 간호사를 자주 접하지 않는 한, 우리의 스키마는 이런 일반화된 이미지를 고수한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드는 엄청나게 다양한 자극들을 검토하고 해석한 뒤 일반적 범주(category)들에 나누어 넣는 일말이다. 스키마는 요컨대 정신적 분류체계다.
    우리는 동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관해 스키마를 갖고 있다. 가령 동물은 포식동물과 그 먹이가 되는 동물, 유해동물, 애완동물, 또는 식용동물 따위로 분류된다. 우리가 특정동물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그것의 관계-사냥할지, 도망칠지, 박멸할지, 사랑할지, 아니면 먹을지-가 결정된다. 이 범주들 사이에 중복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기와 관련해 생각하는 한 대부분의 동물은 식용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하는 스키마를 갖고 있다.....중략...이처럼 특정동물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그들을 대하는 방식은 그게 어떤 동물인가 보다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떠한가에 더 달려있다. 우리는 소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지만 개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그래서 소는 먹을 수 있는 동물로, 개는 먹을 수 없는 동물로 인식하게 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이 과정은 순환적이기도 하다. 믿음이 궁극적으로 행동을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행동이 믿음을 강화한다."

    마지막 말에 주목해 주십시오. "믿음이 궁극적으로 행동을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이 행동이 믿음을 강화 한다"고 합니다. 육식이 내면화 된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소, 돼지를 포식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이는 너무나 오랜 세월에 걸쳐 내면화 된 것이라, 이를 부정하는 것에 심한 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예컨대, 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문화가 골수에 박힌 옛 어르신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 또는 한국의 '자유부인(영화)'은 완전히 '썩을 놈 년'인 거죠? 남하당 대표 박영진 같은 남자들에겐 남자가 부엌에 들락날락 거리는 건 부정한 일로 범주화/내면화 되었겠죠?

    혹시, 남자 분들 가운데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쇠러 가면 조금이나마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지요? 상차림은 오로지 여자의 몫이죠? 남자는 부엌에 들어갈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부당하다는 느낌을 가진 남자가 (요즘엔 잘 모르겠지만) 과거에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게 그저 '관례니까' 하면서 합리화하려는 건 차라리 그거에 대해 '의식'은 한다는 것이니까 차라리 나은 것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옛 어르신들은 그런 '의식'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죠? 이게 스키마로 인한 내면화의 결과입니다.
    육식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바로 이런 상태라는 겁니다. '의식'조차 못 한다는 거죠. '육식? 에이, 뭐, 원래 그런 거지.'라고 생각하는 분은 그나마 육식의 윤리에 대해 '생각의 표면'에 도달하기는 한 것이지만, 생각조차 안 한 분들 역시 만만찮게 많을 겁니다.

    그러나'체벌'은 어떤가요?
    폭력에 찌든 사람이 아닌, 정상적 이성이 작동하는 사람이라면 폭력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너무나 명백하게-선험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건 스키마고 뭐고 없어요. 만일 그러한 스키마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군사독재시절에 폭력에 길들여진, 그러니까 이성이 왜곡된 상태의 사람인 겁니다(영화, <말죽거리잔혹사>에서의 교련선생을 생각해봅시다).

    '육식의 스키마'는, ES335님처럼 어려서부터 '원래' 어떤 이유에서든 고기를 입에 담지 않는 분이라면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스키마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심지어 육식의 비윤리성을 사유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 스키마로부터 100% 자유스러운 사람은 몇 안 될 겁니다.

