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의 잊혀져가는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한 가족의 이야기도 하지만 나의 선조를 통해 재조명 해보는
소용돌이 속의 일제강점기와 8.15해방.6.25와 같은 근대사의 한부분이기도하다.
조부(사진 왼쪽)인 조하익은 평양 바로 옆동네인 대동강가의 평남 강서군 초리면 봉선리에서 지방의 대부호였던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셨다.
미국 선교사 마포삼렬이 교장으로 있던 평양숭실 전문학교(대학)을 한경직목사들과 같은 시기에 졸업하였고
같은 초리면 출신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숭고한 뜻을 따라 흥사단의 국내지부인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농촌계몽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기위한 부흥사경회를 함경도를 포함한 북한전역를 순회하며 개최하였다.
조만식 선생의 조언에 귀 기울여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인 고무공장,페인트공장,양말공장들을 설립하여
국산품 생산과 소비에 의한 민족자본의 축척하였고 수익금의 상량량을 만주,간도등지의 독립투사들에게
군자금으로 배달차량인 트럭과 인편등을 이용하여 전달하였고 중일 전쟁 시작전 일제의 검거에 불응하여
만주지방으로 도피하였으나 일경에 검거되어 정치범으로 투옥되어
대구교도서에서 41세의 아까운 나이에 소원이던 조선 독립을 못보고 옥사하시다.(1937년)
부친(사진 오른쪽)조원찬은 평양숭실고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동창인 안병욱(교수),황순원(문학가) 들과 조선독립을 위한 각종 사회주의사상과 자유러운 신조류를 학습하였고 ( 후에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사상적 무기역활을 함)졸업후 귀국하여 조부가 설립한 민족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함.
1945년 8.15해방이후 (가을쯤) 인근 강동군 출신의 김성주(가짜김일성)가 고향에 나타나 안면이 있는사람들에게
본인의 직업을소개하길"나는 소련 타스통신 북한 특파원으로 특파되었다"고 말한 가짜 김일성의 생생한 목격자고 증언자이다.(김성주는 스스로를 김일성 장군이 아닌" 타스 통신 기자"라고 불렀다.)
그후 1946년3월1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서 벌어진 소위 평양 학생사건 수류탄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이 의거에서는 수발의 일본제 수류탄이 폭발하여 소련군 경비장교의 팔이 떨어져나가는 사건이였으나 불행하게도 김성주는 겨우 목슴만 건진 사건으로 소련군에게 약 200여명의 학생,청년들이 검거되었고 의거자 전원을 수용소군도인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 반체제를 제거한 김일성의 체제를 유지하게하는 혼란속에서 열악한 환경과 영양결핍으로 전염병인 결핵에 걸려 황해도 해주지방에 있는 결핵환자병동으로 이감중 탈주 도강하여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기다.(1947년)
서북청년단-경무대(우리나라 경찰역사상 최연소경감 29세)-치안국20 2전투경찰대 중대장등으로 6.25동란시 전투에 참여하였고 서울방어전투인 미아리 창동전투에 참전하여 탱크를 앞세운 북괴군 남침을 생생히체험하였다
(누가 북침이라고 헛소리를 하는가?)
경북 왜관 -추풍령일대의 철도및 기간산업 경비 국민의 치안과 공비토벌등을 하다가 적탄에 의한 관통상을 입기도 하였다. 부산,진주지역의 경찰서장을 하였고 1955년 부패한 이승만정권이 싫어 자진 사퇴하였다.
이후 사회사업가로서 소외되고 불우한 이웃을 위헤 봉사하시다 2008년 소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