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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 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 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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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선우님의 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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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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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쉽사리 지나치질 못한다.
차를 몰고 달리다 먼발치에라도 보이면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야 만다.
때론 대합실로 들어가
그 안의 공기를 호흡해 보곤 한다.

삶의 무늬와 편린들이 숨을 쉬고 있는
낡은 의자와 흐릿한 유리창,
그리고 맵싸한 디젤 냄새.
생의 도정에서 머물 수도 있었지만
지나쳐 버린 것 같은 삶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간이역은 기억의 저편이다.
실그물에 서너 알씩 담긴 삶은 계란,
심심풀이 땅콩과 오징어, 목쉰 기적 소리,
바람 부는 들판과 완행열차 곁에 간이역은 머물러 있다.
속도와 능률의 뒷전에 있고,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기 쉬운 외진 곳에
간이역은 존재한다.

간이역은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짝패다.
소박, 호젓, 설렘, 여유로움이 있는가 하면,
눈물, 이별, 소외, 외로움, 고단함이
들꽃처럼 서로 여윈 어깨를 기대고 있다.
간이역은 이완과 불꽃이다.
늘어진 시간과 지리함, 빛바랜 회억의 공간만은 아니다.

애잔함과 무심(無心) 속일지라도
침목 곁의 푸른 시그널처럼
반짝임을 피어 올리는 순간의 불꽃이 있다.
간이역은 이별과 눈물이다.
떠나보내는 목마른 손길이 있고,
단선 철로 위를 달리는 속울음이 담겨 있다.

급행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무심히 통과하면,
하릴없이 흔드는 늙은 역무원의 깃대에선
한 방울 눈물 같은 쓸쓸함이 묻어난다.
간이역은 추억이고 만남이다.
흑백사진처럼 아련한 기억의 뒤란이고,
유년의 사진 한 장 떨구어 놓은 오롯한 회색 창고이다.

세월 한켠에 덩그마니 머물러 있는 한 줌 추억.
떨림으로 기다렸던 곳이며,
기대로 발 동동거리면서
손목 시계를 바라보는 예비된 마음자리다.

간이역은 희망이고 설렘이다.
힘차게 요동치며 출발을 품어내는 기적 소리가
희망의 신발 끈을 매고 있다.
산모롱이 저편에 대한 동경과 긴장, 기대가 있다.
눈을 떠 미지를 향하는 설렘을 잉태하는 쪽문이며,
오직 선로 위만을 달려야 하는 가슴 졸임이다.

간이역은 낭만과 외로움이다.
노을 비낀 풍경 속에 고단한 삶의 세목이 있다.
빈 광장에 잿빛 비둘기 몇 마리 회상처럼 머물다 가면,
포플린 판박이 저고리에 꽃무늬 양산을 든 여인이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리는 곳이다.

녹슨 철로, 침묵하는 침목, 기웃거리던 잠자리조차
발길을 돌리면 비수 같은 쓸쓸함이 등뒤에 와 꽂히는 적요다.
간이역은 기다림이며 깨달음이다.
속도를 방해하는 훼방꾼이 아니며, 쓸모 없는 우수리가 아니다.

속도 지상주의가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 또 다른 가치를 표상한다.
기다리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익는 곳이다.
간이역은 삶의 흔적이자 길이다.
생선 비린내에 젖어 있고, 유행가 가락이 떠도는 시장을 끼고 있다.
국밥집, 막국수집이 있고 텁텁한 막걸리가 있다.

촌로의 때묻은 옷자락과 땀에 절은 손수건이 있다.
갈 수밖에 없는 애환과 올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
그 간이역 시그널 옆에 나는 시방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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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수필가 정 태헌님의 "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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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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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발레타인'에
전지현과 박신양이 스치는 영상이 떠오르네요..
아름다운 영환데, 평은 그다지.. -
잘 보았습니다.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겠네요. -
나무님은 포스팅이 대단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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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추억이 깃든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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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진을 끌어내려 보면서 이제 이 사진이 마지막 것인가 가슴조이며 깊이 깊이 잘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사진과 글과 그리고 음악 감사합니다. 나무님..
어린 시절을 간이역 바로 옆에 집이었기에
하루에도 몇번씩 증기기차 지나갈때마다 무슨 삶의 진동인양 온몸으로 떨림을 받으며 자랐었고
그리고 일생을 그때의 기적소리를 그리워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떨때엔, 간이역에 잠시 선 기차에 있던 낯모를 이들과
기차창을 사이로 나누었던 찰나의 눈마주침을 잊지못해
혹시나 다시만날까
몇달이고 간이역을 지켜셨었던 어리석은 세월이 벌써 50년 이상이나 훌쩍 멀어져 갔습니다.
더이상 기다려야 할 것이 없을때엔
자신이 떠나야 하는 것이라는데
아직도 그러지못해 추억속에 배회하던 간이역을 이렇게 다시한번 보게 해주심에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
너무 빨리 앞으로 달려만 가는건 아닌지.....
지나버린 아픔도...추억도 가끔은 돌아볼 여유를 가졌으면하는 생각입니다.
돌아가신 작은아버지께서 평생을 철도청에 몸담으셔서인지
철길. 철도역의 추억은 많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하나씩 없어지고 잊혀져가는 간이역들이 생겨 마음이 씁쓸합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올려주신 님들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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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혼자서 완행열차로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적한 역에서 내려 좀씩 돌아다니다 다시 타면서..
그때 생각에 빠알간 조치원역이 무척 이뻤는데 얼마전에 가보니 전혀 다른 느낌...
추억이란 대개 그때에 묻어둬야 하나 봅니다.