    반면에 '체벌'은 어떻습니까. '체벌'의 비윤리성을 강조하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폭력을 쓰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에게는 폭력의 스키마가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폭력의 습관화로부터도 거리가 멀겠죠.
    반면에 육식을 비판하려는, 그러나 육식의 스키마를 오랜 세월 동안 지니며 살았던 인간에겐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육식의 비윤리성을 분명 인식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스키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이 '체벌'의 경우와는 비교도 안 되게 힘들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하면, '육식의 스키마를 거부하기 위한 사람의 노력'이, 스키마가 없는 상태에서 '체벌'을 거부하려는 사람의 노력보다 월등히 힘들다는 얘깁니다. 고기를 어쩌다 한 점 먹었든, (그럴 일은 거의 없지만) 어쩌다 딱 한 대 때렸든, 두 경우에는 언행일치를 실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은 받겠지만, '체벌'의 경우 그 비판이 더 혹독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고기 한점 먹은 사람에겐 언행일치에도 불구하고 '왠만하면 먹지 않으려는 그 노력'을 인정해주는 거죠. 따라서 가볍게 웃어줄 수는 있겠지만 대 기업 모 회장의 발언과 동급 취급하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물론, 고기 먹을 건 다 먹어가면서 육식주의 비윤리 어쩌고 하는 것도 혹독하게 비난 받겠지만.
  • 지나가다 2011.06.05 18:56 (*.161.86.167)

    오리베님 : 음 이건 왜곡이네요. 제가 무슨 원주민 얘기를 서구우월주의에서 얘기합니까? 문명사회니 자연상태니 하는 말도 본인이 먼저 꺼내지 않았나요?

    님이 도덕을 물었는데 (도덕이 없는) 자연상태의 호주의 원주민의 예로 답한 것은 순환논리다라는 말에서 서구 우월주의가 느껴지면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문명'이라는 개념을 '육식을 위해 사냥(활을 쓰든, 올무를 쓰든)을 하는 행위'로 한정하여" 제 글 어디에서 그런 한정을 감지하셨나요? 신기할 따름이네요.

    제가 든 예의 핵심은 고기의 공급이 도시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는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입니다. 문명이니 자연상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건 님의 일방적 해석일 뿐이죠.


    답변 : 솔직히 이런 님께서는 도덕과 자연 상태에 대한 제 얘기에 대해 납득을 못하고 계신 걸로 보입니다. 자꾸 이미 언급한 사항에 대해서 재차 되묻고 있거든요.

    오리베님께서는 분명 제게 이렇게 따지셨어요.
    "호주 원주민 얘기는 자연 상태를 예를 든 것이라 순환논리라고요? 저는 도덕과 자연상태의 상반이라는 관점은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오히려 님이 그 사람들을 '문명사회'가 아니므로 열외로 하시겠다는 뜻으로 보이네요. ...생략..."

    위의 언급, 즉 "님이 그 사람들을 문명사회가 아니므로 열외로 하시겠다는 뜻으로 보인다"는 말에서 저는 님께서 저를 '비판'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전 자연 상태에서의 원시인의 처지와 원주민의 상황이 유사하다면, 그것은 윤리의 영역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덫 사용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묻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라는 요지의 얘기를 한 것이고요, 그렇다고 해서, 오지의 원주민이 원시시대의 원시인-또는 유인원-처럼 모든 분야에서 도덕적 백치 상태만은 아닐 것이므로(왜냐하면 그들은 21세기를 살고 있으니까) 오로지 수렵문화 하나만 보고 '비문명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 거예요. 문명이란 건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세요.

    "님이 도덕을 물었는데 (도덕이 없는) 자연상태의 호주의 원주민의 예로 답한 것은 순환논리다라는 말에서 서구 우월주의가 느껴지면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라고요.

    분명히 '서구우월주의가 느껴진다'고 말씀하셨죠?
    오지의 원주민들의 문명들 중 하나일 뿐인 '올무나 덫 사용하기'가 "非윤리적-이라기보다는 無윤리적인 자연 상태"라는 단 하나의 사실을 빌미로, 그들 전체의 모든 문명-예컨대, 성인식, 결혼식, 농경 방식, 옷 장식 등-을 도외시 한 채 그들은 '자연 상태'에 있으므로 반서구문명, 즉 야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누차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서구우월주의가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으시다니, 저로서는 님께서 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되어지지 않아요.
    (아, 물론 저도 부분부분 오해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 말이 오해받는 걸 피하기 위해 최대한 길고 자세하게 글을 쓰는 게 버릇이에요. 제 자신이 간략한 글은 정확히 파악을 못 하니까요. 물론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납득을 못 시켰다면 제 글쓰기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 점 반성합니다....)

