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표에 회장님은 "뭐, 뭐를 만든다고? 돌았군"
아내가 유방암이었다 '외로움도 癌을 키운다'는 의사 말이 대못처럼 박혔다
14년간 해외 건설현장에서 기러기 생활한 나는 쉰 다섯에 사표를 던졌다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지금 무슨 말 하는 건가. 뭐, 뭐를 만들겠다고?"손꼽아 보니 딱 17년 전이다. 1994년 현대건설에서 이사였던 내가 1월 3일 신년 하례식이 끝나자마자 사표를 냈다. 사직 인사를 하러 박재면 당시 현대건설 회장을 찾아갔을 때였다. 박 회장은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라며 집게손가락을 당신의 머리에 대고 뱅뱅 돌렸다.
다른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바레인·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이라크·인도…. 꼬박 18년을 모래바람 휘날리는 중동 건설 현장에서 보낸 내가, 직장 생활 31년 동안 오로지 일밖에 몰랐던 내가, 그렇게 그만두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눈치였다. 게다가 그들을 두 번 놀라게 한 건 내가 댄 '사직의 변(辯)' 때문이었다.
- ▲ 지하 공방에서 만든 기타를 든 최동수씨. 마음에 드는 음이 나올 때까지 줄을 매고 풀기를 거듭하며 한 해 기타 2개를 만든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이제 기타를 만들려고 합니다. 일 때문에 미룬 제 오랜 취미와 함께 남은 인생을 보내렵니다." 내 나이 만 쉰다섯의 일이다. IMF 전이라 임원들에겐 정해진 정년이 없었을 때였다. 한참 남은 직장 생활의 유통기한을 내 스스로 접었다. 그 이유가 기타라니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동료들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기타도 기타였지만 사실 더 중요한 부분은 아내였다. 사직서를 내기 직전이던 1993년, 나는 싱가포르에서 국제회의 전시장 선텍 시티(Suntec city) 건설 현장을 맡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김없이 새벽 별 보기 운동을 하던 내게, 어느 날 아내가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병원에 갔더니 유방암 2기였다.
- ▲ 1976년(37세때) 첫 해외 파견지인 바레인 국립은행 건축현장에서.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외로움도 암(癌)을 키운다"는 의사의 이야기가 가슴에 대못처럼 박혔다. 해외 근무 때문에 14년이나 가족을 내팽개치고 '기러기 생활'을 한 나였다. 내가 아내의 암을 키웠다는 죄책감에 몸서리쳤다. 얼마 뒤 아내는 수술대에 누웠다. 아내의 가슴 하나가 없어지던 날, 내 가슴도 무너졌다. 그때 결심했다. 남은 평생, 함께 즐겁게 살다 가겠다고.
사표를 내기 전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냅다 계산기를 가져왔다. '탁탁탁' 계산기를 두드리던 아내가 말했다. "우리, 앞으로 삼시 세 끼 먹는 것만 하면 큰돈 안 들겠네요. 인생 1막은 어차피 애들 때문에 물질에 투자했으니, 이제 남은 인생은 정신적인 자유에 투자하자고요."
언제나 긍정적인 아내의 용단(勇斷)이 내 결심에 엔진을 달아줬다. 우리는 1977년 직원가로 싸게 분양받았던 서울의 아파트를 과감하게 처분하고 서울 인근으로 이사했다. 아파트 가격 차액이 새 삶의 종자돈이 됐다. 여윳돈이 있어 편안하게 취미 생활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다. 빠듯하게 살았고, 아는 후배들이 기술사인 나에게 감리일을 맡겨줘 생활비를 보탰다.
'기타와 아내'라는 제목의 내 인생 2막이 그렇게 시작됐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큰맘 먹고 선물해주신 기타 한 대로 나와 기타의 인연은 시작됐다. 눈썰미 있고 손기술 좋았던 나는 '소리 좋은 기타를 만들겠다'는 맹랑한 생각을 그때부터 키웠다. 장롱 서랍을 몰래 잘라 기타를 만들기도 했고, 체를 잘라 밴조도 만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외국에서 기타 재료를 조금씩 사 모았다. 해외 출장을 가면 기타 공방을 꼭 들러 공구와 재료를 사 왔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들 수 있는 재료부터 모아두자는 심산이었다.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기타 만드는 일을 하니 그게 다 밑천이 됐다.
허투루 기타를 만드는 흉내만 내고 싶지는 않았다. 사표 낸 다음 해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열린 국제 기타 페스티벌에 참가해 기타 제작 과정을 수료했다. 미국 힐스버그(Healdsburg) 아메리칸 기타 스쿨에서 단기 코스를 밟았다.
기타는 음악이 있는 작은 목조 건물이다. 내 인생 1막을 장식한 싱가포르 '선텍 시티', 카타르 도하의 국립대학 건물, 이라크 북부 역사 짓기가 종합 예술인 것처럼 기타 제작도 미학적 판단, 구조의 설계 등이 필요한 종합 예술이다. 나는 지금도 안전모를 쓰고 하루 18시간 현장에서 일하던 그 자세 그대로 기타를 만든다. 아침밥 먹고 집 지하의 공방에 틀어박혀 새벽 2시까지 기타와 씨름한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는 기타가 한 해에 2대쯤이다.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마음에 드는 소리가 날 때까지 줄을 매고 풀며, 나무 깎고 붙이기를 거듭한다. 그렇게 내 혼이 담겨 탄생한 기타가 모두 22대. 처음엔 친구나 예전 동료의 자녀에게 주다가 최근엔 서정실, 변보경, 배장흠 등 유명 기타리스트에게 헌정했다. 2009년에는 일본의 한 기타 박물관이 내 기타 작품 2개를 사서 소장했으니 이젠 아마추어 수준은 넘어선 셈이다.
지난날 운 좋게도 나는 내 능력보다 후한 대우를 받았다. 기타를 만드는 과정을 인터넷에 올려 기타 마니아들과 정보도 나눈다. 이제 나는 기타를 통해 사회가 내게 준 것들을 환원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인생의 2막을 멋지게 장식한 정말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