    오늘은 이만...달리 할 일이 있으니....
  • 오리베 2011.06.05 19:21 (*.60.248.147)
    오호라....

    1번 예는 의도적이신가, 아주 잘못 선정되었네요. 왜 폐암 환자라는 특수대상을 예를 드십니까? 언제 님이 고기 먹으면 죽을 인자를 가진 예를 들면 대장암환자들에 대해서만 고기 먹지 말자 했나요? 폐암 환자 말고 정상인을 대상으로 님의 예에 한 번 대입해보세요. 그래도 대중에게 흡연의 죄악을 설파하는 그 의사의 행위가 정당한지. (그리고 개인 건강에 대한 해악이라는 실용적 측면이 아니라 흡연을 행위규범적 측면에서 "죄악"시 해야 육식의 예에 해당하는 겁니다.)

    2번은 회장의 탈세 행위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선험적으로" 불법이고 비윤리적이잖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그냥 개인의 위선 차원이나 논리의 모순을 넘어 당연히 더욱 몹쓸 행위로 보일 수밖에요. 그러니 비교 대상 자격 미달이죠.

    그리고 체벌에 대한 반론은 체벌 = 폭력을 전제로 하시니 저런 볼것도 없는 escape 성 결론이 나오는 것이네요. 그러나 사회 상규에 맞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수준의 체벌이라는 것은 전혀 전제가 안 되시는가 봅니다.

    그래서 스키마 때문에 고기 끊기가 힘드시다고요? 그래서 그건 다른 문제라고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정말 말이 안 나와요.

    또 무슨 예를 들어도 또 각각 거기에 맞는 이론과 인용과 그에 각색된 예를 들어 절대 인정 안하실 것 같고요,

    그래도 한가지, 논리 전개를 할 때 해박한 지식은 도움이 되긴 하지만 현란한 어법과 학구적 이론과 풍부한 인용 이런 것으로 논증이 되고 진정성이 확보되는게 아니랍니다.

    예전부터 본 님의 글에서 받은 인상은, 님은 자신만의 논리 세계를 치밀하게 구축하고 본인의 논리에 대한 정당성에는 한치의 의심도 거부하며 그 안에 기거하시기를 즐기시는 분 같네요. 더 이상 서로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에스떼반 2011.06.05 20:02 (*.122.97.77)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나 살기 위해서라면 먹을 것이고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다른 생명체를 희생시키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반작용 내지는
    카르마는 쌓일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 고통으로 환경적 재앙으로 서서히 또는 갑자기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옛 풍속들 중에서 자신들을 위해 희생당한 생명들을 위로하는 위령제같은
    의식을 치른 후 그 희생물들을 먹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행위들은 어쩔 수 없이 생명을 빼앗은 것에
    대한 미안함과 위로 또 그 들을 하나의 의식체로 존중하는 마음 등 이었을 것입니다. 또 새 집을 짓고
    난 후 '고사'같은 의식을 치르기도 하는데 이 때는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휘젓고 파내서 그 안에 살던 여러

    생명들이 죽고 거주지를 빼앗김에 대한 일종의 위로와 같은 것이겠죠.

    우리는 우주의 모든 것들에 의식이 깃들어 있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를 깨우쳐 주고자 하는
    존재들은 이 지구도 하나의 의식체로 인식합니다. 즉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구는 스스로 어느 임계점에 다다르면 정화의 절차를 밟기 시작하며 결과적으로 지구상의 자기장의 변화,

    화산, 지진, 지각의 변화, 해일, 기후변화 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꼭 먹어야 만 한다면 먹고 불가피 하다면 죽이십시오 또 사는 게 심심해서 뭔가 고통을 주고 헤치고
    싶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오던 것처럼 하십시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작용과 카르마 등을 피할 생각은
    마십시오. 죽음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우주의 끝으로 달아나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에

    관하여 누군가 우리를 심판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심판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들 안의 진실한 '영혼'이 그 심판자이며 우리 영혼들은 어떠한 사실도 잊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행위에 부합한 결과를 스스로에게 가져 올 것입니다. 우주의 법칙은 이끌림의 법칙이라고 표현 할 수 있겠

    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그 수준에 맞는(발산하는 진동 또는 파장에 맞는) 현실을 끌어 온다는 것

    이죠. 현재의 삶을 자기 중심적으로 합리화 시킨다면 우리들은 이와 같이 권태로우며 고통과 분노가 끊이

    지 않는 세계속에서 계속 남게 될 것입니다.

    이 우주는 경쟁과 투쟁, 약육강식의 논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세요.
    우리 모두 먹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으며 항상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
    이 우주엔 죽음이란 없으며 우리는 영원한 존재임을 믿으세요."


    윗글을 올린분의 내용을 다시금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자 옮겨 왔습니다.
    우리의 생각, 내면의 의식이 바뀌면 많은 변화가 일어 납니다.

    인류의 여러 선각자들께서 남긴 가르침의 근본은 "내 자신의 본질을 깨 달아라" 이 말안에 많은것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육체가 그 수명이 다하면 인과에 따라 어디론가 다른곳으로 거주처를
    옮겨 가게 되며 본질은 영원히 존재하게 되니 결코 없어 지는것이 아니지요.

    우리의 지구별이 우주의 어떤 별보다 짧은 시간에 빠른 영적 진보를 이룰수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태어남을 행운으로 여기고 그 소중함의 의미를 안다면
    이에 적합한 생을 살아 나가고자 하는 목표를 가질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도 하나의 의식을 가진 존재로 본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이를 뒷받침해 줄수 있는
    정신문화는 오히려 자극적이고 탐욕에 찌들은 문화에 밀려 퇴보를 하고
    지구별 자체에 온갖 학대를 가해 왔기에 지금까지는 인내와 인내를 거듭해 왔지만
    지구도 스스로 자체의 생존을 위한 정화작용에 들어갈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으로
    우리가 지구에 행한 작용(행위)에 대한 반작용이 격렬하게 시작하려는 시점에 와 있는것 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작은 실천으로서 생활 습관등 여러가지 방향의 전환이 시급할때라는것을
    인식할수 있기를 바라고 이를 실천하고 옮겨 나가는것은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겠으나
    실천 여부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초래 할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 입니다.
  • 지나가다 2011.06.06 14:04 (*.161.86.167)
    스키마에 대해 설명이 부족했나요?
    아무래도 제가 의도한 바의 의미가 잘 전달이 된 것 같지 않아요.
    아래의 두 경우를 봅시다.

    가정 1)
    채식주의자가 A가 인터넷상에서 육식주의에 대한 토론을 벌입니다.
    홍길동이라는 분의 "채식하면 식물은 안 불쌍하니?"라는 내용의 말이 시발이 되어
    결론으로 도덕적 선긋기가 필요하고, 따라서 자신은 동물과 식물 사이에, 그리고 곤충 사이에서도 해충과는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가정 해봐요.
    토론을 마친 그는 어느덧 배가 고픕니다. 평소대로 그는 돼지고기를 대신할 요리로 된장찌개를 선택합니다. 돼지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래서 어머니가 끊여주신 된장찌개와 채소류만 먹고 삽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요리하시는 걸 보니, 된장찌개의 국물을 바로 멸치로 우려내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태도에 일관성이 깨진 것을 깨달은 이 채식주의자는 김치찌개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한 동안 어머니가 끊여주신 김치찌개를 먹어요.
    그러나 어느 날인가, 김치찌개에 사용된 김치에 새우젓이 사용되었다는 걸 알아채요.

    그는 혼란에 빠집니다. 돼지와 멸치/새우의 존재론적 위계 때문에 말입니다.
    개를 위해서는 벼룩 박멸을 허용하는 것과 멸치를 먹는 건 다른 얘기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돼지와 멸치는 다른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가정 2)
    인터넷상에서 육식주의의 부당함에 주장한 한 채식주의자 B가 있습니다. 그 역시 '뭘 모르고' 고소나 돼지고기 대신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만 먹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 끝에 멸치와 돼지는 존재론적 위계가 다르다고 생각하여 그들 사이에 도덕적 선을 긋습니다. "돼지, No!! 멸치, Yes....."

    ----------------

    톨스토이 같은 근본주의자라면 B보다는 A가 도덕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겁니다. 그는 아마도 "멸치가 빠지면 된장찌개가 맛이 안 난다고? 그럼 차라리 맛없게 먹어라"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근본주의자보다 조금 더 관대하다면, B의 태도를 '위선적인' 태도라고 말하지는 않겠죠.
    '초-근본주의자'라면, "풀도 고통을 느낀다"며 A나 B모두 위선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B가 "돼지 No!!, 멸치, Yes....."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리고 인터넷상에서 "돼지가 불쌍하니까 그만 잡아먹자"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에게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B에게 육식에 대한 스키마가 완벽하게 해소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것이 어찌 일시에 해소되겠어요) 돼지에게 부여했던 의미를 새우나 멸치에게까지 확장하지는 못합니다. 보통은,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보다 스키마에 의해 태도를 결정짓게 되니까요. 그에겐 멸치에 대해 이 오랜 스키마가 적용되는 것이지요.

    구제역 때, 돼지가 산 채로 생매장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보며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 다들 보셨지요? 그분들 중 어떤 분은 이후에 육식을 끊은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결심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지키지 못하거나 또는 육식에의 스키마를 해소하지 못하고 육식을 계속 하면서도 위화감은 여전히 남아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B의 경우처럼 한정된 육식만을 허용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요.

    어쨌거나, 이 분들이 "소나 돼지는 정말 그만 먹어야 해"라고 말했다고 했을 때, "육식에 완전히 성공한 어머니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인 태도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우리는 이들에게 "육식의 스키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인간적 오류와 한계는 보여줄지언정"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본문에서

    1. 인간의 육식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하기는 어렵다는 논리를 폈고
    2. 그 이유는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권과 역지사지의 논리 때문인데
    3. 그럴 경우 식물의 생명권은 어찌해야 하느냐는 논리에 부딪히게 되므로
    4. 따라서 논리의 일관성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건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하므로 어느 정도의 도덕적 선긋기는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했고
    5. 마지막으로 채식주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 얘기했어요.

    강경하게 <모든 유의 육식 반대>라는 입장을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책의 저자인 멜라니 조이의 경우라면, 그들에겐 한 조각의 소세지도 허용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만,
    '육식의 비윤리성'을 논리적으로 주장함과 동시에 '일관된 논리를 관철하는 것의 인간적 어려움'과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딜레마'애 대해서도 얘기한 제 글은 입장이 좀 다르죠?

    제 입장과 메라니 조이의 입장이 같지 않기 때문에
    '말과 행동의 비일관성'을 비난하기 위해 '체벌'을 끌어다 온 건 다소 가혹하다는 생각에 '폐암환자' 얘기를 꺼내든 거예요. 그런 식이라면, 저도 이렇게 비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는 의도인 거예요.

    따라서 제 글을 긍정적으로 보신 분들이라면,
    "비록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위와 같은 이성적 이유 때문에 육식을 중단하고자 노력 중인사람의 글"이라고 생각할 것이고요,

    제 글을 부정적으로 보신 오리베님 같은 분들이라면,
    "아직은 고기를 먹는 입장에서 육식의 도덕적 정당성 운운하는 것 자체가 가식 아닌가"라고 생각할 겁니다.

    관점이 의미를 만드는 것이죠.



    오리베님 : 그리고 체벌에 대한 반론은 체벌 = 폭력을 전제로 하시니 저런 볼것도 없는 escape 성 결론이 나오는 것이네요. 그러나 사회 상규에 맞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수준의 체벌이라는 것은 전혀 전제가 안 되시는가 봅니다.

    답변 : '폭력'이란 반드시 '두들겨 패야' 성립하는 개념은 아니고(사전적 정의처럼), 예컨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원산폭격'같은 얼차려를 지시해도 폭력이라고 보는 겁니다.
    고로 체벌에 대한 반론은 당연히 '체벌=폭력'이라는 전제에서 성립하는 것이지요. '체벌'이 폭력이 아니라면 대체 왜 반대하는 거죠?
    체벌에 대해 옹호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바로, "사회 상규에 맞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수준"의 것이므로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런 건 전혀 파악이 안 되시나 봅니다.

    '관점'이 '의미'를 만들고 '차이'를 만드는 것이죠.

    그러고보니 인간의 육식에 대해 "사회 상규에 맞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수준"의 것이므로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님은 생각하고 계신 거죠?
    그 옛날, 우리 조상들도 노비제에 대해 "사회 상규에 맞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하시면서 옹호하셨겠죠?
    일반적 가치관을 마치 보편적 가치관인양 착각하는 대표적인 경우에요.


    오리베님 : 또 무슨 예를 들어도 또 각각 거기에 맞는 이론과 인용과 그에 각색된 예를 들어 절대 인정 안하실 것 같고요,

    답변 : "각각 거기에 맞는 이론과 인용"을 제시하는 게 님처럼 "원래 그렇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논리적이라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오리베님 : 그래도 한가지, 논리 전개를 할 때 해박한 지식은 도움이 되긴 하지만 현란한 어법과 학구적 이론과 풍부한 인용 이런 것으로 논증이 되고 진정성이 확보되는게 아니랍니다.

    답변 : 그럼요. 그런 것을 일러 <'권위에의 논증'에의 오류>라고 하는 겁니다. 예컨데 인간 사회의 약육강식을 합리화 하기 위해 <종의 기원>의 다윈을 끌어 들이는 거죠. 예전에 어떤 할머니분 께서 '사회다윈주의'을 애기하면서 그렇게 정당화 했잖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학구적 이론'과 '풍부한 인용'자체가 권위 논증에의 오류는 아니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은 다 오류게요.
    어떤 권위에 의존한 글이 오류임을 밝히려면, 논리적으로 비판하든가, 거기에 타당한 다른 권위자의 견해를 제시하면 되는 거예요.

    오리베님 : 예전부터 본 님의 글에서 받은 인상은, 님은 자신만의 논리 세계를 치밀하게 구축하고 본인의 논리에 대한 정당성에는 한치의 의심도 거부하며 그 안에 기거하시기를 즐기시는 분 같네요. 더 이상 서로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답변 : 제 본문 글을 그렇게 보셨나요? 누군가 제게 정당한 논리를 제시하면 저는 한 치 이상의 반성을 합니다. 그런데 님처럼 '원래 그렇다'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제 논리에 대해 '한 치의 의심'을 하는 게 가능하겠어요?
    그리고 방해는요. 님께서는 님의 견해에 반박하는 것을 '방해'라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세 번 말하게 되네요.
    "관점이 의미를 만든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시든 전적으로 자유이므로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는 않겠습니다. 또 비난한다고 해서 육식주의의 스키마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제 입장에서 크게 기분 상할 일도 아니고요.
    그럼 이만...(저는 이만 물러납니다. '원래 그렇다'를 논리에 반박하기 위한 댓글로 시간 뺏기기엔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고로 제가 답글을 달지 않아도, 이 이상의 글을 전혀 보지 않아도 양해 바랍니다.^^)
  • 오리베 2011.06.06 20:20 (*.60.248.147)
    지나가다님.

    앞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남의 답변을 이용하지 말고 처음부터 그냥 본인의 글로 쓰세요.

    왜 질문으로 남의 글을 유도하고는 그걸 카피페이스트해다가
    임의대로 전제를 갖다붙이고 의도를 유추해서 도마위에 놓고 해부하고 강의하느냐 말입니다.
    답글을 달면 또 그걸 카피해다 갖다 붙여서 또 똑 같은 식이죠.
    그래놓고 이게 오류네, 그런 답변 나올 줄 알았네, 뭐네.

    내가 님의 학생입니까? 아니면 뭘 알려 달라고 했습니까?
    이런 건 경우가 아니지 않나요?

    아니면 내가 님의 글을 먼저 직접 비판이라도 했나요?

    국내나 해외싸이트에서도 가끔 신경전은 있지만 이런 일관된 글쓰는 방식은 정말 처음 봅니다.
    말려든 당사자는 별로 기분이 안 좋거든요.
    특히 논쟁의 의지도 없고 논쟁가치도 별로 없다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더구나 자기 뜻이 엉뚱하게 해석되는 경우에는.

    그래도 쓰레드를 계속하지 않으신다니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저 역시 제 편에서 보는 님의 논리적 오류를 아무리 설명해드려도 본인이 못 받아들이고 님 편에서 보는 오류만 주장하며 논리적으로 대응해보라니
    영원히 대화가 될 수가 없지요.
    저 또한 무슨 시간과 정력이 그리 남아돌겠습니까?

    스스로 논리의 기준이든 진리의 척도이든 어찌 여기시든 상관 없으나
    앞으로는 적어도 제 글은 두 번 다시 카피페이스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두동강 2011.06.07 21:53 (*.161.27.166)
    ㅠㅠ 소귀에 경읽기라
  • 11 2011.06.08 15:21 (*.145.223.171)
    읽다 포기.
  • canna 2011.06.08 19:49 (*.254.83.169)
    "1984년 날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 가던 에티오피아의 사례를 보자. 그 당시 에티오피아는 일부 경작지를
    아마인 깻묵, 목화씨 깻묵, 평지씨 깻묵을 생산하는 데 할애했다는 사실을 대중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 작물들은
    가축 사료로 영국을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에 수출할 목적이었다.
    (만일 그 토지에 인간을 위한 곡류가 심어졌다면 에티오피아인은 굶주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고 저쩌고 "

    대중들이 모르고 있었다니 ? 세계인이 다 알고있는사실이였는디....

    에티오피아의 무역경제 80%가 농업으로 이루어졌고, 국민들 85%가 농사를 짓고사는 나라입니다.
    커피, 설탕, oilseeds, gold, hides, skins, pulse...등을 수출해서 돈을버는 나라였습니다.
    당연히 아마인 깻묵, 목화씨 깻묵, 평지씨 깻묵...등, 땅에서 생산할수있는 곡물, 작물들은 다 생산해서 팔았어
    먹고 사는 나라였어요. 지리학자들은 에티오피아를 " Garden of Eden " 혹은 " Bread Basket " 이라고
    표현하지요. Gold, 대리석, 석회암, 탄탈, potash, 천연개스, 철광석, 석유, 지열에너지...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일부 경작지를 가축사료를 재배했다고, 8 백만명이 기아로 죽어갔다란것은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이 작가는 왜 에티오피아에서 기아로 수백만명이 죽어갔는지 원인도 모르는 멍청이 경제학자인지...아니면...무슨 선동의 목적으로 글을 썼던지...
    오죽했으면, Rockefeller대학 교수, 유전학자 놀톤 진덜이, 제레미 리프킨을 이렇게 불러겠습니까 ?
    " fool(바보 ) " and a " demagogue ( 선동 정치가 )"
    하버드 대학 교수, 스텝픈 제이 골드도 제레미 리프킨의 책을 읽고 이렇게 비평했었지요.
    " a cleverly constructed tract of ANTI-INTELLECTUAL PROPAGANDA masquerading
    as scholarship...I don't think I have ever read a SHODDIER work. "

    에티오피아는 공산주의/ 막스주의 국가입니다.
    막스주의 국가이다보니 국민들이 농사를 잘지어 대풍작을 하고싶다는 incentive가 없다는것입니다.
    대풍작을 해봐야, 결국 모두 정부에 바쳐야하니 고생해서 농사를 지을필요가 없다는것이지요.
    그러니, 농업기술을 배우고싶은 incentive역시 없다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에는 수백개의 강과 수천개의 계곡들이있지요.
    가뭄을 대비해 댐도 만들수있고, 저수지도 만들수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모두 자연비에만 의존해 농사를 짓고, 그때 그때 농사가 잘되면 잘되는것이고 안되면 안되는것이고...
    소유권이 없으니, 모두들 배울려는 의지가 없다는것이예요.
    에티오피아의 성인들 61%가 글을 모른는 무식인들이라고 하잖아요.
    거기에다, 일을 해야할 30~34세의 성인들 3백만명이 HIV/AIDS환자라고 하잖아요.
    뿐만 아니라, 막스주의정권의독재와 권력분쟁으로 날마다 전쟁을하니 국민들이 농사를짖고 살아갈수있겠어요?
    1984년도에 에티오피아의 기아상태를 온세계에 전파하자, 유럽과 미국등 많은나라에서 식량과 돈을 원조했었는데 그 식량들과 돈을, 막스주의정권을 위해 싸우는 군인들만 배불리먹이고, 경제개발에 사용해라고 기부한돈들로 신무기와 탱크를 사들이는데 모두 소비했다 잖아요. 하는짓들이 북한의 개정일과 똑같지요.
    유럽과 미국에서 비판을하니, 이렇게 말을 한다는거예요.
    "Arrogant of the WEST to think that without whites, without pop stars,
    Africans would all be dead"
    말하는 꼬라상이도 북한의 개정일하고 똑같지요.

    본문을 쓰신분이, 제레미 리프킨을 권위자로 인정하고,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는거야 자유지만....
    여러 책들을 읽어보시는것도 자신의 논리를 펼치는데, 많은 도움이 될것같습니다.
    제가 읽어 볼만한 책 몇권을 추천해드리지요.

    *. Famine in Africa; Causes, Response, and Prevention
    by Jouchim Von Braun, Tesfaye Tekly, Patrick Webb
    ( 독일의 경제박사와 미국의 경제박사들이 함께 쓴 책입니다.)
    *. Food First; Beyond the Myth of Scarcities- by Frances Moore Lappe, Joseph Collins,
    *. Political Economy of African Famine- by R.E Downs

    이 책들을 읽고 나시면, 에티오피아의 기아 원인을 알수있을거예용~ ^^

    그리고, 서구의 백인들이 흑인을 노예로부려먹었지만, 중동의 이슬람교도들역시,
    유럽의 기독교 교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부려먹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먹었지요.
    그리고, 아프리카의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유럽인들한테 팔아넘기는 장사꾼들이
    중동의 이슬람교도들 이였지요.

    [Thomas Sowell, Race and Culture, BasicBooks, 1994, p. 188]
    estimates that 11 million slaves were shipped across the Atlantic and
    14 million were sent to the Islamic nations of North Africa and the Middle East.
    For every slave captured many others died. Estimates of this collateral damage vary.
    The renowned missionary David Livingstone estimated that for every slave who
    reached a plantation, five others were killed in the initial raid or died of
    illness and privation on the forced march.
    [Woman’s Presbyterian Board of Missions, David Livingstone, p. 62, 1888]
    Those who were left behind were the very young, the weak, the sick and the old.
    These soon died since the main providers had been killed or enslaved.
    So, for 25 million slaves delivered to the market, we have an estimated death of
    about 120 MILLION people. ISLAM ran the wholesale slave trade in Africa.



  • 히야 2011.06.08 20:29 (*.146.4.84)
    여기서 Norton Zinder 애기를 들을 줄이야!!!
    예전엔 이사람 논문 많이 읽었습지요.
  • 현학 2011.06.11 04:47 (*.12.8.110)
    이 난무하고 철학용어가 조자룡의 헌 창처럼 어지럽지만
    에스떼반님의 '내 안에 거시기있다', '현재의 "나"라는 존재는 없어질 수 있으나 또다른 "나"는 영원하다'라는데
    몰표 던지며 '나고 소멸함이 우주뿐 아니라 모든것을 아우르는 진리'라는데 '저도요'라고 답합니다
  • 둥굴래 2011.06.17 19:26 (*.131.78.100)
    대단들 하십니다. 하!!! 감탄
  • 뭐징? 2011.06.18 21:48 (*.94.113.7)
    하여튼 말이 길면 안돼.
  • 냐냐냥 2011.06.20 17:47 (*.190.18.95)
    읽고싶은데 윗부분이 까마득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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